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아버지와 나 ② 수학이냐, 학생운동이냐

[연재] 안영민의 「아버지, 안재구」 (47)

2024-11-26     안영민

1986년 겨울, 대학 입학원서 제출을 앞두고 친구들은 ‘눈치작전’에 정신없었다. 우리는 학력고사 점수로 대학에 지원하던 학력고사 세대였다. 눈치작전이 얼마나 심했던지 지망학과를 빈칸으로 둔 원서를 들고 대학에 간 다음, 막판에 경쟁률이 낮은 학과를 찾아 즉석에서 적어 제출할 정도였다. 적성이고 뭐고 없었다. 합격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나는 초지일관 소신이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대학은 무조건 수학과로 정해두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수학을 참 좋아했다. 또 곧잘 했다. 초등학교 때는 학교 대표로 수학 경시대회에 나가 입상도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수학만큼은 거의 만점이었다. 시험 기간에는 친구들이 모르는 문제를 풀어주는 게 일과였다.

막내인 나의 대학 진학을 앞두고 찍은 가족사진. 나는 어머니의 권유로 아버지가 18년간 몸담았던 경북대 수학과를 진학해 아버지의 뒤를 이은 수학자가 되길 희망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학력고사 성적이 발표되고 지망대학을 고민하는데, 어머니가 경북대 수학과를 추천했다. 아버지의 모교이고, 교수들도 모두 아버지의 후배와 제자이니 공부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라고 했다. 물론 어머니의 속마음에는 데모가 심한 서울의 대학보다는 대구로 내려보내는 게 낫겠다는 판단도 있었다. 4남매 중 성격이나 기질이 제일 아버지를 닮은 내가 걱정되기도 했을 것이다. 물론 어머니의 제안은 당신 뜻대로 되지 못했다. 도리어 어머니에게 상처와 한숨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나는 어머니의 권유를 따라 경북대 수학과를 지원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와 중고등학교를 모두 서울에서 다닌 내가, 가족들을 떠나 혼자 대구에 내려가기로 결심한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대구교도소에 있었고, 경북대 수학과 역시 아버지가 18년간 몸담았던 곳이었다.

나는 대구에서 아버지의 체취를 느끼고 싶었다. 감옥 담장을 사이에 두고서라도 아버지 가까이에 있고 싶었다. 그리고 아버지처럼 뛰어난 수학자가 돼 아버지의 뒤를 잇고 싶었다. 대구에 내려간다고 생각하니 그간 묻어둔 그리움이 격랑처럼 밀려오는 듯했다.

1987년 1월에 원서를 내고 면접 날이 됐다. 당시에는 학력고사 점수가 중요했다. 면접은 큰 비중이 없었다. 분위기도 다들 느긋했다. 내 순서가 돼 면접장에 들어갔다. 교수님 한 분이 원서를 들추다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여기에 적힌 자네 아버님의 성함이 ‘안재구’인데, 맞나?”

“네 맞습니다.”

“네가 영민이구나. 코흘리개 영민이가 이만큼 컸구나.”

“아이고, 영민아. 이게 얼마 만이냐? 그래 어머님도 잘 지내시고?”

면접장이란 것도 잊고 교수님들이 한마디씩 했다. 나중에 면접을 모두 마친 뒤 교수님은 나를 따로 불렀다.

“성적이 좋아 합격은 문제없다. 장학금도 가능하니 어머님께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려라.”

그렇게 해서 1987년 3월에 나는 경북대 수학과의 신입생이 됐다. 나는 교수님들의 배려로 4년 전액 장학생으로 선발됐다. 기숙사 입사 혜택도 받았다. 그 덕분에 나를 혼자 대구에 내려보내면서 노심초사했던 어머니도 큰 짐을 덜었다.

교수님들은 감옥에 있는 선배와 스승에 대한 뒤늦은 보답을 아들인 내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뒤에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이지만, 교수님들은 엄혹한 시절에 아버지의 구명운동에 참여하지 못해 마음의 빚이 컸다고 한다. 그래서 “영민이만큼은 우리가 제대로 챙겨 교수님과 사모님께 힘이 되어주자”라고 마음을 모았다는 것이다. 다른 동기들한테는 표나지 않게 나를 챙겨주던 교수님들의 배려와 사랑은 지금 생각해도 코가 시큰하다.

그런 교수님들께 배우는 수학이란 학문은 참 매력적이었다. 개념과 원리에 따라 사고를 펼치다 보면 어느새 새로운 논리의 세계가 내 앞에 펼쳐졌다. 나는 수학이란 학문이 가져다주는 사고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교수님들의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가 못다 한 학문의 길을 이어가고 싶었다. 당시만 해도 그것이 내 인생의 목표이자, 대학 생활의 전부였다.

그러나 그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해 6월, 대학은 끓어오르는 민주화 열기로 뜨거웠다. 교정은 연일 시위로 들썩였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는 시위대는 예전처럼 소수가 아니었다. 도서관에서 공부에 몰두하던 평범한 학생들까지 수업을 거부하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1987년 1월 14일에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가 조사를 받던 서울대 박종철 학생이 경찰에게 물고문을 받다 숨지면서 이를 규탄하는 투쟁이 거세게 타올랐고,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내건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6월 9일에는 시위를 벌이던 연세대 이한열 학생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의식불명이 되자 6월10일부터 전국적인 시위가 벌어지면서 민주항쟁으로 나아갔다. 사진은 명동성당 앞에서 거행된 ‘살인고문 전두환 정권 규탄대회’ 광경. [사진 제공 – 안영민]

한국 현대사에 큰 획을 그었던 ‘6월항쟁’의 거대한 물결이 전국을 뒤덮었다. 수학과 학생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나는 그 물결 속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갔다. 동료들과 거리로 나섰다. 백골단과 최루탄에 맞서 ‘짱돌’도 던졌다.

뒤늦게 스승의 아들이 최루탄 속을 비집고 다닌다는 사실을 안 교수님들이 나를 불렀다. 호통도 치고 호소도 했다. 지금은 열심히 공부하는 게 아버지 뜻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간곡히 설득했다. 그 설득 앞에 나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6.29선언으로 6월항쟁은 일단락된 듯했지만, 학생운동은 이때부터 전성기를 맞이했다. 비록 1987년 12월의 대선에서는 야당 후보인 김영삼과 김대중의 분열로 노태우가 당선됐지만, 1988년에도 대학가는 시위의 날들이 이어졌다. 광주학살 진상규명, 5공 비리 책임자 처벌, 구속 학생 석방 등 경북대에서도 학생들의 투쟁은 연일 계속됐다.

시위에 참석하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나는 강의실과는 멀어져갔다. 강의실에 들어가서도 교수님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런 분위기가 부담스럽다 보니 강의실에 들어가는 횟수가 차츰 줄었다. 교수님이 나를 찾아도 모른 척 피해 다녔다. 교수님들은 교수님대로 “저 녀석을 제대로 붙잡지 못하면 우리를 믿고 내려보낸 사모님을 뵐 낯이 없다”라며 대책 수립에 전전긍긍했다.

결국 나는 1988년 1학기에 학사경고를 받았다. 아무리 교수님들이 각별한 정이 있다고 해도 수업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제자에게 학점을 줄 수는 없었다. 또 학사경고를 받으면 내가 정신차릴 거라는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열심히 수학 공부만 할 자신이 없었다. 방황하던 나는 2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휴학계를 내고 말았다.

‘수학이냐, 학생운동이냐.’

휴학 기간 내내 갈등하고 고민했던 부분이다. 나는 수학 공부와 학생운동을 병행할 자신이 없었다. 학문으로서의 수학은 만사를 제쳐 두고 공부에만 매달려야 성과를 낼 수 있었다. 교수님과 어머니의 기대대로 수학자의 길을 가려면 더더욱 그래야만 했다. 아버지는 수학과 변혁운동을 모두 완벽하게 해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럴 능력이 안 됐다.

홀로 방황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귀찮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해 12월에 아버지가 석방됐다. 가을부터 전두환, 이순자 구속 투쟁에 불이 붙었고, 노태우 정권은 성난 민심을 달래야만 했다.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전두환과 이순자를 백담사로 보내고, 감옥의 양심수들을 대거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노태우 정권 출범 직후인 1988년 4월에 열린 13대 총선에서 야당이 승리하면서 여소야대 정국이 열렸고, 국회에서 광주민주화운동 청문회와 5공비리 청문회를 지켜본 국민들의 분노는 전두환 이순자 구속과 양심수 석방 투쟁으로 모아졌다. 결국 노태우 정부는 1988년 11월 23일 전두환 이순자 부부를 강원도 인제의 백담사로 보냈고, 12월 21일에 양심수들을 대대적으로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은 전두환 이순자 구속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 광경. [사진 제공 – 안영민]

아버지는 마침내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10년 만에 이루어진 아버지의 석방은 민중들이 치열하게 싸운 성과였다. 나는 부끄러웠다. 역사의 현장에서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혼자 갈등하고 방황만 하고 있었다. 투쟁의 현장을 외면하고 벗어나려고만 했다.

이듬해 3월,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어느새 마음은 정리돼 있었다. 아버지를 대신해 나를 챙겨주던 교수님들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일이었지만, 나의 선택은 학생운동이었다. 복학한 나를 바라보는 교수님들의 눈빛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 착잡한 표정이었다. 그런 눈빛이 마음에 걸려 나는 강의실을 등지다시피 했다.

1990년 3월, 내가 거리 시위에 나섰다가 붙잡혀 구속되자 교수님들은 경찰서 유치장으로 찾아왔다.

“영민아, 우리가 어머님 뵐 낯이 없구나. 모쪼록 건강 잘 챙기도록 해라.”

나는 1990년 3월 거리시위 도중 체포돼 구속됐고, 석방 후에는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해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됐다. 사진은 1991년 3월에 열린 대구경북지역대학총학생회연합(대경총련) 진군식에서 연설하는 모습. [사진 제공 – 안영민]

감옥에서 나온 뒤인 그해 10월, 나는 교수님들을 찾아갔다.

“죄송합니다. 총학생회장에 출마하려 합니다.”

“알겠다. 그 길이 네가 갈 길이라면 어쩔 수 없지. 우리도 더는 너한테 뭐라고 이야기하지 않으마.”

교수님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갖고 있던 나에 대한 책임감도 함께 내려놓았다.

이런 나의 상황과 고민을 아버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와 자주 만나 상의할 여유가 없었다. 1988년 12월에 아버지는 출소했지만, 10년 동안 못 만난 사람들을 만나느라 경황이 없었다. 나는 복학을 준비하느라 새해가 되자마자 대구로 내려갔다. 신학기부터는 학생회 간부로 활동하면서 더 바빠졌다. 방학 때도 농활이다 뭐다 하면서 집에 올라올 짬이 없었다. 아버지를 만나는 것도 대구에 볼일이 있어서 내려온 아버지가 학교로 찾아와야 가능할 정도였다.

아버지는 학생운동을 하느라 수학 공부를 포기한 내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만나면 밥 잘 먹고 뭘 하든 건강도 챙기면서 하라는 정도였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표정에서는 복잡한 심경이 드러났다. 아버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수학이라는 학문과 변혁운동을 병행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를. 하지만 이미 결심이 섰던 나는 아버지에게 더는 묻지 않았다. 두 가지 중에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에 대해…….

아버지는 내가 총학생회장에 출마한다는 소식을 듣고, 당신의 후배이자 제자인 경북대 수학과 교수들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영민이가 대구로 내려와 자네들한테 걱정만 끼쳐 미안하네. 그 녀석도 성인이니 자기 인생은 스스로 헤쳐 나가겠지. 차라리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게 했다면 좋았을 텐데…….”

아버지도 나도 바쁘게 그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저술과 강연 활동을 왕성하게 벌여 나갔다. 나는 총학생회장 당선 이후 얼마 못 가 바로 수배가 떨어졌다. 그 때문에 아버지와 나는 만나기는커녕 전화 연락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간간이 전국 집회 현장에서 반갑게 만날 수 있었다.

나의 수배 생활은 1993년까지 약 3년간 이어졌다. 김영삼 정부는 1994년 초에 시국사건 관련 수배자들에 대한 수배 조치를 해제했다. 다른 수배자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1994년 2월에 검찰에 자진 출두했다. 그리고 1994년 3월에는 학교로 돌아왔다. 수학과 3학년으로 복학해, 한참 어린 후배들에게 모르는 걸 물어가면서 전공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학생운동 관련 사건들은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았고, 1994년 6월에 집행유예로 모든 문제를 마무리했다. 4년 만에 되찾은 일상이었다.

1994년 2월, 어머니의 회갑 때 모처럼 온 가족이 모였다. 이날 어머니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이제 언제건 자유롭게 막내아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머니에게는 남편의 감옥살이보다 아들의 수배 생활이 더 큰 아픔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데모는 후배들에게 맡기고 빨리 졸업부터 해야 한다”라며 신신당부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약속했다. 더는 걱정을 안 끼치겠다고. 하지만 나는 그 약속을 불과 몇 달도 지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