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야권을 그렸다는 신윤복의 [삼추가연] 4화
[연재] 심규섭의 우리그림 이야기(14)
이 작품은 신윤복의 풍속화를 묶은 『혜원전신첩』 중 하나이다.
1930년 간송미술관의 전형필이 일본의 오사카 고미술상에서 구입했다고 한다.
어떤 연유로 신윤복의 풍속화가 일본에 유출되었는지, 어떤 경로와 과정을 거쳐 국내로 들어 왔는 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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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의 풍속화는 어렵지 않다.
신윤복 그림뿐만 아니라 우리 전통 그림은 애매한 조형 방법이나 기법, 화면 구성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삼추가연」이라는 작품은 해석이 불가능하다.
인물과 배경이 따로 놀고, 뜬금없이 국화가 그려지고, 그림의 내용과 전혀 관계없는 화제(畫題)가 쓰여 있다.
개연성도 부족하고 전통 미술조형법에도 어긋난다.
누군가 신윤복의 필선을 흉내 내어 그렸지만, 우리 그림의 화법과 조형 원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먼저, 작품의 제목을 살펴보자.
삼추가연(三秋佳椽)은 ‘세 명의 사람이 깊어가는 가을에 아름다운 인연을 맺는다’는 뜻이다.
물론 작품 속에는 이런 제목이 없다.
이 제목은 간송미술관과 오세창이라는 사람이 후대에 붙인 것이다.
제목을 붙였다는 것은 해석을 마쳤다는 의미이다.
국화가 있기에 가을이고, 세 명의 사람이 등장하기에 삼(三)이다.
가연은 ‘아름다운 인연’이란 뜻인데, 초야권을 사거나 매매춘을 하는 사람들을 아름다운 인연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이 그림을 해석한 오세창은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의 이력 중에 1902년 개화당 사건의 주모자로 일본에 망명했다는 내용이 있다.
개화당은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 박영효 따위가 지도자로 있던 전형적인 종일 매국 조직이다.
종일(從日) 매국(賣國)의 주역인 오세창은 일제가 조선을 보는 관점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왜 오세창의 해석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을까?
여기에 대한 답은 고(故) 오주석 선생의 기록에서 일부 드러난다.
오주석 선생은 김홍도, 신윤복 풍속화 해석의 새로운 지평을 연 미술사학자이다.
오주석 선생이 국립중앙박물관의 학예연구사로 있을 때, 관장이 한국미술사 박사학위를 받으라는 제안을 한다.
그런데 박사학위는 일본에서 받아야 권위가 있다며 일본 유학을 권유한다. 오주석 선생은 한국미술사 학위를 한국이 아닌 일본과 일본 교수에게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일본에 가기는 했지만 끝내 학위를 받지 않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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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의 화제(畫題)를 보자.
국화꽃 쌓인 집은 도연명이 사는가 (秋叢繞舍以陶家-추총요사이도가)
빙 두른 울타리에 해가 기우네 (遍繞籬邊日漸斜-편요리변일점사)
꽃 중에 국화를 편애해서가 아니라 (不是花中偏愛菊-부시화중편애국)
이 꽃 지면 다른 꽃이 없다네 (此花開盡更無花-차화개진갱무화)
위 화제는 중국의 원진이란 시인이 쓴 ‘국화’라는 시를 차용했다고 한다.
그림과 연관성이 있는 구절은 ‘꽃 중에 국화를 편애해서가 아니라, 이 꽃 지면 다른 꽃이 없다네.’이다.
유학 문화권에서 국화의 상징은 군자의 신념, 청렴, 청빈한 삶이다.
군자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매화, 목련, 모란, 국화가 있고 특별히 국화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겨울에는 꽃이 피지 않으니 가을 국화가 지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단언컨대,
삼추가연이란 그림 내용과 화제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림 속에는 국화가 그려져 있는데 3명의 인물이 만들어내는 초야권, 매매춘과 어떠한 관계도 연결할 수 없다.
오히려 위작을 숨기기 위해 적당한 화제를 넣었고, 다시 이 화제를 합리화하기 위해 억지로 국화를 그려 넣었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행여 국화를 젊은 여자로 비유하여,
‘여러 여자 중에 특별히 이런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여자를 만날 처지가 아니니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면 음란 마귀에 씐 것이다.
고작 매매춘하는 그림에 이렇게 고귀한 시를 넣었다면, 분명 신윤복은 사이코패스일 것이고 단 한 점의 작품도 남기지 못하고 자폭했을 것이다.
왼쪽에 그린 국화는 신윤복의 화풍도 아니고 표현 방법도 이질적이다.
우리 그림에서 야외의 꽃은 땅에 닿는 부분을 괴석이나 화면 연출로 가린다.
이 그림처럼 땅바닥에서 곧바로 줄기가 올라가는 표현은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리지 않는다.
손바닥만 한 그림에 굳이 국화의 전체 모양을 그릴 미술 조형적인 필요와 인과관계도 없다.
허리춤까지 곧게 자란 국화는 보조 나무를 대고 인위적으로 키워야 한다. 자연 상태에서는 불가능하다.
이렇게 국화를 인위적으로 크게 키우는 것은 전형적인 일본문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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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의 배경은 황당하다.
알다시피, 신윤복은 풍속화에 풍경을 그려 넣는 특징이 있다.
배경의 풍경은 그림 속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현실감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삼척동자도 척 보면 알 수 있는 들판, 길, 술집, 골목, 거리, 강, 하천 따위의 풍경을 배경으로 그린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배경이 없는데다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김홍도의 씨름이라는 풍속화에는 배경이 생략되어 있지만 누구나 야외이고 많은 사람이 오가는 넓은 마당이라는 것을 유추한다.
하지만 이 그림의 공간은 실내인지 실외인지도 모호하다.
젊은 남자와 노파는 신발을 벗고 있고, 웃통을 벗은 남자가 젊은 여자가 관계를 맺었다고 가정하면 실내가 된다.
그러나 생뚱맞게 들판과 국화가 그려져 있으니 분명 야외이다.
야외에서 그 짓을 하지 않았겠냐고 추정할 수도 있겠다.
한발 더 나아가 포주인 노파가 인적이 드문 장소를 물색하고 망을 보고 있는 사이 관계를 맺었다고 상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젊은 남자의 표정은 느긋하고 노파도 실실 웃고 있다.
안정되고 편안한 공간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실외라면 언덕과 숲, 괴석 따위로 표현할 수 있고, 실내라면 창문 하나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
이런 화면 연출은 신윤복의 다른 그림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역으로 추정하면, 인물을 그린 사람과 배경을 그린 사람이 다르며 시차를 두고 그렸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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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소품이 없다.
소품은 그림의 상황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역할을 한다.
벗은 남자의 정체를 드러내는 옷가지, 망건, 갓과 같은 소품이 있어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젊은 여성이 기생이라면 기생 용품을, 유녀라면 유녀만의 물건이나 장신구 따위가 있을 것이고 초야권을 산다면 여자에게 줄 이부자리, 옷가지, 재물 따위를 그려 넣어야 한다.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남자가 벗어 놓은 옷과 신발도 없다.
유독 노파가 주는 술잔과 술병이 있을 뿐이다.
술은 감흥을 높이는 역할이다.
술을 주는 것은 관계를 맺기 전의 상황이다.
“술 한잔 드시고 재미 좀 보셔. 호호홍”
이 말은 들은 젊은 남자는 득의양양하게 웃옷을 벗고 난 후 바지를 벗기 위해 발목 쪽의 대님을 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관계를 끝낸 후라고 해석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 억지다.
젊은 여자가 조용히 앉아있다.
마치 체념한 것처럼 불쌍하게 느껴진다.
뒷모습이고 고개를 살짝 숙였기 때문인데 젊은 여자는 치마를 걷어 올려 남자를 받아들일 적극적인 행동을 보인다.
그냥 불쌍하게만 볼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젊은 여자는 짧은 저고리에 청색 치마를 입었다.
치마를 허리춤까지 올렸지만 속살이 보이지 않는다. 속치마인지 속바지인지 모를 옷이 드러나 있다.
신윤복의 다른 그림에는 속바지로 표현되어 있으며 일반적인 복식이다.
그런데 속바지로 보기에는 너무 풍성하여 속치마로 보인다.
풍성한 옷은 몸을 가리는 역할이기에 청색 치마를 걷어 올린 효과가 사라진다.
분명 남자의 관계를 의식하여 치마를 걷어 올렸다.
하지만 우리 문화에서는 저고리부터 벗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이다.
입을 때는 치마부터, 벗을 때는 저고리부터.
이런 문화는 어릴 때부터 배워 체화된다. 여자가 저고리를 벗는 행동만으로도 남자는 흥분한다.
신윤복의 미인도에서 젊은 기생이 저고리 고름을 만지는 행동만으로도 야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효과를 낸다.
하지만 치마부터 걷어 올리면 오줌을 싼다고 여겨 고개를 돌린다.
치마부터 올려 관계를 맺는 형식은 웃옷과 치마가 하나로 붙어있는 일본 기모노 문화밖에 없다.
미묘한 일본 성문화가 스며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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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결론이다.
이 작품은 위작이다.
이 작품은 다수의 진품 속에 숨겨서 진짜처럼 위장했다.
단순히 비싼 값에 팔기 위한 그림이 아니라 악질 심리전 위작(僞作)이다.
알다시피, ‘보았다’라는 시각 증거는 재판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만큼 강력한 힘이 있다.
풍속화는 역사적 유물이자 시각적인 증거이기에 조선을 평가하는 주요 기준이 된다.
위작한 자는 누구일까?
이익을 본 자와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다.
이익을 보는 사람이 범인이다.
신윤복이 그렸다면 자폭한 것이다.
그의 행적과 작품을 보면 자폭할 가능성은 제로이다.
이 작품을 진품으로 인정하면 조선은 초야권과 성매매가 판치는 허접하고 부도덕한 국가가 되다.
특별한 의구심을 가지지 않은 대중들은 이런 심리전에 현혹된다.
여기에 국립중앙박물관의 공식 해석이 더하면, 그냥 역사적 사실이 되어 버린다.
1894년 조선은 실질적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된다.
이때부터 일본은 조선을 병합하기 위한 사전작업과 심리전을 치밀하고 광범위하게 펼친다.
조선이 허접하고 패륜적인 나라여서 일본이 개화시켜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속였다.
조선은 그림의 나라였다. 그림으로 정치를 했다.
그만큼 그림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일본은 이런 영향력을 가진 그림을 역이용하여 심리전을 펼친 것이다.
이런 흔적은 오봉도, 맹호도, 십장생도와 같은 핵심 작품에도 남아있다.
만약 이 글을 보는 당신이 오봉도(五峰圖)를 일월오봉도로 부르면서 ‘왕과 왕실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고 권위를 드러내는 그림’이라고 알고 있다면 일본의 심리전에 오염된 것이다.
오봉도는 ‘민본정치를 구현하는 자, 혹은 왕의 역할’이라는 철학적 가치를 담고 있다.
정치지도자의 역할과 백성과의 관계를 불가역적으로 표현한 그림으로, 세계 최고의 정치수준을 보여준다.
이런 그림이 일월교라는 허접한 미신과 왕족만의 욕망을 충족하는 그림이 되면 우리 민족은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미개한 족속이 된다.
이 작품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한 삐라같은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