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아버지와 나 ③ 아들을 ‘인질’로 아버지를 협박한 자들

[연재] 안영민의 「아버지, 안재구」 (48)

2024-12-03     안영민

1994년 6월 13일 밤늦은 시각, 나는 숙소인 대구 신암동 고시원의 문을 열고 나왔다. 다음 날 있을 전공과목 기말고사 예상 문제를 뽑아 두었다는 후배의 자취방에 가기 위해서다. 평화시장 앞을 지나는데, 뒤에서 누군가 “강도야!”라고 소리쳤다.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대여섯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몰려오더니 갑자기 나를 붙잡았다.

“아니 왜 이래요. 사람 잘못 봤어요. 나는 강도가 아니라 경북대 학생이에요.”

나는 뭔가 오해가 있겠거니 생각하면서 그 사람들을 밀쳐냈다. 하지만 그들은 내 팔을 잡아 뒤로 비틀더니 수갑을 채우며 말했다.

“안영민, 꼼짝 말아.”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뭐요? 뭣 때문에 나를 체포합니까? 영장 있습니까?”

그러자 한 명이 내게 종이 한 장을 쓱 내밀었다. 체포영장이었다. 그런데 이름이 내가 아니었다. 영장에는 ‘이영기’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는 대구 새로운청년회 회장이자 한청협(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 조국통일위원장이었다.

“이봐요. 여기 적힌 이름은 내가 아니고 이영기잖아요.”

“일단 가서 이야기해.”

“내 영장도 아닌데 왜 내가 가야 합니까?”

나는 거칠게 항의하며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허사였다. 이미 내 뒤로 승용차 두 대가 따라와 있었고, 여러 명의 완력을 버텨내지 못했다. 나는 주위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저는 경북대 학생 안영민이라고 합니다! 경찰이 지금 이유도 없이 저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내 입을 틀어막고는 승용차에 강제로 밀어 넣었다. 나는 속절없이 끌려가고 말았다.

나를 태운 승용차는 경광등을 울리며 빠르게 달렸다. 뒤로도 승용차가 경광등을 울리며 따라왔다. 한참을 달려 고속도로 입구에서 승용차가 멈췄다. 차에서 내린 저들은 서로 수고했다고 인사를 나눴다. 뒤따라온 승용차에는 내 얼굴을 잘 아는 대구의 형사들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돌아가고, 나를 붙잡은 자들은 다시 빠른 속도로 고속도로를 달렸다.

나는 영문을 몰랐다. 나를 붙잡은 자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도 서울 가서 이야기하자고만 했다.

‘서울로 간다고? 그러면 이들은 안기부? 아니면 대공분실? 그런데 무슨 일로? 왜 나를? 아까 보니 영기 형 영장이던데, 영기 형은 또 왜?’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잡혀 올 만한 이유가 없었다.

당시 나는 2월의 수배 해제 이후 불구속 상태로 받은 1심 재판에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때가 6월 1일이다. 나도 검찰도 항소를 포기해 6월 9일에 형이 최종 확정됐다.

‘그런데 나흘 뒤에 나를 다시 잡아들인다? 복학하고 학과 공부에만 몰두해 온 나를? 왜?’

뭔가 오해가 있다고 생각했다. 가면 알겠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니 한결 여유가 생겼다.

1994년 6월 16일 공안당국이 발표한 구국전위 사건 신문기사. 아버지는 이 사건으로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돼 석방된 지 5년 반만에 아들인 나와 함께 구속됐다. 하지만 나는 구국전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며, 군 복무 중에 잡혀온 대학 후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진 제공 – 안영민]

그렇게 몇 시간을 달려 새벽에 도착한 곳은 서울 홍제동 대공분실이었다. 악명 높은 남영동 대공분실이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면서 주로 사용하던 대공분실이었다.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대공분실의 정문을 통과해 건물 입구에 도착했다.

그들은 나를 데리고 3층으로 올라갔다. 3층에는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방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중 안쪽의 한 방으로 나를 데려간 그들은 수갑을 풀어주고 소지품을 모두 수거했다. 긴장이 몰려왔다.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을 추슬렀다. 하지만 영문을 모르니 답답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이윽고 아침이 되자 바로 수사가 시작됐다. 그런데 내가 잡혀 온 이유가 ‘경북대 활동가조직’ 때문이라고 했다. 1991년 여름에 경북대 학생회 간부 몇 명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적이 있었다. 그때 공안기관에서 갖다 붙인 사건 이름이 ‘경북대 활동가조직’이었다. 당시 구속된 이들의 진술 중에 총학생회장인 나도 활동가조직의 간부였다는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건수를 올리려고 별짓을 다 하는구나 싶었다. 별것 아니라는 생각에 안심도 됐다. 그런데 오산이었다. 저들은 미란다 고지도 안 하고 체포영장도 없이 나를 잡아 온 상황이라 48시간 안에 구속영장을 청구하기 위해 예전의 활동가조직 사건을 끄집어낸 것이다. 활동가조직으로 영장이 나온 다음 저들은 본색을 드러냈다. 태도가 강압적으로 변했고, 베테랑 수사관들이 본격적으로 투입됐다.

“야, 안영민. 우리가 그깟 활동가조직으로 널 잡아 온 거 같아? 지금 너희 아버지가 간첩으로 잡혀 와 있어. 이제부터 네가 아버지랑 어떻게 간첩 짓을 했는지 다 털어놔.”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도대체 이 자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아버지가 잡혀 왔다니……. 내가 아버지와 간첩 짓을 했다니…….

대공분실로 끌려온 지 사흘째 되는 날, 가족들이 면회를 왔다. 어머니는 나를 보며 애써 담담했다. 하지만 참담한 표정은 감출 수 없었다. 곁에 있던 누나가 대화를 엿듣는 수사관들을 잠깐 보고는 조용히 이야기를 꺼냈다.

“영민아, 아버지가 지금 안기부에 있어.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청년들도 여러 명이 안기부에 잡혀 왔어. 여기에도 지금 몇 사람이 잡혀 와 있고…….”

이영기도 그들 중 한 명이라고 했다. 어리둥절해하는 내 얼굴을 보면서 누나는 덧붙였다. 군에 있던 경북대 학생들도 지금 기무사에 잡혀 와 있다고. 내가 총학생회장을 할 때 단과대 학생회장을 했던 후배들이었다. 나는 머릿속이 텅 빈 느낌이었다. 뭔가 어마어마한 일이 터졌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안기부에 구속된 아버지를 면회하는 가족들. 공안당국은 나를 ‘인질’로 잡아놓고 아버지를 끊임없이 회유 협박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공안당국은 아버지가 일본 쪽과 연계해 ‘구국전위’라는 조직을 만들고, 20~30대 청년들을 조직원으로 포섭해 활동하다 적발됐다고 주장했다. 모두 23명이나 구속된 사건이었다. 저들이 발표한 구국전위 조직도에는 내가 ‘경북대책’으로 나왔다. 내 밑으로 군에서 잡혀 온 후배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공안당국의 주장을 일절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야말로 저들의 주장이 거짓임을 증명할 ‘증인’이기 때문이다. 구국전위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내가 끌려온 것이 조작의 결정적 ‘증거’였다. 단과대 학생회장 임기를 마치고 1992~93년에 입대한 후배들은 더더욱 구국전위와는 관계를 맺을 수가 없었다. 단지 군대에 있었기 때문에 손쉽게 끌고 와서 ‘쪽수’를 늘이는 데 이용한 것이다.

내가 구국전위와는 관련이 없다는 건 수사관들도 알고 있었다. 저들은 내게 아버지를 언제 만났냐, 만나면 주로 무슨 이야기를 하냐, 경북대 운동권 중에서 아버지와 만난 사람이 누구누구냐 등 주로 아버지와 나의 관계에 대해 캐물었다. 하지만 구국전위와 관련된 내용은 묻지 않았다. 나는 “3년 동안 수배를 받아 아버지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러니 아버지와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도 나눈 적도 없다”라고 항변했다.

내가 아버지와 관련된 진술을 거부하자 저들은 누나도 잡아들일 수 있다고 협박했다. 당시 안기부에 구속된 청년 중에는 아버지를 도와 일본 쪽과 연락을 담당했던 정화려가 있었다. 그는 학생운동 시절 큰누나와 잘 아는 사이였다. 저들은 이 부분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또 행방불명된 작은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내게 작은아버지를 만난 사실이 있지 않냐며 허무맹랑한 소리를 해댔다. 이참에 누나들까지 온 가족을 간첩단으로 만들 수 있다며 협박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저들은 단지 내가 필요했을 뿐이다. 나를 붙잡아둔 게 아버지에게는 큰 압박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수사에 협조하면 아들은 풀어주겠다고 회유했다고 한다. 그랬다. 나는 ‘인질’이었다. 저들은 아버지를 협박하기 위해 아들을 인질로 잡아둔 것이다.

20일 동안 대공분실에 인질로 잡힌 나는 참담했다. 나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낼 아버지를 생각하면 자꾸만 눈물이 났다. 나 때문에 죄없이 끌려온 후배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괴로웠다. 졸지에 수배자 신세가 된 대구의 선후배들을 생각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내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학생운동을 하면서 나름 치열하게 투쟁했다고 생각했지만, 저들에게는 한낱 애송이에 불과했다. 나는 저들의 의도를 파악하고, 사건의 실체를 똑똑히 바라보기보다는 감당하기 힘든 이 시간이 어서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나약한 포로였다.

더군다나 저들의 수사 기법은 철저히 한 인간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방식이었다. 예전과 같은 무자비한 구타나 물고문, 전기고문은 없었다. 하지만 더욱 교묘한 방식으로 사람을 옥죄었다.

원룸형 수사실에는 수사관과 마주 보는 형태로 놓인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안쪽에는 간이침대와 세면대, 변기가 아무런 가림막도 없이 있었다. 그 방에서 나는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못한 채 끊임없이 자술서를 써야 했다. 또 24시간 감시카메라가 돌아가는 그곳에서 먹고, 자고, 씻고, 싸고를 다해야만 했다.

방안에는 시계가 없었다. 당연히 몇 시인지 알 수 없었다. 작은 창문은 밀폐돼 있어 바깥을 전혀 볼 수 없었다. 24시간 불을 켜놓아 밤낮을 분간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야간 수사, 밤샘 수사는 기본이었다. 잘 때도 혼자 두지 않았다. 주로 취침 시간에 감시자로 들어오는 수사관은 내 옆에서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그게 그의 역할이었다. 잠들만하면 말을 걸었다. 주제도 맥락도 없었다. 교묘한 방식의 잠 안 재우기 고문이었다.

1차 구속 기한인 10일이 되자 나는 지칠 대로 지쳤다. 구속 기한 연장을 위해 하룻밤을 경찰서 유치장에서 보냈는데, 나는 시체처럼 쓰러져 잠만 잤다. 유치장이 천국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러한 불법 수사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뒤에야 조금씩 바뀌어 나갔다. 야간 수사를 금지했고, 국정원이나 경찰청 대공분실에 직접 구금해 수사하는 것도 금지했다. 구속 수사의 경우에도 경찰서 유치장에서 수사기관으로 출퇴근하면서 수사받도록 했다. 강압적인 수사로 받아낸 진술서만 있으면 혐의가 인정되던 과거와는 분명 달라진 모습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은 게 있다. 구체적인 행위가 아닌 생각이나 주장만으로도 처벌할 수 있는 국가보안법이 바로 그것이다.

1994년 6월 28일 발표된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남북정상회담 합의 기사. 하지만 7월 8일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남북관계가 급속히 경색되면서 여름 내내 주사파 논란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구국전위 사건은 대표적인 친북 주사파 사건으로 집중 부각됐다. [사진 제공 – 안영민]

내가 정신을 차린 건 수사가 마무리될 무렵이었다. 한날은 수사관들이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들어왔다. 자기들끼리 뭐라고 하면서 짜증을 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이 남북정상회담을 한다고 뉴스에 났다는 것이다. 그 소식에 나도 깜짝 놀랐다. 그리고 수사관들의 당혹스러운 표정도 이해가 갔다.

1993년에 북이 핵무기비확산조약(NPT)을 탈퇴하면서 북미 간에 심각한 대결 국면이 조성됐다. 1994년에는 미국의 클린턴 정부가 북의 영변 핵시설에 대한 선제 타격을 검토하면서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순간으로 내몰렸다. 전쟁 위기가 코앞에 닥친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바빠지는 게 공안기관이었다. 간첩단 사건도 주로 이럴 때 터졌다. 구국전위 사건을 대대적으로 터뜨린 것 역시 마찬가지 이유였다. 공안정국을 만들고 저항을 틀어막기 위해서다. 그런데 갑자기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 저들이 당황할 만도 했다.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는 소식은 내게도 큰 힘이 됐다. 김영삼의 말처럼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는 법이다. 제아무리 국가보안법으로 탄압해도 대통령이 직접 반국가단체의 ‘수괴’를 만나러 간다는데 네놈들이 어쩔 거냐, 이런 배짱이 절로 나왔다.

체포되고 만 18일이 지난 7월 1일, 나는 검찰로 송치됐다. 그날 밤 서울구치소 독방에 수감될 때 나는 다짐했다. 흔들리지 말자, 주저앉지 말자, 힘을 내자……. 지긋지긋한 대공분실에서 벗어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북정상회담 합의를 보면서, 비록 우리 시대가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겠지만 궁극에는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남북정상회담은 김일성 주석이 7월 8일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26년 뒤의 이 날은 아버지의 기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희망의 씨앗을 보았기에 흔들리지 않았다. 아버지와 나를 묶고 있는 이 사슬이 영원할 수 없다는 걸 확신했다. 그때야 비로소 나는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돼 10년 만에 출소한 아버지가 왜 다시 구국전위라는 조직을 만들었는지, 그 조직으로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