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초기의 여류화가 순창설씨부인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97)

2025-01-13     이양재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귀래정(歸來亭) 신말주(申末舟)는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막내 동생으로 5살 때 부모와 사별하고 형을 부모처럼 섬기며 성장했다. 귀래정은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신말주에게 지어준 호인데, 현재 전북 순창에는 신말주가 지은 ‘귀래정(歸來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여기 순창은 그의 순창설씨부인(淳昌薛氏婦人)의 고향으로, 설씨부인은 조선 개국(1392년) 후 첫 여류화가(女流畵家)1)이다. 설씨부인이 남긴 그림과 글씨 『설씨부인권선문(薛氏夫人勸善文)』은 우리나라 국가지정유산 보물(제728호, 1981년 7월 15일)로 지정되어 있다.

1. 『설씨부인권선문』의 서지학적 검토

『설씨부인권선문』은 16면1첩의 절첩(折帖)으로 되어 있다. 이 권선문의 전문은 모두 1,103자인데, 원래는 한 폭의 두루마리로 된 유물을 한 면에 4~5행으로 나누어 절첩으로 만들었다.

크기는 가로 19.8cm, 세로 40cm로, 펼쳐 놓으면 가로가 317cm가 되는 장축(長軸)이다. 세로가 40cm인데, 전체의 길이가 317cm라는 것은 대략 40×80cm의 전지 4장을 이용하여 권선문 축을 만들었다는 의미이다.

현황의 16면의 종이를 보아 그림과 글씨는 같은 지질의 색지(色紙, 粉紅色紙)에 그렸다. 종이의 색감이 주는 느낌은 아주 고운 여성적 분위기이다. 실물을 관찰하며 지질을 보아야 하겠지만, 색지는 설씨부인이 직접 염색한 종이일 수도 있다.

현재의 절첩은 6겹으로 배접하여 만든 첩 면에 붓글씨로 쓴 권선문 14면과 채색 그림 2면이 붙어있다. 즉, 전체 16면 가운데 14면은 권선문이고, 2면은 사찰이 그려져 있으며, 뒷면에는 후손들의 집에 전해 내려오던 편지글과 권선문이 쓰여 있다.

여기 앞에 들어있는 그림 두 면을 살펴보면, 이 그림은 연결되는 그림이므로 원래는 한 점을 둘로 나눈 것이다. 『권선문』 끝에는 ‘정부인설(貞夫人薛)’이라는 기명과 ‘순창설씨지인(淳昌薛氏之印)’이라는 여섯 자가 새겨진 인장을 찍었다.

2. 『설씨부인권선문』의 회화사적 검토

『설씨부인권선문』 절첩 그림(1482.07)은, 안견의 『몽유도원도』(1447.04) 처럼 그려진 연도가 분명한 작품이다. 이 그림은 여류화가2)가 그린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작품이다. 1429년생인 설씨부인은 1504년생인 신사임당보다 75년 전에 태어나 활동하였다. 1482년에 그린 권선문 절첩 그림만 보아도, 설씨부인은 신사임당보다 50여 년 먼저 그림을 그린 것이 된다. 또한 신사임당의 작품은 낙관이 되어 있는 그림이 없다.

이러한 면을 보면, 『설씨부인권선문』 절첩 그림은 조선전기에 남은 유일한 여류화가 그림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그림에는 ‘성화 18년 7월(1482년 7월, 성종13) ’이라는 연도가 적혀 있다.

『설씨부인권선문』 끝부분, 설씨부인, 보물, 1482년, 고령신씨문중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설씨부인권선문』 그림, 설씨부인, 보물, 1482년, 고령신씨문중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현재의 그림 상태는 상당히 낡았지만, 청록의 산수와 단청된 사찰 모습의 분별력을 보이고 있는 지본채색의 산수화이다.

조선시대 여성 문인들의 작품이 대부분 시조인 단문의 운문이다. 그러나 이 『권선문』은 산문으로 1,103자로 이뤄졌으며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로 출발한 것처럼, 이 설씨부인의 『권선문』도 꿈 이야기로 전개되고 있다.

또한 『권선문』 중에 ‘여성(女性)’ 두 글자가 나오는데, 이는 불경에서 나오는 용어이기는 하지만, 이 또한 우리나라 문헌에 ‘여성’이라는 단어를 쓴 최초의 기록이다.

『권선문』이 관념적으로 선행을 권하는 문장이지만, 그림은 순창(淳昌) 강천산의 아름다운 경계 속에 세워질 암자의 실경을 그리려는 사의(思意)를 가지고 그렸다. 즉 이 그림은 관념산수가 아니라 조선초기의 실경산수이다. 그것이 안견의 『몽유도원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다.

그림이 끝에 ‘성화(成化) 18년 7월 정부인 설(貞夫人薛)’이라고 쓰고 씨(氏) 자를 띄어 쓴 다음 씨(氏) 자를 가운데 놓고 낙관했다. 그리고 그 사람 다음에 약비(若非) 두 자도 검은 도장으로 찍었다.

『설씨부인권선문』은 조선시대 여성 문인이 쓴 최초의 산문 형식의 글로 신사임당의 글보다도 60여 년이 앞서 있다. 또한 조선 전기 사대부 집안의 여인이 사찰을 복원하는 불사에 관심을 두고, 불교의 인과응보설과 관련된 글을 썼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이 필첩은 조선시대 여류 문인이 그리고 쓴 필적 가운데 가장 오랜 국가유산이다.

3. 『권선문』의 요약

『권선문』을 요약하면, ‘대개 인(因)과 과(果)의 가르침을 보면, 살았을 때 선(善)과 악(惡) 간에 지은 바를 인이라 하고 그 다음에 그를 따라 받은 바를 과라고 한다’. ‘나는 여성으로서 비록 진실되고 묘한 이치를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지난날들의 일들을 대략 생각해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중국에 들어온 이래 자비로써 가르치고 인고로써 깨우쳐 많은 중생을 건졌다’로 시작되는 이 권선문은 꿈 얘기로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

부인이 어느 봄날 꿈을 꾸니 돌아가신 어머니가 머리에 관을 쓰고 옷자락을 날리며 허공에서 내려와 마주 앉더니 다음과 같이 이르더라는 것이다. “내일 아침 어떤 사람이 찾아와 너에게 좋은 일을 함께하자고 하면 오직 기쁜 마음으로 따를지언정 하기 싫은 마음을 갖지 말라. 이 일이 네가 복을 짓는 원천이 될 것이다.”라고 하시더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미처 대답도 못한 채 꿈을 깼으며 숙연해져 옷깃을 여미고 일어나 날이 밝기를 기다리니 꼭두새벽에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을 시켜 살펴본즉 이웃 마을에 사는 ‘약비(若非)’라는 사람이었다. 꿈도 이상하고 해서 손님을 정중히 맞아들여 찾아온 사유를 물었다. 이에 약비의 대답도 신기하기만 했다.

“이 고을 땅 광덕산에 산수가 좋은 터가 있는데 옛날 신령스님께서 보고 좋게 여겨 잠시 초가를 지었는데, 많은 세월을 겪는 동안 비바람에 집과 담장이 무너져 빈터만 남게 되었고 스님들의 오랜 한이 되었지요. 그런데 중조(中照)라는 분이 뜻을 두고 중창할 마음으로 널리 신도들이 보시하기를 권해서 저 또한 그때 작은 도움이 되어 새로 집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곁에 부도가 있어서 우선 절 이름을 부도암이라고 짓고 단청까지 하였습니다. 그 수는 비록 작으나 조촐하게 꾸미니 산중의 어느 사찰이라도 능히 미치지 못할 바라 이후부터 고인(高人) 승사(勝士)나 수행자들이 모두 기뻐하며 모이게 되었지요. 그런데 일을 급히 하다 보니 몇 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집이 기울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조스님과 다시 개축하고자 뜻을 모았으나 그 힘이 모자라 감히 손을 못 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듣자옵건대 부인께서는 항상 이 같은 보시행을 즐겨하신다 하기에 시주를 모시자 하니 그 뜻이 어떠하신지요.” 하는 것이었다.

설씨부인은 간밤의 꿈을 생각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일어나 절을 두 번 한 뒤 그에게 꿈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마땅히 불사에 참여하여 그 뜻을 원당(願堂)으로 삼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인의 의견을 제시하며 협조를 바랐다.

“이제 이 암자를, 듣건대 그 소용되는 바가 반드시 많은 것도 아니니 어찌 혼자 이룰 수 있겠소. 하지만 모든 이들이 원(願)을 함께 세워 뭉친 뒤에 불사를 일으킴이 좋은 줄 아오. 불경에 이르기를 ‘만약 능히 예 사찰을 보수하면 이 색계(色界)를 벗어나는 복이 있다’ 하였은즉 큰 공덕을 짓고 선한 뿌리를 맺으며 임금님을 어버이로 받들어 비는 사람이면 하지 말라 할지라도 가히 할 것이오. 이 「권선문」으로 말미암아 크게는 임금님과 어버이를 빌고 작게는 자기 스스로를 빌어 온갖 만물에 이르기까지 그 이로움이 미치지 않겠습니까? 그 뜻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모든 신도를 깨우칠 것이나 다만 부인들이나 신도들이 알기 어려운 바를 널리 권하기로 한다면 이제 「권선문」을 짓고 중조스님으로 하여금 널리 권하도록 함이 어떻겠소.”

이렇듯 해서 「권선문」은 지어졌으며 불교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불교의 영험을 알리기 위하여 그간에 있었던 영험스런 사례를 몇 가지 들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야기대로 권하는 바가 결코 헛되지 아니함을 알 것이라, 그러므로 감히 이 글을 써서 모든 이들에게 선(善)을 권하노라”라며 끝을 맺었다.

4. 귀래정 신말주와 순창설씨부인

귀래정(歸來亭) 신말주(申末舟, 1429~1503)는, 서화가 신덕린(申德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조참의 신포시(申包翅)이고, 아버지는 공조참판 신장(申檣, 1382~1433)이며, 어머니는 정유(鄭有)의 딸이다. 신말주는 1429년 5월 14일(음)에 한성에서 태어난다. 5세 때 부모를 잃고 12세 연상의 형 신숙주(申叔舟, 1417~1475) 밑에서 자라면서 형을 부모처럼 여기면서 자랐다. 1451년(문종1) 사마시에 합격하고, 1454년(단종2)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한다. 『조선왕조실록』 단종2년 12월조에 보면, 그가 26세에 문과에 급제했을 때 왕이 잔치를 베풀고 술 30병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종사랑(從仕郎)으로 승문원 정자에 임명되었으며 봉훈랑(奉訓郞)으로 사간원 우헌납 겸 지제교에 임명되었으나, 1455년(단종3)에 단종(端宗, 재위 1452~1455)이 폐위된 뒤 처의 고향인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로 내려가 귀래정을 지어 학문을 연마하였다. 이후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신말주를 큰 인물이라고 생각하여 등용하려 했으나 응하지 않자 크게 노하여 형 신숙주에게 동생의 의향을 물었다. 이에 신숙주는 동생이 지병이 있어 그렇다고 머리를 깨 피를 흘리며 읍소하자, 세조의 노기가 풀렸다는 일화가 전한다. 신숙주는 동생에게 “만일 네가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면 너뿐 아니라, 온 집안이 편치 않을 것”이라 설득했다. 신말주는 형의 의사에 따라 1459년에 사헌부 집의 사간원 사간을 역임하고 1466년 사간원 대사간에 올랐다. 얼마 후 형조참의에 전보되었으나, 1467년 칭병 사퇴하여 순창으로 돌아왔으나 갑자기 불러 군직에 보하였다. 1470년(성종1) 부인의 병이 심하다 하여 귀향을 주청하자 성종은 허락하며 내의(內醫)에 명하여 달려가 부인의 병을 고치라 하였다. 1476년(성종7) 다시 벼슬에 나가 전주부윤으로 재직하면서도 순창의 귀래정을 오갔다. 1483년 창원도호부사, 1487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와 대사간, 1488년 첨지중추부사·전라수군절도사를 지냈다. 1503년(연산군9) 12월 9일(음) 순창에서 75세로 세상을 떠났고, 1504(연산10)년 3월 24일 장례를 치렀다.

귀래정 신말주의 정부인(貞夫人) 순창설씨는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의 아들인 설총(薛聰, 655~?)의 28대 손녀로서, 사직(司直) 설백민(薛伯民)의 무남독녀(無男獨女)이다. 1429년(세종11) 2월 30일(음력) 순창에서 태어났다. 신말주와는 동갑(同甲)이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총명하여 여성으로서의 문장과 필재(筆才)가 탁월하고 정숙한 덕성을 갖추어 덕망이 높았다. 또한 불교와 유교에 조예가 깊고, 서화에도 높은 수준을 갖고 있었다. 항상 근검하게 살았으며, 집안의 재산이 넉넉해 친척 중에 가난해 늦도록 출가하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결혼에 필요한 것을 갖추어 출가시켰으며 이웃에 급한 일이 있으면 몸소 나섰다고 한다. 설씨의 『권선문』 또한 이런 생활에서 나왔다.

설씨부인은 특히 문장과 필법에 능했는데, 우리나라의 회화사학계 일각에서는 순창에 있는 귀래정(歸來亭) 우측 바위에 새긴 ‘신부윤귀래정(申府尹歸來亭)’를 설씨부인이 썼다고 주장하며, 설씨부인은 서법(書法)에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라고 주장한다.

「전 설씨부인 화조도」 도(1)과 도(6), 개인소장(고령신씨). [사진 제공 – 이양재]

한편, 설씨부인이 그린 것으로 전하는 작품 「화조도」 화첩(8도)도 문중에 현전한다. 이 「화조도」는 『귀래정실기(歸來亭實記)』3)(1994년 판)에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쓰여진 한문과 한글 묵서는 조선중기 이후에 쓴 것으로 보이지만, 그림에서는 중국 원나라 이래의 화풍이 보인다. 그리고 필치는 여성스럽다. 설씨부인의 원작에 묵서를 넣은 것인지, 아니면 원작을 베끼며 묵서를 한 것인지, 상세한 연구가 필요하다.

5. 맺음말 ; 『설씨부인권선문』의 유래와 평가

설씨부인은 1482년(성종13) 봄 간밤의 꿈이 신험(神驗) 함을 생각하고 손수 권선문(勸善文)을 짓고 강천산(剛泉山)4)의 아름다운 경계 속에 세워질 암자의 설계도까지 그려 부도암(浮圖庵)의 승려 약비(若非)로 하여금 많은 불신자에게 돌려 시주를 구하게 하였다.

설씨부인 권선문은 부도암에서 보관하여 오다가 절이 쇠락하면서 스님이 신말주의 18세손인 신승재에게 돌려주어 대대로 전해 내려오게 되었다. 1981년 7월 15일 보물 제728호로 지정되었다. 『권선문』 첩은 본래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 고령신씨 본가에 세운 보호각 유장각(遺藏閣, 1990년 건립)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국립전주박물관에 위탁 보관한 상태이다.

『설씨부인권선문』 문장에 관한 평가는 일찍이 위당 정인보(鄭寅普, 1893~1950)가 남긴 『담원전집(薝園全集)』 제1권에서 이 권선문 화첩을 처음으로 언급하고 있다.5) 정인보는 1934년 순창까지 내려가 이 설씨부인 권선문 화첩을 확인하고, 문장은 ‘기승전결과 같은 논리의 전개가 법도에 맞는 진고문(眞古文)’이라고 평하며, 이제까지 법도를 구비한 글의 시조로 꼽히는 계곡(溪谷) 장유(張維, 1587~1638)보다 앞서 이러한 법도를 구사한 설씨부인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위당 정인보 이후에 신말주 부인설씨에 관하여 주목한 학자는 독립운동가이기도 한 사회주의 계열의 학자 최익한(崔益翰, 1897~1957년 이후)이다.6)

『설씨부인권선문』 그림은 조선초기에 그려진 연도(年度)와 지역이 확인되는 몇 점 안 되는 그림 가운데 한 점이다. 1482년에 그려진 이 그림에 나타난 화풍은 고려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조선초기 그림의 보편적인 화풍과 구도를 그대로 보여 준다.

설씨부인는 1429년 순창에서 태어나 대략 15세쯤에 신말주와 혼인하여 남편 따라 한양에서 보한재 신숙주의 인근에서 살았다. 대체로 1444년경 무렵부터 단종이 퇴위하던 1453년까지는 한성에 살았다. 이 시기는 안견(安堅)과 최경(崔涇) 강희안(姜希顏) 등이 활동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시숙(媤叔)이던 보한재 신숙주는 세조조에 예림의 총수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남편 신말주는 나름대로 그림에 관한 이해가 깊었던 문인(文人)이다.7)

『申末舟先生 十老契帖』, 신말주, 1499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42호. [사진 제공 – 이양재]

즉 설씨부인은 당대의 화단의 조류를 깊이 배울 수 있던 위치에 있었다. 이후 그는 신말주와 함께 순창으로 낙향(1453년)한 29년 후이던 1482년 7월(54세)에 이 그림을 그렸다. 설씨부인의 생존 당시 화단을 미루어 보면 이 『설씨부인권선문』 그림이 주는 회화사적인 위치와 의미는 매우 크다. 회화사학계에서 안견의 화풍을 이었다고 보는 거의 모든 화가 가운데 설씨부인의 생존연대만이 안견의 생존 시대와 중첩되기 때문이다.

설씨부인은 1508년 11월 21일(음), 80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1509년 1월 4일 장례를 치른다. 고령신씨(高靈申氏) 가문의 화원으로 조선후기에 활동한 신세장(申世漳), 신일흥(申日興), 신한평(申漢枰, 1726-1809이후), 신윤복(申潤福, 1758~?) 등이 신말주와 설씨부인의 후손이다. (2025.01.07.)

「朝鮮女流藝術史上 申末舟夫人薛氏의 地位」 제1회분, 崔益翰, 동아일보, 1940년 3월 17일자. [사진 제공 – 이양재]

 

주(註)

1) 조선전기 유학자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모친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보다 75~50년이나 앞선 여류화가라는 역사적 사실은 매우 놀랍다.

2) 조선전기에 활동한 여류화가라면 순창설씨부인(淳昌薛氏婦人, 1429~1508)과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이 있다.

3) 귀래정실기간행위원회, 『歸來亭實記』, 1994년 5월 10일 발행.

4) 강천산(剛泉山)은 전북특별자치도 순창군 팔덕면과 전라남도 담양군 용면의 경계에 있는 높이 583.7m의 산이다. 호남정맥의 산이며 1981년 1월 7일에 첫 번째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5) 鄭寅普, 『담원전집』 제1권 pp.194~197., 연세대학교출판부.

6) 崔益翰, 「朝鮮女流藝術史上 申末舟夫人薛氏의 地位」, 1940년 3월 17일, 20일, 21일, 23일 등 4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기고. 최익한의 이 글은 순창설씨부인에 관한 가장 중요한 논문이다.

7) 귀래정 신말주가 그림에 관한 이해가 깊었다는 것은, 그가 남긴 문인풍의 그림 『申末舟先生 十老契帖』(11폭)으로 입증된다. 1992년 6월 20일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제142호로 지정.

신말주의 십로계첩은, 조선전기의 문신 귀래정 신말주가 노년에 순창에서 조직한 十老契에 관한 사항을 정리하여 연산군 5년(1499)에 제작한 화첩이다. 신말주는 연산군 4년(1498)에 70세의 나이로 은퇴한 후에는 부인의 고향인 순창으로 낙향하였다. 이듬해인 연산군 5년(1499)에는 자신의 정자인 귀래정에서 본인을 포함한 70세 이상의 노인 10명과 함께 계를 결성하고 ‘십로계’라고 하였다. 십로계의 결성을 기념하기 위하여, 신말주는 직접 그린 그림과 시 10편을 모아 이 화첩 10점을 만들었다. 계에 참여한 노인 10명의 인물도를 그리고 각 인물의 성품과 사상을 읊은 시를 적었으며, 서문에는 계를 맺은 이유와 목적 등을 기록하였다. 계원 10명에게 각기 하나씩 화첩을 나누어 주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는 1점 만 전해진다. 문인들의 계회도(契會圖)는 주로 16세기 이후에 유행하는데, 십로계첩은 그보다 앞서 제작되었다. 궁중의 공식적인 모임이 아닌 문인들의 사적인 모임을 그린 초기의 기록화라는 점에서 회화사적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