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입에 말아 넣으시오”

[연재] 안영민의 「아버지, 안재구」 (53)

2025-01-07     안영민

“영민아, 아버지가 드디어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가 입원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갈 무렵이었다. 나와 교대해 병실을 지키던 작은누나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처음으로 입을 열고 말씀을 하셨다는 게다. 나는 급히 차를 몰고 다시 병원으로 갔다.

“그래? 뭐라고 하시던데? 누나를 알아보셨어?”

“아니, 알아보시지는 못하는데…….”

누나는 아버지를 힐끔 쳐다보고는 조용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내 손을 잡고 손에다 뭘 쥐여주는 것처럼 하시더니, ‘입에 말아 넣으시오’ 이렇게 말씀하셨어.”

아버지는 천정만 응시한 채 누워계셨다.

“아버지, 저 영민이에요. 알아보시겠어요?”

아버지는 나를 흘낏 보더니 다시 천정만 바라보았다.

“아까 그 한마디 하시고는 다시 입을 꾹 다무셨다.”

응급실에 실려 온 뒤 2주간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오가며 투쟁했던 아버지는 열흘 전 호흡기를 떼고 일반병실로 옮겨왔다. 하지만 일반병실에서도 거동을 못 하고 식사도 콧줄로 공급받으며 누워만 계셨다.

시간이 지나면서 호흡도 맥박도 혈압도 모두 정상 수치로 돌아왔다. 담당 의사는 이제 퇴원해도 좋다고 했다. 코로나의 기세가 조금 꺾였다지만 여전히 요양원에서는 면회가 자유롭지 않았다. 아버지를 곁에서 챙겨 드릴 수 있는 병원에 좀 더 있기로 했다. 아버지를 꼭 뵙고 싶은 분들이 문병도 왔다.

그런데 아버지는 무슨 연유인지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말을 안 하셨다. 눈을 감고 있거나 천정만 바라보고 계셨다. 자식들도 못 알아보고, 곁에서 말을 걸어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답답한 나는 휴대전화에 저장된 사진을 보여드리고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를 날카롭게 노려보곤 다시 천정만 바라보았다. 구술 작업을 할 때 불현듯 찾아오던 묵비의 순간과도 같았다. 손에 무엇이라도 움켜쥔 듯 항상 주먹을 꽉 쥐고 있었고, 팔다리에도 잔뜩 힘을 준 채 버티는 모습이었다. 온몸이 긴장 상태였다. 콧줄을 갈기 위해 의사와 간호사가 왔을 때도 완강히 저항했다. 보다 못해 그냥 내버려두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기억을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작은누나가 예전에 아버지가 쓰신 책을 읽어드렸다. 이야기를 나누기는 어려운 상황이라 하루에 몇 시간씩 곁에서 책을 읽어드렸다. 여전히 반응이 없었지만, 어린 시절 밀양의 할배 할매들 이야기가 나올 때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뒤, 마침내 아버지가 입을 여신 것이다. 첫마디가 바로 “입에 말아 넣으시오”였다.

그 한마디에 나는 아버지가 처한 상황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아버지는 지금 생사를 건 투쟁 중이었다. 병실은 끌려온 취조실이고, 아버지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보여주던 나는 취조하는 형사였다. 그래서 묵비하고 천정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꾸준히 들려주던 작은누나를, 어렵게 연락선을 갖고 찾아온 동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도 없을 때, 손에 꼭 쥐고 있던 것을 건네주며 이렇게 말한 것이다.

“입에 말아 넣으시오.”

아버지가 쓴 회고록 『끝나지 않은 길』을 보면 1948년 2.7 구국투쟁 후 모든 투쟁이 비합법이 되고, 모든 조직이 지하로 들어가던 시절의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남로당 밀양군당의 소년 연락책으로 활동하던 아버지는 군당의 연락문서를 들고 아지트를 찾아갔지만, 이미 그곳은 적들의 침탈로 풍비박산이 난 뒤였다. 어렵게 찾아간 마지막 비선마저 끊어진 상황에서 아버지는 홀로 산속을 헤매게 된다. 결국 아버지는 자신이 갖고 있던 문서를 입에 말아 넣어 씹어 삼키고, 갖고 있던 총도 계곡물에 던져버리고 산에서 내려왔다. 그때가 1949년 4월 8일이었다.

절절하게 묘사되는 그 대목이 바로 아버지의 오늘이었다. 그날은 아버지의 무의식 어딘가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살길을 찾아 산에서 내려와야만 했던 그날이 아버지에게는 평생의 회한으로 남았는지도 모른다. 그랬다. 아버지의 지금은 그 참담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아버지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투쟁하고 있었다. 조직을 지키고,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끝까지 싸우는 중이었다.

그렇게 다시 조직선을 만나 마지막 임무를 끝낸 아버지의 얼굴은 전과 다르게 편안해 보였다. 온몸의 긴장도 풀린 상태였다. 손발은 따스했고 얼굴도 편안했다. 누나에게 첫마디를 건네고 난 며칠 뒤 아버지는 나와 형도 알아보았다.

“세민아, 영민아. 너희들 오랜만이구나.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지?”

병원에 입원한 지 한 달 만에 듣는 아버지 목소리였다. 아니 요양원에 입원하고 한 달도 못 돼 코로나로 면회가 중단된 뒤, 반년 만에 제대로 다시 듣는 아버지 목소리였다. 그 한마디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끝끝내 나를 몰라보면 어떡하나 걱정하다 흘리는 감사의 눈물이고, 안도의 눈물이었다.

7월 6일 오후에 아버지는 퇴원했다. 6월 4일에 응급실에 실려 왔으니 한 달이 조금 넘은 때였다. 여전히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표정은 밝았다. 아버지의 살아온 생을 알고 있던, 그래서 더욱 각별하게 챙겨주었던 요양원의 직원들이 아버지를 따뜻하게 맞이했다. 그날 저녁 요양원에서 보내준 영상에는 하모니카 연주를 듣는 아버지의 얼굴이 나왔다. “안재구 교수님!”하고 부를 때는 고개도 끄덕였다. 그다음 날에는 깔끔하게 이발한 모습도 영상으로 만났다. 아버지는 자신을 챙겨주던 이들에게 일일이 고맙다는 인사를 눈짓으로 하셨다고 한다.

또 하루가 지난 7월 8일 새벽, 정적을 깨며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요양원의 남자 실장이었다. 순간 직감이 왔다. 혹시 아버지가…….

“보호자님, 안재구 어르신이 지금 심정지 상태가 와서요. 심폐소생술을 진행해야 할지요?”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내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냥 놔두세요. 제가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나는 심폐소생술이 아버지에게는 고통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대로 편히 가시게 해드리고 싶었다. 요양원은 집에서 차로 10분이 채 안 걸린다. 형과 함께 도착하니 시계는 5시를 가리켰다. 아버지의 손발을 만져보았다. 여전히 따뜻했다.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마침내 자신의 임무를 모두 마친 ‘전사’는 그렇게 편안한 모습으로 영별의 길을 떠났다.

2020년 7월 8일 새벽에 세상을 떠난 안재구 교수의 영결식 광경. 아들인 안영민씨가 유족을 대표해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나는 아침부터 서둘렀다. 미리부터 생각해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예약하고, 아버지의 동지들과 지인들에게 연락했다. 남민전동지회와 범민련, 진보연대 등 많은 통일사회단체가 참여한 가운데 ‘통일애국지사 고 안재구 선생 민주사회장’ 장례위원회가 구성됐다. 빈소가 마련되고 많은 이들이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7월 9일 저녁에 열린 추모식에서도 함께 아버지의 생애를 회고했다.

안재구 교수의 장례는 통일운동단체들이 참여해 ‘통일애국투사 고 안재구 선생 민주사회장’으로 열렸다. [사진 제공 – 안영민]

7월 10일 오전 6시에 발인을 마치고 아버지의 운구는 수원 연화장을 거쳐 밀양 초동면 성만리에 자리 잡은 선영으로 내려갔다. 장례식장을 떠날 때부터 폭우가 내려 걱정했는데, 밀양에 도착하니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고 해가 비추기 시작했다. 그곳에도 밀양과 대구에서 많은 이들이 모였다. 아버지를 기억하고 아버지를 따랐던 후배 동지들이다. 이들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는 길이어서 아버지도 마음이 푸근했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주듯 추모식을 끝내니 어디선가 새가 한 마리 퍼드덕 날아올랐다. 천천히 우리들의 머리 위를 한 바퀴 돌고는 숲으로 사라지는 새를 모두가 신비롭게 바라보았다.

안재구 교수는 할아버지 안병희 선생과 아내 장수향 여사가 있는 고향인 경남 밀양의 선영에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아버지는 마침내 당신을 키워준 고향의 품에 안겼다. 평생 삶의 길잡이가 되었던 당신의 할아버지 안병희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워했을 아내 장수향 곁에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했다. 그리고 하늘에서 그리운 이들을 다시 만날 것이다. 학문의 스승으로 수학자의 길을 이끌어준 박정기 교수와,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서로의 맹세를 잊지 않았던 이재문과 여정남, 두 혁명동지를…….

그리고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신념의 쪽배로 분단을 건너온 수학자를…….
역사는 기록할 것이다. 민족의 해방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전사의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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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년간 매주 아버지의 평전을 연재하는 동안 성원해 주신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격려와 응원 덕분에 53회, 원고지 총 1,500매에 달하는 긴 글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안재구>는 아버지에 대한 저의 회상기일 수도 있고, 간병기일 수도, 사부곡일 수도 있습니다.

곁에서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점점 희미해지는 기억 속에서도 끝까지 놓지 않으려 했던 고향 밀양의 할배 할매들, 해방 정국의 반제 반분단 투쟁 속에서 함께 생사를 넘나든 선배 동지들과 벗들, 학문의 스승인 박정기 교수님과 경북대 수학과의 선후배들, 평생의 혁명동지 이재문, 여정남 열사를 비롯한 대구의 혁신계 선배들, 그리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잊지 못하던 사랑하는 아내 장수향과 보고 싶은 아우 안용웅…….

아버지와 그분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제가 살아온 50여 년 동안 제 삶 속에 뿌리내린 아버지의 존재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독자 여러분과 함께한 그 시간이 정말 행복했습니다. 다시 한번 독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아버지, 안재구>는 3월에 단행본으로 정식 출간될 예정입니다. 출간되면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