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아버지와 나 ⑤ 다시 덧씌운 ‘간첩’ 혐의
[연재] 안영민의 「아버지, 안재구」 (50)
2011년 7월 6일 아침에 7~8명의 국정원 수사관들이 들이닥쳤을 때, 나는 작은애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는 길이었다.
“안영민씨 맞죠? 국정원에서 나왔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애 유치원부터 보내고 나서 이야기합시다.”
“좋습니다.”
곁에 있던 아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빠, 이 아저씨들 누구야?”
“응, 아빠 친구들이야. 아침에 일이 있어서 집으로 찾아온 거야.”
하지만 여전히 놀란 눈이 풀리지 않았다. 뒤따라오는 남자들을 힐끔거리며 쳐다보던 아이는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렇게 한 무리의 남자들이 나를 뒤따르는 가운데 아이를 아파트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유치원에 데려다주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연행하는 거냐?”라고 물으니 “오늘은 압수수색 나왔다”라고 한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국정원 수사관들은 몸수색부터 했다. 압수수색 대상에는 신체도 포함돼 있었다. 그 다음 휴대전화를 압수해 포렌식 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컴퓨터는 물론이고 각종 책과 자료, USB, 장롱 구석에 있던 구형 필름 카메라와 비디오카메라, 옷장 위에 처박아둔 예전에 쓰던 노트북까지 몽땅 압수했다. 책꽂이의 책들도 한 장씩 넘겨 가며 살폈고, 옷장 속의 옷도 한 벌씩 주머니까지 샅샅이 뒤졌다. 여자 수사관은 아내의 옷장과 서랍장을 뒤졌다. 아이들 방의 책상과 책꽂이까지 뒤졌다. 금속탐지기를 동원해 잘 보이지 않는 장롱, 냉장고, 옷장, 소파의 밑바닥까지 다 훑었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으니 답답했다. 저들이 제시한 압수수색 영장에 적힌 내용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조총련 관계자와 접촉해 수시로 지령을 수수하고, 이에 따라 활동하면서 조직원을 인입해왔다’라고 했다. 말 그대로 ‘간첩’ 혐의였다.
국정원은 이미 5~6년 전부터 나를 밀착 감시해 왔다. 나중에 재판부에 제출된 국정원의 수사 기록을 보면 2005년 11월부터 이미 내 휴대전화를 도·감청하고 있었다. 또 이메일과 우편물 검열, 인터넷 접속 파악, 동선 확인 및 미행 등 내 모든 일상을 엿들었고 엿보았다.
저들은 이를 ‘내사’라고 표현했다. 본격적인 수사 이전 단계라는 의미다. 하지만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저지른 명백한 불법 사찰이었다. 가족끼리 나눈 사적 대화까지 다 파악하고 아는 척하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 때도 그랬고, 이명박 정부 때도 그랬다. 남북의 만남이 활발해지고 민간의 교류협력이 다방면으로 진행됐지만, 국정원의 감시는 변함없었다. 국정원은 ‘민주정부’ 시절에는 납작 엎드려 있는 듯하지만, 절대 아니었다. 대공수사팀은 여전히 전방위적으로 내사 중이었다. 정권이 바뀌면 언제든 칠 수 있게 준비해 놓는 것이다. ‘민주정부인데 설마 별일이야 있겠어?’ 하며 방심하는 동안에도 저들은 치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2005년 11월이면 내가 <민족21> 대표를 새로 맡은 직후였다. 당시 나는 신임 대표 자격으로 총련의 <조선신보>와 협력사업을 계속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다. 이때부터 국정원은 밀착 감시에 나선 것이다.
나는 2001년 8월에 처음 북을 방문했다. 평양에서 열린 8.15민족공동행사 취재를 위해서였다. 2000년 6월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 발표 이후 정부 당국은 물론 민간에서도 남북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후로 노무현 정부 때까지 노동, 농민, 여성, 청년, 문화예술, 종교 등 각계각층에서 남북의 만남과 공동행사가 진행됐다. 나도 취재단의 일원으로 행사에 자주 참여했다.
<민족21> 역시 남북 언론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창간 때부터 ‘남북이 함께하는 통일언론’을 내세운 <민족21>은 북의 <통일신보>와 일본의 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와 다방면으로 협력사업을 진행했다. <통일신보>와 <조선신보>가 보낸 기사를 <민족21>에 게재하고, <민족21>의 방북 취재나 총련 관련 취재 때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다.
<민족21>의 창간 5주년인 2006년에는 세 언론사가 서울에서 공동으로 사진전 ‘평양 사람들의 서울 나들이’를 진행하고, <민족21>에 게재됐던 <통일신보>와 <조선신보>의 기사들을 묶어 『래일을 위한 오늘에 살지요』, 『실리사회주의 현장을 가다』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사진전과 출판은 남북협력사업으로 승인받아 통일부로부터 사업비를 지원받았다. 2005년부터 대표를 맡았던 나는 이러한 사업들을 진행하느라 일본과 평양을 자주 다녔던 것이다.
<민족21>의 사업은 모두 통일부의 허가를 받고 진행한 일이라 국정원도 시비를 걸 만한 게 없었다. 그런데 왜 나의 일본 방문에는 그리 민감하게 반응했을까. 더군다나 저들은 아버지와 나를 함께 압수수색했다. 도대체 왜 <민족21>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아버지와 나를 묶어서 수사를 벌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정권이 바뀌니까 <민족21>에 국가보안법을 걸어 마구잡이로 탄압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자, 국정원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강변했다. 이번 수사는 안재구, 안영민 부자와 관련된 일이라고 주장했다.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되자 저들은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국정원의 팀장은 첫 수사 때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조직하고 주고받은 문서는 어차피 다 나옵니다. 아무리 암호를 걸고 여기저기 감춰 놔도 시간이 문제이지 결국은 우리가 다 찾아냅니다.”
“아니 뭐가 있어야 감추든 말든 할 거 아닙니까?”
그들만큼 나도 자신 있었다. 당연했다. 국정원이 찾는 ‘지령문’이니 ‘보고문’이니 하는 건 애초부터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당황하고 초조해지는 건 국정원이었다. ‘지령문’을 찾아내면 바로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민족21> 전체로 수사를 확대할 계획이었는데, 아무리 뒤져도 나오는 게 없었다.
그새 언론은 내가 “천안함을 폭침한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정찰총국의 지령을 받았다”라는 둥 “조선로동당 225국 소속 대남공작원과 연결됐다”라는 둥 가짜 뉴스를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1994년 구국전위 사건 때처럼 ‘대를 이은 빨갱이 부자’라고 언론은 물론 극우 인터넷 매체와 블로그까지 난리였다. 모두 국정원이 흘려준 허위 정보를 받아 썼다.
기사만 보면 수사가 끝나기도 전에 이미 판결이 나온 듯했다. 죄인으로 낙인찍고 조리돌리는 건 1979년의 남민전 때와 1994년의 구국전위 때와 다른 게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인터넷이 보편화되고 SNS가 발달한 2011년의 <민족21> 사건이 더 심각했다.
가짜 뉴스는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남민전 사건 때는 말을 하지 않으면 주위에서 잘 몰랐지만, <민족21> 사건 때는 말을 안 해도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가족들이 겪는 마음고생은 2011년이 훨씬 더 컸다. 심지어 아내조차 내게 여러 차례나 “당신 정말 아닌 거 맞지? 진짜 아니지?”라고 물을 정도였다.
한날은 일간지의 한 기자가 내게 물었다.
“북한과 연계돼 간첩 활동을 한 게 사실입니까?”
“그런 사실 없습니다.”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 말에 화가 나 또박또박 답해주었다.
“그건 국정원에 물어봐야죠. 나를 간첩이라고 주장하는 국정원이 근거를 밝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왜 자꾸 나한테 간첩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라고 합니까?”
언론은 무죄추정의 원칙도 없고, 피의사실 유포가 불법이란 점도 모른 척했다. 붙잡아온 수사기관에서 죄가 있음을 밝혀내야 하는데도, 붙잡혀온 사람한테 죄가 없음을 증명하라는 꼴이었다. 국정원보다 더 비열한 집단이었다. 언론의 속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났다. 나는 몇 차례 국정원에 출두해 조사받았다. 그런데 수사가 진척되는 게 별로 없었다. 부지런히 압수물을 뒤졌지만 기대와 달리 뭔가 나오는 게 없는 눈치였다. 자신들도 답답한지 한날은 내게 넌지시 물었다.
“혹시 예전에 일본에 갔을 때, 선물을 받은 게 있지 않습니까?”
“무슨 선물이요? 선물 받는 경우가 많아서요.”
“아버님께 전해 달라는 선물이요.”
“아, 그런 적이 한 번 있었어요. 개성인삼이었죠, 아마.”
“홍삼이었을 겁니다.”
“그랬나? 근데 그건 왜요? 아버지한테 가져다드렸더니 몸도 좀 챙기며 활동하라고 날 주셔서 내가 다 먹었는데…….”
“그때 다른 건 받은 게 없나요?”
“아뇨. 홍삼인지 인삼인지밖에 없어요.”
“누가 줬나요?”
“오래돼서 누가 줬는지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수사관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불현듯 내 머릿속에 뭔가 떠올랐다. 나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일이었다.
‘혹시 그때 받아온 선물과 편지 때문에 이 사달이 벌어진 건가?’
인삼인지 홍삼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저들은 정확히 홍삼이라 지적하며 내 기억을 바로잡아주었다. 그만큼 확실한 정보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국정원이 아버지와 나를 동시에 압수수색을 벌인 것이 그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그때부터는 얼마든지 해보라는 배짱이 생겼다. 저들이 저렇게 나오는 이유를 짐작하고 나니 내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