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화는 비극적 시대의 산물이나 직필없는 시대는 더 비참"

임헌영, 『한국현대필화사1-필화의 문학 사회사』

2024-12-02     이승현 기자

"아무리 경제적으로 선진국 진입을 외쳐도 한국의 어용지식인의 영향력이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한, 자기 민족의 안위보다 남의 나라를 먼저 염려해주는 사대주의 사상이 존재하는 한 정신적인 후진국 신세를 벗어나기는 어렵지 않을까"

뮨학평론가이자 민주화운동 원로로서 윤석열정권 퇴진을 위한 전국비상시국회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는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이 『한국현대필화사1-필화의 문학 사회사』를 출간한 까닭이다.

임헌영 선생은 '미군정부터 이승만 집권기의 필화사건'을 시대배경에 대한 설명과 함께 꼼꼼히 출처를 적어 넣고 △정치사회사 △사회사상사·지성사 △문학 예술사로 구분해 정치인, 진보적 학자, 문인, 가수, 코미디언 등을 망라했다.

지금까지 필화는 주로 글, 특히 출판된 글에 대한 규제만을 의미했지만 붓은 자기 의사를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에 불과하고 현대 사회에서 말과 행동, 노래, SNS에 남긴 글 등 모든 의사소통에 대한 직간접적인 제재가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태준, 신남철, 박치우, 정태식을 비롯한 좌파 지식인과 이종률, 이동화, 박진목, 고정훈, 김낙중 등 진보적 지식인은 물론 만담가 신불출과 가수 남인수와 계수남, '자유부인'을 쓴 정비석 등이 줄줄이 이승만에 의한 필화 피해자로 소환된다.

유진오와 임화, 이광수, 최남선, 박영희, 최석두, 박문서, 조벽암, 김상훈, 박노아, 엄흥섭, 배호, 이용악, 이병철, 김광주, 노천명, 한하운, 이호우와 이영도, 임수생 등 좌우익을 망라한 문인들이 당한 필화도 최대한의 기록으로 뒷받침하고 적절한 야사를 곁들였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오기영이 당시 요직을 두루 지낸 경성전기에서 이승만의 정치노선을 지지하는 대한노총의 퇴진압박으로 사직한 뒤 북행을 택한 것도 필화에 따른 비극으로 보았다.

임헌영, 『한국현대필화사1-필화의 문학 사회사』, 689쪽, 소명출판사 [사진-소명출판사]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도 많다.

하버드대학에서 영미문학을 전공한 뒤 8.15 이후 미군정 정보요원으로 근무하다 미국의 대한정책을 정면비판하다 귀국조치된 뒤 만년을 극심한 가난속에 보낸 작가 강용흘.

듀크대학에서 체육학을 전공한 뒤 일제하 경평축구대회를 처음 개최하고 미군정기에 친일경찰 청산에 앞장선 항일투사 최능진이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을 막기 위한 정치활동에 실패한 뒤 군사재판에서 총살형을 당한 이야기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저자에게 필화란 무엇이고 지금 왜 필화에 관한 이야기를 썼을까?

임 선생은 2일 광화문 인근 식당에서 진행된 출판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세계 4대성인 중에 필화를 당하지 않은 건 석가모니 부처 외엔 없다. 또 20세기 후반기에 지구상에서 가장 필화가 많은 나라가 한국이고 8.15이후 가장 필화가 많은 시대가 지금"이라고 하면서, "세계사, 한국의 현대사를 움직인 건 모두 다 필화"라고 말했다.

책머리에는 "필화의 궁극적인 개념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사상이나 의사를 자유롭게 나타내는 일체의 행위에 대하여 개인이나 집단에 국가가 가하는 제재와 압력, 형벌 등에 대한 총칭"이라고 썼다.

"당연히 필화가 빈번한 건 질곡과 비극의 시대가 된다. 그러나 필화가 있어야 할 시대에 직필은 없고 곡필과 망언과 허위와 날조만 난무하는 현상은 더 비참하다. 이보다 더 참담한 것은 필화의 몸통일 언론매체 자체를 통제할 뿐만 아니라 양식을 가진 지식인과 언론 방송인을 축출해 버리고, 직언할 인사들을 아예 등장시키지 않는 필화의 원천봉쇄이다."

"인생살이에서 어용은 출세의 길이고 필화는 가시밭길이지만 역사에서는 그 행불행이 뒤바뀐다. 가시밭길을 걸었던 수난자들에 의하여 역사는 발전해 왔고 그들로 말미암아 인류역사는 전진할 수 있었다."

"한국 현대사는 세계 지성사에서 필화가 가장 많았던 격랑의 연속이었다. 그 격랑을 하나하나 통찰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담하게 희생당했고 고난의 생을 보냈던 가를 상기하면 그 어떤 통곡으로도 원혼을 달랠 길이 없다. 이 모든 희생자들 앞에 작은 기념비를 세우는 심정으로 이 책을 바친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는 세계의 평화가 지켜지지 않고 포격이 횡행하고 있으며, 전운이 감도는 한반도에서 잔치를 벌일 순 없다는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인터뷰를 거론해 역대 노벨상 수상자의 멘트 중 가장 멋지고 위대한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임 선생은 필화에 대한 루쉰의 인식을 원용해 한국 현대사에 이어져 온 필화사를 정리했다.

제국주의 열강이 1911년 반제민족해방투쟁으로 일어선 신해혁명의 주도세력을 압살하고 국토를 침탈하기 위해 중군의 군벌을 움직여 맨손으로 청원에 나선 청년들을 수백명 학살한 1926년 3월 18일 참사.

루쉰은 그해 11월 20일 초판이 출간된  시사평론집 『무덤』의 서문에서 "먹으로 쓴 거짓말이 피로 쓴 사실을 감출 수는 없다"고 하면서 제국주의 침략국과 약소국의 반민족적 독재세력, 이를 직간접적으로 지지하는 지식인을 필화 탄압의 주체로 보았다.

"제국주의 세력은 침탈하려는 나라를 보다 쉽게 점령하려고 그 국가가 비 애국적인 부패한 독재체제를 유지하도록 강구하는 한편 반제민족독립의식을 고취하는 지식인들의 붓을 꺾거나 아예 그런 지식인들이 활동을 못하도록 만들고자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

'사월혁명부터 박정희 정권의 몰락까지'를 다룬 2권과 '전두환 쿠데타 이후의 필화사'를 제목으로 한 3권이 내년에 연속 출판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