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창 김현성 서 『남창해진 심경찬』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93)

2024-12-09     이양재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1. 명필 남창 김현성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명필(名筆) 가운데 선비 서화가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 1542~1621)이 있다.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자는 여경(餘慶)이며, 호는 남창(南窓)이다. 목사 언겸(彦謙)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광주이씨(廣州李氏)로 진사 이중경(李重卿)의 딸이다.

1561년(명종 16)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64년(명종 1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다. 관직은 교서관정자(敎書館正字)를 시작으로, 홍문관 저작(著作)·박사(博士)에 전임되었다가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올랐으며 이어 공조좌랑(工曹佐郞), 아산현감(牙山縣監), 승문원교검(承文院校檢), 문화현령(文化縣令)을 역임한다.

김현성은 1582년 어머니 상을 치루고 다시 금산군수(錦山郡守)를 거쳐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임금을 의주(義州)까지 호송한다. 1593년 예빈사정(禮賓寺正)과 비변사랑(備邊司郞)을 겸하였고, 1599년 4월에 인천부사로 부임하였는데, 명나라 장수에 대한 지원을 소홀히 하여 부임 4개월 만인 8월에 파직된다.

이후 김현성은 1602년 양주목사(楊州牧使), 괴산군수(槐山郡守)를 지내다가 봉상시정(奉常寺正), 상의원정(尙衣院正)으로 옮기고 1608년 선조의 옥첩(玉牒)을 쓴 공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된다. 1617년(광해군 9) 돈령부(敦寧府)의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 때 왕명으로 평양 기자비의 비문을 베껴 왔으며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廢母論)에 불참하고 사직한다.

「김현성 비명」 앞부분, 이수광 지음. [사진 제공 – 이양재]

이러한 남창 김현성에 관해서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이 남긴 「김현성비명(金玄成碑銘)」이 『국조명신록』 권50에 수록되어 있는데,[주1] 그의 비명은 김현성의 인품을 잘 드러내고 있다.

2. 남창 김현성의 현전 작품과 「남창해진 심경찬」 

남창 김현성은 시·서·화에 두루 능하였는데, 그림보다는 글씨에 뛰어났고, 특히 시에 능하였다. 글씨는 조선초에 유행하였던 우아하고 균정된 모습을 지닌 송설체(松雪體)를 따랐으나, 다른 서가의 작품과 한 눈에 구분이 갈 정도로 김현성 만의 개성이 강하다.

「한묵청완서(翰墨淸玩書)」에 포함, 1602년 윤2월, 42.6×27.1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관 5065). [사진 제공 – 이양재]

현재 전하는 그림(畵)은 확인된 작품이 없고, 서(書)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한묵청완서(翰墨淸玩書)」에 그가 1602년 윤2월에 쓴 소품(小品) 한 점(42.6×27.1cm)이 들어 있는데, 이 필첩에 들어 있는 이우의 작품을 김현성의 작품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있다. 김현성의 작품은 아래 사진의 소품이다.

「봉별윤첨추령공(奉別尹僉樞令公)」, 1604년, 23.0×61.7cm, 수원시박물관 소장(홈페이지 1014). [사진 제공 – 이양재]

한편, 수원시박물관에는 1604년 8월(음력)에 연경 사신으로 떠나는 윤 첨추령을 위하여 쓴 한시 「봉별윤첨추령공(奉別尹僉樞令公)」 1점(23.0×61.7cm)이 있다.

국가지정문화재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김현성 필적(金玄成 筆蹟)』이 보물(2010년 1월 4일 지정, 보물 제1626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물로 지정한 이 『김현성 필적』은 1614년에 그가 북애(北崖) 이증(李增, 1525~1600)의 절구와 율시 9편을 행서로 필사한 것이다.[주2]

『김현성 필적(金玄成 筆蹟)』, 보물(제1626호), 1614년, 39.9×30.6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그런데 이 필첩(크기 39.9×30.6cm)은 원래의 작품을 잘라서 1장 당 5행 8자의 필첩으로 만든 것이다. 김현성이 이증이 지은 시를 쓴 것이 17면에, 남창 김현성이 쓴 말미의 제사(題辭)가 2면, 옥산 이우(李瑀)의 글씨 1면 등 모두 20면의 글씨가 있다.

이 시첩의 글씨는 15세기 안평대군을 이은 16세기 조선화 된 송설체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63세의 노숙한 필치라는 점에서 현재까지 알려진 필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남창해진 심경찬(南窓楷眞 心經贊)」, 표지 및 첫면과 발문, 김현성, 33.5×21.5cm, 개인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외에도 남창 김현성의 중요한 작품으로는 그가 해서로 쓴 개인 소장의 「남창해진 심경찬(南窓楷眞 心經贊)」(33.5×21.5cm)이 있다. 이 필첩은 1993년 10월, 예술의 전당 서예관에서 개최한 ‘조선중기서예’전에서 공개된 바 있다.

이후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신편한국사』 > 「조선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Ⅴ. 문학과 예술」 > 2. 미술 > 2) 서예 > (1)고법으로의 복귀(p.492)’에 이 작품의 서두 부분 3행을 수록하고 있고, 또한 “[김영복의 서예 이야기 : 조선의 글씨] 중기의 명필 남창 김현성”에도 이 서첩의 중간 부분 4행을 소개하고 있다. 2006년에 김현봉의 석사학위 논문 『朝鮮中期 南窓 金玄成의 書藝硏究』[주3]에서는 ‘도판목차 도1’로 이 작품을 앞세워 소개하고 있다.

개인소장의 「남창해진 심경찬」은 남창 김현성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이 필첩의 표제는 「남창해진(南窓楷眞)」이고, 첫 장의 제호는 「심경찬(心經贊)」이다. 이 필첩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김현성 필적』과 마찬가지로 원래의 작품을 잘라서 1면 당 3행 6자의 필첩으로 만들고 있다. 김현성의 작품은 제1면에서 제19면까지이고, 제20면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아들 사보(士輔) 김비(金棐, 1613~?)가 1690년(庚午)에 쓴 발문(跋文)이 있다. 이 필첩은 『심경부주(心經附註)』에 들어 있는 「심경찬」의 본문 전문 만을 싣고 있다.[주4]

「김현성 행서 시고(詩稿)」, 김현성, 30×24.5cm, 개인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외에도 남창 김현성의 작품은 여러 필첩에 단편적으로 들어 있는 시고와 간찰이 여러 점 현전하고 있다.

그런데, 김현성은 당대의 명필이니 만치, 그에게는 금석문(金石文)을 써달라는 주문이 많이 들어 왔는지 그가 남긴 금석문이 많다. 「이충무공 수군대첩비문(李忠武公水軍大捷碑文)」(보물, 여수시), 「순천 팔마비(順天八馬碑)」(보물, 순천시), 「정언 유격묘 비문(正言柳格墓碑文)」, 「행주대첩 비문<구비>(幸州大捷碑文<舊碑>」(경기도유형문화유산, 고양시), 「숭인전 비문(崇仁殿碑文)」, 「조헌선생 유허추모비(趙憲先生遺墟追慕碑, 경기도유형문화유산, 김포시)」, 「신숭겸 충렬비문(申崇謙忠烈碑文)」 등등이 현전하고 있고 이 비 가운데 두 비가 국가유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의 저서로는 1634년(인조12)에 그의 문인이던 오숙우(吳肅羽)가 시 138수(首)를 모아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의 서문을 받아 목판본으로 발행한 『남창잡고(南窓雜稿)』가 있다.

3. 남창 김현성에 관한 평가

남창 김현성은 조선 중기에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와 함께 이름을 날린 송설체(松雪體)의 대가이다. 그는 당시의 평론가들에게 “서예가 중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 글씨뿐 아니라, 시와 그림도 뛰어나 여러 번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였다.

글씨는 당시에 유행했던 조맹부(趙孟頫)의 송설체(松雪體)를 섭렵하였고, 부분적으로 왕희지(王羲之)의 영향도 수용하였다. 그러나 김현성의 글씨는 조맹부에 핍진(逼眞)했던 15세기 송설체의 대가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의 글씨와 달리 16세기 조선화된 송설체의 전형을 보여 준다. 성수침(成守琛, 1493∼1564)의 영향을 받아 부드럽고 유려한 서풍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특히 해서(楷書)에 능하였는데, 비갈(碑碣)·병풍(屛風)·족자(簇子) 등 글씨를 많이 썼다.

「이충무공 수군대첩비문(李忠武公水軍大捷碑文)」(국가유산 보물, 여수시), 비문의 글은 이항복(李恒福)이 짓고, 명필 김현성(金玄成)이 썼으며, 비몸 윗 부분의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라는 명칭은 김상용(金尙容)이 썼다. [사진 제공 - 이양재]

그러나 현전하는 대표작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김현성 필적(金玄成 筆蹟)』과 개인소장의 「남창해진 심경찬(南窓楷眞 心經贊)」으로 매우 희소하다. 한편 코베이 옥션의 2018년 제222회 ‘삶의 흔적’ 경매에 Lot. 50.으로 『남창유적(南窓遺跡)』 (총11면)이 8,000만원에 출품된 바 있다.

김현성의 이 필첩은 영의정을 지낸 조선 중기의 문신 이홍주(李弘胄, 1562년 ~ 1638년)의 구장본이다. 이를 보면 수집가들 사이에서 남창 김현성의 작품에 대한 호가(呼價)는 매우 높으며, 실제로 그의 필첩은 국가유산(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다.

 

주(註)

[주1] 「김현성비명(金玄成 碑銘)」, 『국조인물고』 권50, 「우계ㆍ율곡종유친자인(牛栗從游親炙人)」, 이수광(李睟光, 1563~1628) 지음.

번역문 : “천계(天啓) 원년인 신유년(辛酉年, 1621년 광해군 13년) 10월 임오일(壬午日)에 남창선생(南窓先生) 김공(金公, 김현성)이 향년 80세로 양생방(養生坊) 집에서 세상을 떠나자, 선생의 의리를 듣고 기풍을 사모하는 조정의 어진 사대부(士大夫)와 후진들이 너나없이 달려가 눈물을 흘리며 골육지친(骨肉之親)을 잃은 것처럼 슬퍼하였는데, 더구나 나 이수광(李睟光)은 공에게 인정받은 바가 가장 친밀하고 오래되었으니,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병으로 초야에 누워 있는 바람에 뫼 구덩이에 임하여 한번 통곡하지 못하여 유명간(幽明間)에 저버리게 되었다. 지금 공의 생질 성여학(成汝學) 군이 공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나에게 찾아와 말하기를, “그대처럼 우리 외숙을 깊이 아는 사람이 없으니만큼 그대가 비명(碑銘)을 써야 할 것이다.” 하였는데, 감히 적임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양하여 거듭 공을 저버릴 수 없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諱)는 현성(玄成)이고 자(字)는 여경(餘慶)이며 호는 남창(南窓)이다. 선대의 계통은 김해(金海)에서 비롯되었고 수로왕(首露王)의 후손이었는데, 중간에 침체되어 떨치지 못하였다. 증조는 김계선(金繼善)이고 할아버지는 김인손(金仁孫)인데, 모두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가 아버지 김언겸(金彦謙)이 비로소 문학과 덕행으로 저명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원주목사(原州牧使)가 되었고 좌찬성(左贊成)의 벼슬을 추증(追贈)받았다. 어머니 광주이씨(廣州李氏)는 진사(進士) 이중경(李重卿)의 딸인데, 큰 별이 방안으로 떨어지는 꿈을 꾸고 나서 공을 잉태하였다. 공이 겨우 두 살이 되어 손으로 벽의 글씨를 모사(模寫)하면서 오랫동안 놓지 않았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5세에 ≪소학(小學)≫을 읽고 대략 그 뜻을 알았고, 붓글씨 외에는 다른 놀이를 하지 않았으며, 15세에 더욱더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 통달하였다. 날마다 새벽이면 부모 곁에 가서 문안을 드리고 나서 밤중 내내 쉴 새 없이 글을 읽었다. 찬성공(贊成公)이 항상 말하기를, “이 아이는 재주가 보통보다 뛰어나 배울 때 긴요한 부분에 이르면 칼날처럼 이해하여 조금도 의심이 없으니, 기이하고 기이하다.”라고 하였다. 약관(弱冠)에 신유년(辛酉年, 1561년 명종16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뒤이어 갑자년(甲子年, 1564년 명종19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교서 정자(校書正字)에 임명되었다가 저작(著作), 박사(博士)로 전직하였고 관례에 따라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승진하였다. 영서찰방(迎曙察訪)으로 나갔다가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 들어왔고 아산현감(牙山縣監)으로 나갔다가 승문원교검(承文院校檢)으로 들어왔으며, 또다시 문화현령(文化縣令)으로 나갔다. 임오년(壬午年, 1582년 선조15년)에 거듭 부모 상(喪)을 당하고 상복(喪服)을 벗고 나서 가산군수(嘉山郡守), 금산군수(錦山郡守)를 거쳐 형조정랑(刑曹正郞),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 들어왔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25년)에 왜란(倭亂)이 일어나자 어가(御駕)를 호위하고 의주(義州)로 가 예빈시정(禮賓寺正)으로 비변사(備邊司) 낭관(郎官)을 겸임하였다. 그 이듬해에 재령군수(載寧郡守)로 나갔다가 인천부사(仁川府使)를 역임하고 들어와 내섬시정(內贍寺正), 사재감정(司宰監正), 군기시정(軍器寺正)을 역임하였다. 임인년(壬寅年, 1602년 선조35년)에 특별히 양주목사(楊州牧使)에서 제술관(製述官)으로 차출되어 경상(境上)에서 명(明)나라 조사(詔使)의 접대를 돕고 돌아오자 괴산군수(槐山郡守)로 임명되었고 봉상시정(奉常寺正)으로 들어와 상의원정(尙衣院正)으로 옮기었다. 병오년(丙午年, 1606년 선조39년)에 조사(詔使)가 또 나오자 재차 공을 제술관으로 삼았는데, 전후 모두 재주로 선발된 것이었다. 그때 조정에서 국(局)을 설치하고 여러 학사(學士)들로 하여금 동시집(東詩集)을 편찬해 올리라고 명하였는데, 공이 그 선발에 참여하였다가 일이 끝나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되어 삭녕군수(朔寧郡守), 여주목사(驪州牧使)를 역임하였다. 무신년(戊申年, 1608년 광해군즉위년)에 선조대왕(宣祖大王)의 옥첩(玉牒, 지문(誌文))을 쓰고 그 공로로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에 임명되었다가 중추부사(中樞府事)로 옮기었다. 정사년(丁巳年, 1617년 광해군9년)에 명을 받아 평양(平壤)에 가서 기자 비문(箕子碑文)을 쓰고 돌아올 때, (대비(大妃,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기를 청하는)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헤아릴 수 없는 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어떤 사람이 공에게 말하기를, “조정에 들어가지 말고 기다리도록 하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다. 내가 왜 교묘하게 피하려고 하겠는가?” 하고 임금에게 가 복명(復命)한 다음 물러나 병환을 이유로 벼슬을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로 인해 몇 년 동안 면직되었는데, 그때 마침 흉년이 들어 죽도 더러 잇대지 못하였으므로, 어떤 전형(銓衡)의 관리가 공을 가엾게 여겨 한산한 벼슬을 주어 녹을 먹도록 하였다. (신유년(辛酉年, 1621년 광해군13년) 10월 임오일(壬午日)에) 공이 세상을 떠나자 집이 가난하여 장례(葬禮)를 치르지 못하다가 11월 기미일(己未日)에 모전(帽錢)을 합하여 고양군(高陽郡) 아무 마을 유좌(酉坐)의 자리에다 장례를 치렀는데, 선영(先塋)이었다.

공의 사람됨이 영명하고 단정하며 온화하고 과감하여 처신(處身)과 행사(行事)를 한결같이 법도에 따라 하면서 겉으로 꾸미거나 일부러 다듬지 않고, 의리를 보아 움직이고 정도를 지켜 변하지 않는 등 정수한 금(金)과 깨끗한 옥(玉)처럼 시종 한결같았으니, 정말 행실에 독실한 군자(君子)였다. 성품이 또 지극히 효성스러워 양친(兩親)을 봉양할 때 뜻을 어기지 않았고, 관청에서 받은 녹봉을 모두 부모에게 드리고 사사롭게 소유하지 않았다. 어버이가 병환이 났을 경우에는 목욕하고 하늘에 기도하였으며 손바닥을 갈라 피를 내어 드렸다. 어버이 상(喪)을 당하자 슬퍼하다가 야위어 거의 죽을 뻔하였다. 묘소의 곁에다 상막(喪幕)을 지어 놓고 아침저녁으로 곡(哭)하며 전(奠)을 드렸고 상복(喪服)을 벗지 않았다. 평소 새벽에 머리를 빗고 세수를 하고 나서 의관(衣冠)을 정제한 다음 선조의 사당(祠堂)에 참배하였고 출입할 때 반드시 고하는 등 늙을수록 더욱더 경건히 하였다. 한창 병환이 위독할 적에도 그의 어버이가 장수를 누리지 못한 것을 통한으로 여겨 곁에 있는 사람들의 비애를 자아냈으니, 이게 어찌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한 것이 아니겠는가? 누이 한 명이 있었는데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다. 공이 처음 과거에 합격하였을 때 찬성공(贊成公)이 기뻐하여 몇 명의 노비(奴婢)를 주려고 하였으나 공이 누이가 있다는 이유로 굳이 사양하니, 찬성공이 가상히 여겨 애써 그 뜻을 따라 주었다. 재산을 나눌 때 황폐하고 낡은 것만 가지었고 서적(書籍)과 같은 하찮은 것도 모두 누이가 스스로 택하도록 하니, 누이가 그 의리에 감동하여 또한 차마 혼자 차지하지 못하였다. 만년에 그를 맞아들여 어머니처럼 봉양하여 국 한 그릇이나 한 점의 고기도 반드시 같이 먹었다. 외사촌 아우가 매우 가난하자 공이 노복 한 사람을 보내어 땔나무를 하고 물을 긷도록 하였으며, 그 아우가 죽자 노비와 재산 3분의 2를 그의 서자(庶子) 및 생질 중 궁한 사람에게 주었다. 가산이 상당히 풍족한 어떤 노비가 아들이 없이 죽자 어떤 사람이 공에게 ‘법에 따라 그의 가산을 수취하라’고 권하니, 공이 말하기를, “사람이 죽은 틈을 타 재물을 수취하는 것은 의리가 아니다. 그의 가산을 탈취한다면 그 누가 그의 시신을 묻어 주겠는가?” 하고 끝내 불문에 부쳐 버렸으니, 재물을 경시하고 의리를 중시하는 것은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이었으나 공에게 있어서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벼슬에 임해서는 한결같이 정성을 다하여 자애로 백성을 돌보았고, 관리로 일을 처리하는 것에 능하지 않았으나 부임하는 곳마다 사랑을 남기어 고을 사람들이 그의 청렴 결백을 칭송하였다. 공이 청빈(淸貧)하면서도 조금도 가산을 불리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집안사람이 후일을 위해 계획을 세우기를 원하자 공이 정색(正色)하고 말하기를, “온 집안사람이 배불리 먹으면 족하다. 어떻게 공적인 것을 긁어다 사적인 것에 보탤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파직되어 돌아올 때마다 집안에 한 섬의 곡식이 없어 처자들의 얼굴에 굶주린 빛이 감돌았으나 개의하지 않았다. 집에 있을 때에는 학문에 마음을 쏟고 혼자 있을 때 근신하는 공부를 하여 비록 한가할 적에도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특히 ≪근사록(近思錄)≫, ≪주역계몽(周易啓蒙, 역학계몽(易學啓蒙))≫ 등의 글을 좋아하여 온종일 단정히 앉아 마음을 쏟아 탐색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 경지를 엿볼 수 없었다. 늙도록 게을리하지 않고 학도들을 지도하였기 때문에 경전(經典)을 가지고 질문하는 사람이 항상 많았다. 임자년(壬子年, 1612년 광해군4년) 이후로 항상 문을 닫고 조용히 함양하여 조정의 의논에 일체 참여하지 않았으나 여전히 잊지 못하고 세상을 걱정하였다. 일찍이 항의하는 상소를 올려 과거를 삭탈한 임숙영(任叔英)을 다시 등용할 것을 요청하였는데, 임금 또한 우대하는 비답(批答)을 내렸다. 평생 동안 좋아하는 것이 없고 오직 산수(山水)를 너무나도 사랑하여 한 곳의 아름다운 경관을 만날 때마다 돌아갈 줄을 모르고 노닐면서 물러나 영원히 떠날 뜻이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그의 문장은 가장 시(詩)에 능하였는데, 정교하여 맛이 있는데다가 절실하고도 적당하여 저절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그의 필법(筆法)은 젊어서부터 조송설(趙松雪, 조맹부(趙孟頫))을 본받아 탈태(奪胎) 자득(自得)의 교묘함이 있었으므로 글씨를 써달라고 찾아온 사람이 문전을 꽉 메워 일시의 충족을 채워주지 못하였는데, 공사간(公私間) 비문(碑文)과 병풍이 모두 그의 글씨였다. 아! 공은 빼앗을 수 없는 지조와 따라갈 수 없는 덕행과 엄폐할 수 없는 재주와 학문이 있었다. 그러나 내심(內心)의 아름다움을 겸양하여 숨기려고 힘썼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외부의 문예(文藝)만 보고 칭송하며 보배로 여기었지 두 가지가 공에게 있어서 말단이라는 것은 알지 못하였다. 이율곡(李栗谷, 李珥) 선생이 극구 찬양하면서 ‘공은 마땅히 대각(臺閣)이나 시종(侍從)의 자리에 두어야 한다.’ 하였고, 성우계(成牛溪, 成渾) 선생도 ‘김 아무개 같은 사람은 고인(古人) 속에서 찾아보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으로 넉넉히 공을 알 수 있다.

부인이씨(李氏)는 종실(宗室)의 자손이다. 공경과 순종으로 부도(婦道)를 다하였고 아버지를 여읜 조카들을 자신의 자식처럼 사랑하고 양육하였으니, 다른 일도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다. 공보다 29년 전에 세상을 떠나 공의 왼쪽에 묻히었다. 양자로 들인 김인수(金遴秀)도 공보다 앞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아들은 아무개, 아무개이다. 공이 세상을 떠난 뒤에 원종(原從)의 공훈으로 인해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의 벼슬을 추증(追贈)하였는데, 이는 나라에서 생전에 미처 명하지 못한 것을 명한 것이었다. 아! 애석하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어찌하여 묘성(昴星)의 정기가 하얗게 장경(長庚)이 되었는가? 김공이 태어날 때에도 또한 광채를 잉태했도다. 나라의 중한 보배가 되니 성대한 명망이 있었도다. 외온 내강(外溫內剛)의 성품으로 시례(詩禮)를 스스로 지켰도다. 경륜이 문장으로 발로되니 종왕(鐘王)은 여벌의 일이도다. 우주에 찬찬하게 빛나니 고금에 우뚝 뛰어났도다. 별 중에 북두성이 있으니 세상에서 우러러보았도다. 공이 실로 그와 같은지라 학자들이 사표로 삼았도다. 작위가 낮지를 않았었고 또한 기회도 만났도다. 그러나 펼치지 못하였으니 그 누가 이를 주관하였는가? 고집하고 변하지 않으니 죽도록 실추하지 않았도다. 내 명(銘)이 사적인 것이 아니니 천지 신명에게 물어 보게나.”
[네이버 지식백과] 김현성 [金玄成]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주2] 이 필첩에는 「취정원수좌하(醉呈元帥座下)」, 「영보정(永保亭)」, 「덕산현(德山縣)」, 「신창산정(新昌山亭)」, 「단양도담(丹陽島潭)」, 「차한산벽상운(次韓山壁上韻)」, 「제쌍계당(題雙溪堂)」, 「차고산관운(次高山館韻)」, 「아산제영(牙山題詠)」등 9수가 실려 있고 말미에 김현성의 제사(題辭)가 붙어있다. 매 면마다 5줄의 글씨를 세로로 오려붙여 장첩(粧帖)하였다. 서첩의 작성 경위에 관해서는 말미의 제사(題辭)에 그 사연이 적혀 있다. 이에 따르면 이증의 아들 이경함(李慶涵, 1553∼1627)이 부친의 옛 동료였던 김현성에게 이증의 유고를 부본(副本)으로 남기기 위해 글씨를 써줄 것을 청하자 김현성이 이에 응해 필사한 것이다. 이증의 본관은 한산(韓山)으로, 그는 예조판서로 아천군(鵞川君)에 봉해지고 의간공(懿簡公)에 추증되었다.

[주3] 김현봉, 『朝鮮中期 南窓 金玄成의 書藝硏究』, 2006년, 대전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주4] 한글 현토(懸吐) 심경찬(心經贊)

“舜禹授受 十有六言이니 萬世心學이 此其淵源이라 人心伊何오 生於形氣하니 有好有樂요 有忿有懥라 惟欲易流하니 是之謂危니 須臾或放이면 衆慝從之니라 道心伊何오 根於性命根於性命하니 曰義曰仁이요 曰中曰正이라 惟理無形하니 是之謂微라 毫芒或失이면 其存幾希니라 二者之間이 曾弗容隙하니 察之必精하야 如辨白黑하라 知及仁守 相爲始終하니 惟精故一이요 惟一故中이라 聖賢迭興하야 體姚法姒라 提綱挈維하야 昭示來世하시니 戒懼謹獨이요 閑邪存誠이며 曰忿曰慾을 必窒必懲이라 上帝寔臨하시니 其敢或貳아 屋漏雖隱이나 寧使有愧리오 四非皆克하야 如敵斯攻이요 四端旣發에 皆廣而充이라 意必之萌엔 雲卷席撤하고 子諒之生엔 春噓物茁하라 雞犬之放에 欲其知求요 牛羊之牧에 濯濯是憂라 一指肩背 孰貴孰賤고 簞食萬鍾에 辭受必辨이라 克治存養에 交致其功이니 舜何人哉오 期與之同하라 維此道心은 萬善之主니 天之予我 此其大者라 斂之方寸에 太極在躬이요 散之萬事에 其用弗窮이라 若寶靈龜하고 若奉拱璧하라 念茲在茲하니 其可弗力가 相古先民컨대 以敬相傳하니 操約施博이 孰此爲先고 我來作州에 茅塞是懼하야 爰輯格言하야 以滌肺腑라 明窓棐几에 淸晝鑪薰이라 開卷肅然하야 事我天君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