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견의 「설천도」와 작자미상의 「파초야우도」를 대비한다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91)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가운데 「설천도(雪天圖)」가 있다. 안견의 인흔(印痕)이 있는 작품이다. 이 그림 옆에 붙어 있는 별지(別紙)에는 안견의 이름이 적혀 있다. 한편 화면 오른쪽 중간의 가장자리 부분에는 ‘안견(安堅)’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안견의 작품이라 전한다”라고 부정당하고 있다.
1. 안견 작을 애써 부정하기 위해 만든 ‘단선점준(短線點皴)’이라는 신조어
우리나라의 회화사학계는 「설천도」에 찍힌 ‘안견(安堅)’이라는 도장은 후날(後捺)된 것으로 본다. 그리고서는 “「설천도」는 안견의 진작(眞作)은 아니지만 조선 초기 안견파 산수화의 전형적인 양식적 특징인 ‘편파이단구도(偏頗 二段構圖)’와 ‘단선점준(短線點皴)’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라고 평가한다.
웬, 궤변인가? 안견의 작품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은 안견 작품으로는 가치가 없는 가짜라고 단정한 후에 안견 없는 안견파 산수화의 특징을 보여준다는 말인데, 그것이 궤변 아니면 무엇인가? 안견의 화풍이 없는 안견파라는 것은 교묘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안 모 교수에 의하면 “단선점준(短線點皴)은 2~3mm 정도의 짧은 선이나 점의 형태로 산, 언덕, 바위 등의 질감을 표현하는 준법으로, 가늘고 뾰족한 붓끝을 화면에 살짝 대어 약간 끌거나 터치를 가하듯 하여 집합적으로 사용된다. 우리나라에서는 15세기 후반부터 발생하여 16세기 전반기에 유행하였던 한국적 준법으로 안견(安堅)의 작품이라 전해지는 작품에서 특징적으로 보인다”라는 사용 시기를 한정하는 단서(但書)를 달고 있다.
이 단어는 조선화나 동양화에 있어서 화보(畫譜)에 나오는 준법(皴法)도 아닌데, 안견이 창안한 화법도 아니고, 안견을 따른 작가들의 그림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전반기에 유행하였던 한국적 준법으로 사용 시기를 한정하는 단서는 이른바 단선점준이 나타나는 국박 소장의 안견 작품들은 안견의 작품임을 부정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논리이다.
이 단서에 의하여 단선점준이 나타나는 그림은 안견의 관지가 있어도 모두 안견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부정되며, 소위 단선점준이 고려말기의 작품에 나타난다고 하여도, 그러한 작품은 모두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전반기의 작품으로 판정하여야 한다. 엄밀하게 볼 때 ‘단선점준’이라는 단어는 안 모 교수가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만이 안견의 유일한 진작이라고 주장하기 위하여 만든 신조어로서, 그 사용 시기를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전반기로 한정한 가설이다.
2. 안견의 「설천도」는 절파화풍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설천도」는 구도라든가, 풍경 표현 방식에 있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중 「강천모설도(江天暮雪圖)」와 작품 분위기가 매우 흡사하다. 따라서 “「설천도」는 단순히 겨울 풍경을 그린 동경산수도(冬景山水圖)가 아니라 소상팔경(瀟湘八景) 중 한 장면인 ‘강천모설(江天暮雪)’을 그린 「강천모설도」”라고 보는 관점도 있다. 이 그림은 “「소상팔경도」 화첩 중 1엽이었는데 화첩이 해체되면서 단독 그림으로 유전(流傳)되어 후대에 「설천도」로 명명되었다”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작품 분위기가 흡사하다고 하여 동일한 주제로 그린 작품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설천도」 화면 오른쪽 상단에 보이는 끝이 뾰족하고 각이 진 첨형(尖形)의 원산(遠山) 두 봉우리는 대진(戴進, 1388경~1462경) 및 전기(前期) 절파(浙派) 화가들의 산수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데, 조선 초기 산수화 작품 중 대진 화풍의 특징인 원경에 배치된 첨형 암봉이 나타난 가장 이른 예는 안견 필(筆)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의 ‘만동(晩冬)’이다. 「설천도」를 포함해 조선 전기에 제작된 산수화 작품 중에는 첨형의 암봉을 보여주는 여러 예가 존재한다.
안 모 교수는 명나라 대진의 화풍이 15세기 후반 조선에 소개된 것으로 본다. 대진 화풍의 영향이 16세기 전반의 조선 화단에 점차 확산하고 있었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설천도」는 안견파 화풍에서 절파화풍으로 전환되던 과도기적 화풍의 작품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설천도」에 보이는 첨형의 원산이 대진의 절파화풍의 영향이라고만 단정할 수는 없다. 이러한 「설천도」에 보이는 원산의 두 봉우리의 원형(原形)은, 멀게는 「어제비장전」 판화(11세기)에 부분적으로, 늦게는 고려말 노영(魯英)의 「고려태조 담무갈보살 예배도」와 작자미상의 1410년 「파초야우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인 첨형의 원산은 이른바 장마당 그림이라고 불리는 비전문가들의 그림에서 흔히 보이는 소략한 원산의 형상이다.
즉 이러한 첨형의 원산으로 인하여 「설천도」가 대진을 비롯한 명대 절파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은 말도 안 된다. 이것은 중국 절파화풍의 영향이라기보다는 고려회화의 전통적 영향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의 역사와 그 역사가 남긴 문물(文物)을 볼 때, 어느 특정 현상 하나를 집어내어 작품 전체를 외부의 영향이라고 보는 것은 식민지 문화 시각의 잔재이다.
「설천도」는 김광국(金光國, 1727~1797)의 『화원별집』에 들어있던 그림이다. 그 화첩의 일부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설천도」는 1911년 6월 20일 동경 동문관에서 발행한 『조선국보대관』에 제24도로 실려 있다. 1933년 이왕직(李王職)에서 간행한 『이왕가박물관소장품사진첩 회화지부』와 1934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권14(회화편)에 실려 있다. 즉 「설천도」는 대한제국시기에 이미 이왕가박물관 소장품이었다.
그리고 그림의 왼쪽에 ‘안견(安堅)’이란 기명(記名)은 김광국이 『화원별집』을 만들면서 쓴 것이다. 작품의 오른쪽 중앙부 아래의 인흔은 ‘안견(安堅)’이라 되어 있으니, 이 인흔은 김광국이 소장하기 이전에 찍혀진 것이다. 이를 후에 날인(捺印)한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가볍게 폄훼하여 판단하는 것은 학자적 태도가 아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학예부장을 역임한 이원복 전 경기도박물관장은 이 작품을 “박락이 심해 화면 상태가 양호하지는 않지만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와 친연성이 보이며, 필치나 구도 등을 살피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비해당화기」에 언급이 보이는 「설제천한도(雪霽天寒圖)」나 「설제여한도(雪霽餘寒圖)」로 비전됨 직하다.”라고 평가하였다. 이원복 관장의 이 평가는 「설천도」 안견 작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열어 놓은 평가이다.
3. 1410년 「파초야우도」를 주목한다
일본의 동경국립박물관에는 작자미상의 「파초야우도(芭蕉夜雨圖)」가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은 1410년(태종 10) 이전에 제작되었고 현재는 축(軸)으로 되어 있다. 지본(紙本) 수묵(水墨)이며, 맨 아래에 그림을 배치하고 그 위로 화찬을 3단에 걸쳐 배치하였다. 첩(帖)을 축으로 개장한 듯하다. 그림과 글씨를 합한 크기는 세로가 95.9cm 가로가 31.0cm이다. 현재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1410년에 봉례사(奉禮使)로 일본에 갔던 집현전 학사 양수(梁需)[주1]와 일본 교토(京都) 오산(五山)의 시승(詩僧) 13인 등 14인의 화찬이 적혀 있는 그림이다. 「파초야우도」는 작자미상의 그림이지만, 화풍으로 보아 양수를 따라갔던 조선시대 화원(畵員)의 작품일 것으로 주장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에 화찬을 쓴 14인 가운데 조선인은 양수가 유일한 것으로 보아 고려말이나 조선초에 그려져 일본으로 유출된 그림에 1410년에 찬문이 들어간 것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필자는 1410년에 일본에 가는 사신 양수를 따라갔던 화원의 작품으로 본다.
양수는 이 작품에 ‘유용산승사 차운화초도(遊龍山僧舍 次韻花草圖)’라는 제(題)와 찬시 “비 내려 파초잎을 적시며 가을밤은 깊어져 가는데(雨滴芭蕉秋夜深) / 옷깃을 부여안고 앉아 고아한 시 낭송을 듣네(擁衿危座聽高吟) / 공은 멀리 어디에서 왔는가 묻는 사람 없으니(遠公何處無人問) / 이국에서 온 선비의 고향 떠난 심사로다(異國書生萬里心)”를 쓰고, ‘영락8년8월 일 조선국봉례사 통정대부 예조좌참의 집현전학사 양수제(永樂八年八月 日朝鮮國奉禮使通政大夫禮曹左參議集賢殿學士梁需題)’라는 관지(款識)를 하였다.
이 「파초야우도」는 조선초기 회화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대칭을 이루면서 왼편으로 후퇴하는 대각선 구도, 근경과 중경 사이의 안개를 이용한 공간 확장, 가라앉을 듯이 보이는 중거(中距), 첨예한 모습의 토파(土坡)와 그 주변의 특이한 수초(水草), 흑백의 대조가 강렬한 산의 묘사 등은 단순해 보이는 이 작품이 조선 초기의 화풍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소나무와 버드나무의 묘사에 남송 원체화풍(院體畵風)의 영향이 나타나 복합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작품은 공백으로 남아 있는 1410년 이전의 고려말 조선초 회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런데 이 그림에도 「설천도」에 나타나는 첨형(尖形)의 원산(遠山)이 그려지고 있으며, 근경의 산에는 단선점준이 보인다. 이를 보면 선(線)도 준(皴)도 아닌 이른바 ‘단선점준(短線點皴)’은 안견 이전에도 있었음이 확실하다.
4. 맺음말 ; 「설천도」는 안견의 작품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설천도」는 안견 작이다. 조선 영조조의 구장자 김광국 이전부터 안견 작으로 전승하였고, 이왕가미술관에서도 안견 작품으로 매입하였다.
이 「설천도」가 인견 작이라고 부정한 미술사학계의 첫 인물이 안 모 교수이다. 그 바탕에는 일본 천리대학 소장의 「몽유도원도」만이 안견의 진작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이상한 「몽유도원도」 짝사랑이 담겨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삼척동자가 보아도 분명한 안견 작이다. 「몽유도원도」만이 안견의 유일한 진품이라고 하는 논리는 「몽유도원도」의 가치만 높이고, 안견의 다른 작품들은 짓밟는 행위로 귀착한다.
「몽유도원도」는 안견의 진작(眞作)이기는 하나, 안견 작품의 기준작(基準作)은 아니다. 오히려 「설천도」가 안견의 기준 작품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는 가설은 가설로 끝내야 한다. 안 교수의 안견론의 상당 부분을 폐기하고, 이제 우리의 것을 외부의 눈이 아닌 우리의 눈으로 보고 평가하자.[주2]
주(註)
[주1] 양수(梁需)는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이다. 본관은 백천(白川)인데, 1382년(우왕8년)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해주목사(海州牧使) 형조참의(刑曹參議) 강화부사(江華府使) 등을 지냈다. 1410년 2월 회례사(回禮使)가 되어 일본국왕 아시카가 요시모치(足利義持)에게 서계(書契)와 부물(賻物)로 백세저포(白細苧布) 흑세마포(黑細麻布) 각 25필(匹), 인삼(人蔘) 송자(松子) 각 50근(斤), 잡채화석(雜彩花席) 10장(張), 호피(虎皮) 표피(豹皮) 각 1령(領), 전물(奠物)로 백세저포‧흑세마포 각 10필, 청주(淸酒) 1백 병(甁) 등을 전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도중에 바다에서 해적을 만나 약탈당하였다. 1411년 1월에 아시카가 요시모치가 보내는 답서(答書)와 예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태종은 그가 사신으로 갔다가 도둑에게 약탈당한 것을 불쌍히 여겨서 쌀 20석과 지폐인 저화(楮貨) 1백 장(張)을 하사하였다.
[주2] 「몽유도원도」만이 안견의 유일한 진품이라고 하는 가설을 내 놓은 안 모 교수가 서울대를 거친 하버드대 출신이라는 것으로 인하여,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의 학자들은 그 가설(假說)을 비판 없이 정설(定說)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1970~80년대 한국학에 있어 하버드대는 한국어와 한국문화의 초보적인 것을 가르치는 당시 우리나라의 고등학교 교실 수준이었다. 당시 하버드대에 가서 한국학을 전공한다는 것은 한국의 김치를 담그는 방법을 배우기 위하여 서울대 식품영양학과 출신이, 김치를 배우러 북경대로 유학가서 김치와는 전혀 다른 중국식 ‘파오차이(泡菜)’를 김치라고 배우고, 김치를 배우러 동경대로 유학가서 일본식 ‘아사즈케(浅漬け)’를 김치라고 배우는 상황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