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 신윤복의 계보와 연고지’에 관하여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90)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지난 11월 12일 오후 1시부터 오후 5시 30분이 넘도록 거의 다섯 시간 동안,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 있는 ‘이호철북콘서트홀’에서는 ‘은평역사한옥박물관’과 ‘고령신씨종중회’에서 공동주최하여 “혜원의 고향, 은평 - 은평의 화원, 신윤복”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필자는 1993년에 혜원 신윤복의 계보를 정리 발표하여 31년 후에 이루어진 이 행사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이번 제1회 학술대회에서 한국고문헌연구소의 서수용 소장은 제1주제 「혜원 신윤복의 가계와 은평구 구산동 고령신씨 세장지에 대한 고찰」을 발제하였고 필자가 제2주제의 발제자이면서도 제1주제의 토론자로 참여하였다. 당시의 세 주제 토론과 전체 종합 토론에서 있었던 내용을 종합하여 이번 학술대회의 중론(衆論)을 담아 나름대로 정리한다.
1. 왜 혜원 신윤복을 연구하게 되었는가?
학술대회의 끝 순서 종합토론 시에 한 청중이 필자에게 “왜 혜원 신윤복을 연구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첫 질문으로 하였다. 필자는 “회화사학계의 누구든 단원 김홍도를 연구하다 보면 혜원 신윤복을 알게 된다”라고 답변하였다.[주1]
이 질의에 앞서 필자는 「혜원 신윤복의 삶과 예술」을 발제하면서 “호암 문일평이나 근원 김용준도 단원 김홍도를 상세히 언급하는 가운데 단원과 대비하여 혜원 신윤복을 간략히 언급하였다”라고 설명한 바 있다.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는 서민들의 생활상을 배경이 없이 그렸는데 비하여,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는 서민들의 생활상을 그린 것도 있지만 주로 당시 사회의 양반층과 풍속 생활상을 그리면서 배경을 충실히 모사하고 있어, 연구자 대부분은 단원과 혜원의 풍속화는 대비하게 된다.” 필자 역시도 혜원을 주목하고 연구한 것은 바로 그러한 작품 대비에서 시작하였다.
2. 혜원 신윤복의 계대를 확정하기까지
학술대회에서 주요한 관건은 혜원 신윤복이 고령신씨(高靈申氏)인데, 조선시대 고령신씨 문중에서 만든 족보에서 혜원 신윤복 집안이 왜 소외되었는가 하는 것의 초점이었다. 필자가 1993년 9월경에 고령신씨 시조 신성용(申成用)으로부터 혜원 신윤복에 이르는 계보를 확정하여 월간 「미술세계」 11월호와 12월호에 「고령신씨보외 중인보」를 기고한 이래, 필자의 혜원에 관한 관점을 공식적으로 검토하는 학술대회였던 셈이다. 1993년 당시까지만 해도 혜원 신윤복이 고령신씨였다는 사실은 고령신씨대종회에서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당시만 해도 혜원 신윤복에 관하여 연구되거나 알려진 사실은 매우 빈약하여, 혜원에 관한 연구는 거의 맨땅에 헤딩하는 수준이었다. 다만 혜원 신윤복에 관하여 알려진 사실은 위창 오세창이 편찬한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주2]에 혜원 신윤복은 고령신씨이고, 첨사 한평의 아들이라고 기록된 것이 알려진 전부였다.
위창은 그 전거를 『화사보략(畵士譜畧)』으로 밝히고 있어, 필자는 우선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되어 있는 그의 위창문고를 뒤져 보았다. 위창문고에는 『화사보략』이 아닌 『화사양가보록(畵寫兩家譜錄)』(위창古4402-5)이 있었는데, 이 책은 1916년에 오세창이 정서(淨書)한 화가와 서가의 계보 기록(원고본)이다. 이 『화사양가보록』이 『화사보략』이다. 이 책에는 신윤복의 고조부까지 5세 4대의 계대가 나오는데, 바로 이 기록이 혜원 신윤복의 계보를 확정하는데 단초가 된다.
혜원에 관하여 연구하려면 우선 그의 가계(家系)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의 가계를 규명하면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리라 보았기 때문이다. 기존의 고령신씨세보 여러 종을 살펴보았으나, 『화사양가보록』에서 밝히고 있는 혜원가의 5세 4대의 기록과는 연결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나는 1991년에 『고령신씨족보』 초간보(1578년, 어성보, 목판본) 2책을 입수한다. 그 초간보에서 혜원의 계대를 확인하기가 불가능하였던 실마리가 찾아졌다. 임란전 족보는 대체로 적서의 구별이 있어도 모두 수록하였는데, 『고령신씨족보』 초간보는 적자만 기록하고 서자는 한 사람도 수록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에 관하여 이번 학술대회에서 한국고문헌연구소의 서수용 소장은 “1578년 고령신씨 초간보(어성보)의 간기를 보면, 편찬자 명단을 보면 초간보 판하서(板下書)를 신여도(申汝櫂)가 자신의 필체로 정서(淨書)하였음에도 서자이기 때문에 족보에 수록하지 않았다”라고 지적하였다.
이를 보면 고령신씨 문중은 다른 문중에 비하여 일찍부터 적서의 차별이 심하였고, 따라서 당시에는 18세기 후반에 활동하였던 혜원의 계대를 기존에 공개된 족보를 가지고서는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혜원이 서손(庶孫)이라면 그 주변에 잡과(雜科) 입격자(入格者)가 있을 것이라 여겨져 여러 종의 잡과 방목을 뒤지며 우선 고령신씨를 찾아 나갔다.
그렇게 하여 일차 완성한 계대를 월간 『미술세계』 1993년 11월호에 「혜원 신윤복을 찾아서 – 일재 신한평과 더불어」라는 제호의 원고에 포함하여 기고하였다. 그 계대가 「고령신씨보외 중인보(高靈申氏譜外中人譜)」이다.
3. 고령신씨 족보 발행과 그 변천에 관하여
제1주제 발제자 한국고문헌연구소의 서수용 소장에 의하면 고령신씨 문중에서는 1578년 초간보부터 1924년 병암보까지 모두 여섯 번의 족보 편차가 이루어졌다. 이에 필자와 발제자가 토론한 관점을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
- ①1578년, 초간보(어성보), 목판본, 3권 2책. 이 족보는 적서의 차별이 심하여, 임란 전에 출간한 초간보이면서도 이례적으로 서자는 전혀 수록하지 않았다. 따라서 혜원 직계 선조로는 적손(嫡孫)인 9대조 신공섭(안협공)까지만 수록하고 있으며, 간기를 보면 전 참봉 신여도(申汝櫂)가 초간 족보 편찬에 참여하였으나 서손이라는 이유로 수록에서 제외하고 있다.
- ②1753년, 진주보(晉州譜), 목판본, 6책. 진주보에도 서자는 수록하지 않았으므로, 역시 혜원 직계 선조로는 적손(嫡孫)인 9대조 신공섭(안협공)까지만 수록하고 있다.
- 가승①, 정조 말(1790년경), 필사본, 가승, 1책. 이 책은 공식적으로 출간한 족보는 아니다. 그러나 안협공 신공섭(申公涉)의 소실로 광주이씨 이효〇(李孝〇)의 딸이 기록되어 있다. 광주이씨 부인은 신수진(申守眞, 또는 申狩眞, 申滇)을 낳았고, 광주이씨 부인 묘소는 양주 연서 구산리에 소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혜원 직계로는 14세 신극해까지 수록하고 있다. 이러한 가승(家乘)이 고령신씨 가문의 서손들에게 비전(祕傳)하여 내려왔을 것이나, 현전하는 것이 매우 희소하다.
- ③1804년, 갑자 한성보, 목활자본, 9책. 비로소 서자들을 대거 수록하여 만든 족보이다. 신공섭의 소실 광주이씨에 관하여 기록하지 않았으며, 그의 소생 신진(申滇)[주3]을 신공섭의 적손처럼 기록하고 있다. 혜원의 부친 신한평까지 수록하고 있으나 혜원은 빠져 있다. 그러나 이 갑자보가 안협공 서손들이 나온 첫 족보로서 조선시대의 고령신씨 족보로는 이주 중요한 기록이다.
- ④1850년, 묵정보, 신윤모 편, 21책, 목활자본. 청주에서 만든 족보로서 적서 차별을 다시 크게 반영하고 있다. 묵정보를 편찬한 분들은 1804년 갑자 한성보에 서손들이 많이 들어있다는 이유로 훼철시키는 잘못을 저질렀는데, 이는 현대에서는 비판받을 만한 일이다.
- ⑤1898년, 유동보. 신헌구 편찬, 26책, 목활자본. 신한평의 대가 빠져 있고, 신공섭의 광주이씨 부인의 후손 일부를 적손의 후손으로 입보하고 있다. 이것은 1894년 갑오경장으로 신분제가 무너지자 서손들도 족보에 수록하게 되는데, 서손임을 감추기 위하여 적손으로 입보한 경우이다.
- ⑥1924년, 병암보. 신승구 편찬, 34책, 목활자본, 역시 신한평의 대가 빠져 있고, 신공섭의 광주이씨 부인의 후손 일부를 적손의 후손으로 입보하고 있다.
- 중인 종합보① 『성원록』, 이창현 편, 1890년경, 필사본, 19책. 고려대중앙도서관 소장. 고령신씨 항목에 신윤복까지 기록하고 있으며, 그 계대가 ‘고령신씨보외중인보’와 일치한다. 연향 이창현은 오세창의 고모부(오경석의 매제)로서 그가 집성한 중인들의 통보(統譜) 『성원록』은 1997년 필자가 혜원의 외가를 확인하고 팔고조도를 작성하는 데 활용한 고서이다.
발제자 서수용 소장은 이러한 고찰을 한 결과 1804년 고령신씨 한성보의 가치를 상당히 높이 평가하였다.
4. 혜원 신윤복 가문의 세장지와 세거지에 관하여
1804년, 한성보에 의하면 신공섭의 서자 신수진의 배위는 양주김씨이고, 묘소는 “양주 연서 구산리 자좌합영(楊州延曙龜山里子坐合塋)”으로 되어 있다. 지금의 은평구 구산동이다. 여기에는 신공섭의 후실(後室) 광주이씨(廣州李氏)의 묘소도 있었다.
1804년 한성보를 보면 신수진이 모친 광주이씨의 묘를 여기에 모신 이후 이곳은 안협공파 신수진과 그 후손들이 대대로 묘소를 쓴 세장지(世葬地)가 된다. 혜원의 할아버지 신덕광(申德洸, 1695~1751)의 묘소도 여기에 합장되어 있으니 광주이씨 부인으로부터 직계 7대 8세의 자손이 대대로 여기에 묻힌 것이다.
한성보를 만들던 1804년은 혜원의 부친 신한평(申漢枰, 1726년경~1809년경)은 생존해 있었다. 1804년이면 그가 78세쯤 되던 해인데, 당시 그는 생존하였으므로 그의 묘에 관한 기록이 없다.
자손들이 서손으로 차별받는 가운데 갑오경장으로 신분제도가 무너지고, 조선왕조는 기울어 갔다. 이러한 시기에 나온 1898년 유동보에 신수진의 후손들 상당수가 적손의 계대에 편입된다. 그런데, 1990년대 말~2000년대 초까지 서손임을 고집스럽게 지켜온 후손들도 일부 현존한 것으로 판단된다. 서손에서 적손으로 입적하여 계대가 변경된 그들은 적자 행세를 하게 되었으므로 구산리 일대에 있던 고령신씨의 세장지는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유동보를 편찬한 이후 1900~1910년 사이에 세장지는 분할되어 팔려 나가고, 1905년에는 일제의 조선통감부가 들어서고 조선총독부는 1910년부터 1918년까지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한다. 당시 구산리 소재의 부동산 일부는 동양척식[주4]에 넘어갔다. 현재 조선총독부가 1913~1917년에 시행한 구산리의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와 ‘임야조사부’가 남아있다.
조선시대에 적손의 선산에 서손이 들어가는 예는 없다. 즉 적서가 묘소를 서로 다른 산에 쓰는 것이다. 안협공 신공섭의 묘소는 “양주 장흥리 마장평”에 있다. 지금의 양주시 장흥면 삼상리이다. 여기서 구산동 거북골 근린공원까지 약 12km이니 걸어서 3시간 정도의 거리이다.
조선시대에 서손들의 시제사(時祭祀) 참석은 가능하였지만, 제관(祭官)이 되기는 거의 불가하였다. 그러나 은평구 구산동에서 양주 장흥의 안협공 묘소까지 가서 시제사에 참여하기는 가능한 가까운 거리이다. 구산동이 혜원 직계 선대의 세장지였던 것은 삼척동자가 보아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혜원이 태어나고 자란 세거지(世居地)는 어디일까? 보통 이렇게 대대로 세장지를 이룬 곳 주변에는 묘소를 지키기 위한 세거 마을이 있다. 고령신씨는 구산동 인근에 세거 마을이 있었을 것이다. 구산동 세거지로부터 멀어도 4km 이내이다.
중요한 사실은 여기 조선후기의 은평 지역에는 문화 환경(인프라)이 갖추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혜원과 같은 시기의 화가였던 송월헌 임득명(林得明, 1767~1822)도 여기 은평 지역의 회진임씨(會津林氏) 출신이다.
연서역(延曙驛)은 조선시대 한양에서 의주로 가는 서발(西撥)의 첫 번째 역사였다. 따라서 인근에는 역관들이 사는 집이 많았고, 청나라의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는 지역이었다. 연서역에서 모화관이 있던 독립문까지는 7km가 조금 넘는다. 말이나 나귀를 타고 간다면 10분 정도의 거리이다. 구산리에서 연서역까지는 1.5km 남짓하니 뛰어서 7~8분의 거리이다. 혜원 신윤복의 고향은 이러한 지리적 위치에 있었다.
제3주제 「조선후기 은평과 혜원 신윤복의 생애」에서 발제자 군산대학교의 김종수 명예교수는, “(중략) 은평 지역에는 인동장씨, 우봉김씨 등 역관 집안과 회진임씨 등의 아전 집안이 거주하고 있었다. 물론 다음에 살펴볼 바와 같이 혜원 신윤복의 고령신씨 집안도 거주하였다. 고령신씨 역시 인동장씨와 마찬가지로 역관과 화원을 배출한 중인 명가이다. 조선후기에 은평 지역은 도성과 가까울 뿐만 아니라 그림같이 아름다운 풍경이 있고, 또 서울 양반들의 허세와 거만, 부당한 횡포와 간섭 등을 피할 수 있어 중인 집안이 선호하는 지역이었다. 19세기 말경 조선에서 활동했던 한 외국인의 눈에 비친 은평 지역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을 연상할 만큼 아름답다. 그는 은평 지역에서 나무장수 소년들이 도성에서 땔감을 팔고 돌아오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서대문을 지나면 훌륭한 마찻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가면 서울의 배후라고 할 수 있는 산줄기의 궁벽한 돌출부에 설치된 2개의 관문(무악재와 녹번이고개)을 지나게 된다. 이 길을 따라 첫 관문을 지나면 나무가 울창한 산으로 둘러싸인 물 좋은 한 계곡이 나타나는데, 이곳을 나릿골이라고 한다. …(중략)… 모래벌판을 지나 북한산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면 매우 시원하게 우리를 맞아 주는 늙은 소나무 숲이 마치 아치처럼 길 위를 덮은 곳을 지나게 된다. 잘 다듬어진 무덤으로 뻗은 풀숲의 둔덕은 앉아서 쉬기에 매우 편안하며, 늙은 나무들이 그렇게 잘 가꾸어진 이유를 알 수 있다. 서쪽으로 향하면 높은 능선을 옆으로 낀 소나무와 참나무의 숲이 훤히 펼쳐지는데 저녁이 되어 서산에 떨어지는 해가 비추는 그 아름다운 모습은 어느 곳을 가보아도 그리 흔치 않다. 조선에서 가장 비천한 나무장수 소년들이 두세 마리의 나귀를 끌고 서울에서 땔감을 판 다음 돌아오는 길이면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경치인 줄 모른다고 할지라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노래를 흥얼거리게 된다. 초여름이 되면 여기저기의 산골짜기에서 뻐꾸기의 노랫소리가 울려온다. 그리고 종달새가 하늘 높이 치솟아 날개를 치면서 아름다운 노래를 토해낼 때면 그들의 가슴도 주위의 아름다움에 터질 것만 같은 모양이다. 나중에는 가마꾼조차도 말을 멈추고 그들의 노래를 듣는다. 큼직한 왜가리가 논에서 천천히 날아오른다. 흰 황새도 날개를 펄럭거리며 우아하게 비상하는데 언덕 위에 내릴 때는 마치 미끄러지는 듯하다. 까치도 많다. 그들은 사람들을 따르며 다정하게 우지진다.’ (H.N.알렌 지음/신복룡 역주, 『조선견문기』, 2019, 집문당, 37∼38쪽)
윗글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 은평 지역은 나무장수 소년들이 두세 마리의 나귀를 끌고 한양 도성으로 가서 땔감을 판 다음 석양을 감상하면서 돌아올 수 있는 거리였다. 따라서 은평 지역에 거주하던 역관, 화원, 아전 등 중인 관료들도 일이 있으면 하루 사이에 도성을 다녀올 수 있었다.
18세기 말 이가환(李家煥, 1742∼1801)은 “한양 주민들이 주거를 택하는 데 호오(好惡)가 매우 심해 동류(同流)가 아니면 섞여 살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역마다 사람들의 복식과 언어, 모습이 크게 달라 겉모습만 봐도 어디 사람인지 판별할 수 있을 정도이다.”(『玉溪淸遊卷』 序)라고 말하였다. 역관, 화원 등을 배출한 중인 명가(名家)들이 은평 지역에서 살았던 것에 비추어 볼 때, 그들과 동류(同流)인 혜원 신윤복 집안도 이곳에 살았을 것이다. (중략)”라고 하였다.
한편 제3주제의 토론자 고령신씨연구회의 신경식 회장은 이번 토론에서, “고령신가와 은평면 구산리는 인연이 참으로 오래되었다. 1536년 10월 혜원 신윤복공의 9대 종조고이신 신공제(申公濟)공께서 68세에 돌아가시자 은평면 구산리(龜山里)에 초분(草墳)으로 모셨다가 7개월 후인 1537년 4월에 양주(楊州) 홍복산(弘福山) 남록(南麓)《지금의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 산4-1번지 자좌(子坐)》에 장사하였으며, 9대 조모이신 광주이씨(廣州李氏)가 1554년 돌아가시자 은평면(恩平面) 구산리(龜山里)에 장사하였고, 8대 종조모이신 신굉(申汯)공의 초배(初配)이신 진주유씨(晉州柳氏)가 돌아가시자 역시 은평면(恩平面) 구산리(龜山里)에 장사하였고, 8대 조모이신 양주김씨(楊州金氏)가 1570년 돌아가시자 구산리(龜山里)에 장사하였다. 8대 조부이신 신진(申滇, 증가의대부 동지중추부사)공도 1594년 돌아가시자 구산리(龜山里)에 장사하였고, 7대조 신경뢰(申景㵢, 가의대부)공 → 6대조 신대원(申大源, 譯科, 사역원 첨정)공 → 5대조 신극해(申克海, 사역원 첨정, 가선대부)공 → 고조 신청(申淸, 첨지중추부사)공 → 증조 신세만(申世漫, 譯科)공 → 할아버지 신덕광(申德洸, 판관)공 내외분까지 묘소가 구산리(龜山里)에 있는 것을 1804년도에 발행된 한성보(漢城譜)에서 확인하였다. 신한평(申漢枰, 圖畫署畫員)공과 신윤복(申潤福, 圖畫署畫員)공은 1804년 한성보(漢城譜)를 제작할 때에는 생존해 있었으므로 한성보(漢城譜)에서는 구산리(龜山里)에 묘소가 없는 것이 맞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은평면 구산리(龜山里)에는 고령신씨(高靈申氏)의 묘소가 26기 54위가 있었음을 1790년경 간행된 고령신씨보첩(高靈申氏譜帖)과 1804년 간행된 고령신씨 한성보(漢城譜)에서 파악·확인하였다. 혜원공의 8대 조부이신 신진(申滇)공은 중종대왕(中宗大王)과 동서지간인 신공섭(申公涉)공의 서자(庶子)로 출생하여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산리(지금의 서울시 은평구 구산동)에서 살다가 돌아가시어 같은 마을에 장사한 것으로 판독된다”라고 논증하였다.
5. 맺음말 : 종합토론의 의견들
종합토론에서 은평향토사학회의 박상진 회장은, 자신도 “20년전부터 은평이 혜원의 고향”이라고 주장하며 “현지를 답사하였으나 찾지 못했다”라며, 이번 학술대회의 중요성을 피력하였다.
또한 아시아풍수지리연구소의 신상윤 소장은 “거북골근린공원이 풍수학적 관점에서 묘를 쓸 수 있는 자리인가를 탐사하여 보았는데, 공원의 동쪽 경사지가 초입부가 좋은 자리”라고 지목하였다.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고령신씨 신철구씨 소유의 옛 연서 구산리 산35(5,600평)는 지금의 구산중학교 자리이다. 거북골 근린공원 서쪽에 붙어 있다.
또한 현장에 참석한 경기대학교 이기범 교수는 “혜원의 서체와 한시에 관한 수준이 상당한 수준으로 연구하고 싶다”라는 의견이 나왔다. 옳은 지적이다. 혜원은 신한평이 원교 이광사의 초상화를 그리러 1774년 전남 완도군 신지도에 갔을 때 동행하였거나, 원교의 체본을 얻어 공부하였던 것 같다. 혜원은 원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다른 면이 있다면 혜원의 서체가 원교 서체보다는 유연(柔軟)하다.
제1주제부터 제3주제까지의 발제자와 토론자, 청중은 아무도 은평구 구산동이 혜원 신윤복의 고향이자 세장지라는 의견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아마도 이의를 달았다가는 치밀하게 준비한 발제자들의 논리에 여지없이 무너졌을 것이다.
사실 은평 지역의 향토사학계 일각에서는 학술대회 며칠 전에 “혜원 신윤복의 선산은 구산동이 아니라 갈현동”이라는 주장이 나왔고, 이를 전해 들은 필자는 1913~1917년경 연서 갈현리 토지 소유자들을 조사한 조선총독부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를 확보해 가지고 있었다. 연서 갈현리에는 신씨(申氏) 소유의 부동산이 전혀 없고 신씨(辛氏) 1인 소유의 부동산이 두 필지 있었다. 즉 갈현동은 애당초 고령신씨의 선산이 아니었다.
이외에도 혜원이 신공섭의 서손이면서도 다시 신한평의 서자인가에 관한 토론이 있었다. 필자의 생각은 1804년 한성보에 나온 신한평[주5]의 전주이씨 부인이 후실(後室)이고, 한성보 수단에 제외된 신윤복과 신윤수의 모친 홍천피씨(洪川皮氏) 부인이 전실(前室)이며 혜원 신윤복은 신한평의 다섯째 아들이 아니라 장남이라고 밝혔다. 한성보에 나온 신한평의 아들 넷은 1804년 한성보를 편찬할 당시 배우자가 기록되지 않았음을 볼 때 미성년자였기 때문이다.
1804년은 혜원이 도화서에서 구축(驅逐) 당한 이후이며, 이를 괘씸하게 생각한 일재 신한평은 홍천피씨 부인과 신윤복 삼 남매를 족보에 수단하지 않고, 후실과 그 자녀를 수단한 것이다. 요즘 말로 혜원이 미워 호적에서 파내 버린 셈이다.
주(註)
[주1] 나는 월간 『전통문화(傳統文化)』 1987년 1월호와 2월호에 단원 김홍도에 관한 글을 발표한 바 있고, 월간 『미술세계』 1993년 7월호에 「단원 김홍도 작 ‘서원아집도’의 탐색」을 기고하고, 9월에 탈고한 글 「단원 김홍도작 초상화를 찾아서」를 기고하였으나 편집부에서는 둘로 나누어 전반부를 10월호에 게재하였고, 후반부는 1994년 1월호에 게재하였다.
[주2]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 오세창 편찬, 1928년, 계명구락부 발행. “申潤福 / 字笠夫。號惠園。高靈人。僉使漢枰子。畫員。官僉使。善風俗畵。(畵士譜畧) /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은 1928년에 출판되었지만, 이 책은 그의 부친 역매 오경석이 편찬을 시작한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그만큼 오랜 세월 동안 모인 자료를 결집한 편찬이 『근역서화징』이다. 즉, 혜원을 처음으로 주목한 근대의 예술가는 서예가이자 미술비평가 오세창이고, 그 시기는 19세기 말~20세기 초이다.
[주3] 한성보에서의 신진(申滇)의 진은 ‘성할 전(滇)’자이다. 참진(眞)의 왼쪽에 삼수변(氵)을 붙였다. 그런데 그의 본명은 申守眞 또는 申狩眞이다. 후대에 이르러 신수진을 족보에 수록하기 위하여 적자의 항렬 삼수변(氵)에 맞추어 보명(譜名)을 짓다 보니, 眞의 왼쪽에 氵를 붙여 申滇라 하였는데, 이때는 신전이라 읽지 않고 신진이라 읽어야 한다.
[주4]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는 1905년 한국통감부가 설치된 지 3년 후인 1908년 일제가 조선의 경제권 이득 착취와 토지 및 자원 수탈 목적으로 세운 회사이다. 동척은 조선의 식산(殖産) 진흥을 담당하고 일본에서 근면(勤勉)하고 농업에 전문성을 가진 농민을 육성하여 진보된 농법 전수와 식산 사업에 이바지한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지만 실제로는 조선의 경제권 이득 착취와 조선의 농광산물 등의 풍부한 자원을 수탈하는 역할을 했다.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지속된 토지조사사업에서 토지를 직접 관리하거나 싼값에 지주들에게 팔기도 하였다. 1912년 이전에 연서 구산리의 많은 토지들이 동척으로 넘어갔고, 연고가 나타나지 않는 토지는 일제가 국유화하였다.
[주5] 1804년 한성보에는 신한평이 영묘(英廟, 英祖) 기사생(己巳生)으로 되어 있다. 1749년이다. 기존의 1726년과 차이가 크다. 한성보는 목활자본이다. 필자가 보기에 기사(己巳)는 을사(乙巳)의 오식(誤植)이다. 그렇다면 신한평은 1726년이 아니라 1725년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