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아버지와 나 ① ‘대를 이은 빨갱이 부자’

[연재] 안영민의 「아버지, 안재구」 (46)

2024-11-19     안영민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긴 뒤 아버지는 서서히 기력을 회복했다. 하지만 여전히 음식은 콧줄로 공급받았다. 주무시는 때보다 깨어 있는 시간이 점점 늘었다. 깨어 있을 때는 말 없이 천정을 응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아버지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자주 말을 걸었다.

“아버지, 저 영민이에요.”

“아버지가 몸이 편찮으셔서 병원에 입원했어요. 의사 선생님 이야기로는 금방 좋아지실 거래요. 불편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으세요.”

하지만 아버지는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 이 사진 기억나세요. 작년에 아버지 생신 잔치 때 오신 분들과 찍은 사진이에요.”

2019년 10월에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열린 ‘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 생신 축하모임’. 여든 여섯 번째 생일을 맞은 아버지는 평소와 달리 기억이 또렷해져서 사람들도 알아보고, 반갑게 이야기도 나눴다. [사진 제공 – 안영민]

나는 조금이라도 아버지의 기분을 좋게 해드리려고 휴대전화에 저장된 사진을 보여드렸다. 8개월 전인 2019년 10월에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열린 아버지 생신 모임 때 찍은 사진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사람들도 잘 알아보았다. 모처럼 기분이 좋았다. 즐겁게 웃으며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이어 가는데, 아버지가 내 손을 확 밀쳐냈다. 그러고는 나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봤다. 아버지의 그런 눈빛은 처음 보았다. 눈빛에는 적개심이 서려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급히 휴대전화를 치웠다. 아버지는 고개를 돌린 채 나를 외면했다. 그 모습은 마치 수사관 앞에서 진술을 거부하고 묵비하는 모습 같았다. 아버지는 지금 상황을 수사기관에 강제로 잡혀 온 것이라 여기는 듯했다. 내가 사진을 보여주는 것도 누구누구를 아느냐며 취조받는 상황으로 느낀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복도로 나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서럽기도 했다. 아버지의 기억이 이대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도 됐다.

다시 병실로 조용히 들어왔다. 아버지는 주무시는 듯했다.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지난 세월 아버지와 함께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경북대에 수학과 교수로 재직 당시의 가족사진. 이때가 우리 가족이 가장 평화롭고 행복한 시절이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대를 이은 빨갱이 부자.’

1994년의 구국전위 사건 때 함께 구속된 아버지와 나를 언론에서는 이렇게 보도했다. 2011년에 <민족21> 사건으로 아버지와 내가 동시에 압수수색을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은 그렇게 우리 부자를 규정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복은 남다른 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아버지는 내게 푸르른 산맥 같은 존재였다. 언제나 변함없이 늘 그 자리에 당당히 서 있는……. 하지만 돌이켜보면 아버지와 내가 함께 산 날은 얼마 되지 않는다. 우리는 함께 지낸 시간보다 헤어진 시간이 훨씬 더 많았다. 만남보다는 헤어짐이 더 익숙했다. 부자간의 사랑은 늘 그리움으로만 남아 있었다.

남민전 사건으로 아버지가 구속됐을 때,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10년의 징역살이를 마치고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가족과 떨어져 혼자 대구로 내려가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그 뒤 경북대 총학생회장과 전대협 중앙위원으로 수배 생활을 3년간 했다. 그리고 구국전위 사건 때는 아버지와 함께 구속됐다. 아버지는 영등포교도소에, 나는 서울구치소에 갇혔다.

1996년에 출소한 나는 10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무기수로 감옥에 있었다. 우리가 다시 만난 것은 1999년 8월에 아버지가 가석방된 뒤였다. 나는 아버지가 감옥에 있을 때 결혼했고, 아버지가 석방됐을 때는 분가해 따로 살고 있었다. 그러니 아버지와 함께 산 것은 어린 시절의 어렴풋한 시간이 전부라 할 수 있다.

건강이 악화되기 직전인 2018년 무렵 아버지의 모습. 나는 2016년부터 아버지를 가까이서 모시면서 살아온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세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내가 아버지와 일상을 공유한 것은 2016년 무렵부터다. 조금씩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한 아버지를 우리 집 근처로 모시고 왔다. 아버지의 수발을 들면서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가 살아온 이야기를 세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사춘기 소년 시절에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푸른 수의를 입은 유리 벽 너머의 존재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게 너무 힘겨웠다. 아버지가 두 어깨에 짊어진 역사의 무게는 어린 내가 가늠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대학교수의 똘똘한 막내아들에서 간첩 자식이라 손가락질받는 처지도 내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웠다. 육성회비와 수업 준비물 걱정에 학교 가기가 싫었던 가난 역시 내 마음을 짓눌렀다.

아버지와 나의 관계가 단지 한 가정의 울타리 안에 갇힌 관계였다면, 아버지의 존재가 내게는 뛰어넘을 수 없는 벽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회한과 원망으로 평생 아버지를 대했을지도 모른다. 감당할 수 없는 현실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을 것이다.

그 벽을 부수고 내게 다가온 것은 아버지를 묶고 있는 역사였다. 1980년 5월의 광주가 그랬고, 1987년 6월의 거리가 그랬다. 나는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그 역사의 무게를 나도 함께 감당하겠다고 결심한 순간, 비로소 나는 아버지의 삶 속으로 한발 한발 다가설 수 있었다.

그런 아버지를 생각하면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세 가지가 있다.

1990년 4월이었다. 거리 시위에 나섰다가 붙잡힌 나는 구속돼 대구교도소에 갇혔다. 아버지가 출소하기 전 마지막으로 있었던 곳이 대구교도소였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아버지를 면회하느라 여러 차례 찾아왔던 그곳에 내가 수인이 되어 들어온 것이다. 아버지를 아는 교도관들도 나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구속되고 한 달쯤 지났을 때 아버지가 면회를 왔다. 어머니는 지긋지긋한 교도소 문턱은 다시 넘고 싶지 않다며 몸져누웠고, 아버지 혼자 걸음을 한 거다. 접견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버지를 보는데, 예전에 내가 아버지 면회를 왔을 때 푸른 옷을 입고 접견실로 들어서던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 나도 어색하고 아버지도 어색한 순간이었다. 그때 아버지가 맨 처음 꺼낸 말이 아직도 기억에 또렷하다.

“전에는 내가 그 안에 있고 네가 밖에서 면회하더니만, 오늘은 정반대가 되었구나.”

아버지의 그 한마디에 나는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가 갇혔던 바로 그곳에 똑같은 이유로 다시 아들이 갇혀야 하는 현실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본질이었다. 면회실의 아크릴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나의 위치가 바뀐 그 장면이 내게는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출소 후 내가 총학생회장에 출마하기로 결심한 것도, 그때의 기억이 내게 역사의 무게와 시대의 본질을 감당해야만 한다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기억은 1996년 10월이다. 1994년 6월에 아버지와 함께 구속된 뒤, 나는 2년 4개월의 징역살이를 마치고 순천교도소에서 석방됐다. 석방되자마자 대전교도소에 있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순천에서 대전으로 가는 내내 마음이 착잡했다. 젊은 내가 감옥에 있고, 늙은 아버지가 석방되는 게 도리였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1998년 10월에 열린 나의 결혼식 때 대구교도소에 있던 아버지는 외출을 허락받아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유리 벽을 사이에 두고 푸른 옷의 아버지를 만나자 북받치는 슬픔에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다시 또 아버지가 그 안에 있고 내가 밖에서 면회하게 된 것이다. 짧은 면회 시간이 침묵 속에 금방 지나갔다. 아버지는 내게 “엄마가 기다리니 어서 올라가 보라”라는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 아버지가 내게 하고 싶었던 말은 며칠 뒤 도착한 편지 속에 오롯이 담겨 있었다.

“사람은 모름지기 덕이 있어야 한다. 어떤 이론이나 주장보다도 더 호흡이 긴 것은 그 사람이 가진 성품이요, 덕망이다. 덕이 있을 때 사람들은 마음으로부터 그를 믿고 따른다. 이렇게 뭉쳐진 인간관계는 어느 것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큰 힘을 가진다. 나는 네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아버지의 당부를 마음속에 새겼다. 목청만 높이고 분주하게 뛰어다니기만 했던 20대를 지나 30대로 들어서는 당시의 우리 모두에게 하는 당부였을 것이다.

세 번째 기억은 2011년 7월이다. 나는 작은애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려고 아파트 복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7~8명의 남자가 다급하게 내렸다. ‘뭔 일이야’라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들은 내 앞에 섰다. 국정원 수사관들이었다. 그들은 내게 압수수색 영장을 내밀었다. 같은 시각 이웃 동에 있는 아버지 집에도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들이 압수수색 영장을 들고 들이닥쳤다.

나는 한나절 만에 압수수색이 끝났지만, 아버지는 밤을 꼬박 새우고 다음 날 저녁까지 압수수색을 받았다. 당시 공안기관은 “일본의 공작원을 통해 지령을 수수하고, 간첩 활동을 했다”라며 우리 부자에게 혐의를 덧씌웠다. 예전과 다른 게 있다면 바로 체포해 구속하는 게 아니고, 먼저 압수수색부터 하고 조사는 나중에 받는 것이다. 마구잡이로 불법 연행, 체포를 못 하게 됐으니 그만큼 사회가 좋아진 건가.

<민족21> 편집주간으로 현직 언론인이었던 나는 국정원에 출두해 조사받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거부했다. 그냥 구속하라고 했다. 경찰청 대공분실로 가던 날 아침, 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저놈들이 우리를 또다시 걸고넘어지는데, 이참에 내가 다시 감옥에 들어가야겠다. 그곳에서 내가 죽어야 저놈들이 쳐놓은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벗어나지 않겠나. 그게 내가 역사와 민족 앞에 떳떳한 일이다.”

아버지는 저들이 뭐라고 조작하더라도 예전처럼 부자를 모두 구속하지는 못할 테니, 당해야 한다면 차라리 당신이 끌려가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 전날 평소와 달리 소고기를 잔뜩 사 들고 우리 집에 와서 손자들에게 고기를 배불리 먹인 것도 그런 연유였다. 잡혀가기 전에 할아버지로서 마지막 도리를 하자고 생각한 것이다. 맛있게 먹는 어린 손자들을 보며 활짝 웃었지만, 아버지의 눈빛은 몹시 착잡해 보였다.

대공분실에서 줄곧 묵비하며 차라리 나를 구속하라며 ‘농성’하는 아버지를 변호사와 함께 모셔 나오는데, 눈물이 왈칵 나왔다. 참으로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1979년과 1994년에 이어 2011년까지, 32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변한 건 하나도 없었다. 우리 부자에게 세상은 왜 이리도 모질게 굴까.

사람들은 내게 묻곤 한다. 아버지가 걸어간 고난의 길을 어떻게 아들도 뒤따를 수 있었나. 어려서부터 아버지 때문에 겪어야 했던 고통이 작지 않았을 텐데도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가리라고 결심한 건 어떤 연유인가. 이제부터 그 물음에 답해보려고 한다. 대를 이어 역사의 길을 외면하지 않았던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부자 관계를 넘어 동지 관계로 승화된 우리 두 사람의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