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판화본 『태사묘제음복연제명록』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87)

2024-10-28     이양재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필자는 20대 초반부터 한국의 고 판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하여 29세 때이던 꼭 40년전, 월간 『종합 디자인』 1984년 5월호 p.97부터 p.101까지 「삽화로서의 옛 판화」를 기고하였고, 1992년 5월호 『가나아트』에는 「한국고판화의 재인식」을 기고하였다.

그리고 1992년 8월 12일부터 24일까지 한국애서가클럽이 ‘조선개국600년기념전’으로 ‘조선고판화전’을 경복궁 내 전통공예관을 빌려 주최하는데 깊이 관여하며, 당시 발행한 책 『조선의 고판화』 pp.44~78까지 「조선시대의 고판화」를 기고하였다. 당시 『조선의 고판화』는 직접 원고지에 쓴 것이었고, 교정을 직접 보지 않았더니 오식(誤植)이 아주 많다.

이후 필자는 1995년에 발행한 『민족 무예』 창간호에 “무예도보통지의 본질과 원화를 그린 화원에 대한 규명”을 기고하였고, 또한 계간 『민족 예술』 1995년 봄호(3월 발행)에 「단원 김홍도 화풍의 고판화(상)」을 기고한 바 있다. 이 글의 수정본과 (하)도 어느 잡지엔가 발표하였다. 이번 연재부터 간헐적으로 우리나라의 고판화를 1~2점씩 소개하고자 한다.

1. 『태사묘제음복연제명록(太師廟祭飮福宴題名錄)』의 입수

『태사묘제음복연제명록』 서문, 국박본. [사진 제공 – 이양재]
『태사묘제음복연제명록』 서문, 백민본. [사진 제공 – 이양재]

18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10여 년간 나는 고서 거간을 하던 남상기를 자주 만났다. 1988년 11월 어느날 그는 내게 다 떨어진 고서 한 책을 권한다. 목판본 『태사묘제음복연제명록(太師廟祭飮福宴題名錄)』 1책이다. 앞뒤 표지도 없고, 구한말의 문서로 임시 배접을 하여 볼품이 없었다.

그러나 앞의 서문 뒤에 세면에 거쳐 풍속화가 목판화로 들어 있었다. 모두 18장으로 그 서지 사항은 다음과 같다. 책 크기 ; 33.8×23.1cm., 반곽 ; 약 24.2×18.4cm. 판심 ; 上下內向黑魚尾, 題名錄序(서문에 만), 張次.

적 요

 

비고

1 앞뒤

太師廟祭飮福宴題名錄序

 

 

2

太師廟祭飮福宴題名錄序

萬曆癸丑十月 日蒼石李埈書予豐基之別館

 

2

(줄칸 공백)

 

 

3

(줄칸 공백)

 

 

3

(목판화) 1

 

 

4

(목판화) 2

 

 

4

(목판화) 3

 

 

정차 1~14

太師廟祭飮福宴題名錄

판심에 張次 표시

 

 


2. 『태사묘제음복연제명록』의 초판 발행 년대

『태사묘제음복연제명록』 서문, 국박본. [사진 제공 – 이양재]
『태사묘제음복연제명록』 서문, 백민본. [사진 제공 – 이양재]

 

『태사묘제음복연제명록』 서문, 국박본. [사진 제공 – 이양재]
『태사묘제음복연제명록』 서문, 백민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이 책은 동일본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이나 서울대학교 규장각에는 없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소장품 번호, 구5137)은 책 크기가 세로 33.4cm, 가로 22.0cm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도 배접되어 있고, 필자 소장본보다는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그러나 목니로 보아 필자 소장본보다는 후쇄본이다.

그런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은 『형제급난도』로 유명한 창석(蒼石) 이준(李埈, 1560~1635)의 서문이 필사되어 있다. 그러나 서체를 살펴본즉 창석 이준의 친필은 아니다. 국박본이 후쇄본인 것으로 보아 창석 이준의 서문이 떨어져 나간 이후에 찍은 판에다 창석의 서문을 베껴 넣은 책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초간본은 창석이 서문을 쓴 만력계축(萬曆癸丑, 1613년)에 발행한 책은 아니다. 원화가 그려지고, 창석 이준이 1613년 10월에 원래 화첩에 서문을 썼으며, 이 책은 그 이후에 발행한 책이다. 초간본의 정확한 판각 시기는 빠르면 1614년부터 1630년 사이로 추정된다.

3. 맺음말; 태사묘(太師廟)와 조상 제례에 관하여

태사묘는 경북 안동시 북문동에 있는, 고려의 개국공신인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정필(張貞弼) 등 세 분 태사(太師)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1540년(중종 35년) 안동부사 김광철(金光轍)이 현위치에 사묘를 건립하였다. 1556년 안동부사로 부임한 권소는 권씨 성을 가진 수석 호장(戶長)에게 관리를 맡겨 매년 제사를 받들게 하는 등 제도화에 힘썼다.

현재의 건물은 한국전쟁 때 불에 타 1960년대에 다시 세운 것이다. 묘우 안에 있는 보물각에는 붉은 잔, 비단, 관, 가죽신, 부채 등 보물 제451호로 지정된 삼태사의 유물 22점이 보존되어 있다. 매년 춘추 중월인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에 향사(享祀)를 모신다. 오늘날에는 제례(祭禮)가 위축되고 있다. 선조를 향한 시향(時享) 참여자는 해마다 줄어든다.

종묘 제례와 제례악은 2001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 되었다. 어찌 열왕(列王)에 관한 제례만이 중요하겠는가? 우리나라가 유교 국가가 아니더라도 국가의 미풍양속으로서의 제사 풍습을 살려야 할 것이다. 지방의 중요한 조상 제례를 국가나 지자체의 무형유산으로 지정하는 행정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