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야권을 그렸다는 신윤복의 [삼추가연] 1화

[연재] 심규섭의 우리그림 이야기(11)

2024-12-28     심규섭
신윤복/삼추가연(三秋佳連)/종이에 담채/28.2*38.6cm/국보 135호 혜원 신윤복필 풍속도첩/간송미술관 소장. [사진 제공 – 심규섭]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 중에서 가장 난해하다.
이러다 보니 엉터리 해석이 난무한다.
역사를 알고 해석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 관점이다.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보는가에 따라 전혀 다르게 해석한다는 말이다.

일단 간략하게 그림을 살펴보자.

국화가 피어 있는 가을 야외이다.
오른쪽에 젊은 사내와 술을 권하는 늙은 할미도 보인다.
그 앞에는 댕기 머리에 청색 치마를 입은 젊은 여자가 있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자태로 보아 어린 여자이다.

웃통을 벗고 있는 사내는 수염도 나지 않은 젊은이로 보인다.
대님을 묶고 있는 것은 벗은 바지를 다시 입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을 두고 일반적인 해석은 이렇다.
무려 국립중앙박물관의 견해이다.

남자와 여자는 이미 하룻밤을 지낸 것으로 보인다. 이 사내는 여자의 초야권을 산 것이다. 흔히 ‘머리 얹어 준다.’는 말은, 기생의 초야권(初夜權)을 사서 땋은 머리를 위로 틀어 올릴 수 있게 해 준다는 뜻이다.
동기(童妓)의 초야권을 사는 사람은 이부자리와 의복과 당일의 연회비를 담당해야만 했는데, 아마도 젊은 오입쟁이는 그 비용을 냈을 것이다.

이 해석에는 자극적인 개념이 등장한다.
바로 서구 중세에 있었다는 초야권(初夜權)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젊은 여자를 기생이라고 규정한다.
또한 늙은 여자는 기생의 초야권을 매매한 뚜쟁이로 묘사한다.

이 그림의 출처는 혜원 풍속도첩 중 하나이다.
1930년대 간송미술관의 전형필 선생이 일본에서 사들였다고 한다.
나는 이 작품이 진품인지 위작인지 판단하지 못한다.
일단 진품이라고 전제하자.

이 그림은 남녀의 성매매를 다루고 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초야권, 어린 기생, 뚜쟁이가 들어가는 해석은 전혀 동의할 수 없다.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초야권이라는 개념이 존재했는지도 알 수 없고, 그것을 사고파는 것이 가능했는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초야권으로 해석하는 명쾌한 근거를 대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뜬금없이 1809년(순조 9년) 창작한 애정 소설 ‘절화기담(折花奇談)’을 소환한다.
‘절화기담’은 이생이라는 선비가 우물가에서 순매라는 이웃집 여종에게 반해 요즘 말로 ‘작업’을 하는 것이 기둥이 되는 줄거리이다.
여기에는 남녀의 만남을 주선해 주는 역할을 하는 뚜쟁이 할미가 등장한다.

소설 속 일부 내용이다.
할미는 순매를 소개해 달라는 이생의 부탁을 받고 거절한다.

“순매는 마음이 고귀하니, 빼앗거나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약간의 돈을 맡기시면 일을 주선해 보겠다.”

그러니까 소설 속에 나오는 이생이라는 선비와 순매라는 어린 종년, 그 사이를 연결하는 할미의 설정이 신윤복의 그림과 유사하다는 말이다.

그럴싸하지만 전혀 관계가 없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선비와 노비인 여자이다. 천민 여자에게 평민 남자가 수작을 걸고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것은 남녀의 흔한 일이다.
오히려 천민 여자 하나를 어쩌지 못하고 노심초사하는 세태를 보여줄 뿐이다.

실제 천민이든 여종이든 관계없이 15세 이하의 여성을 강간하면 목매달아 죽였고, 매매춘을 하면, 평민은 천민으로 강등하고, 천민은 무인도로 보내 평생 그곳에서 살게 했다.
이것이 당시 조선 형법이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 작품을 초야권을 사고파는 내용으로 해석한단 말인가?
조선은 유럽 중세에도 없었던 반인륜적인 초야권을 매매하는 패륜적인 나라였단 말인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