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유도원도」의 새로운 해석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85)

2024-10-14     이양재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지난 83회의 연재에 이어 「몽유도원도」의 새로운 해석을 논하고자 한다.)

6. 세종조 시서화(詩書畵)의 결집 『몽유도원도 권축』과 찬시를 쓴 인물들

현재의 『몽유도원도 권축(夢遊桃源圖 卷軸)』은 아래의 순서로 되어 있다.

①안평대군(安平大君, 30세)의 「몽유도원도」 제첨, ②안평대군의 시문, ③안견의 「몽유도원도」 그림, ④안평대군의 「몽유도원도」 기문, 이어서 ⑤신숙주(申叔舟, 31세)의 찬시(讚詩), ⑥이개(李塏, 31세), ⑦하연(河演, 72세), ⑧송처관(宋處寬, 38세), ⑨김담(金淡, 32세), ⑩고득종(高得宗, 60세), ⑪강석덕(姜碩德, 53세), ⑫정인지(鄭麟趾, 52세), ⑬박연(朴堧, 70세), ⑭김종서(金宗瑞, 65세), ⑮이적(李迹, 60대 후반), ⑯최항(崔恒, 39세), ⑰박팽년(朴彭年, 31세), ⑱윤자운(尹子雲, 32세), ⑲이예(李芮, 29세), ⑳이현로(李賢老, 30대 중반), ㉑서거정(徐居正, 28세), ㉒성삼문(成三問, 30세), ㉓김수온(金守溫, 38세), ㉔천봉 만우(千峯 卍雨, 90세), ㉕최수(崔脩, 70세)의 찬시가 들어가 있다.

성명

생졸년

나이

당시 관직 / 기타

1

李瑢

1418~1453

30

안평대군

2

安堅

1418경~1470경

30

화원, 어진화사

3

申叔舟

1417~1475

31

1447년 중시문과 급제,
집현전 응교

4

李塏

1417~1456

31

집현전 학사, 사육신

5

河演

1376~1453

72

우의정

6

宋處寬

1410~1477

36

승문원 교리

7

金淡

1416~1464

32

승문원 부교리, (집현전 박사 출신)

8

高得宗

1388~1452

60

한성부 판윤

9

姜碩德

1395~1459

53

형조 참판

10

鄭麟趾

1396~1478

52

예조 판서, (집현전 출신)

11

朴堧

1378~1458

70

인수부윤

12

金宗瑞

1382~1453

65

충청도 도순찰사

13

李迹

?~1401(문과)~?

60

(?)

14

崔恒

1409~1474

39

집현전 응교

15

朴彭年

1417~1456

31

집현전 교리, 사육신

16

尹子雲

1416~1478

32

집현전 부수찬

17

李芮

1419~1480

29

집현전 부수찬

18

李賢老

?~1438(문과)~1453

30

집현전 부교리

19

徐居正

1420~1488

28

집현전 박사

20

成三問

1418~1456

30

집현전 수찬, 사육신

21

金守溫

1410~1481

38

부사직(승문원?)

22

卍雨

1357~?

90

승려, 호 千峯

23

崔脩

1377~?

70

성균관 사예

이들 가운데 「몽유도원도」의 주인공 안평대군은 조선초기 서예의 대가(大家)이며, 그림을 그린 안견은 조선 초기 최고의 어진화사(御眞畵師)이자 산수화가이다. 그리고 신숙주를 비롯하여 21인은 당대의 명인이다.

특히 이들 가운데 신숙주와 정인지는 한글 창제에 공헌한 최고의 집현전 학사이고, 김담은 천문학자이며 박연은 음악이론가이다. 이개와 박팽년 성삼문은 후일 사육신에 포함되고, 김종서는 조선초기 최고의 무장이다. 그리고 서거정은 후일 『동문선』을 편찬한 당대의 문장이다. 23명의 인물 가운데 40대의 인물은 한 사람도 없다.

『몽유도원도 권축』에 안평대군과 21인이 지은 찬시와 자평(自評)의 서예 작품이 있고 여기에 안견의 그림이 들어 있다는 것은 당대의 시서화(詩書畵)가 모여 있다는 의미이니, 여기에 들어있는 23인의 작품 시서화(詩書畵) 모두가 하나같이 중요한 국가유산(문화재)이다.

『몽유도원도 권축』의 국가유산으로서의 의미는 조선 초기의 시서화가 집결(集結)되어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회화사학계에서는 이 『몽유도원도 권축』을 조선 초기 세종대의 문화 예술을 집대성한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한다. 만약 『몽유도원도 권축』에 이들 21인이 찬시가 없었다면, 「몽유도원도」의 가치 평가는 지금 보다도 상당히 약할 것이다.

그런데 위의 인물 23인 가운데 1453년 11월 수양대군의 계유정란(癸酉靖難)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자는 김종서와 이현로, 안평대군이고, 더 있다면 후일(1456년)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죽은 사육신 가운데 삼인(이개 박팽년 성삼문)이 있다.

즉, 위의 23인 가운데 수양대군 즉 세조에 관련하여 죽임을 당한 자는 두 차례에 걸쳐 모두 여섯 사람이니, 『몽유도원도 권축』이 수양대군의 살생부가 되었다는 것은 야사(野史)에도 등장하지 않는 잘못된 주장이다.

오히려 신숙주와 정인지를 위시한 『몽유도원도 권축』에 찬시를 쓴 대부분의 집현전 소속의 관리들은 세조(世祖, 재위 1455~1468)에 의하여 당당하게 중용된다. 어쩌면 수양대군은 계유정란을 일으켜 왕권을 찬탈하였지만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이 키워 놓은 집현전 학자들 모두를 아꼈던 것이 아닌지? 이개 박팽년 성삼문 등 3인도 세조가 등극한 이후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기 이전에는 세조에 의하여 중용된 인물이기에 그러한 관점을 형성할 수 있다.

신숙주와 정인지를 위시한 11인이나 되는 집현전 소속이거나 소속이었던 관리들이 「몽유도원도」에 찬시를 썼음에도 그들 모두는 계유정란에서 안전하였다. 이를 보면 그들은 안평대군과 가까웠음에도 당시의 정치적 시류에 따라 세조조에 헌신한 것이다. 당시 조선의 국민으로서는 그들을 비난할 수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세조는 수양대군 시절, 세종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신 왕자이기에 세종의 의중을 가장 잘 간파하여 세종조의 문화와 예술의 중흥을 세조의 치세(治世)에서 그대로 이어나간다.

그런데 현재의 『몽유도원도 권축』은 1949년에 재 표구한 것이다. 재 표구하기 이전에는 고득종의 찬시가 제일 앞에 배치되어 있었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몽유도원도 권축』은 1949년에 일본에서 용천당에서 재 표구되기 이전에는 완전한 표구 상태가 아니었다.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은 「몽유도원도」가 완성된 1447년 4월 23일로부터 6년 7개월 후가 되던 1453년 11월 27일 강화 교동도에서 사사(賜死)를 당하였고, 당시까지도 「몽유도원도」와 찬시는 임시로 만든 엉성한 권축 상태였는데, 이런 상태가 재 표구 이전까지 그대로 유전(遺傳)하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몽유도원도 권축』을 새롭게 해석하기 위해서, 「몽유도원도」를 새롭게 해석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이 작품이 일본 천리대학으로 들어가기 전에 재 표구 과정을 거치면서 수리되었다는 점을 인지하여야 한다. 그 수리 과정에서 극히 일부 떨어져 나간 부분들은 새로이 그려 넣어졌고, 약간의 보묵(補墨)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때를 빼는 과정(洗淨)에서 뜻하지 않게도 약간의 발묵(潑墨)이 제거[주1] 된 것 같다.

따라서 『몽유도원도 권축』의 연구는 『조선고적도보』 권14(1934년) 회화편에 수록된 수리되기 이전의 사진과 이 작품의 현 상태를 비교 연구하여야 한다. 물론 『조선고적도보』 권14 회화편에 수록된 사진도 이 작품의 1930년대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지 1930년대 이전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7. 「몽유도원도」의 특색에 관한 새로운 관점

안평대군의 「몽유도원도」 기문에서는, 안평대군이 꿈에서 무릉도원(武陵桃源)의 입구로부터 들어가 도원에 이른다. 그 과정을 그린 것이다. 그림의 크기는 세로 38.7㎝, 가로 106.5㎝이다. 조선시대 조선 비단의 한 필 길이는 1,635cm이고, 그 폭은 32.7cm인데, 「몽유도원도」는 세로가 38.7cm이니, 좀 폭이 넓은 비단을 사용하였다. 요즘 말로 파노라마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는 그림의 왼쪽 하단부로부터 오른쪽 상단부로 대각선을 따라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 그렸다. 왼쪽의 자연스러운 현실 세계와 중간부의 도원으로 이르는 길, 오른쪽에 배치된 환상적인 도원(桃園)의 길이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현실 세계는 부드러운 토산(土山)으로 이루어져 있고, 도원으로 이르는 길은 기이한 형태의 암산(巖山)으로 형성되어 있고, 도원은 다시 원만한 복숭아밭으로 그리고 있어 차이가 크다.

그림 전체는 3~4 부분으로 구분되면서도 하나의 통일된 전경(全景)을 이루고 있다. 삼원법(三遠法)에 따라 고원(高遠) 심원(深遠) 평원(平遠)을 끌어다 쓰며(援用), 그림을 다중화(多重化)한 시각으로 그리고 있다. 왼쪽의 현실 세계는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중간의 도원에 이르는 길은 고원법과 심원법을 쓰고 있으며, 도원 내부는 조감도(鳥瞰圖, 俯瞰法) 형식으로 평원법을 쓰고 있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넓은 도원을 표현한다.

「몽유도원도」 제첨과 시문, 안평대군 필. [사진 제공 – 이양재]

축본(軸本, 두루마리)으로 된 그림은, 펼치면서 안평대군의 제첨과 시문이 나오고, 이어 「몽유도원도」의 도원 부분을, 이어서 도원에 이르는 험한 길을 볼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현실 세계를 볼 수 있다. 즉 「몽유도원도」는 이 그림의 결론부인 도원을 먼저 보도록 그렸다.

대체로 중국이나 조선의 몇몇 그림을 보면 그림의 도입부가 오른쪽부터 시작한다. 송나라 시기의 「청명상하도」가 그렇고,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 중기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 축본과 이를 모사한 호생관 최북의 「봉래선경전도」 축본도 그렇다.

그런데 왜 「몽유도원도」는 결론부 도원이 축본을 펼치자마자 보이도록 앞에 그렸을까? 요즘의 미술관 전시와는 달리 개인적으로 축본 그림을 볼 때는 그림을 모두 펼친 후에 보기보다는, 대체로 그림을 펼쳐 가면서 본다.

「몽유도원도」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도원도 안에 그려진 도원은 궁궐을, 초옥(草屋)은 왕의 보좌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인간을 그려 넣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중국과는 달리 조선에서는 왕의 행렬을 그린 반차도(班次圖)에서도 왕은 그려 넣지 않았다. 「몽유도원도」에서 먼저 안평대군이 목표로 하는 왕권의 세계를 먼저 보여 주고 그에 이르는 길은 매우 험난하다는 것을 말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것은 그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주는 정치적 전언(傳言)이었던 셈이다.

「몽유도원도」를 조선시대의 풍수로 풀어 보면 매우 흥미롭다. 기문을 인지한 상태에서 그림을 상세히 관찰하고 분석하지 않으면 착시를 보게 된다. 우선 안평대군의 기문에 동굴에 관한 언급은 없는데도, 그림에 동굴이 그려져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착시에 의한 착오이다. 「몽유도원도」를 풍수적 관점에서 분석해 보거나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안평대군이 쓴 기문을 분석하면 그러한 착시를 극복할 수 있다.

(1) 「몽유도원도」의 풍수지리적 고찰

도원(桃源)을 풍수지리적 개념에서 검토하려면 우리는 이 작품에 그려진 양택(陽宅)으로 산수 간의 지리 여건을 검토하여야 한다.[주2] 우선 풍수(風水)라는 말을 검토하여 보면 이 말은 ‘바람을 가두고[주3] 물을 쉽게 얻는다’라는 장풍득수(藏風得水)에서 나온 말이다.

이 가운데 우선 장풍의 관점에서 「몽유도원도」와 안평대군의 기문에 나타난 지리적 여건을 검토하여 보면, 도원은 들고 나는 곳이 한 곳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지형은 항아리라든가 술병에 비유되기도 하며, 문학적으로는 방호(方壺)라든가 동중(洞中)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풍수지리에서는 이러한 장풍이 아주 잘 되는 곳을 가리켜 장풍국(藏風局)의 명당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장풍국의 명당에 해당하는 곳으로 널리 알려진 곳은 고려의 수도 개성[주4]과 해남의 대흥사(大興寺)가 있다.

많은 사람이 「몽유도원도」에서 묘사한 도원을 둘러싼 산을 보면 금강산(金剛山)을 연상하게 된다고 말한다. 더욱이 도원은 도가적(道家的) 의미에서 신선(神仙)의 마을로 이해됐으며, 금강산은 이른바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三神山)[주5] 가운데 하나인 봉래산(蓬萊山)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았을 때 「몽유도원도」에 나타난 가파른 산들은 금강산의 기암절벽과 연상시켜 생각해 보는 것은 당연하다.

「몽유도원도」에 대한 기존관점대로 도원의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을 뿐만 아니라 일부는 바위가 하늘을 덮은 모습”이라면 이는 양택으로서는 적합하지가 않다. 햇살이 적고 습하여 양지식물(陽地植物)이 제대로 자라거나 꽃 필 수가 없고, 도원의 가장 안쪽은 비교적 어둡고 습할 것이므로 집을 도원의 안쪽에 그려 넣을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명당은 양지가 바르고 가까이에서 물을 얻은 수가 있으며 공기가 잘 환기되는 그러한 장소이어야 한다.[주6]

도원의 일부가 동굴이라면 이는 길지(吉地)가 아니라 흉지(兇地)가 된다. 다만 안평대군이 기문에서 쓴 대로 “암벽에 기둥을 엮고 골짜기 뚫어 집 짓는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니겠는가?”라는 언급대로 집을 바위에 붙여 지었을 뿐이지, 앞에서 안평대군의 「몽유도원도 기문」을 살펴보면서도 언급하였듯이 도원의 일부가 동굴 안은 절대로 아니다. 물론 집을 바위에 붙여 지었다는 것은 풍수지리에서 썩 좋은 현상은 아니다.

그러나, 「몽유도원도」에 그려진 이 집을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초가집으로 볼 때 이는 남향집이다. 이를 미루어 보면 「몽유도원도」의 도원 부분은 남동 방향에서 조감도(鳥瞰圖) 형식을 빌려 본 모습을 정면으로 보이도록 그려진 것이 된다.

그런데 왜? 「몽유도원도」에 대한 기존관점은 도원의 “일부는 바위가 하늘을 덮은 모습”이라고 보았던 것일까? 그 이유는 도원 부분의 최상단부에 “바위들이 고드름처럼 매달려” 있는 것으로 그림을 판독하였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렇게 판독한 원인은 도원 부분의 상단부에 원경(遠景, 바위산)으로 그려진 산의 윤곽 가운데는 짙고 가는 먹선을 사용한 부분이 여러 곳 있어 부분적으로 착시현상(錯視現像)을 일으키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짙고 가는 먹선은 그림의 다른 여러 부분에서도 보이고 있는데, 그림의 다른 여러 부분에서는 그림의 최상단부가 아니므로 착시현상을 보여 주지 않고 있다.

「몽유도원도」 도원 부분의 상단부에 원경으로 그려진 이러한 짙고 가는 먹선을 배제하고 본다면 우리는 안평대군이 기문에서 이야기하는 기후조건, 즉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고 “붉은 놀이 떠 오르고”하는 모습을 더욱더 잘 연상할 수가 있다. 즉 도원 부분의 원경 바위산에서 짙고 가는 먹선의 사용은 「몽유도원도」에 있어서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 묘사를 방해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 여기에서 「몽유도원도」 도원 부분의 상단부(원경)에 보이는 짙고 가는 먹선은 후에 보묵(補墨)한 것이라는 가설이 제기된다. 이것은 안평대군의 기문에서 말하는“구름과 안개가 자욱”한 형상을 표현하는 데는 짙고 가는 먹선을 자주 사용할 필요가 없고, 「몽유도원도」란 환상적인(夢) 모습을 표현해야 한다는 관점을 근거로 하여 내려진 결론이다.[주1]

이러한 필자의 관점대로 一 도원 부분의 원경에 보이는 짙고 가는 먹선을 배제하고 一 「몽유도원도」를 살펴보면 기존의 관점인 “일부는 바위가 하늘을 덮은 모습”이라는 판단을 갖게 한 착시현상은 곧바로 사라진다. 아무리 꿈에 본 도원이라고 해도 도원이 양지바르고 물이 풍부하고 환기가 잘 되는 곳일 때라야 인간이 살 만한 최적의 자연환경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현실 세상 부분(왼쪽)과 「몽유도원도」의 도원 부분. [사진 제공 – 이양재]
도원에 이르는 길. [사진 제공 – 이양재]

한편, 이제 풍수지리 득수(得水)의 관점에서 「몽유도원도」와 안평대군의 기문을 검토하여 보자. 「몽유도원도」의 중앙 부분은 상당히 함축된 묘사를 보여 주고 있다. 안평대군의 기문에 의하면 이 부분에는 “백 굽이로 휘어져 사람을 홀리게 한 시냇물”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원 부분이 남동쪽에서 바라다본 조감도 형식의 모습을 정면에서 보이도록 그렸다면, 그림의 중앙 부분은 도원으로 이르는 길을 다중(多重) 시각에서 보고 함축하여 그린 그림이다.

이를 미루어 보건대 도원의 중앙 부분에 흐르는 시내의 상류(上流)는 도원의 중심부에 그려진 배가 물결을 따라 오락가락하는 시내로 이해될 수가 있고, 이 도원의 중심부에 그려진 시내의 원류는 그림의 오른쪽 끝부분에 그려진 바위산에 가려져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물이 풍부한 도원으로부터 거의 정남향으로 시내가 빠져나와[주7] 백 굽이의 계곡을 흐리며 인간 세상으로 이어지는 것이 된다.

즉. 이는 풍수지리에서 이야기하는 “명당의 위치는 주위에서 물이 흘러나와 흐르면서 그 물이 집터 주변을 감싸고 돌아 나갈 때 굽이를 이루어 외부의 큰물을 만날 때 역수(逆水)로 부딪쳐야 한다”[주8]라는 그것에 해당한다. 이를 보면 「몽유도원도」는 바로 이러한 득수의 이해가 어느 정도는 내포(內包)되어 있음을 잘 알수가 있다.

아울러 「몽유도원도」에서 보여지는 도원을 둘러싼 좌우의 험한 바위산들은 좌청룡우백호(左靑龍右白虎)가 되며, 후면의 산은 주산(主山)이 되고, 또한 도원에 이르는 백 굽잇길을 이루게 한 전면의 산들은 내안산(內案山)과 외안산(外案山)이 된다. 그리고 바위산들이 둘러싼 한복판에 도원이 이룩될 만한 2~3리 넓이의 땅이 있고, 물이 풍부하며, 멀리 하천이 그려진 것은 재미있게도 풍수지리에서의 명당 요건과 많은 부분에서 일치한다. 우리는 실제로 기암절벽의 금강산에 양택으로서의 명당 자리에는 사찰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고 있다.

어쨌든 이상에서와 같이 이러한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분석하여 보았을 때도 안평대군이 꿈에 본 도원을 동굴과 연관시켜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도원의 일부가 동굴이라는 착시현상을 갖게 한 짙고 가는 먹선은……, 최소한 도원 부분의 상단부에 그려진 짙고 가는 먹선의 일부는 훨씬 후대에 와서 보묵한 선으로 보아야 할지 의문이 간다. 짙고 가는 먹선이 도원을 동굴로 보도록 착시를 이르키기 때문이다.

「몽유도원도」를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검토하여 보면 의외로 이 작품에는 부분적으로나마 풍수지리의 기본적 관점이 그대로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알 수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도참적(圖讖的)이며 풍수적인 관점이 보편적으로 널리 유포되어 있었는데. 안평대군의 꿈에 마저 그러한 그 시대의 풍수지리에 대한 도가적 관점이 잠재되어 나타난 것이다.

(2) 안평대군의 「몽유도원도 기문」에 나타난 꿈의 분석

「몽유도원도」는 꿈을 그린 그림이다. 물론 그림을 그린 안견이라든가, 꿈에 동행한 신숙주 등은 그러한 꿈을 꾸지는 않았다. 그런데 안견은 서화에 능한 안평대군의 주문을 받아 「몽유도원도」를 그렸다. 이는 안평대군 자신이 꿈에 노닌 도원의 모습을 안견에게 말하며 대강 스케치하여 주지 않고서는 안평대군이 크게 만족할 만한 「몽유도원도」를 안견은 절대로 그릴 수 없었다는 관점을 갖게 한다.

실제로 「몽유도원도」의 여러 찬시에서는 안평대군이 안견에게 꿈에 노닌 도원의 모습을 일일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듯 알려 주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안견의 「몽유도원도」 그림은 주문자 안평대군의 구상과 의도에 따라 안견이 그린 것이므로 두 사람의 합작품적인 성격이 짙다.

어쨌든 안평대군이 도원의 꿈을 꾸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꾼 꿈에 미련을 두고 이를 당시 문사(文士)들에게 널리 이야기하였고, 그림으로까지 그리게 하였다. 이러한 안평대군의 꿈에 대한 집착은 도원(桃源)[주9]을 찾는 몽상가적인 그의 기질과 피동적인 그의 정신 구조를 보여 준다.

반면에 조선중기의 허균은 『홍길동전』이라는 소설에서 소외된 자들을 위한 이상향을 개척하러 떠나는 현실 투쟁적이고 능동적인 자신의 정신 구조를 홍길동이라는 인물을 통하여 반영하고 있다. 즉 안평대군과 허균은 상반된 기질을 가진 인물임을 우리는 여기에서 잘 알 수가 있다.

안평대군 스스로가 쓴 「몽유도원도 기문」을 분석하면, 그 시대에 있어서 안평대군의 정신적 갈등과 이 작품이 그려진 의미를 새롭게 발견할 수가 있다. 그런데 안평대군의 꿈을 분석할 때, 지크문트 프로이트(Freud, Sigmund., 1856~1939년)의 정신분석학적 시각에서만 분석해서는 안 된다.

우선 우리는 안평대군이 도원을 노니는 꿈을 꾼 당시(1447년)는 조선시대 초기였고, 당시의 사람들은 그 시대의 봉건적인 사고와 지식과 경험, 그리고 욕구를 바탕으로 하여 꿈의 현상을 이루어내 왔다는 점을 크게 참고하여야 한다. 즉, 안평대군이 도원을 노닌 꿈은 안평대군과 그의 시대를 이해하는 가운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와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해몽법에 근거하여 분석하여야 한다.

보편적으로 볼 때 우리 민족은 전래 관습상 꿈을 세 종류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 왔다. 첫째, 미래를 예시하는 현몽(現夢)의 의미이다. 이는 김유신의 누이인 보희와 문희가 꿈을 사고 팔았다는 일화라든가, 꿈을 꿀 때마다(3번) 아들의 이름을 갈았다는 정몽주(鄭夢周) 부친 정운관(鄭云瓘)의 일화, 그리고 꿈에 백두용이 나타나 왜적의 기습을 알려 주어 나가 싸웠다는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난중일기(亂中日記)』에 나와 있는 일화에서 잘 나타나 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민족은 태몽이라든가 현몽을 매우 중요시 하는 독특한 심리적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계시적 현몽으로서의 관점을 프로이트는 “꿈의 원시적인 해석”으로 보았다.

둘째, 현실에서의 불만을 극복하려는 의지 싸움이나 도피 심리를 대리 충족시켜 주는 의미이다. 적극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은 꿈에서 마저 끊임없는 투쟁을 보여 주나, 반면에 소극적이며 몽상적인 사람은 꿈에서 마저 쉽게 도피하고 안주해 버린다. 실제로 안평대군은 자신이 쓴 기문에서 “옛사람의 말에 ‘낮에 한 일이 밤에 꿈이 된다’라고 하였으니, 나는 대궐 안에 몸을 의탁하여 밤낮으로 왕사에 종사하고 있는데. 어찌 꿈이 산림에 이르렀으며……"라고 한바 있는데, 이를 보면 당대의 사람들은 꿈을 현실의 연결선 상에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은 프로이트의 꿈에 대한 기본적 관점과 상통(相通)한다. 특히 프로이트는 “꿈은 하나의 소망 충족이며 모든 꿈의 원천은 현실이나 무의식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셋째, 이른바 아무 의미가 없는, 또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은 꿈이다. 이러한 꿈을 흔히 ‘개꿈’으로 표현하는데, 이러한 꿈은 쉽게 잊어버린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보면 “원인이 없는 꿈은 없으므로 이는 꿈의 왜곡에 해당”할 수도 있다. 즉, 개꿈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안평대군은 도원을 노니는 자신의 꿈을 현몽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이를 안견이 그리게 하였고, 손수 기문을 지었으며, 또한 21인에게서 찬시를 받았다. 이러한 21인의 찬시 가운데는 안평대군과 그 주변의 인물들이 안평대군의 도원을 노니는 꿈을 어떠한 의미로 받아들였는지를 잘 알게 하여 주는 부분이 있다.

따라서 이를 간략히 살펴보면, 신숙주는 안평대군의 도원을 노니는 꿈을 빗대어 안평대군의 갈 길이 하늘의 뜻임을 암시[주10]하고 있으며, 하연은 안평대군의 야심이 이루어 올 미래를 축원하고 있고,[주11] 고득종[주12]과 김종서[주13]는 안평대군의 야심을 경계하고 있으며, 반면에 안평대군의 심복인 이현로는 안평대군의 야심이 빨리 이루어지길 기대[주14]하고 있다. 즉, 안평대군은 도원을 노닌 꿈을 자신의 야망이 이루어지는 현몽으로 받아 들었고. 이를 이루려 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한 의도가 「몽유도원도」와 21인의 시문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안평대군의 야심은 후일 세조가 된 수양대군과의 권력투쟁에 밀려 허망한 꿈으로 끝난다. 이제 필자는 안평대군이 도원을 노닌 꿈을 위에서 언급한 꿈의 둘째 의미의 관점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그런데 프로이트라면 안평대군의 도원을 노닌 꿈을 어떻게 분석하였을까? 프로이트의 저서 『꿈의 해석』에 대한 요점은 “꿈의 잠재 내용은 욕망이고, 꿈은 이 욕구를 수행하는 작용이다. 그러므로 잠재몽(潛在夢)의 세계는 무의식의 세계이고, 쾌감 원칙이 지배하는 일차적 욕구 과정이다. 그러나 잠 속에서도 욕구를 가로막는 심리 작용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여기에서 비롯된 불안을 없애기 위해서 욕망이 위장되어 현재몽(顯在夢)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꿈은 잠을 보호하기 위해 상징적이고 위장된 내용으로 나타나는 욕구 충족이라 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꿈의 해몽법은 꿈은 현실과 연결되어 있으나 미래를 예지(豫知)해 준다는데 기본 바탕을 두고 있다. 즉. 프로이트의 꿈의 분석과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꿈의 해몽법은 꿈을 보는 관점의 원칙상 일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관점이든 우리 민족의 고유한 꿈에 대한 관점이든 안평대군의 꿈은 그의 정신세계를 보여 준다.

「몽유도원도 기문」에 나타난 안평대군의 꿈에서 우선 지적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안평대군은 말을 타고 편안하게 도원에 갔으며, 산관야복을 입은 자가 길 마저 알려 주었다는 사실이다. 즉, 도연명의 「도화원기」에서의 어부는 노를 저어 자신의 힘으로 도원에 이르렀으나, 안평대군은 의타적으로 말을 타고 편안하게 도원을 다녀왔다는 점이다. 이는 안평대군의 안일한 정신적 자세를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주15]

이러한 예는 또한. 안평대군이 꿈에서 동굴을 거치지 않고 골짜기를 거쳐 들어갔다는 데서도 나타난다. 즉, 단군신화(檀君神話)에 등장하는 인간이 되길 원하는 범과 곰의 예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동굴로 들어 가는 것은 새로운 한 탄생의 준비를 의미한다. 안평대군의 꿈에 동굴의 존재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어둡고 험한 과정을 회피하는 안평대군의 안전과 평안을 추구하는 평소의 자세를 보여 준다고 하겠다.

프로이트는 “꿈이 낮 생활에서 유래하고, 완전히 논리적으로 덧붙여진 다수의 사상을 대리하는 것”이라 하였다.[주16] 따라서 안평대군이 꿈에 본 도원이란 그가 현실에서 평안하게 안주할 수가 있는 그 만의 정신공간을 의미한다. 그 크기란 2~3리 정도의 넓이에 사방이 바람벽처럼 바위산으로 둘러싸인, 그리고 가축이라든가 논밭이 없으면서도, 즉 노동 없이 생활이 해결될 수가 있는, 조용하며 문사들이 함께한, 그러한 자기만의 공간을 그는 원하고 있었다는 잠재의식이 꿈에 도원을 노니는 것으로 표출한 것이다.

즉, 이는 프로이트가 언급한 ‘소망의 충족’으로서의 꿈이거나. 또는 안평대군 자신의 一조선 왕조의 왕자로서 원하는一 욕구에 내재한 반작용이 표출된 ‘꿈의 왜곡’일 수도 있다. 그런데, 안평대군의 도원을 노닌 꿈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해몽법[주17]을 참고하여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대한 공식에 따라 분석하여 보면, 아래의 두 해석이 나타난다.

첫째는, 안평대군에게 내재한 강한 성적 욕구가 꿈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복숭아꽃이 만발한 도원 입구를 거쳐 도원에 이른다는 것은 여성을 찾으러 간다는 것으로, 도원을 둘러싼 바위산 등은 은밀한 외진 곳으로의 접근을, 말을 타고 간다는 것이라든가 안개가 끼어 있다는 것은 행위를, 시내에 물결 따라 오락가락하는 빈 배가 있다는 것은 행위의 끝남을 암시하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이야기하는 “리비도(Libido)에 해당한다. 리비도란 “모든 행위의 숨은 동기를 이루는 근원적인 잠재의식하에서의 욕망을 말하는데, 곧 이는 성욕과 경쟁 에너지의 원천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보면 안평대군의 성욕과 경쟁의식의 본체가 도원을 노닌 꿈으로 표출된 것으로 판단되기도 한다.

둘째는. 우리 민족의 해몽법에 따르면, “산은 국가나 사회 계급을 상징하므로” “산정을 향하여 오르는 꿈은 대체로 자기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노력의 경향을 암시”하며, 말을 타고 “산 정상에 오르고 사방을 굽어볼 수 있으면” 그리고 “높은 산 일대에 꽃이 만발한 것을 보면" “현실에서 그의 정치적 권세는 크게 떨칠 것”으로 본다. 또한 “복숭아는 애정의 상징”으로서 “우리는 복숭아 모양의 그림을 사랑의 상징으로 사용한다. 복숭아는 그 꽃부터 연분홍 또는 담홍색으로 정감을 환기시킨다. 복숭아의 황금색과 홍색이 가미된 타원형 끝은 여성의 가슴 윤곽과 흡사하며, 복숭아 맛은 달고도 시며 과즙이 많다.” 따라서 “복숭아꽃이나 살구꽃이 만발한 곳을 거닐면 자기 신분이 영예로워지거나 정사(情事)를 갖게 된다.”[주18] 즉, 이 해석에 따르면 안평대군의 권력과 애정을 모두 차지하고자 하는 욕구가 도원을 노닌 꿈으로 표출된 것이다.

그런데 안평대군에 대하여 우리는 흥미로운 자료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안평대군과 그의 사궁(私宮, 壽聖宮)의 궁녀, 그리고 궁녀의 애인 김진사를 주제로 하여 쓰인 비극적인 한문 소설 『운영전(雲英傳)』이다. 이 『운영전』이란 소설에서 안평대군은 사궁(私宮)에 많은 궁녀를 두고 있었고, 성품이 난폭하고 질투가 많은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러한 안평대군의 묘사는 당시까지 구전되던 그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구전적인 사항은 사실일 수도 있고, 안평대군을 몰아낸 측에서 만들어 낸 중상모략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안평대군의 도원을 노닌 꿈을 분석하여 보면 그의 수성궁에는 많은 궁녀가 있었을 가능성은 크다.

또한 안평대군의 심복 이현로(李賢老)가 그에게 아첨하며 그의 세력을 믿고 권세를 부린 사실을 보면 안평대군의 성품의 일면을 가늠해 볼 수도 있다. 물론, 필자는 현실에서의 안평대군은 상당히 긍정적인 인물이었다고 보며, 또한 예술가로서의 그의 인품을 믿는다. 이는 안평대군에 대해 역사에 투영된 것은 그의 실체와는 정반대가 되는 것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해몽법이 어떠한 결과가 나오든 안평대군의 삶과 환경에 비추어 볼 때 그가 꾼 도원을 노닌 꿈은 문사(文士)이자 왕자로서의 소망을 대리 충족시킨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안평대군은 수양대군과의 경쟁의식에 의하여 자신의 도원을 노닌 꿈을 안견이 그림을 그리게 하고 21인의 찬시를 받은 바 있는데. 이것은 자신의 현실에서의 욕구를 이루려는 목적에서 꿈을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6년 후(1453년)에 일어나는 안평대군과 수양대군의 충돌(계유정란)로 그가 꿈꾸었던 영화(榮華)는 좌절된다. 이 충돌은 문사와 일부 원로무인(元老武人)을 주축으로 한 안평대군의 세력과 신무인(新武人)을 주축으로 한 수양대군 세력의 유혈 충돌을 의미한다.

이러한 유혈 충돌에서는 항시 무자비한 무력으로 선수를 치는 세력이 이긴다. 안평대군의 꿈에는 이상향을 그리워하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문약(文弱)한 그의 성품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성품으로 해서 결국 그는 시기를 놓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수양대군의 세력에게 진다. 즉, 우리는 안평대군이 수양대군에게 밀린 원인을 「몽유도원도 기문」에 나타난 안평대군의 심리상태에서 찾을 수가 있다.

8. 맺음말

이제까지 「몽유도원도」에 대한 기존의 관점과 전혀 다른 필자의 새로운 관점을 몇 가지 제시하였다. 즉, 「몽유도원도」와 도연명의 「도화원기」는 연관이 거의 없음을 입증하였고, 「몽유도원도」를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새로이 고찰하였으며, 또한 「몽유도원도 기문」에 나타난 안평대군의 꿈을 분석하여 보았다.

그 결과 「몽유도원도」의 본질이란 안평대군의 꿈을 그린 이상의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만약 꿈의 이상향이 아닌 허균의 『홍길동전』[주19]의 결론부로 언급한 현실에서 추구하였던 이상향으로서의 ‘율도국’과 같은 의미의 장소를 그렸다면, 이는 민중의지(民衆意志)의 발로일 수가 있다.

그러나 안평대군의 꿈이란 그 개인의 귀족적인 욕구가 도출된 것이므로 이러한 그림에는 민족정신에 따른 민중적이며 이념적인 평가를 부여할 수가 없다. 다만 우리는 이 작품 「몽유도원도」가 조선초기 회화라는데 만족해야 할 뿐이다.

어쨌든, 「몽유도원도」는 삼척동자가 보아도 논란의 여지가 없는 안견의 진작(眞作)이다. 그러나 이를 안견의 기준 작품으로 오판하였을 때, 안견의 관지(款識)가 있는 『설천도(雪天圖)』나 안견의 전칭 작품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적벽도(赤壁圖)』 등은 안견의 진작이 아닌 것으로 부정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고유섭(高裕燮) 최순우(崔淳雨) 이동주(李東洲) 등 선배 미술사가(美術史家)들은 아무도 「몽유도원도」를 안견의 기준작품으로 설정하지를 않았다. 물론 안 모 교수도 자신의 논문 「안견과 그의 화풍」 결론부에서 “「몽유도원도」에 나타난 환상적인……이 양식이 안견의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았을 때의 순수한 개인적 또는 개성적 화풍을 어느 정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지……”를 언급[주20]하고 있는 것을 보아, 어떻든 안 모 교수 역시 「몽유도원도」 연구 초기(1974년)에는 이 작품이 안견의 기준작품이 될 수 없음을 올바르게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안견의 관지가 있는 『설천도』나 기타의 전칭 작품이 과연 안견의 진작이냐?”에 대한 논란의 여지는 1990년경에 와서 「몽유도원도」를 안견의 기준작품으로 설정함[주21]으로써 만들어진 것이다.

어쨌든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대강 스케치하여 주며 그리도록 부탁한 특별한 예의 주문화이므로, 안견이 즐겨 구사한 화풍이 들어가 있다고 볼 수가 없다. 또한 이 작품은 전존하는 동안 수차 보묵되고 수리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절대로 안견의 기준작품이 될 수가 없다.

이제라도 「몽유도원도」의 참 의미와 가치가 새롭게 설정되고 평가되어야 하겠지만. 이 작품을 一 기존의 관점같이 一 과대평가하여 안견의 다른 작품이 갖는 의미와 가치를 잃어버려서도 안 되겠고, 물론 과소평가해서 이 작품이 갖는 의미와 가치를 잃어버려서도 안 되겠다.

결론적으로 보았을 때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의 꿈을 그린 주문화이다. 꿈을 꾼 사람보다 화가가 꿈의 모습을 더 상세히 알 수는 없다. 또한 안평대군은 송나라 곽희의 화풍을 선호하였다. 이것이 바로 「몽유도원도」에 안견이 표현할 수가 있는 화풍의 한계이다. 따라서 「몽유도원도」는 안견의 한 대표작이기는 하나, 결코 안견의 기준작품으로 설정될 수가 없는 작품이다. (1997. 발표 / 2024.10.12. 정정(訂正))
 

주(註)

[주1] 현상(現狀)의 「몽유도원도」가 그려졌을 당시의 원 상태가 아니라는 관점의 하나로 필자는 그림의 오른쪽(현실 세상 부분) 상단부 하늘에 표현된 발묵(潑墨) 현상 같은 것이 1948년경 이 작품이 수리되면서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말하는 발묵 현상은 먹으로 보다는 목탄(木炭) 같은 다른 재료를 사용하여 표현했던 것 같다.

[주2] 필자가 「몽유도원도」를 풍수지리적 입장에서 고찰하는데 김호년씨가 자문해 주었다. 김호년씨는 『한국의 明堂』 『한국門中풍수』 『땅을 알고 터를 잡자』 등 풍수지리를 다룬 지서를 낸 바 있는 풍수지리의 전문가이다.

[주3] 바람을 가둔다는 것은 세찬 바람이 들지 않아 아늑함을 의미한다. 이는 바람이 잘 통하여 환풍이 잘된다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주4] 村山智順 著. 崔吉城 譯. 『朝鮮의 風水』, pp.585~603 참조, 1990년, 민음사 발행.

[주5]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을 삼신산이라 한다.

[주6] 김호년, 『한국의 明堂』, pp.24-26, 1996년(1판 18쇄본), 동학사 발행.
        김호년. 『한국門中풍수』. pp.31-32, 1996년, 동학사 발행.
        村山智純 著, 崔吉城 譯, 전게서 pp.665-669 참조.

[주7] 도원에서 시내가 빠져 나오는 부분은 도원도 중앙부분의 폭포로 보이는데, 도원도의 중앙부분은 다시각의 관점에서 보고 그렸으므로 마치 시내가 도원의 서쪽 폭포로 빠져 나가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도원과 연결시켜 풍수지리적 입장에서 볼 때 도원의 정남향(正南向)으로 실정하여야 한다.

[주8] 김호년, 전게서. p.28.

[주9] 조선시대 문인들이 생각한 이상향으로서의 낙원은 「몽유도원도」의 경우와 같은 도가적(道家的)이기도 하면서도 몽환적(夢想的)인 도원과 『홍길동전』에 나타나는 율도국 같은 모든 사람들이 평등히 살만한 성취 목표로서의 국가가 있고, 또한 일부의 문인들 사이에서 유유자적한 문화향유의 현실적이면서도 안일(安逸)한 이상향으로서의 정원(庭園)이 있었는데, 「몽유도원도」를 통하여 볼 때 안핑대군은 몽상적이면서도 문인들이 유유자적할 수가 있는 그러한 안일한 이상향을 지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10] 신숙주, “‥‥‥누가 천인으로 하여금 길은 가리키게 하며, 곧장 길을 잡아 요지로 가게 하였나?‥‥‥".

[주11] 하연, “‥‥‥태평성세 누리며 오래오래 사는 세상을 몸으로 겪으셨으니, 앞으로도 무궁한 복록을 누리실 징조네‥‥‥”

[주12] 고득종, “‥‥‥바라건대 주공의 충성심은 있는 대로 본받아서, 아무쪼록 나라의 앞날이 주나라 같게 하소서”.

[주13] 김종서, “‥‥‥신선 땅 복숭아나무 어떻게 뽑아다가 궁권안에 옴겨 심을 수 있은까? 저 삼투아를 재촉하여 많이 많이 따다가 우리 님(세종)께 바치고져”.

[주14] 이현로, “‥‥‥옥으로 지은 궁전에 때는 바햐흐로 이른 봄, 구리 항아리 시계는 더디기만 하구나‥‥‥”.

[주15] 박팽년의 「비해당기(匪懈堂記)」에 의하면 1442년 6월 어느날, “세종(世宗)은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당호(堂號)가 ‘왜? 안평(安平)이냐?’고 물으신 후 ‘비해(匪懈)’라는 당호를 하사(下賜)하였다”한다. ‘안평(安平)’이란 안일하다는 의미이나 ‘비해(匪懈)’란 부지런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리한 일은 안평대군의 성격에 대하여 세종이 염려하고 있었으므로 생긴 일화가 아닌가 여겨진다.

[주16] 지그문드 프로이드, 『꿈의 해석』, 장병길 번역본, p.484, 1997년, 을유문화사 발행.

[주17]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해몽법은 해몽자마다 약간의 차이점은 드러내고 있다.

[주18] 한건덕, 『꿈의 예시와 판단』, p.587, 779, 751, 683, 687, 751, 855 참조, 1997년(개정판), 명문당 발행.

[주19] 『홍길동전』은 허균(許均)에 의하여 17세기 초에 지어진 한글 소설이다.

[주20] 안휘준, 「安堅과 그의 畵風 - 몽유도원도를 중심으로」, 『진단학보』 제38호, pp.50~73, p.73에서 인용. 1974년 10월, 을유문화사 발행.

[주21] 안휘준, 『安堅과 夢遊桃源圖』, 1993년(개정판), p.117., 도서출판 예경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