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핵무기 보유국 지위 ‘적극적 굳히기’ 들어가나
[초점] 미국발 ‘러, 북 핵무기 용인 가능성’ 경보음
북러 밀착을 경계해온 미국 정부의 고위 인사들이 러시아의 북한 핵무기 용인을 우려하는 경계음을 내고 있어 주목된다. 핵무기 투발수단인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기술과 겹치는 위성 기술 이전에 대한 우려에 연이은 것이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임기 막바지에 방한해 지난 6일 한미 외교장관회담을 가진 뒤 조태열 외교장관과의 공동기자회견에서 모두발언을 통해 러시아의 북한에 대한 위성 기술 제공에 우려를 표하면서 “푸틴 대통령이 여기에 더 나아가 러시아의 수 십 년 간의 정책을 뒤집고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용인하려는 단계에 가까워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통상 기자들의 질문에 앞서 입장를 밝히는 고위당국자의 모두발언 내용은 미리 조율, 검토된 해당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봐도 무방하다.
북한의 ICBM ‘화성-19’형과 군사정찰위성 ‘만리경-1’호
블링컨 장관은 “포탄이라든가 탄약 그리고 병력을 북한이 러시아에 제공하는 것”에 대해 러시아가 ‘반대급부’로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군사장비와 훈련을 꼽고 “모스크바가 북한에 첨단 우주 및 위성 기술을 공유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을 신뢰할 만한 정보가 있다”고 강조했다. 발언의 맥락상 ‘우주 및 위성 기술 공유’에 대한 우려에 방점이 찍힌 것.
그러나 ‘우주 및 위성 기술’ 제공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언급돼 온 사안이고 개연성도 높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북한 국가항공우주기술총국은 2023년 11월 21일 정찰위성 ‘만리경-1’호를 궤도에 진입시킨데 이어 지난해 5월 27일 ‘만리경-1-1’호를 서해위성발사장에서 발사했으나 실패한 바 있다.
또한 위성 발사에 성공하더라도 추진체에 탑재된 위성의 수준은 그리 높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외부 기술지원이 절실한 상황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만약, 북한이 러시아의 지원 하에 고사양의 정찰위성을 궤도에 진입시킬 경우 북한은 군사정보 획득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다.
참고로 ICBM 발사 기술은 위성 발사 기술과 거의 같고 ‘대기권 재진입’ 기술이 추가로 필요하다. 북한은 이미 지난해 10월 31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9’형 고각 발사에 성공하고 미국 전역을 사정거리에 둔 ‘최종완결판 대륙간탄도미사일’로 명명하기도 했다.
따라서 핵무기 투발수단으로서 ICBM 개발은 일정 수준에 도달했고, 위성 발사를 통해 계속 기술 수준을 높여나가되 위성 기술 수준을 높여 군사정보 획득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미국의 우려가 나오고 있는 셈이다.
미국은 한일 양국에 많은 군사기지를 운용하고 있고, 이를 북한의 정찰위성이 상시 감시하는 체제가 구축될 경우 북한은 물론 중국과 러시아까지 겨냥한 미국의 동북아 군사력 운용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블링컨 “러, 북 핵무기 용인 가능성 있다”
골드버그 “비핵화, 달성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
그러나 아무리 핵무기 투발수단이나 정보자산을 북한이 확보하더라도 결국 핵심은 ‘핵무기’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량은 공개된 바 없지만 이미 일정한 수준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사실상 핵무기 보유국(a de facto nuclear weapon possessor state)’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이스라엘과 인도, 파키스탄이 기존에 ‘사실상 핵무기 보유국’으로 간주돼 왔다.
이춘근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명예연구위원은 핵탄두 하나에 20kg의 핵물질이 필요하다는 기준으로 북한의 핵무기는 HEU(고농축 우라늄)와 플루토늄을 합해 97~122개 정도로 추정했고, 투발수단에 실전배치한 것은 50~100개 정도로 추정했다. 이중 플루토늄탄은 10~20개 수준에 불과하고 대부분 HEU탄이라고 봤다.
지금까지 북한의 6차에 걸친 핵시험(2006~2017)은 유엔 안보리에서 한 목소리로 규탄성명과 강력한 제재 결의가 통과돼 북한의 비핵화를 압박했다. 중국과 러시아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거부권을 갖고 있고, 핵무기비확산조약(NPT) 체계에서도 핵보유 5개국, 이른바 ‘P5’로서 기득권을 인정받고 있는 나라로서 북한의 핵시험을 용인하지 않은 정책을 일관되게 취해 온 셈이다.
그런데 블링컨 장관이 “푸틴 대통령이 여기에 더 나아가 러시아의 수 십 년 간의 정책을 뒤집고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용인하려는 단계에 가까워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음을 낸 것이다.
여기에 더해 지난 7일 이임한 필립 골드버그 주한 미국대사는 지난 5일 <동아일보>와의 이임 인터뷰에서 “비핵화 목표는 유지되겠지만 달성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골드버그 대사는 트럼프 차기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직접 대화를 추진하는 상황이 전개되면 ‘비핵화’ 목표가 유지될 수 있을지를 묻는 질문에 “비핵화는 트럼프 1기 행정부를 포함한 미국의 지속적인 정책 목표였다. 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비확산과 평화, 안정을 위해 중요한 목표다”고 전제하고 “러시아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자신들이 지지해 왔던 (유엔) 결의안을 위반하겠다고 할 때까지는 거의 모든 나라가 동의했다”고 말했다.
이는 지난해 3월 러시아가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결의 이행을 감시하는 대북제재위원회 전문가 패널의 임기 연장을 반대함으로써 안보리의 대북제재를 사실상 무력화시킨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이후 한미일 등 서방 11개국은 ‘다국적제재모니터링팀’(MSMT, Multilateral Sanctions Monitoring Team)을 지난해 10월 출범시켰지만 이는 유엔 산하기구가 아닌 임의조직에 불과하다.
이같은 맥락에서 골드버그 대사의 “비핵화 목표는 유지되겠지만 달성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는 답변이 나온 것. 결국 서방이 아무리 북한의 비핵화를 외치더라도 유엔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가진 러시아가 입장을 바꿀 경우 북한의 ‘사실상 핵무기 보유국’ 지위는 막을 수 없을 것이라 본 것이다.
북, 우라늄 농축시설 추가 공개와 ‘새로운 국제질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북러 밀착은 심화됐고, 지난해 6월 19일 평양에서 북러 정상회담이 열려 새로운 북러조약(「북러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관계에 관한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북러관계는 군사동맹 관계로 진전돼 북한군의 우크라이나 전쟁 파병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북한 언론은 지난해 9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고농축우라늄(HEU) 농축시설을 현지지도했다면서 우라늄 원심분리기가 꽉 들어찬 곳을 둘러보는 사진을 게재해 눈길을 끌었다. 이 시설은 영변 등 지금까지 알려진 곳이 아니어서 북측이 이 시설을 공개하고 나선 이유에 대한 분석들이 뒤따르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2018년 6월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을 토대로 2기 트럼프 정부와의 협상을 염두에 둔 포석이라는 분석도 나왔지만 북러간 군사밀착의 일환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을 ‘노딜(no-deal)’로 마감하고 출국하기 전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그(영변)보다 더 많은 것을 얻어야 했다”면서 “왜냐하면 여러분(기자들)이 말한 적 없고, 쓴 적도 없지만 우리가 발견한 다른 것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영변지역 이외의 우라늄 농축시설을 뜻하는 것으로 지난해 9월 북측이 공개한 강선지역으로 추정되는 곳을 북한이 공개한 의도가 차기 트럼프 정부와의 협상 여지를 보여줬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러시아는 신 북러조약에 따라 ‘핵무기 보유국’인 북한을 군사동맹국으로 갖게 되고, 북한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자 NPT 체제에서 P5인 러시아로부터 ‘사실상 핵무기 보유국’ 지위를 인정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북한은 그동안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재래식 무기의 열세를 만회할 수 있는 효율적인 국방력 강화라는 측면과 더불어 대미, 대남 협상력 강화라는 측면이라는 양면 전략하에 추진해 왔지만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무위로 돌아가면서 비핵화의 ‘마지막 기회’를 접고 ‘핵무기 보유국’ 지위 응고전략, 굳히기에 들어간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미국의 단극 지배체제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더 이상 성과가 불투명한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매달리기 보다는 러시아와의 군사동맹을 축으로 한미일에 맞서는 북중러 공동전선을 구축하고 급부상하고 있는 브릭스(BRICS)를 비롯한 글로벌 사우스(Global Shouth)와의 연대를 통해 생존을 도모할 공간이 열렸다고 판단한 것.
실제로 최선희 북한 외무상은 지난해 9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제4회 유라시아 여성포럼과 제1차 브릭스 여성포럼에 참석해 연설하며 “자주와 정의에 기초한 다극화된 세계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올해 1월 1일자 <로동신문>은 이례적으로 최고지도자의 신년사나 신년공동사설을 싣지 않고 6면에 ‘지난해의 복잡다단한 국제정세는 무엇을 실증해주는가’라는 제목의 개인 필명의 글을 통해 “미국주도의 국제질서를 배격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면서 “동북아시아와 유럽에서 핵전쟁위험이 짙어가고있는 때에 조로(북러)사이에 체결된 조약은 유라시아대륙의 평화와 안전유지를 위한 보류형성의 법적기초로 되었다”고 강조했다.
북한이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우라늄 농축시설을 의도적으로 드러낸 것은 ‘조용한 응고’ 전술에서 한발 나아가 ‘적극적 응고’ 전술을 구사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핵탄두 소형화나 수소탄 등의 ‘핵시험’을 강행할 가능성도 얼마든지 열려 있는 셈이다.
이미 북한의 ICBM 발사에 대해서는 유엔 안보리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거부로 규탄성명이나 제재결의가 채택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만약 북한이 7차 핵시험에 나설 경우 러시아가 북한을 감싸고 돌지가 관전포인트가 된 것. “비핵화 목표는 유지되겠지만 달성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는 골드버그 전 대사의 발언은 그래서 의미심장하고, 차기 트럼프 정부가 큰 숙제 앞에 직면한 현실을 일깨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