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이재문과 여정남 ⑮ 남민전의 길이 현실이 되다

[연재] 안영민의 「아버지, 안재구」 (45)

2024-11-12     안영민

1981년 1월에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남민전 동지들은 전국의 교도소로 흩어졌다. 대부분 특별사동(특사)이 있는 교도소였다. 소위 ‘좌익사범’을 수용하는 특사는 대전, 전주, 광주, 대구, 이렇게 네 군데 교도소에 있었다. 모두 엄중한 시설로 재소자에 대한 비인간적 처우와 폭력이 일상이었다.

아버지는 전주교도소로 이감됐다. 전주교도소에 오자마자 직면한 것은 ‘전향공작’이었다. 박정희는 유신헌법이 통과된 직후부터 전국 교도소의 ‘좌익사범’들에게 대대적으로 전향공작을 벌였다. 체제 경쟁에서 북쪽보다 우위에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잔인하고 폭력적인 만행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많은 이들이 ‘강제로’ 전향을 당했다. 전향을 거부하다 교도소 측에서 고용한 깡패 재소자들과 교도관들에게 맞아 죽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도 적지 않았다. 끔찍한 정신적 육체적 폭력에도 끝까지 버틴 이들은 모두 특사에 수용됐다. 이곳에서 외부와 차단된 채 특별 감시를 받았다.

전향공작은 1980년대에도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기결수가 돼 교도소로 넘어온 양심수들에게는 ‘교회사’라는 직함을 가진 교무과 직원들이 달라붙어 전향서를 받아내려고 기를 썼다. 온갖 회유와 협박이 자행됐다.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징역살이에 큰 불이익을 주었다.

“전주교도소에는 남민전에서 청년조직을 책임진 최석진 동지가 함께 있었어. 그는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혹독하게 고문당하다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죽을 각오로 3층 수사실의 창문을 깨고 뛰어내렸어. 이때 골반이 부러지고 크게 다쳤지. 재판 때도 내내 들것에 실려 나와 심문을 받을 정도였어.”

20대의 나이에 무기수로 전주교도소에 온 최석진은 투신의 충격으로 다친 신장이 다시 탈이 났다. 급성신우염이 발병해 온몸이 퉁퉁 부었다. 피오줌을 쏟으며 고열에 시달렸다. 외부 병원의 치료가 시급했다. 하지만 교도소 측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을 놓고 전향해야 치료해 준다고 했다. 이에 분노한 아버지와 양심수들은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단식이 길어지자 당황한 교도소장은 요구사항을 모두 들어주겠다고 했다. 최석진의 외부 진료를 허용하고, 간병할 소지(교도관을 도와 잔일을 하는 재소자)를 배치하는 것도 수용했다. 운동시간 연장과 부식 개선도 약속했다. 하지만 속임수였다. 단식을 푼 지 1주일 뒤에 교도소 측은 아버지를 광주교도소로, 최석진을 대구교도소로 이감해 버렸다.

1985년 광주교도소에서 남민전 사건의 김남주 시인과 이수일 선생, 그리고 아버지와 정종희 선생이 함께 찍은 사진(뒤쪽에 양복 입은 이들은 교화위원). 남민전 사람들이 대거 감옥에 들어오면서부터 소내 처우 개선을 위한 치열한 투쟁이 전개됐고, 많은 부분에서 성과를 냈다. 독립운동에 전 재산을 바친 보성의 명문가 출신인 봉강 정해룡 선생의 나이 어린 삼촌이었던 정종희 선생은 6.25때 토벌군의 총탄에 맞아 실명한 채 사셨는데, 월북한 정해룡 선생의 동생이 고향을 다녀간 이유로 온 집안이 간첩단 사건으로 엮여 무기형을 받았다. 광주교도소에서 아버지는 정종희 선생과 한방에서 살며 두 눈이 되어 드렸던 인연이 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비인간적인 처우는 광주교도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부식이 엉망이었다. 채소는 오래돼 흐물거렸고, 생선에서는 구더기가 나왔다. 담배꽁초가 섞인 국과 썩어가는 김치가 사람이 먹는 음식으로 나왔다. 아버지와 양심수들은 단식투쟁으로 맞섰고, 교도소 측은 잔인한 폭력으로 탄압했다.

“수갑 채운 팔을 뒤로 젖히고, 두 팔과 목덜미 사이에 곤봉을 끼워 누르는 ‘비녀꽂이’가 저놈들의 전매특허였지. 이 때문에 많은 동지들이 다쳤고, 차갑고 습기 찬 징벌방에 갇혀야만 했어.”

교도소 측의 폭력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파렴치한 잡범들 방에 집어넣어 몰매를 맞게 하거나, 사형수 방에서 그들의 노리개가 되게 했다. 하지만 2~3일이 지나면 그들도 양심수들을 지지했다. 부식 개선과 운동, 세면, 세탁 시간 연장 등 싸움의 성과가 일반 재소자들에게도 큰 혜택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박관현 열사는 광주교도소에서 광주학살 책임자 처벌과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세 차례에 걸쳐 50일 동안 단식투쟁을 벌였다. 거듭된 단식으로 건강이 나빠진 박관현 열사는 결국 단식투쟁 도중에 가슴 통증을 호소하며 쓰러져 1982년 10월 12일에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사진은 1980년 5월 전남도청 앞 집회에서 연설하는 박관현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 [사진 제공 – 안영민]

광주교도소에서 잊을 수 없는 일은 1982년 10월에 일어난 박관현 열사의 죽음이었다. 1980년 5월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은 경찰에 쫓겨 다니다 1982년 4월에 체포됐다. 광주교도소에 수감된 박관현은 광주학살 책임자 처벌과 부당한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세 차례에 걸쳐 50일간 단식투쟁을 벌였다.

하지만 당시 소장인 최건식이란 자는 박관현을 밀폐된 징벌방에 가두며 탄압했다. 거듭된 단식으로 박관현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다. 박관현은 단식투쟁 도중에 가슴 통증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응급조치도 제대로 못 받고 전남대병원에 이송된 박관현은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박관현의 죽음은 교도소 측의 명백한 타살이었다. 소식을 들은 양심수들은 전원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다. 박관현을 탄압했던 최건식은 결국 다른 교도소로 쫓겨났다. 새로 온 소장은 양심수들의 요구를 상당 부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징역살이는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끊임없는 탄압과 회유, 폭력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몸은 갇혔어도 정신만큼은 네놈들에게 내주지 않겠다는 결기와 각오 없이는 한순간도 살아낼 수 없는 곳이 감옥이었다. 투쟁 없이는 결코 자유를 쟁취할 수 없는 그곳에서 아버지는 동지들과 함께 줄기차게 투쟁을 이어나갔다.

투쟁의 끝은 항상 이감이었다. 저들은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되면 양심수들을 뿔뿔이 흩어놓았다. 하지만 양심수들은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이감된 교도소에서도 부당한 처우에 맞서 투쟁을 이어나갔다.

교도소 내 처우 개선 투쟁에서 남민전 사람들의 역할은 컸다. 대개 같은 사건 관련자는 한 교도소에 두지 않았다. 분리 수감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남민전은 워낙 많은 사람이 구속되다 보니 한곳에 여러 명이 모일 수밖에 없었다. 어느 교도소든 투쟁의 중심에는 남민전이 있었다. 남민전의 조직적인 투쟁은 다른 양심수들도 결속시켰다. 교도소 측은 골머리를 싸맸지만, 투쟁은 큰 성과를 얻었다. 일반 재소자들까지 남민전 사람들이 들어오기 전과 후로 감옥살이가 달라졌다며 고마워할 정도였다.

1986년 5월 3일, 인천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로 시국은 급격히 얼어붙었다. 전두환 정권은 경찰의 폭력 진압에 맞선 시위대의 저항을 빌미로 민주화운동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감옥에도 칼바람이 불었다. 법무부는 각 교도소의 비전향장기수들을 대전교도소로 보내기 시작했다. 한곳에 모아 엄격하게 관리하겠다는 의도였다. 그해 9월에 저들은 아버지도 대전교도소로 보냈다.

동양 최대의 감옥이라는 대전교도소는 밀폐된 통로와 전자식 철문, 인터폰과 이중 아크릴로 폐쇄된 감방이었다. 관리자는 편했지만, 수감자는 관짝 같은 현대식 감방에서 철저히 격리됐다. 그중에서도 비전향장기수들만 따로 수용한 특사는 이중으로 외벽을 쌓아 외부와 철저히 차단됐다. 저들의 표현처럼 엄중 구금시설이었다.

이곳에서도 아버지는 비인간적인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투쟁은 특사 전체로 확산됐다. 골치 아파진 저들은 석 달 만에 아버지를 다시 대구교도소로 이감해 버렸다.

1986년 12월, 아버지는 대구를 떠난 지 10년 만에 수인이 되어 대구로 돌아왔다. 젊은 시절의 추억이 가득한 곳, 경북대 수학과 시절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한 대구는 고향과 진배없었다. 하지만 대구교도소는 고향처럼 푸근한 곳이 절대 아니었다. 소장을 비롯한 교도관 대부분은 독재정권의 하수인이었다. 그들은 양심수들을 가혹하게 대하고 괴롭혔다. 아버지는 부당한 처우 개선을 위해 감옥살이 중 가장 긴 11일간의 단식투쟁을 해야만 했다.

대구교도소는 1990년 4월에 내가 구속됐을 때도 양심수 탄압 1번지의 악명을 지키고 있었다. 당시 내가 있던 미결 사동에서 처우 개선을 내걸고 투쟁이 붙었다. 나를 비롯한 주동자들은 보안사로 끌려가 두들겨 맞고 꽁꽁 묶인 채 징벌방에 갇혔다. 밥도 개처럼 엎드려 입으로 먹어야만 했다. 우리는 즉각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며칠 뒤 나는 결심 공판에서 최후진술을 통해 대구교도소의 야만적인 처사를 폭로했다. 법정에 온 사람들은 대구교도소로 몰려와 항의했다. 결국 교도소 측은 우리를 징벌방에서 풀어주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를 면회 온 아버지는 “이놈들이 예나 지금이나 하는 짓이 바뀐 게 하나도 없다”라며 분노했다.

감옥에서 아버지는 참으로 소중한 분들을 만났다. ‘간첩 혐의’로 20~30년씩 징역을 살고 있던 특사의 무기수들이었다. ‘통일사업’을 위해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도 있었고,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조류에 밀려 북으로 넘어갔다 돌아온 뒤 간첩으로 체포된 ‘납북어부’들도 있었다. 조국으로 유학을 왔다가 간첩으로 몰린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 관련자들도 있었다. 심지어 6.25 때 붙잡혀 여태껏 갇혀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특사에서 외부와 차단된 채 끝도 모를 징역살이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들에 비하면 남민전은 나았다. 바깥에서는 가족들의 지원도 있었고, 함께 감옥살이하는 ‘공범’도 많았다. 널리 알려진 사건이라 기억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비전향장기수처럼 잊힌 존재는 아니었다. 남민전 사람들은 ‘간첩’이란 이름으로 감옥 안에서도 외면받아 온 그들과 연대했다. 비인간적인 대우를 뿌리뽑기 위해 함께 투쟁했다. 그 과정에서 비전향장기수의 존재도 점차 세상 밖으로 알려졌다.

“장기수 선생님들은 민족해방운동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어. 분단을 극복하고 자주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모든 걸 바친 선배 투사들이지. 우리한테 남민전 이야기를 듣고는 다들 깜짝 놀랐어. 자기들은 한두 사람씩 점으로 선을 겨우 이어왔는데, 남민전은 제대로 투쟁을 벌였다며 칭찬하셨지. 감옥 안에서 우리를 참 많이 아끼고 동지애로 대해주셨어.”

아버지도 똑같은 경험을 했다. 통혁당과 인혁당 사건 이후 남아 있던 핵심들과 새로운 청년들을 결집해 조직한 것이 남민전이었다. 남민전이 침탈당하면서 민족해방운동의 마지막 남은 구심이 허물어졌다고 여겼다. 하지만 기우였다. 남민전은 깨졌어도 새로운 핵심들이 다시 나와 뒤를 이은 것이다. 탄압이 있으면 저항이 있고, 모순이 있으면 투쟁이 있다는 건 사회과학의 진리다. 혁명은 대를 이어 나아가는 법이다. 앞선 자의 희생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전진하는 게 혁명의 본성이다.

남민전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바깥세상은 갈수록 달라지고 있었다. 전두환 독재의 폭압을 뚫고 학생들은 치열하게 투쟁했다. 감옥에는 끌려온 학생들로 넘쳐났다. 학생들은 감옥 안에서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남민전 사람들과도 어울렸다. 그 학생들이 출소하면서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남민전의 모습도 하나둘씩 세상에 드러날 수 있었다.

1987년 6월항쟁과 6.29선언, 그리고 그해 말의 대선까지 격동의 시간이 흘러갔다. 대선에서는 김영삼, 김대중의 분열로 노태우가 당선돼 군사독재를 이어갔지만, 민중들의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1988년 4월 총선에서 여소야대를 만들었고, 전두환·이순자 구속과 양심수 석방을 요구했다. 그 투쟁 덕분에 남민전도 자유의 몸이 됐다.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일이 10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1988년 전두환 이순자 구속과 양심수 석방을 외치는 민중들의 투쟁 덕분으로 남민전 사건 관련자까지 석방이 됐다. 1988년 12월 21일 오전 대구교도소 앞에서 모여든 환영 인파에 인사를 하고 있는 아버지. 머리띠를 맨 사람들이 이날 대구교도소에서 석방된 양심수들이다. 아버지 오른편으로 환영 나온 지금은 고인이 된 백기완 선생도 보인다. [사진 제공 – 안영민]

1988년 12월, 민주화 투쟁의 성과로 감옥에서 풀려난 아버지는 당시 재야와 민주단체, 청년학생운동 안에서 ‘민족해방’의 구호가 널리 퍼져 있는 것을 보고 감격했다.

“남민전은 민족해방의 과제를 비밀리에 토론하고, 투쟁도 은밀히 진행했지. 그런데 나와서 보니 다들 민족해방에 대해 공개적으로 토론하고, 미국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비판하는 거야. 깜짝 놀랐어.”

1982년의 부산 미문화원 방화와 1985년의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은 광주학살의 배후이자 군사독재를 지원해 온 미국의 민낯을 드러내는 투쟁이었다. 1987년 6월항쟁은 본격적인 대중운동의 신호탄이 됐다. 변혁운동도 더 이상 ‘지하’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다양한 민주단체들을 결성하면서 공개적인 활동에 나섰다. 국가보안법의 탄압은 여전했지만, 이를 뚫고 ‘민족해방운동’은 빠르게 성장해 나갔다.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1987년 8월 결성), 전청대협(전국청년단체대표자협의회, 1989년 1월 결성),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 1989년 5월 결성), 전노협(전국노동자협의회, 1990년 1월 결성), 전농(전국농민회총연맹, 1990년 4월 결성) 등 각계각층의 대중조직이 깃발을 올렸다. 남민전이 비밀리에 추진했던 통일전선 운동도 대중운동의 성장과 함께 공개적으로 펼쳐졌다.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1985년 3월 결성)을 거쳐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1989년 1월 결성), 전국연합(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1991년 12월 결성)으로 전선운동은 발전했다. 남민전 준비위원회가 지하조직으로 결성된 지 10여 년이 지난 때였다.

하지만 남민전은 여전히 금기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어마어마한 간첩단 사건으로 발표되면서 민주화운동 안에서도 남민전과는 거리를 두었다. 1988년 12월 양심수 석방 때도 마지막까지 석방 여부가 논란이 된 게 남민전이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1970~80년대 공안사건에 대한 재평가와 민주화운동 관련 심사에서도 남민전은 배제되었다. 2006년에는 남민전 사건의 29명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됐지만, 대부분 남민전의 외곽조직인 민투의 조직원들이었다.

유신독재에 맞서 가장 치열하게 투쟁했지만, 남민전은 조직 명칭이나 혜성대 활동, 북과의 연계 논란 등으로 외면받았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한국의 사회운동은 남민전이 목숨 걸고 개척한 길을 따라 걸었다. 남민전이 주장한 민족해방과 자주통일은 보편적인 시대 과제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남민전에 대해서도 역사적 의미와 역할을 정당하게 평가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1988년 12월 27일 연세대에서 열린 양심수 석방 환영대회에서 남민전을 대표해 인사하는 아버지. 맨 왼쪽부터 이수일 선생과 이제는 세상을 떠난 고 김병권 선생, 고 김남주 선생, 고 박석률 선생. [사진 제공 – 안영민]

경북대학교 사회대 앞 교정에는 ‘여정남공원’이 조성돼 있다. 2007년 1월 23일, 인혁당 8열사들이 32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은 뒤, 경북대 후배들은 힘을 모아 2010년에 여정남 열사를 기리는 조형물을 세웠다. 2022년에는 이재문 선생의 흉상도 이곳에 함께 세웠다.

매년 4월이면 여정남공원에서 여정남과 인혁당 열사들의 추모식이 열린다. 또 매년 10월이면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의 민족민주열사묘역에서 남민전 통일열사 합동추모식이 열린다. 아버지는 살아생전에 추모행사에 빠지지 않았다. 2020년 7월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로는 내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추모제에 참석하고 있다.

여정남, 이재문, 안재구……. 세 사람에 대한 기록은 여기까지다. 가장 먼저 반독재 민주의 제단에 목숨을 바친 여정남은 마지막 순간까지 안재구를 지켜냈다. 이재문은 죽음이 몰려오는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안재구를 믿으며 기꺼이 별이 됐다. 살아남은 안재구는 그들과의 약속을 평생 가슴에 새겼다. 안재구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남은 삶을 전부 민족해방의 길에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