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의 절정

[연재] 심규섭의 우리 그림 이야기(2)

2024-10-18     심규섭
연못가의 여인/신윤복/비단에 채색/28.2×29.7cm/18세기/국립중앙박물관. [사진 제공 – 심규섭]

늦여름, 연꽃이 활짝 피었다.
밖은 무더웠지만 시원한 툇마루에 편안하게 앉았다.
땀을 식히고 새소리를 듣다가 곱게 싸놓은 생황을 가져왔다.
생황으로 좋아하는 노래를 연주하고 난 후 기분 좋게 담배를 피운다.
그렇게 정적이 흐르니 어디선가 바람이 불고 연잎이 날린다.

이 여인의 정체는 뭘까?

일단 자태를 보자.
장식이 있는 트레머리를 얻었다.
당시 유행하던 청색 치마에 소매가 좁은 저고리를 입었다. 가죽신을 신고 툇마루에 편안하게 앉았다.
오른손에는 생황을, 왼손에는 곰방대를 들고 있다.

입술 모양이 약간 이상하다.
생황을 불고 난 후가 아닐까 추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담배 연기를 뿜는 모습이다.
생황은 두 손으로 잡고 분다.
여인이 한 손으로 생황을 잡은 것은 담배를 피우기 위함이다.
곰방대를 깊게 빤 다음 고개를 돌려 ‘후~’하고 연기를 내뱉는 입술 모양인 것이다.

가체, 의복, 신발, 담배, 곰방대로는 여인의 정체를 알 수 없다.
이런 요소는 당시 조선 여인의 일반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여인의 정체를 알려주는 유일한 단서는 생황(笙篁)이다.
생황은 중국 악기에서 들여온 악기로 삼국시대부터 사용했다. 이 정도면 전통 악기로 불러도 된다.
생황은 만들기가 어렵고 연주법도 까다롭다. 당연히 가격도 비쌌다.
일반 백성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악기인 셈이다.

선비들은 생황을 연주하거나 듣는 것을 고급 풍류로 인식했다.
이런 생황을 연주할 수 있는 여성은 기생밖에는 없다.
이 여인이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혼자 생황을 연주한다는 것은,
생황이 개인 소유이며 능숙하게 연주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마당에 인공 연못을 만들었다.
반듯한 돌을 쌓은 흔적이 이를 증명한다.
뒷마당에 연못을 만들 수 있는 곳은 아주 부잣집이거나 기생집이다.
그렇다면 여인의 정체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기생집의 노련한 기생이거나 전직 기생 출신으로 부잣집 첩일 것이다.

뭐, 여인의 정체가 어떠하든 상관없다.
어떤 사람은 젊은 기생에게 밀려난 퇴기의 애환이 담겨있거나 자유롭지 못한 조선 여인의 한탄을 표현했다고 한다.
모두 색안경을 쓰고 해석하는 것이다.
오히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여성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산책하다가 생황 소리를 들었다.
소리를 따라가 보니 탐스러운 연꽃이 피어있는 작은 못이 나왔다.
연꽃인지 여인의 몸에서 나는 것인지 모를 진한 향기가 났다.
다리를 벌리고 편하게 앉은 여인이 생황을 불고 있었다.
잔잔한 음률에 젖은 몸은 평안하고 깊게 물고 내뿜는 연기에 시름이 흩어졌다.

신윤복은 종이를 내어 빠르게 사생했다.
연못에서의 풍류는 짧게 지나간다. 종일 생황을 분다면 고단한 노동이 될 뿐이고 쾌락도 반복되면 지루해진다.
그림은 시공간을 압축하여 영원성을 만든다.
여인의 행복은 고정되어 신화가 된다. 모두가 행복과 풍류의 최고지점을 알게 된 것이다.

신윤복은 여인의 풍류를 통해 자신을 이입시켰다.
여인 대신 남자를 넣어도 멀쩡한 그림이 된다.
사회적으로는 신윤복과 같은 신흥 중인이 추구하는 풍류인 것이다.

김홍도/월하취생도/23.2*27.8/종이에 수묵 담채/간송미술관 소장. [사진 제공 – 심규섭]

김홍도의 월하취생도(月下吹笙圖)가 있다.
자기의 모습을 이입한 것으로 추정하는 작품이다.
술동이와 파초, 종이와 붓이 있는 공간에서 생황을 불고 있다.
파초에 글을 썼다는 고사를 당시 정서로 그렸다.

김홍도의 풍류 공간은 실내이며 신윤복의 연못보다 좁다.
방구석과 연못을 갖춘 저택은 물질 풍요의 차이를 드러낸다.
파초는 절제의 뜻이지만, 연꽃은 출세의 상징이다.
김홍도는 절제와 내면을 바라보지만, 신윤복은 풍요와 외부에 의한 풍류이다.
그래서 신윤복의 풍류는 운치가 있고, 김홍도의 풍류는 야성적이고 전투적이다.

풍류와 행복은 전투적으로 찾아야 한다.
가끔은 연못가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 쉬어가는 것도 필요하다.(*)
 

심규섭(沈規燮)

경북 봉화에서 출생.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다녔음.
현재 작품 활동과 전시기획 및 대중미술교육활동을 병행하고 있음.

6회 개인전과 수 십 회의 단체전.

저서 : 아름다운 우리그림 [궁중회화], [민화]
           [연필 하나로 내 얼굴 그리기]
           [북한미술이야기]

연락처 smynan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