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의 자리 짜기 -자기 자리는 자기가 짠다
[연재] 심규섭의 우리그림 이야기(4)
단원 김홍도의 [자리 짜기]라는 풍속화이다.
이 작품을 보기 전에 해결해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두 개로 보이는 남자의 눈썹과 아랫도리를 까고 공부하는 아이의 모습이다.
어떤 사람은 남자가 눈썹 화장을 했다고 전제한다. 이후 지우지 않아서 두 개로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 후기 일반 남자가 화장(化粧)한다는 기록은 본 적이 없다. 그리고 방안에서 일하는 남자가 굳이 화장할 일이 있을까?
의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보통 눈썹 화장은 눈썹을 진하게 칠하는데, 원래 눈썹을 지우고 그 위에 새로 그리는 눈썹 화장법은 일본 게이샤의 방식이다.
여자도 아니고, 기생도 아닌 남자가 이런 일본 화장법을 사용했을 까닭은 없다.
결론은 잘못 그린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집중하는 표정을 그리던 중, 눈썹과 눈이 너무 멀어지자 이를 보완하기 위해 선을 그은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는, 하의가 없이 글을 읽는 아이 모습이다.
팔에 칠한 것과 같은 피부색을 칠한 것으로 보아 바지를 입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머리카락을 묶지 못하며 바지를 입지 않아도 부끄러움이 없는 아이라고 가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작대기로 글을 짚어가면서 읽을 정도면 최소 7세는 넘어야 한다.
그냥 잘못 그린 것이다.
자녀가 바지 없이 엉덩이를 까고 있을 어떤 이유도 그림에는 없다.
김홍도의 풍속화에 큰 영향을 받은 김득신의 [자리 짜기] 그림에는 바지를 입은 모습으로 그렸다.
애초 바지를 입은 모습이었다. 다리가 접히는 모양이 그러하다.
천재 화가인 김홍도가 잘못 그린 것일까?
이 그림은 모작이다. (위작이 아니다. 모작은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창작 방법이다.)
두 개처럼 보이는 남자의 눈썹도, 벗은 모양처럼 보이는 아이의 하체도 원본 그림을 모사하는 과정에서 화공이 잘못 그린 것이다.
이런 오류는 김홍도 풍속화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모사한 그림을 여러 화공에 의해 몇 번을 걸쳐 모사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오류이다.
그림을 살펴보자.
배경은 방안이다.
방안이라고 설명하는 어떤 배경도 없지만 틀림없는 방안이다. 김홍도만의 탁월한 표현 방법이다.
시간은 오후일 것이다.
사방관(四方冠)을 쓴 남자가 짚으로 자리를 짜고 있다.
표정이 진지하고 손놀림이 익숙하다.
그 옆에는 아내가 물레를 돌려 실을 뽑고, 뒤에는 어린 아들이 공부하고 있다.
조선시대 평범한 일반 가정의 모습이다.
여자의 물레질, 남자의 자리나 가마니, 짚신 짜기는 일상이었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특이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남자가 쓴 사방관(四方冠)과 공부하는 아이이다.
풍속화는 백성의 삶을 그린다.
하지만 사방관은 선비나 양반의 실내용 모자이고, 아이는 서당이 아닌 집에서 공부하고 있다.
다시 말해, 농민이 아니라 선비의 삶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도 이 그림을 풍속화로 분류한 이유가 뭘까?
사방관을 쓰고 자리 짜기를 하는 남자는 유학을 공부하여 과거시험을 보고 관직에 나아가 정치를 하려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글공부 대신에 자리 짜기를 하고 있다.
이 때문에 몰락한 양반, 잔반, 별 볼 일 없는 시골 양반이라고 추정한다.
양반은 고려 시대부터 있었다.
문반, 무반을 합쳐 양반이라고 불렀다.
조선 초기에는 위로 3대가 과거시험에 합격해야 양반이라고 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양반 자격을 박탈했다. 이를 ‘4대 무현관’이라고 했다.
조선 중기 이후 조상 중에 벼슬을 지낸 관리가 있으면 양반이라 불렀다.
양반은 사회적 계층과 혈통적 신분이라는 두 가지 개념을 가지고 있다.
사회적 계층이란 양민이면 누구나 양반이 될 수 있고, 양반이었더라도 양민으로 떨어질 수 있는 유동성이 있다는 말이다.
혈통적 신분이란 조상 중에 양반이 있다면, 그 후손까지 양반을 자칭했지만 3대에 걸쳐 초시라도 한 번 합격해야 양반을 유지할 수 있었다.
양반은 소수의 계층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전체 가구 수에 2%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 후기가 되면 양반의 비율이 급격히 늘어난다.
조선은 작은 정부를 지향했다.
녹을 받는 관직은 2,000개 전후였다고 하고, 녹을 받지 못하는 명예 관직도 얻기 어려웠다.
혜원 신윤복의 관직은 종 3품 첨절제사이다. 족보에 있는 내용이다.
평생 그림만 그렸던 신윤복이 무과시험에 합격해 군인으로 복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윤복은 매관매직을 통해 양반이 된 것이다.
당시 명예 관직을 사고파는 고신첩, 공명첩은 국가가 주도했고 흔했다.
수만 명 이상의 중인이나 부자들이 양반이 되었다. 그 가족까지 합치면 수십만 명의 양반 가족이 만들어진 것이다.
과거시험이 남발되었다.
여기서 합격한 수천 명의 사람도 벼슬자리가 없어 무한정 대기했다. 이런 사람을 한량이라고 했다.
양반이라고 다 잘 사는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벼슬을 하지 못하거나 몰락한 양반, 벼슬에 뜻이 없는 시골 양반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다양한 일을 했다.
심지어 부자 천민에게 소작을 붙어먹는 경우도 흔했다.
이들이 생계를 위한 직업은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농사, 고기잡이, 상업, 교육, 의술, 집필과 출판, 세무, 회계뿐만 아니라 자리 짜기, 양봉, 장담그기, 닭 사육 따위의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선비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신념으로 삼는다.
선비는 계층이나 계급이 아니라 삶의 태도이다.
크고 작은 정치를 통해 백성을 평안하게 하고 세상을 옳게 바꾸자 하는 사람인 것이다.
일단 철학 공부와 수신(修身)을 해야 한다.
가치관, 신념은 사람의 성품과 인격을 만들기 때문이다.
다음은 제가(齊家)이다.
제가의 개념은 복잡하지만, 가정을 꾸리고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림 속의 선비는 수신과 제가를 실천하고 있다.
아내와 함께 생계를 위해 일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문장으로 이름이 났던 김낙행(1708~1766)은 자신의 문집인 『구사당집(九思堂集)』에 이렇게 썼다.
부인의 종용에 따라 자리 짜는 일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서툴렀지만, 마침내 자리 짜는 일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 일을 하다가 일생을 마치게 되더라도 분수에 맞는 일이니 괜찮겠다고 여겨 「직석설(織席設)」이란 글을 남겼다.
김낙행은 자리 짜기의 장점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 일을 하여 나에게 보탬이 되는 것은 다섯 가지이다.
일없이 밥만 축내지 않음이 첫 번째이다.
쓸데없는 출입을 줄임이 두 번째이다.
한더위에 무덥고 땀 흘리는 것을 잊고, 대낮에 곤히 잠자지 않음이 세 번째이다.
마음은 근심 걱정에 묻혀 있지 않고, 말은 지리하게 늘어놓을 겨를이 없음이 네 번째이다.
완성되면, 정밀하게 짠 것은 늙으신 어머니를 편안하게 해드리고 거칠게 짠 것은 내 몸과 처자식에게 깔아 주며, 어린 계집종들도 맨바닥에서 자는 것을 면하게 해 주고 남은 것은 나처럼 빈궁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음이 다섯 번째이다.’
[김낙행, 직석설, 구사당집 8권]
풍속화는 그야말로 일상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많은 선비나 양반은 백성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풍속화에 선비나 양반의 모습이 담긴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