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의 큰 구멍을 메울 수 있는 하나의 작업을 했다”
[인터뷰] 『대종교 항일투쟁 인물사전』 출간한 김동환
“한편으로는 기쁜데, 한편으로는 많은 아쉬움이 있다... 여러 보완해야 될 요인이 많이 나타나고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또다른 책임감이 따라온다.”
무려 천 쪽이 넘는 분량에 1,350여 명의 항일운동가들을 빼곡히 수록한 『대종교 항일투쟁 인물사전』(도서출판 선인)을 집필, 출간한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은 지난 5일 통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기쁨보다 아쉬움을 내세웠다. 개인이 해낸 일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의 방대한 역저를 마무리한 소감으로는 예상 밖이다.
그도 그럴 것이 기존 독립운동가들의 항일투쟁에 대한 기록들은 넘쳐나지만 이를 대종교(大倧敎)와 연결시킨 작업은 기초자료부터 연구성과까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데다 대종교의 현주소 또한 너무 안타까운 실정이기 때문이다.
홍암 나철(1863~1916)이 국권상실기인 1909년 우리 고유 신교(神敎)를 중광(重光)한 대종교는 단군민족주의로 무장, 북로군정서의 청산리대첩이라는 금자탑을 쌓았고, 국어·국사 등 국학(國學)의 초석을 다졌다는 점에서 역사적 위상이 우뚝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이 사전에는 김구, 김두봉, 신규식, 이상설, 신채호, 이극로, 홍범도, 김좌진처럼 널리 알려진 기라성 같은 독립운동가들은 물론 이름조차 접해보기 쉽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이 모두 대종교를 젖줄로 항일투쟁에 나섰다는 ‘사실(팩트)’들이 일목요연하게 담겨 있다.
김동환 연구위원은 “사전이라는 이름을 걸고 집필을 순수하게 한 게 5년 정도 된다. 집필을 준비하기 위해서 자료조사부터 인물표제를 만들기까지 거의 20년이 걸린 작업이다”며 “1차 자료가 거의 없어졌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대표적으로 대종교가 매년 네 차례 발행했던 대종교보(大倧敎報)만 하더라도 남아있는 것이 얼마되지 않고 특히 대종교 항일투쟁의 가장 중요한 시기가 1911~1936년 사이에 딱 6회분 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대종교는 1942년 임오교변(壬午敎變)이라는 일제의 대탄압을 받아 많아 많은 희생자를 내고 모든 자료들을 빼앗겼으며, 주요간부들이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다.
김동환 연구위원은 “여기에 수록된 인물들의 항일투쟁의 족적이 기존에 나와 있는 독립운동사전, 항일운동사전하고 비슷하게 이야기된다면 의미가 없을 것”이라며 “기존에 많이 알려진 분들에 대해서는 ‘대종교적인 항일투쟁’을 어떻게 벌였다라는 것을 세밀하게 넣을려고 노력했다”고 밝혔다
사전에는 개인별로 [참고문헌]을 빠짐 없이 달았고, 주요 인물들에 대해서는 [사상]이나 [사상과 저술] 같은 란을 따로 두어 집중 조명했다. 이에 대해 그는 “이 분들의 행동에 어떤 정신적 배경이 들어가 있기에 이렇게 강력하고 쉬지 않는 힘을 그 시기에 보여줬느냐는 것을 연결시키고자 노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번 사전 편찬 작업과정에서 “일제의 기준으로 본다면 대종교는 독립운동 단체고, 대종교인은 곧 독립운동 항일투사들”이고, “대종교의 모든 움직임이 사실 항일투쟁, 독립운동과 떨어질 수 없다”며 “대종교 시교당이 곧 학교인 동시에 독립운동기지”라는 점을 새삼 재확인했다고 밝혔다.
특히 “청산리독립전쟁 북로군정서를 지탱해준 바탕이 대종교 교인들”이라며 “북로군정서에서는 경신조직이라고 하는데, 경신조직을 통해서 북로군정서의 중요한 자금 모금, 교통, 정보모집 바탕이 됐다. 북로군정서의 경신(驚信)조직이 218과까지 퍼져 있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서훈 문제도 이번 기회에 많이 다른 시각에서 봐야 된다”며 “여기에 기록된 분들 중에서도 독립운동이었든 항일투쟁의 흔적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훈되지 않은 인물이 수없이 많다. 이걸 계기로 해서 그런 것도 재평가돼야 한다”고 짚었다.
그는 대종교가 독립운동과 국학운동을 넘어 우리 고유의 종교와 철학, 수행법 등을 재정립했다며 “나철이라는 인물이 사실 삼일철학(三一哲學)을 전래 단군신앙의 흐름 속에서 재천명한 모습을 보여주고... 백포 서일이 그 삼일철학이라는 가치를 좀더 철학적으로 사상적으로 체계화시켰다”고 방점을 찍었다.
나아가 “백포 서일 같은 분은 독립운동의 현장에서 그 복잡한 투쟁의 와중에도 늘 연구 보따리를 메고 다녔던 분”이며 “항일투쟁을 대종교적인 정신을 통해서 큰 힘을 얻고자하는, 그런 군교일치(軍敎一致)의 정신을 지향해 갔다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북로군정서 총재로 김좌진 장군을 지휘했던 백포 서일(1881~1921)은 「삼일신고 강의 三一神誥講義」 「회삼경 回三經」 등의 주요한 저술을 남겼다.
동학과 대종교, 사회주의운동의 연계성을 묻는 질문에는 “동학과 대종교의 연관성을 보게 되면, 대종교의 자료나 대종교 인물들로 볼 때는 그 연관성이 아직 발견이 안된다”며 “앞으로의 또 하나의 과제가 될 듯 하다”고 답하고, “대종교는 본디 대사회주의적(大社會主義的)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는 집단”이라며 “홍익인간이 철학적 이상주의를 강조한다면 사회주의는 정치적 현실주의를 중시한다는 차이”라고 구분하고 “수많은 사회주의자들이 대종교적 정서를 품고 활약하였다”며 홍명희와 이극로, 대종교 2세 교주인 김교헌의 장남 김정기 등을 꼽았다.
그는 “대종교 항일투쟁 인물사전에 실려있는 인물들이 이렇게 정리가 일차적으로 됨으로써 우리 근대사의 큰 구멍을 메울 수 있는 하나의 작업을 했다 생각할 수 있다”며 “이렇게 1차 가공된 것을 토대로 해서 좀더 관심을 갖는 분들이 객관적인 검증, 혹은 평가, 이런 걸 통해서 뭔가 우리 사회의 연구 분위기, 또 우리 사회에 이런 가치가 확산 될 수 있는 분위기, 이런 게 조금 퍼졌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있다”는 바람을 전했다.
벌써 그는 “이미 집필하고 나서 30여 명 정도의 새로운 인물들을 확보해서 어느 정도 집필을 하고 있지만, 당연히 보편(補編), 책으로 본다면 증보판 같은 걸 기회가 되면 빨리 내야 한다”고 개정증보판을 예고했다.
이번 사전 편찬 작업이 롯데장학재단(당시 이사장 허성관)의 후원을 받아 진행됐지만 그는 “이걸 정리를 안 해놓으면 사실상 우리시대가 가면 끝나는 것 아니겠나. 누군가는 반드시 정리해야 되는 일”이라며 개정증보판 발간은 “개인이라도 해야 한다”고 역사적 책무임을 강조했다.
아울러 지난해 대종교 2세교주인 무원 김교헌(1868~1923) 선생 서거 100주기를 맞아 『무원 김교헌의 생애와 역사인식』(도서출판 선인)을 낸데 이어 내년 초 ‘홍암 나철의 생애와 사상’을 시작으로 백포 서일과 단애 윤세복의 생애와 사상을 단행본으로 출간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다음은 지난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과 진행한 『대종교 항일투쟁 인물사전』 출간 기념 인터뷰 전문이다.
“기쁨과 안타까움이 교차하는 마음이다”
□ 이번에 『대종교 항일투쟁 인물사전』을 출간했는데, 천 쪽이 넘고 인물도 1,350여 명이라는 굉장히 방대한 작업이었다. 먼저 출간한 소감은?
■ 한편으로는 기쁜데, 한편으로는 많은 아쉬움이 있다. 여기에 담겨야 됨에도 불구하고 담기지 못한 인물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 때문에 기쁨과 좀 안타까움이 교차하는 마음이다.
□ 그래도 대업을 마무리했으니 홀가분함이라든지...
■ 홀가분함도 있는데, 한편으로는 이미 이걸 완성하고 나서 여러 보완해야 될 요인이 많이 나타나고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또다른 책임감이 따라온다.
□ 이렇게 큰 일을 하려면 계기나 결심이 있어야만 이렇게 오랫동안 큰 작업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집필 동기나 계기가 있다면?
■ 일제 강점기 대종교는 모든 것을 걸고 희생한 집단인데, 해방 이후에는 그에 대한 평가는커녕 사실 거의 잊혀져버린 모습이 된 거다. 거기서 움직였던 수많은 인물들, 그 인물들의 자취를 반드시 근대사의 한 부분으로 세워줘야 하는데 그걸 늘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해방 이후에 국가가 나서서 벌써 정리했어야 한다. 좀더 능력있는 학자들이 벌써 정리를 했어야 되는 건데, 아직도 무관심 속에서 방치돼 온 거다. 그래서 그런 문제를 심각하고 안타깝게 생각한 것이 계기가 된 것이다.
□ 대종교 인물사전이라면 대종교가 주체로 나서야 되는 것 아닌가?
■ 대종교가 당연히 나서야 되는데, 해방 이후 대종교가 그런 구조적인 기능을 할 수 있는 틀을 갖추질 못한 것이다. 이런 연구나 자료정리, 혹은 집필에 대해서는 겨를을 갖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종단 차원이 아니라 개인적인 결심을 하게 된 이유다.
□ 이 정도 작업을 하려면 소요된 시간과 경비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집필 과정을 간략하게 소개한다면?
■ 사전이라는 이름을 걸고 집필을 순수하게 한 게 5년 정도 된다. 집필을 준비하기 위해서 자료조사부터 인물표제를 만들기까지 거의 20년이 걸린 작업이다.
관심을 갖고 마음 속에 품었던 것이지만 그걸 체계적으로 집필을 시작하자라고 결정을 하게 된 계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서 롯데장학재단이 후원을 하게 돼 본격적인 집필에 들어간 것이다. 그게 한 5년 정도 순수하게 집필 시간이 걸렸다.
비용 역시 금액으로 따지기 상당히 힘들다. 자료조사부터 탈초, 번역 등 수많은 과정을 거처야 되는 건데, 그런 건 제외하고 순수하게 집필로 들어가서 자료발굴, 탈초, 번역, 원고작성에 약 4년 동안 약 4억 원 가까이 소요됐다. 여러 사람들의 노력을 본다면 크게 많지 않은 금액이지만 그런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이걸 결정적으로 일정기간 속에 완성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됐다고 말할 수 있다.
□ 하다보면 제일 큰 문제가 자료와 집필을 같이 할만 한 사람들일 텐데, 한계가 많이 있었을 것 같다.
■ 당연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게, 학자들이 대종교 연구를 능동적으로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물론 대종교라는 교세가 미약한 것도 있지만, 1차 자료가 거의 없어졌다. 1차 자료가 거의 없어지다 보니까 쉽게 접근도 못하고 학자들의 능동적인 관심도 못 갖고 그러다 보니까 그동안에 체계적인 연구가 이뤄지지 못했다. 대부분의 자료가 없어졌다라는 게 가장 큰 문제가 된다.
저는 이걸 처음 시도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남아있는 1차 자료들이 뭐냐라는 걸 상당히 고민하면서 찾았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 <대종교보 大倧敎報>가 1년에 4회가 발간이 되었는데, 남아있는 대종교보가 13%밖에 안 된다. 1차 자료가 거의 없어졌고, 또다른 1차 자료랄 수 있는 <봉교원서 奉敎願書>, 인물들의 대종교를 접하게 된 기본적인 인적기록 같은 것이 하나도 남아있는 것이 없다.
제가 주로 활용했던 것이 일제강점기 자료로서 중요하게 남아 있는 것이 <종문영질 宗門榮秩>이라는 대종교인들의 교질(敎秩)을 체계적으로 적어놓은 기록이 있다. 그게 1922년 전반까지 적어놓은 거다. 물론 그 이후 거는 없고. 그 기록이 22년 중반까지 된 기록이 있는데, 거기에 약 2,000여 명의 인물들이 기록돼 있다.
또 경상북도 성주 사람 성세영이 육필로 기록한 『본사행일기 本司行日記』가 있다. 거기에 그 시기 1910년대의 경상도지역 대종교인 명단이 기록돼 있다. 그때까지 전국의 교인 명단이 다 있었다는 거다.이 분이 1922년 음력 10월에 남도본사, 경성에 있을 때 이걸 다 필사한 거다.
그리고 해방이후 대종교 항일투사였던 이현익 선생이 기록한 『대종교인과 독립운동 연원』, 박명진 선생의 『대종교 독립운동사』를 토대로 해서 여타 일제 강점기 때의 문서와 교차검증을 시도하면서 인물들의 기록을 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그 과정에서는 일제 문서 뿐만 아니라 개인의 문집, 개인의 일기, 가령 『가람일기』 같은 것을 통해서 인물들의 근거를 서로 입체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 한사람 한사람 생애를 총체적으로 검토해야 되지 않나?
■ 어떤 분은 한 명 쓰는데 적게는 15일, 한 달이 걸리기도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논문 100편 쓴 거나 마찬가지다. 짧게 하루에 두세명 쓰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이 다 검토하고 써야 한다. 상당히 지난한 작업이다.
□ 도서출판 선인에서 펴냈는데 편집은 마음에 드나? 2단 편집에 천 쪽이 넘는 분량이다.
■ 부족한게 아무래도 많이 있을 것이다. 나중에 손을 봐야할 것이다. 원래 두 권으로 계획을 한 거다. 요새 활자를 크게 하니까 1,500 페이지에서 1,600 페이지가 나오고 두 권 분량이다. 그런데 사전은 두 권으로 나누면 안 좋다고 하더라. 그래서 판을 키우고 활자를 조금 줄여서 한 권으로 만든 것이다. 사전은 교양서가 아니고 자료로 보곤 하니까 이렇게 한 거다.
□ 한 권으로 오롯이 1,350여 명을 담았다는 것은 대단하다.
■ 내가 하면서 느낀 게 ‘외자 이름’이 너무 많은데, 교보에 웬만한 주요 인물들은 누가 어떤 이름으로 개명했다고 다 나오는데, 그때 교보(大倧敎報)가 다 없어졌다. 최남선의 대종교명이 ‘최선’이라는 우원상 선생의 이야기는 있는데 그걸 수록할 수가 없다.
김두봉은 내 스스로 유추해서 ‘김규’라고 찾아냈다. 『종문영질 倧門榮秩』이라고 대종교 종령(倧令)이라는 게 있다. 그것을 1대1 대조해보니까 인물이 똑같이 맞물리는데 김두봉이 김규로 유추된다.
아마 이런 걸 계기로 해서 자료가 색다른 것들이 여기저기 튀어나올 거다. 기회가 되면 고대의 최남선문고를 가봐야 되고, 최범술 원고가 다 없어졌다고 한다. 최범술이 한용운의 원고를 다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어디에 있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든다. 아마 국내에도 부분부분 있을 거다. 대종교에서 이런 걸 생각도 안 한다. 대종교보가 안 나온지 20년 된다. 미래가 없다.
□ 쉽지 않았을 텐데, 사진이나 자료들은 주로 어디서 구했나?
■ 20여년간 준비하면서 모은 자료들과 기존에 보훈처 같은데 남아있는 것을 구했다.
□ 사전에 실린 이런 표는 자료들을 축약해서 만든 건가?
■ 제가 그린 거다.
□ 한자로 된 자료들의 번역은 어떻게 했나? 시나 서신, 일제 자료를 번역하는 것도 굉장히 높은 수준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 제가 번역했다. 특히 대종교 관련 이런 것은 사상소나 문화소를 모르면 해석이 안되니까.
□ 원래 여러 사람이 팀을 만들어서 역할분담을 하면 좋을 텐데, 이런 자료를 이렇게 검토해서 교차검증할 수 있는, 같이 할 사람이 없었을 것 같다.
■ 그렇다. 연구 저변이 거의 없다 보니까 혼자 뛰고 찾고 정리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이런 걸 계기로 해서 여러 뜻 있는, 관심 있는 학자들이 2차 가공할 수 있는 틀은 마련했다고 볼 수 있겠다.
□ 사전에 보면, 각 인물별로 빠짐없이 등장하는 게 [참고문헌]인데, 이렇게 빠짐없이 수록한 이유가 있나?
■ 대종교 인물들을 기록함에 있어서 자료가 없다 보니까 자칫 근거를 나름대로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을 경우에는 단순한 근거없는 기록으로 치부될 수 있는 염려가 없잖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될수 있는 대로 그 인물들의 대종교의 [교력](敎歷), 대종교에 들어와서 나름대로 대종교적인 경험을 어떻게 했느냐? 또 그 분들이 대종교적인 성격으로서 어떠한 항일의 삶을 살았느냐에 중점을 두고자 했다. 당연히 최대한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로서 참고문헌을 열거한 것이다.
□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 서평을 쓰면서 항일투쟁 연구에 있어서 화수분이 될 수 있다고 표현했다. 그런데 [교력] 자료는 굉장히 드문 것 같다.
■ 교력 자료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일제강점기 대종교 인물들의 교력이 남아있는 봉교원서, 개개인별 신상, 이런게 남아 있는 게 없으니까. 최대한 여러 자료를 통해서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한 거다. 그 사람이 어떻게 대종교에 들어와서 어떤 경험으로 어떻게 대종교적인 삶을 살았다, 이걸 부각시키기 위해서 노력을 해봤다.
“대종교에 입교하게 되면 그게 독립운동에 들어가게 되는 거다”
□ 인물별로 항일투쟁에 대해서는 기존에 나와 있는 것도 많지만, 특이한 게 [사상]이나 [사상과 저술] 별도의 란을 둬서 각 인물들을 조명한 것이 이채로웠다. 이렇게 집중 조명한 이유는?
■ 제목이 ‘대종교 항일투쟁 인물사전’ 아니겠나. 여기에 수록된 인물들의 항일투쟁의 족적이 기존에 나와 있는 독립운동사전, 항일운동사전하고 비슷하게 이야기된다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차라리 기존에 많이 알려진 분들에 대해서는 ‘대종교적인 항일투쟁’을 어떻게 벌였다라는 것을 세밀하게 넣을려고 노력했다. 왜냐하면 이 분들의 행동에 어떤 정신적 배경이 들어가 있기에 이렇게 강력하고 쉬지 않는 힘을 그 시기에 보여줬느냐는 것을 연결시키고자 노력한 것이다.
가령 예를 든다면, 서일이라는 인물을 보면, 단순히 행동주의 입장에서 보면 ‘아, 독립군 지도자다’ 이렇게 볼 수 있는데, 그 분은 철저하게 대종교적인 정신가치를 통해서 자기의 항일투쟁의 의지를 관철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당시에도 표현이 됐지만 ‘군교일치(軍敎一致)’다. 백포 서일이라는 인물은 나름대로 독립운동의 항일투쟁을 대종교적인 정신을 통해서 큰 힘을 얻고자하는, 그런 군교일치의 정신을 지향해 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한 분을 예를 든다면, 박은식 같은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박은식은 기존의 독립운동사전이나 기존의 연구를 보면, 다 유교에서 개혁유교로 넘어간 걸로만 기록이 돼 있고, 그 이후의 삶의 행적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안하고 있다. 만약에 그렇다면 백암 박은식이 저술했던 『한국통사』나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가 왜 쓰여졌느냐라는 것을 설명을 못하게 된다. 결코 그가 유교나 개혁유교 정신으로 그 책을 쓴 것이 아니다. 그 책은 벌써 1910,11년 대종교로 전환되면서 역사인식이 극명하게 바뀌어가는 걸 보여준다. 그 정신적인 바탕 속에서 『한국통사』가 만들어지고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가 엮어지게 된다.
여기서 제가 [사상], 혹은 [사상 저술]을 특별히 부각시키고자 노력한 것은 그 인물들의 행동을 올바르게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에 언급하려고 노력했다.
□ 대작을 집필했는데, 이 과정에서 기존에도 꾸준히 연구해왔지만 독립운동이나 대종교와 관련해서 새롭게 살필 수 있는 맥락이나 중요하게 줄기로 다가온 게 있다면?
■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얘긴데, 일제는 대종교를 그들이 통감부(1906.2~1910.8) 시절부터 철저하게 항일단체로 규정했다. 1910년 병탄을 하면서 이미 대종교를 없애기 위한 구체적인 움직임을 하지 않았나. 왜냐하면 이 분들은 대종교가 그들의 식민지 통치를 위해서 철저하게 없애야 하는 독립운동 단체라고 딱 문서에도 규정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의 기준으로 본다면 대종교는 독립운동 단체고, 대종교인은 곧 독립운동 항일투사들이다. 대종교에 입교하는 것은 독립운동단체에 들어가는 거니까, 대종교인들 자체가 바로 항일투사로서 인정이 되는 거다. 그래서 대종교의 모든 움직임이 사실 항일투쟁, 독립운동과 떨어질 수 없다. 그래서 대종교 내부에서도 얘기 됐지만 대종교 시교당이 곧 학교인 동시에 독립운동기지다 이렇게 인식됐던 거다.
그런 걸 잘 보여주는 게 청산리독립전쟁 북로군정서를 지탱해준 바탕이 대종교 교인들이란 말이다. 대종교 교인들이 성금을 내고, 성금이 바로 독립운동 자금이 되고, 또 그 사람들의 조직을 북로군정서에서는 경신(驚信)조직이라고 하는데, 경신조직을 통해서 북로군정서의 중요한 자금 모금, 교통, 정보모집 바탕이 됐다. 북로군정서의 경신조직이 218과까지 퍼져 있었다. 그건 뭘 말하나? 대종교의 주요 거점 거점 마다 경신조직의 세포를 둔 거다. 그래서 그런 것이 체계적으로 움직이고 작동을 해서 북로군정서라는 큰 조직을 움직일 수 있었다.
저는 이번에 집필하면서 느낀 게 대종교에 입교하게 되면 그게 독립운동에 들어가게 되는 거다. 서훈 문제도 이번 기회에 많이 다른 시각에서 봐야 된다고 본다. 여기에 기록된 분들 중에서도 독립운동이었든 항일투쟁의 흔적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훈되지 않은 인물이 수없이 많다. 이걸 계기로 해서 그런 것도 재평가돼야 한다.
이미 서훈된 대종교인 중에서도 사실 평가가 다시 이뤄져야 할 분들이 굉장히 많다. 뭐 그분들이 그런 걸 원하지는 않겠지만 서훈이 상향이 돼야 된다거나, 재조정이 돼야겠다는 것을 느꼈다.
□ 항일투쟁에 중점은 두고 있지만, 저서라든지 사상을 검토해 보면, 대종교는 종교로서 신교(神敎)를 중광(重光)했고, 삼일철학(三一哲學)이라든지 삼법수행(三法修行)을 갖추고 있는데, 항일투쟁이나 국학에 의해 가려진 대종교 고유의 종교활동, 이런 것도 이번에 인물들을 정리하면서 드러난 게 있는지?
■ 대종교가 그동안에 연구도 많이 안 됐지만 연구가 된 방향이 거의가 독립운동 방면이다. 독립운동 방면에서 무장투쟁하고 또 조금 조망이 더 된 것이 국어나 국사 방면에서의 국학운동, 이런 걸로 부각이 됐지만 더 본질적인 것은 대종교가 우리 근대, 어떤 사상체계의 중요한 변곡점을 만들어줬다고 생각한다.
질문을 했지만, 과연 대종교가 중광한 계기를 통해서 사실 한철학, 한사상의 틀이 마련되고 우리 사유의 중요한 논리적 틀이 되는 삼일철학, 삼일철학이라는 것도 사실 이 집단에 의해서 형상화 된다.
가령 예를 든다면 나철이라는 인물이 사실 삼일철학을 전래 단군신앙의 흐름 속에서 재천명한 모습을 보여주고, 그걸 계승한 인물이 백포 서일이다. 백포 서일이 그 삼일철학이라는 가치를 좀더 철학적으로 사상적으로 체계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 삼일철학 중에 중요한 수행장치가 삼법수행인데, 대종교 3세교주를 지낸 단애 윤세복이 임오교변(壬午敎變, 1942년)에 의해서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삼법수행을 자기가 스스로 임상을 했다. 거기서 하나하나 정리한 게 현금 대종교 경전에 실려있는 삼법수행이다. 그러니까 나름대로 그들은 철학이나 수행 방면에서 상당한 노력을 했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모습을 복합적으로 보여준 또 한 분이 호석 강우라는 분이다. 호석 강우가 발표되지 않은 많은 글에서 대종교의 교리, 사상에 대해 정리했다. 호석 강우도 독립운동, 항일투쟁 측면하고는 또 다른 측면에서 이제는 한번 연구되는 계기가 돼야 된다.
여기에 [사상], [저술]을 특히 강조해서 넣은 것도 그런 이유가 있는 거다. 이 분들의 행동과 정신적인 질서가 결코 따로 놀지 않았다. 그걸 어떻게 일치시키느냐 노력을 했다.
특히 백포 서일 같은 분은 독립운동의 현장에서 그 복잡한 투쟁의 와중에도 늘 연구 보따리를 메고 다녔던 분이다. 돌아가실 때까지. 그걸 증언을 해 준 분이 일제의 기록에도 나오지만 만주독립운동의 주요 지도역할을 했던 정신(정윤)이라는 분이다. 또 이홍래라는 항일투사의 기록에서도 등장한다. 같이들 독립투쟁의 와중에도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모습을 볼 수 있다.
□ 지금 현재는 삼법수행의 맥이 끊겨 있다고 볼 수 있나?
■ 그렇다.
□ 홍암 나철과 백포 서일이 폐기절식(閉氣絶息)했다는 대목도 대종교 안에서는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안다.
■ 그렇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이해가 쉽지 않겠지만 우리가 흔히 호흡, 수행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수행의 최고 경지를 폐기로 본다. 폐기란 자기 스스로 숨을 멈춰서 기를 끊는 것을 말한다.
홍암 나철은 일제 강점기 때 헌병대의 검시관이 나와서 홍암 나철의 죽음 원인을 구명하지 못했다. 삼법수행의 최고 경지랄 수 있는 폐기, 기를 스스로 닫는다, 절식, 호흡을 끊는다, 그렇게 죽었다고 해서 검시관이 ‘성스러운 죽음’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느냐고 생각한다.
□ 많은 수록 인물 중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거나 새롭게 의미를 부여할만한 조직이나 인물이 있다면 예를 들어달라.
■ 몇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를 단적으로 예를 든다면, 보재 이상설이다. 우리 독립운동 계열에서 1910년대에 최고 영향력을 행사했던 분이라고 얘기된다. 보재 이상설에 대해 대종교단 내에 『중광 60년사』에 1914년도 북도본사의 책임자였다는 간단한 기록만 나오는데, 이번에 남아있는 20년대 대종교보에서 보재 이상설이 연해주 대종교 개척에 선두적 역할을 했다는 기록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당시 교내의 뜻에 의해 바야흐로 북만주에 포교를 펼치고 밀산으로 그 중심지를 삼으니 보재가 그 처음이다”라는 기록이다. 그래서 보재 이상설이 1914년 연해주지역 ‘북도본사’의 책임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그거구나라는 걸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또 하나는 보재 이상설이 큰 역할을 했던 ‘권업회(勸業會)’에 대해서 앞으로 더 대종교 관련 연관성을 연구해야 되지 않겠냐는 생각을 해보고 싶다. 왜냐하면 권업회는 보재 이상설과 더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분이 최재형이라는 분이지 않나.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인데, 1921년도에 돌아가시지만, 최재형이라는 인물이 대종교단 내에서는 대종교인으로 기록이 돼 있다. 박명진의 『대종교 독립운동사』에도 최재형을 대종교 교인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이번 사전에 포함시키지는 않았다.
그런 걸 보면 권업회의 인물들이 대종교와 연관된 인물이 상당히 많다. 그래서 그런 것을 새롭게 한번 파헤쳐서 연결시켜 보고 싶은 그런 단체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다.
□ 신채호 선생이 활동했던 신문사나 단체도 거의다 대종교 관련 조직이더라.
■ 그 분도 권업회의 <권업신문> 주필을 오래했다.
동학과 사회주의와의 연계성, “앞으로의 또 하나의 과제”
□ 역사적 맥락으로 따져봤을 때, 이미 동학이 있었고 대종교의 항일무장투쟁이 있고, 그 이후에 독립운동의 주도권이 사회주의운동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국내에선 3.1운동, 만주지역에선 대종교를 비롯한 민족주의 항일무장투쟁이 있었다.
대종교는 동학과 사회주의운동과 시기적으로도 중간에 놓여 있었고 성격상으로도 이어지는 측면이 있는 것 같은데, 지금까지 연계성은 잘 드러나지 않고 단절된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서로 연계성이나 인물 중첩성이 확인된 것이 있는지 궁금하다.
■ 먼저 동학과 대종교의 연관성을 보게 되면, 대종교의 자료나 대종교 인물들로 볼 때는 그 연관성이 아직 발견이 안된다. 한 인물을 구태여 예를 든다면 대종교 중광에 참여했던 해학 이기 같은 분은 본인이 녹두장군 전봉준을 찾아가서 혁명군을 이끌고 당시 한양을 공격해야 된다는 의견을 개진하기도 한 기록이 있다. 그런 걸로 본다면 뭔가 연관이 된 인물들이 있을 텐데 그런 것을 제가 본격적으로 찾아보질 못했고, 연결을 시켜보질 못했다. 앞으로의 또 하나의 과제가 될 듯 하다.
□ 김구의 경우는 동학에도 참여했고 대종교인에도 이름을 올렸다.
■ 그렇다. 동학의 접주를 했고, 김구는 상당히 종교적으로도 열린 가치를 지닌 분 아닌가. 그분이 천주교를 모태신앙으로 믿으면서도 그 이전에 이미 동학의 접주 활동을 하고, 또 구체적인 활동을 했지 않나. 그 이후에는 상해임시정부 시절부터 해방 이후까지 대종교의 교인으로서 본인 스스로가 늘 성금도 내고 회합에 참여한 분이다. 김구 같은 분이 단적으로 잘 보여준 것이 뭐냐면, 일제강점기 때 대종교가 해방 초까지 ‘공민종교(公民宗敎)’의 역할을 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거다.
김구는 자기가 천주교인이면서 “우리 배달민족 치고 대종교인 아닌 사람 누구냐”는 의견을 대종교 모임에 참석하면 늘 얘기하곤 했다고 한다. 그런 것은 안창호나 만주의 명동학교를 이끌던 김약연 목사, 이동휘 이런 분들도 대종교를 자기 정서적 국교(國敎)로 받아들인 모습을 많이 보인다.
불교를 신앙하는 한용운이나 해방이후 불교 역경사업에 선두 역할을 보여줬던 운허선사(이시열)는 해방이후에도 대종교 활동과 불교 활동을 같이했다. 이런 걸 보면 그 분들은 개인적인 종교과 더불어 종교를 넘어선 종교로서의 대종교를 마음속에 담고 있었다. 그런 걸 공민종교로 흔히 표현한다. 그런 것도 앞으로 중요한 연구과제, 개척과제다 이렇게 생각을 해 본다.
□ 김구 선생은 마곡사에서 머리를 깎은 스님이었고, 천주교인, 동학 접주에 대종교에, 우리가 꼽을 수 있는 것만도 네 가지나 된다.
■ 그 분이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가치, 사상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게 『백범일지』 중에 ‘나의 소원’ 부분인데, 나의 소원의 핵심이 바로 국조(國祖) 단군(檀君)의 홍익인간(弘益人間) 아니겠나. 그 분은 우리가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는 걸 원치 않는다, 문화적 이상으로서 세계에 우뚝서기를 바란다라는 것이다. 그게 나의 소원의 핵심이다.
그게 뭐냐? 나는 우리 국조 단군의 홍익인간의 이상이라고 굳게 믿는다. 이런 얘기를 나의 소원의 마지막에 하지 않느냐. 나의 소원의 핵심은 그거다. 단군 홍익인간으로서 문화적인 이상국가, 세계주의를 꿈꿨던 분이 김구다. 그런 걸 보면 그분의 이상도 상당히 대종교 바탕으로 해서 우리 고유의 틀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김약연 선생은 굉장히 유명한 분이셨고 문익환 목사, 윤동주 시인이라든지 다 그분이 설립한 명동학교 출신인데, 이분이 나중에 기독교를 받아들여 목사가 됐지만 대종교인이었고, 십자가와 단군초상을 같이 걸어놓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확실한 근거가 있나?
■ 확실한 근거가 있다. 단군 할아버지를 걸고 예배를 봤다라는 것은 이미 여러 증언이 있다. 명동학교 출신의 문익환 선생의 동생 문동환 목사가 대종교 식으로 결혼식을 했다는 것도 스스로의 기록에 나타난다. 그 정도로 김약연 목사나 이런 분들의 개인적인 기독교 생활 바탕 속에 대종교라는, 단군이라는 큰 그릇을 항상 싸안고 개인 신앙, 기독교 신앙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
□ 대종교의 항일무장투쟁과 이후 사회주의 항일무장투쟁의 연계성이나 중첩되는 세력이나 인물은 없는지?
■ 대종교는 본디 대사회주의적(大社會主義的)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는 집단이다. 대종교의 궁극적 지향점이 홍익인간임을 보더라도 파악된다. 이것은 또 다른 논구(論究)의 영역이겠지만, 홍익인간이 철학적 이상주의를 강조한다면 사회주의는 정치적 현실주의를 중시한다는 차이일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김두봉을 비롯하여 홍명희·이극로 등과 권오설·권오상·안기성·김사국·박낙종·임태호·박일병·박순병 등등, 수많은 사회주의자들이 대종교적 정서를 품고 활약하였다. 특히 대종교 2세 교주인 김교헌의 장남 김정기 역시 사회주의적 배경을 안고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우리 근대사를 지탱해준 인물들, “이 시대의 살아있는 인물로 만들어야”
□ 우리 시대에 대종교는 까마득하고, 그나마 항일투쟁에 대해서는 조금 사회적 인식이 있는 것 같다. 우리 시대에 대종교 항일투쟁 인물사전을 펴내는 게 어떤 의미를 갖는 건지? 선생은 이 책이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갖는 책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지?
■ 저는 사실 그동안 대종교가 해방 이후에 연구가 되지 않았고, 또 관련 인물들이 홀대를 받은 것 아니겠나. 어떻게 보면 사회구조에 의해서 의도적 외면을 당하는 것도 있을 것이고. 이것은 우리 근대사의 많은 부분이 구멍이 뚫려 있었다는 것을 얘기할 수 있다.
그러니까 대종교 항일투쟁 인물사전에 실려있는 인물들이 이렇게 정리가 일차적으로 됨으로써 우리 근대사의 큰 구멍을 메울 수 있는 하나의 작업을 했다 생각할 수 있다. 제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이렇게 1차 가공된 것을 토대로 해서 좀더 관심을 갖는 분들이 객관적인 검증, 혹은 평가, 이런 걸 통해서 뭔가 우리 사회의 연구 분위기, 또 우리 사회에 이런 가치가 확산 될 수 있는 분위기, 이런 게 조금 퍼졌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있다.
□ 두껍고 가격도 있고, 전문적인 서적이다 보니까 이 책을 어떻게 보급시키고 홍보해야 될지도 고민될 것 같다. 출판기념회라든지 이 정도의 역작이라면 봉정(奉呈)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소개해달라.
■ 보급 계획 같은 걸 체계적으로 가진 것은 없다. 원래 그런 것까지 생각하고 한 것은 아니니까. 도서관이나 이런데 이미 보급이 됐다. 그런 걸 토대로 해서 조금씩 조금씩 관심자가 늘어날 것으로 본다.
출판기념회는 안 하기로 했다. 어떻게 보면 맨 처음에 말했지만 제 기쁨도 있지만 한편으로 좀 너무 안타까움, 회한이 많고 그런 것은 좀 자제하면서 움직이기로 했다. 다만 이 책이 나온 것을 계기로 내일 홍암 나철 선생 고향인 벌교 사당에 학자 몇분들과 그 지역의 뜻깊은 인사들 몇 분하고 해서 봉정식을 정중하게 드리는 걸로 의미를 새기기로 했다.
□ 중국 화룡현 대종교 삼종사 묘역도 있는데.
■ 그건 전번 금요일에 다른 분들이 갔는데, 확인해 보니까 책을 못 가져 갔다. 다만 3종사 묘역을 정리하고 거기서 원도를 드리면서 이 책에 대한 고유 형식을 취했다고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도 상당히 뜻 깊다.
□ 추가 자료 확보라든지 추가 인물 등재 이런 것이 있는데, 어떤 과정을 겪어서 어떻게 개정증보판까지 낼 계획인가?
■ 제가 이걸 하면서도 얘기했다. 대종교 항일투쟁의 가장 중요한 시기가 1911년에서 1936년인데 그 시기의 대종교보가 6회분 밖에 안 남아있다. 1년에 4회를 냈으니까 한 6%의 기록 밖에 안 남아있다. 그런데 지금 관심 있는 학자들이 얘길 서로 주고받다 보면, 자료가 일본 어디, 중국 구체적으로 어디, 이렇게 있다라는 학자들도 있다.
대종교보와 더불어서 그 관련된 1차 자료를 우선 어떻게 발굴하느냐. 제 개인적으로는 국내에도 이게 아마 부분부분 걸리는 게 있을 거다. 그 작업을 우선 체계적으로 해야 되겠다. 이번 인물사전 집필을 계기로 해서 연관된 개인 자료도 꽤 있을 거라 본다. 지방에도 그렇고 집안에도 그렇고, 개인이 소장한 것도 그렇고. 그런 거와 연결시키는 작업이 좀더 활발하게 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겠냐 생각해 본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미 집필하고 나서 30여 명 정도의 새로운 인물들을 확보해서 어느 정도 집필을 하고 있지만, 당연히 보편(補編), 책으로 본다면 증보판 같은 걸 기회가 되면 빨리 내야 한다. 그걸 완결성을 기하기 위해 좀더 노력해야겠다.
□ 끝나자마자 벌써 증보판을 고민해야 하는 입장인 것 같은데, 시간과 돈, 많은 것들이 소요될 것 같다. 기존에는 롯데장학재단이 지원이라도 했는데, 고스란히 개인 몫으로 돌아가는 것 아닌가.
■ 개인이라도 해야 한다. 사실 롯제장학재단이 지원을 안 했다면 제 개인적으로라도 몇 년이 더 걸리더라도 해야될 몫이다. 이걸 정리를 안 해놓으면 사실상 우리시대가 가면 끝나는 것 아니겠나. 누군가는 반드시 정리해야 되는 일이다.
더 안타까운 건 뭐냐면, 우리 같이 좀 우둔한 사람들이 이걸 하게 된 거, 이건 더 마음이 아프다. 우리보다 능력있고 실력있는 분들이 얼마나 많이 있나. 그런 분들이 좀더 능동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가 이것을 통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 겸손의 말씀으로 들린다. 사실 이 분야를 저술할 수 있는 사람은 선생 말고는 없지 않나.
최근 몇 년간 사전 편찬에 주력해 왔는데, 앞으로 활동 계획이나 집필 계획이 있다면?
■ 몇 년전부터 나름대로 부분부분 준비해온 게 있다. 대종교 주요 인물들에 대한 입체적 평가가 담긴 책이 나와야 된다는 걸 늘 마음 속에 갖고 있었다. 홍암 나철이나 무원 김교헌, 백포 서일, 단애 윤세복, 호석 강우, 예관 신규식, 백암 박은식... 수많은 사람들의 책이 안 나온 분들도 있고, 나와있는 것들도 본질을 건드리지 못한 게 굉장히 많다. 그분들을 이 시대의 살아있는 인물로 만드는 것에 많이 부족하지 않나 생각해서 그걸 준비하고 있다.
작년에 조금 급하게, 무원 김교헌 선생이 서거한지 100주기가 된 해이기 때문에 자의반타의반해서 『무원 김교헌의 생애와 역사인식』이라는 책을 급하게 냈다. 그래서 내년 초에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게 ‘홍암 나철의 생애와 사상’, 그 이후에는 ‘백포 서일의 생애와 사상’, ‘단애 윤세복의 생애와 사상’ 이런 걸 연차적으로 해서 책으로 남길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대종교를 떠나서 우리 근대사를 지탱해준 인물들이기 때문에 우리 근대사에 이런 인물들이 이런 행적을 밟아왔고 이런 의미를 우리시대에 던져줬다라는 것을 분명하게 남기는 게 우리 공부하는 사람으로서의 책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당장은 그걸 체계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모든 일에 ‘선후, 경중, 선택, 집중’이 필요하다는 평소의 지론과도 맞닿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