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화가 인재 강희안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96)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안견이 생존하던 시기의 다른 화가들이 여럿 있다. 현동자 안견(安堅, 1418년경~1470년), 근재 최경(崔涇, ?~?),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 1417~1465)을 통칭하여 조선초기(세종~세조조)의 삼대가(三大家)라고 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 신말주(申末舟, 1429~1503)의 부인 순창설씨(淳昌薛氏)도 화가로 활동하였다. 이번에는 인재 강희안에 관하여 살펴보자.
한 시대의 화가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안견이 이들 시대의 최고 대가이고, 「몽유도원도」를 안견의 기준작품으로 본다면. 강희안과 최경의 작품에서는 당연히 안견 회화의 영향이 보여야 한다. 그러나 안견의 영향은, 아니 「몽유도원도」가 이들의 작품에 미친 영향을 논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안견이 다양한 화풍을 구사하였다고 본다면, 당연히 안견의 영향이 이들 그림에서 일부 나타나야 한다.
1. 인재 강희안
우리나라의 회화사에서 인재 강희안은 안견, 최경과 더불어 조선초기 화단의 삼대가(三大家)이다. 그는 조선초의 명신으로 시·서·화에 능하여 삼절(三絶)로 이름이 높았다. 자는 경우(景愚), 호는 인재(仁齋),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그는 강시(姜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북면(東北面) 순무사(巡撫使) 강회백(姜淮伯), 아버지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강석덕(姜碩德), 어머니는 영의정 심온(沈溫)의 딸이다. 동생이 좌찬성 강희맹(姜希孟)이며, 이모부가 세종이다. 문종, 세조 등은 그의 사촌이다. 동생으로 강희맹이 있고, 또 다른 사촌으로 노사신, 박중선 등이 있다. 조선초기의 삼대가 가운데 안견은 평민(平民)으로 보이고, 최경은 천민(賤民)이었으나, 강희안은 사대부(士大夫)에 속하였다.
그는 1441년(세종 23)에 식년 문과에 정과로 급제해 돈녕부주부(主簿)가 되었다. 1443년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세종이 지은 『훈민정음(訓民正音)』 28자에 대한 해석을 상세하게 덧붙였다. 1444년 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의사청(議事廳)에 나아가 언문(諺文)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했고, 1445년에는 최항 등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주석을 붙였다.
1447년 이조정랑이 되었고, 같은 해 집현전 직제학 최항·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 등과 『동국정운(東國正韻)』을 완성하였다. 1450년 왕이 위독해지자 부지돈녕(副知敦寧)의 직에 있으면서 미타관음(彌陀觀音) 등의 경문(經文)을 썼다. 1454년(단종2)에 집현전 직제학에 올랐고, 1455년(세조 1)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1456년에 단종 복위 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신문을 받았으나 화를 면했다. 후일에 다시 대사헌 신석조(辛碩祖)와 좌사간(左司諫) 이종검(李宗儉)이 처벌을 요구했지만 왕의 비호로 무사할 수 있었다. 1460년 호조참의 겸 황해도관찰사가 되었고, 1462년에 인순부윤(仁順府尹)으로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표·전(表箋)을 받들고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63년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가 되었다. 1464년에 만 47세로 사망했다.
2. 인재 강희안의 예술세계
강희안은 시와 글씨, 그림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불렸으며, 특히 전서(篆書)·예서(隷書)와 팔분(八分)에도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었다. 시는 위응물(韋應物)·유종원(柳宗元)과 같다는 평이 있으나 자신의 글을 세상에 발표하기를 꺼렸다. 그림은 송나라의 유용(劉墉)·곽희(郭熙), 글씨는 진(晉)나라의 왕희지(王羲之)와 원(元)나라의 조맹부(趙孟頫)에 비견되기도 하였다.
기록상으로 전하는 작품들을 살펴보면, 작은 풍경화를 묵화로 즐겨 그렸다. 그리고 영모화(翎毛畵)·산수화·인물화에도 뛰어났다. 작품으로는 「여인도(麗人圖)」가 유명하고 청학동(靑鶴洞)·청천강(菁川江)의 두 족자와 「경운도(耕雲圖)」는 기보(奇寶)라 할 수 있다.
1454년(단종2) 산천 형세를 잘 아는 예조참판 정척(鄭陟), 지도에 밝은 직전(直殿) 양성지(梁誠之)와 함께 수양대군이 주도한 8도 및 서울의 지도 제작에 참여했다. 1445년 명나라에서 보내온 ‘體天牧民永昌後嗣(체천목민영창후사)’의 여덟 자 옥새를 만들었는데 조정에서 추천해 쓰게 했다. 세조 때에 임신자(壬申字)를 녹여서 을해자(乙亥字)를 주조하였는데, 을해자의 자본(字本)을 글씨를 강희안이 썼다.
글씨나 그림을 후대에 남기기를 꺼려 그의 작품으로 세상에 전하는 것이 매우 드물다. 인재 강희안의 성격은 온화하고 말이 적으며 청렴⁃소박하고 물리에 통달했고 또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고 고요한 것을 사랑해 젊어서부터 영달을 구하지 않았다. 일찍이 의정부에서 검상(檢詳)으로 추천하려 했으나 끝까지 사양해 한때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인재 강희안의 저서로는 원예에 관한 전문 서적 「양화소록(養花小錄)」이 『진산세고(晉山世藁)』 권4에 들어 있는데, 「양화소록」은 우리나라 최초의 원예서이다.
3. 인재 강희안의 전존 작품
강희안의 작품은 주로 소품이 현전한다. 그의 작품으로는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18세기 대(大) 수장가인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 1727~1797)의 수집품이다. 이외에도 간송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 「청산모우도」와 「교두연수도」 같은 산수화가 전한다.
인재 강희안은 도화서 소속의 화원이 아니었으므로, 직업화가였던 안견이나 최경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우리나라의 회화사에 남긴 그의 업적은 결코 그들에 뒤지지 않는다.
세종·숙종·영조·정조 등은 모두 서화에 능했고 그림을 즐긴 문인화가들이 적지 않았다. 다만 성리학이 주도한 전통사회에선 기술직을 얕게 보아, 화원은 외국어에 능통한 역관이나 문서의 기록을 담당한 글씨에 능한 사자관, 그리고 병을 잘 고치는 의관과 같이 신분이 양반 아닌 중인들로 말단 관직이지만 이는 신분에 따른 폄훼일 뿐이지 그림 자체를 천시한 것이 아니었다.
강희안이 그린 그림으로는 「고사관수도」, 「산수도(山水圖)」, 「교두연수도(橋頭烟樹圖)」, 「강호한거도(江湖閑居圖)」, 「청산모우도(靑山暮雨圖)」, 『전강희안·신부인등 필화집(傳姜希顔申夫人等筆畵集)』 내 「고사도교도(高士渡橋圖)」와 「절매삽병도(折梅揷甁圖)」‧「소동개문도(小僮開門圖)」 등등이 전하고 있다.
이 현전 작품 가운데 「고사관수도」 이외에는 모두 전칭작품으로 분류하고 있다. 강희안의 현전 작품은 전칭작품을 포함하여 10여 점이 채 되지를 않는다. 이들 작품은 「청산모우도」 1점을 제외하고 거의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전강희안·신부인등 필화집』에는 강희안의 전칭작품 6점과 신사임당의 전칭작품 1점이 들어 있다. 견본채색의 이 화집은 강희안의 작품으로 보이는 3점은 강희안의 필치로 보이며, 나머지 3점은 강희안을 전후로 한 시기의 다른 화가의 그림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 1점은 신사임당 풍의 그림이다. 이 강희안의 전칭작 3점은 마하파화풍과 절파화풍의 영향이 보인다.
강희안의 「고사관수도」는 조선 전기와 중기 화풍의 변화를 대변하는 작품이다. 조선전기 인물산수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이 그림의 인쪽 중단부에 ‘인재(仁齋)’의 낙관(落款)이 있어 이 그림이 인재 강희안의 작품임을 말하고 있다. 또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산수도」에는 향로형의 ‘심재(心齋)’ 주인(朱印)이 찍혀 있고, 그림의 오른쪽에 강희안의 작품으로 배관(拜款)하고 있다. 이 주인은 소장인으로 보이는데, 이 ‘심재’가 누군가를 확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아마도 정조~순조조의 인물로 추정된다.
4. 맺음말 ; 인재 강희안이 선호한 화풍은?
강희안은 대표적인 조선초기의 사대부(士大夫) 화가이다. 강희안의 산수화를 통해 조선 초기 산수화의 전반적인 양상을 유추할 수 있으며, 서화를 천한 재주로 여긴 태도에서 서화에 대한 조선 초기 사대부의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화풍은 당시 조선에 절파화풍이 수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그러나 「고사관수도」와 같이 명대의 절파화풍(浙派畫風)을 구사하면서도 사대부의 문기와 감필법을 사용한 생동감은 강희안만의 기량으로 평가된다.
고려시대에 그려진 「오백나한도(五百羅漢圖)」를 통해서 고려말에 유입된 절파화풍을 엿볼 수 있듯이, 조선초기 화단에서 활약한 강희안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와 안견의 작품으로 전하는 「적벽도」에서 이미 절파화풍이 나오고 있다. 이 두 작품은 절파회풍을 구사한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그림이다.
이러한 절파화풍에 속하는 그림을 남긴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화가로는, 사대부 화가 김시(金禔, 1524~1593)와 이경윤(李慶胤, 1545~1611)을 비롯해 조속(趙涑, 1595∼1668) 등과 화원인 이흥효(李興孝, 1537∼1593), 이징(李澄, 1581∼1674이후), 이정(李禎, 1578∼1607), 김명국(金明國, 1600∼1663이후)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가 안견을 띠랐다고 분류하는 안견파 화가이다.
절파화풍이 1465년에 사망한 강희안의 「고사관수도」에 나타난다는 것은, 명초에 대진(戴進, 1388~1462)에 의하여 확립된 절파화풍이 동시대 조선 화단에 곧바로 수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동자 안견은 다양하게 여러 화풍을 구사하였는데, 고려화 한 마하파화풍과 조선초기에 수용된 절파화풍도 여기에 포함된다. 우리나라 회화사학계에서는 안견파 화풍의 실체를 말한다. 안견파 화풍이라는 그림에는 마화파화풍과 절파화풍이 나타난다.
즉 절파화풍이 나타난다고 하여 「적벽도」를 안견 작품이 아니라 안견의 전칭작품이라고 평가하는 부정적인 시각은 「몽유도원도」 만이 안견의 유일한 진적이라는 안 모 교수의 가설에 묶인 비정상적인 논리이다.
인재 강희안의 작품에서만 절파화풍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현동자 안견의 전칭작품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안견의 전칭작품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몽유도원도」 만이 안견의 유일한 진적은 아니다. 「몽유도원도」는 안견의 진적이지만 다양한 화풍을 구사한 안견의 작품 모두를 가름할 수 있는 기준 작품이 아니다. 다양한 화풍을 구사하는 화가에게 기준작품으로 한 점을 지목할 수는 없다.
인재 강희안은 당대의 명필이다. 그가 남긴 글씨로는 「강지돈녕석덕묘표(姜知敦寧碩德墓表)」와 「윤공간공형묘비(尹恭簡公炯墓碑)」 등 금석문이 있다. 그리고 그는 을해자(1455년 주조)의 모자(母字)를 썼다. 이 을해자는 금속활자로서 안평대군(安平大君)의 글씨를 자본으로 한 경오자(庚午字)를 녹여 주조하였으니, 이것은 세조의 찬탈(簒奪)을 극력 반대하다 사사(賜死)당한 안평대군 지우기였다.이외에도 강희안의 글씨를 모각한 것이 『고금역대법첩(古今歷代法帖)』1) 장57에 2행 채록되어 있다.
[주1] 『고금역대법첩(古今歷代法帖)』은 1859년 서예가 박문회가 중국과 한국의 역대 서예가들의 필적을 모아 엮은 법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