안견 작 「사시팔경도」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98)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조선전기에는 「사시팔경도」와 「소상팔경도」가 여러 작가에 의하여 그려졌다. 현동자 안견도 예외는 아니다. 보한재 신숙주는 1445년에 지은 『비해당화기(匪懈堂畫記)』1)에서 안평대군이 소장하고 있는 현동자(玄洞子) 안견(安堅)의 작품을 열거하면서 「팔경도(八景圖)」 두 점을 제일 앞서 언급하였다.
이를 보면 안견도 「사시팔경도」와 「소상팔경도」를 1445년 이전에 그렸다. 회화사학계에서는 안견이 1442년 이전에 「팔경도」 두 점을 그린 것으로 본다. 그런데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안견의 작품으로 전하는 「사시팔경도」와 「소상팔경도」가 소장되어 있다. 이 두 그림 16점은 모두 한 화첩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크기가 다르고 소장인의 유무에 따라, 1980년대에 두 화첩으로 고쳐 엮었다. 이번에는 「사시팔경도」를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1. 안견 작 「사시팔경도」의 기존 평가
1974년, 모 교수는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는 15세기 후반에, 「소상팔경도」는 16세기 초의 그림으로 추정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러면서도 「사시팔경도」는 「몽유도원도」와 친연성이 짙고 화풍에서 북송의 화원 곽희의 여운이 보여 안견의 전칭작 중에선 가장 중요시되는 그림으로 평하였다.
모 교수는 “현재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만이 확실하게 확인된 그(안견)의 유일한 작품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안견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작품 중 화풍상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작품이다. 모두 여덟 폭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폭에 각각 이른 봄과 늦봄, 초여름과 늦여름, 초가을과 늦가을, 초겨울, 늦겨울을 표현하였다. 즉 사계의 변화를 차이가 큰 필법과 묵법으로 예리하게 묘사하였다.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는 조선 초기 안견파 화풍의 한 전형을 나타낸다. 한쪽 끝부분에 치우친 편파 구도, 풍경과 물체가 따로따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조화된 통일을 이루는 구성, 풍경과 물체 사이에서 펼쳐지는 수면과 안개 등에 의해 확산되는 공간 등 두드러진 특징들이 보이는데, 이러한 특징들은 안견파 산수화들에 한결같이 나타난다”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평가는 「사시팔경도」가 “안견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작품 중 화풍상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작품”이지만, 곽희화풍의 영향을 받은 「몽유도원도」만이 안견의 유일한 진품이라는 단정에서 안견작이 아니리고 부정하는 것이다. 이 말은 「사시팔경도」가 안견의 그림이라는 점을 부정하기 위한 부정으로 보인다.
이러한 모 교수가 단정적으로 말하는 안견론의 핵심은 “안견(安堅)은 곽희(郭熙) 화풍을 토대로 여러 화풍을 종합, 절충하여 독자적 경지에 올랐으며, 16세기에는 ‘안견파’가 탄생하는 등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안견파 화풍이 보이는 작품은 안견작이 아니라고 극구 부정하는 것이다. 안견이 사용하지 않은 안견화풍의 안견파라는 비정상적인 이상한 논리이다. 민족회화를 규명하고자 하는 제대로 된 역사관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우리 민족의 회화사를 농락하는 궤변이 아닌가?
2. 안견 작 「사시팔경도」의 현황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덕수 3144)되어 있는 안견의 전칭작품 「사시팔경도」는 견본수묵화이다. 크기는 세로 35.8cm, 가로 28.5cm이다. 「사시팔경도」는 네 계절(四季)을 각기 두 폭씩 그렸다. 즉 이른 봄(早春), 늦은 봄(晩春), 이른 여름(初夏), 늦은 여름(晩夏), 이른 가을(初秋), 늦은 가을(晩秋), 이른 겨울(初冬), 늦은 겨울(晩冬)의 여덟 장면을 여덟 폭의 화면에 표현한 그림이다. 그러므로 「사시팔경도」는 「사계팔경도(四季八景圖)」라고도 한다.
「사시팔경도」는 조선 초기에는 안견화풍으로 그려졌고, 중기에는 절파(浙派)화풍으로, 후기 이후에는 남종화풍으로 그려졌다. 따라서 「사시팔경도」는 그때그때의 시대마다 유행한 화풍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이면서 그려져 왔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안견 전칭작품 「사시팔경도」는 곽희파 스타일의 전형적인 조선초기 안견이 즐겨 구사한 화풍을 가지고 있다. 그림은 대칭구도를 하고 있고, 계절의 변화가 잘 드러나며 산세나 수목, 인물표현 및 화면구도, 필치 등에서 대가의 완숙미를 보여준다. 수묵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건물 주위에만 옅은 붉은 색을 입혔다. 이 점은 1482년에 그려진 신말주의 순창설씨부인 그림 「설씨부인권선문」과 15세기 문청(文淸)의 「누각산수(樓閣山水)」, 양팽손(梁彭孫)의 「산수도」, 그리고 16세기 여러 계회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점이기도 하다.
여덟 폭 모두 그림의 비중이 한쪽에 쏠리게끔 변각구도(邊角構圖)로 그리면서도 고원과 평원의 대조를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각각의 작품이 가진 비대칭성을 대칭적으로 배열하는 한편, 경물들을 통해서 각 작품을 연결 지어 그려 놓는 한편 안개와 수면을 그려 넣음으로써 넓은 공간을 시사한다. 계절마다 필묵법이 다른 모습을 보인다. 봄은 필묵이 부드러운 반면, 겨울은 필묵이 다소 각이 지고 거칠다.
①초춘(初春) : 오른쪽에 산이 무게감을 주면서도 왼쪽에 선염(渲染)을 써서 원산(遠山)을 보여준다. 봄에는 날씨가 따뜻하고 아지랑이가 일며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하므로, 온화하고 부드럽고 곡선적인 필법으로 그린다. 화면의 중앙부 오른쪽은 침수로 인하여 훼손된 흔적이 보인다.
②만춘(晩春) : 근경의 지반은 강 건너의 마을과 주산과 평행을 이룬다. 그 사이에 넓은 수면과 짙은 연운이 담겨 있으면서도 균형을 주기 위해 좌측에 봉우리를 배치하였다. 그러면서도 비스듬히 솟은 언덕이 주목되는데 이는 이후 양팽손의 그림에서도 등장하며 안견의 「몽유도원도」에서도 불 수 있다.
③초하(初夏) : 만춘의 언덕이 보이면서도 정자와 함께 해조묘와 소나무 그리고 잡목이 서있다. 갈라진 폭포와 작은 바위 역시 중기에서 볼 수 있다.
④만하(晩夏) : 세찬 폭풍우가 소재인데, 산허리조차도 풍향에 따라 굽어지면서 강기슭으로 치닫는다. 중국의 설경산수도와 유사하다. 여름은 녹음이 짙고 물이 많으며, 이 그림에서는 비가 오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⑤초추(初秋) : 대진의 작품 중 「춘유만귀도」와 비슷하다. 다만 동떨어진 경물과 넓은 수면이 나타난다.
⑥만추(晩秋) : 보다 논리적이고 무리가 없는 구성인데 뒤로 갈수록 높아지는 모습이 나타난다. U자형 굴곡도 보이는데, 이는 이후 16세기 전반기 그림들에서도 보인다. 가을은 달을 감상하거나 쓸쓸하고 스산한 자연으로 묘사한다.
⑦초동(初冬) : 가장 성공적인 구성의 묘 주산의 계곡에서 흐르는 폭포를 향해서 근경의 언덕이 뻗고 있음 주산(주된 산으로 초동에서는 두 번째 위치한 산)의 정면은 앞으로 숙여 안개로 덮인 공간의 거리를 좁혀준다. 이렇게 하나의 통일감을 불어넣어 주는 모습이 나타난다.
⑧만동(晩冬) : 초동과 달리 보다 밀집된 구성을 보여준다. 주산이 폭포를 수반하며 버티고 있다. 그리고 원산이 병풍처럼 늘어져 있다. 날씨가 춥고 눈이 많이 오며 나무들은 낙엽이 져서 앙상한 모습이므로, 거칠고 강한 필묵법을 구사하고 있다.
이상의 「사시팔경도」는 각 화면마다 세형침수와 해조묘, 그리고 이른바 단선점준이 보인다. 이러한 묘사가 “「몽유도원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라고 모 교수는 「사시팔경도」 「소상팔경도」 「적벽도」 「추림촌거도」 등 국내에 현전하는 안견의 모든 전칭작품을 안견 작이 아니라고 부정한다.
3. 안견 작 「사시팔경도」를 다시 평가하자
모 교수의 안견론 핵심은 “안견(安堅)은 곽희(郭熙) 화풍을 토대로 여러 화풍을 종합, 절충하여 독자적 경지에 올랐으며, 16세기에는 ‘안견파’가 탄생하는 등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안견파 화풍이 보이는 작품은 안견작이 아니라고 극구 부정하는 것이다. 안견 화풍이 없는 안견파라는 이상한 논리이다. 민족회화를 규명하고자 하는 제대로 된 역사관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우리 민족의 회화사를 농락하는 궤변이 아닌가?
국립중앙박물관에 현전하는 「사시팔경도」와 「소상팔경도」는 관지가 없지만 안견의 작품으로 뒤섞여 전해져왔다. 두 점의 소장품 번호가 한 번호, ‘덕수 3144’번인 것을 보면, 아마도 구입시기와 출처가 같은 것으로 판단된다.
후일 이 두 점의 작품은 분리되어 각기 「사시팔경도」와 「소상팔경도」로 연구되었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을 말하여 줄 수 있다. 신숙주의 『비해당화기』에 두 점의 팔경도가 들어 있는 것을 보면, “안평대군의 수집품이었을 때부터 이 두 작품은 함께 전승되어 내려왔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 「사시팔경도」 역시 「소상팔경도」와 마찬가지로 17세기 초반의 소장자 윤휘(尹暉, 1571~1644, 本海平)2) 가(家)의 소장품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시팔경도」와 「소상팔경도」는 다른 시대에 그려진 것이 아니라 같은 시대에 같은 작가에 의하여 그려진 그림으로 보아야 한다.
사실상 국립과 공립박물관, 간송미술관 등에 안견의 작품으로 전하는 작품을 모두 안견의 작품으로 보고, 또한 안견 작품에 관한 모든 고문헌을 함께 검토한다면 중요한 결과가 나온다. 안견은 산수뿐만 아니라 인물에도 능하였다.
그리고 안견 화법의 공통적 실체를 볼 수가 있다. 그 공통적 실체로, “안견 작 「몽유도원도」는 안견의 대표적이지만 결코 안견의 기준작품은 아니다”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안견의 전칭작품 「사시팔경도」와 「소상팔경도」는 이제 전칭(傳稱)이라는 허울을 벗어 던져야 한다.
「소상팔경도」는 지난해 12월 17일 연재에서 다룬 안평대군의 「소상팔경시첩」까지 현전하고 있지 않은가? 그 연관성을 애써 부정하는 모 교수의 심뽀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제라도 회화사학계의 소장파 학자들이 조선전기회화사의 정립에 나서길 바란다.
주(註)
1) 신숙주, 「화기(畵記)」. 제95회 연재분 「소상팔경도」 주2) 참조.
2) 윤휘(尹暉, 1571~1644)의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정춘(靜春), 호는 장주(長洲)·천상(川上). 증찬성 윤희림(尹希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자감정 윤변(尹忭)이다. 아버지는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이며, 어머니는 참봉 황대용(黃大用)의 딸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89년(선조 22) 진사가 되고, 1594년 별시문과에 문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었다가 1596년 병조좌랑이 되었다. 이듬해 병조정랑이 되고 이어 사서·장령·필선·사간 등을 거쳐, 전라도·경상도 관찰사로 나가 치적을 올렸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에 관련, 벼슬에서 쫓겨났다가 뒤에 다시 기용되었고, 1618년 동지 겸 진주사(冬至兼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공조·예조의 참판을 거쳐,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때 장흥·아산 등지에 유배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기용되어 한성부좌윤·청주목사, 호조와 형조의 참판을 지냈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왕을 남한산성에 호종하고, 특명전권대사로 적진에 출입하면서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환도 후 도승지에 임명되어 청나라와의 외교를 전담하였고, 한성부판윤·형조판서를 거쳐 1639년 우찬성으로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오고, 1641년 공조판서가 되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죽은 뒤 아들 윤면지(尹勉之)의 공훈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장익(章翼)이다. 저서로 「장주집」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