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복의 ‘서서 술집’

[연재] 심규섭의 우리 그림 이야기(1)

2024-10-11     심규섭
혜원 신윤복/주사거배/종이에 담채/28.2*35.6/조선 후기/간송미술관 소장. [사진 제공 – 심규섭]


혜원 신윤복이 그린 술집 풍경이다.
제목이 주사거배(酒肆擧杯)인데, 술집에서 술잔을 든다는 평범한 뜻이다.
이보다는 상황을 잘 전달할 수 있는 ‘서서 술집’이 잘 어울린다.

주막이 아니라 주점이다.
주막은 임시로 만든 술집이고, 주점은 붙박이 술집이다.
주막과 주점의 가장 큰 차이는 세금이다.
주점은 정부의 허가를 받고 세금을 내며 장사하는 곳이다.

술맛이 좋다고 입소문이 났을 것이다.
대청마루가 있는데도 손님들은 모두 서 있다.
주모가 술구기로 떠주는 모습과 안주를 먹기 위해 젓가락을 드는 주객의 모습만으로 술 향기 가득한 풍경을 만들었다.

분홍색 진달래가 활짝 핀 봄날의 초저녁이다.
퇴근길에 진한 술 향기를 맡았다.
차마 지나치지 못했다.
데운 청주 한 잔을 시켜 마셨다.
짠지를 입에 넣자 뒤에 선 사람이 보챈다. 술잔을 내려놓고 옆으로 물러섰다.

주점 앞에 핀 진달래가 바람 따라 흔들린다.
딱 한 잔만 더...
술집 앞에 서서 부뚜막 술통만 바라본다.

그림 왼쪽에 신윤복이 쓴 글이다.
“술잔을 들어 밝은 달을 맞이하고, 술 항아리 끌어안고 맑은 바람을 맞는다.”

서서 급하게 마시는 술잔에도 운치가 넘친다.

그러나,
혜원 신윤복은 이렇게 착한(?) 그림을 그릴 사람이 아니다.
막걸리 한 잔도 쪼그려 앉아 먹는 것이 우리의 습성이다.

넓고 편한 대청마루를 두고 서서 술을 마시는 이유는,
곁눈질로 주모를 훔쳐보면서 웃음을 흘리는 아전의 표정에서 알 수 있다.
술을 핑계로 젊은 주모를 보고 수작을 걸어 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젊은 주모는 신윤복의 미인도에 나오는 똑같은 가체를 하고 옷을 입었다. 청색 주름치마는 비싼 옷이다. 앉은 자세, 술구기를 잡은 손 맵시에서 미인도의 그림자가 느껴진다. 확실히 신윤복 그림이 맞다. [사진 제공 – 심규섭]

젊은 주모는 머리를 올리고 가체를 틀었다.
과부인지 결혼하지 않고 머리만 올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남편이 있는 부녀자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가체를 올려 꾸민 젊은 주모는 유행하는 청색 주름치마를 입었다.
이 치마는 비싼 옷이다.

앉은 자세나 술구기를 든 손에서 농익은 교태가 흐른다.
대청마루에 앉으면 주모가 술상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성질 급한 남정네들은 주모를 가까이 보기 위해 술통 앞에 몰려들었다.
술을 받으면서 소문처럼 예쁜지 확인하고 말이라도 건네 볼 심산이다.

손님이 몰려오고 농담과 수작을 걸어오자, 주모는 급히 기둥서방을 불렀다.
연보라 저고리의 젊은 남자가 맨상투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급하게 나왔다.
이런 모습은 일을 도와주는 목적이 아니라 위협을 가하기 위함이다.

붉은 덜렁과 노란 초립을 쓴 사람은 무예청 별감이고,(*) 깔때기를 쓴 사람은 나장이다.(*)
접부채에 옥색 두루마기를 입은 젊은 선비가 있고, 도포를 끌어 올리는 사람은 아전으로 보인다.
모두 만만치 않은 직업과 위세를 가졌다.

연보라 저고리에 미투리를 신었다. 어설프고 연약해 보인다. 이런 나약함을 숨기기 위해 맨상투에 소매까지 걷었다. 맨상투를 보인다는 것은 체면을 차리지 않겠다는 의지로 웃통을 벗은 거나 다름없다. [사진 제공 – 심규섭]

젊은 기둥서방은 기세에 눌렸는지 머쓱한 표정이다.
그래도 주먹은 풀지 않았다.
주눅이 들어 어정쩡하게 서 있는 기둥서방의 모습에 화가 났는지 주모의 표정은 뾰로통하다.

기묘한 웃음을 흘리는 아전은 붉은 옷을 입은 무예청 별감을 부추기는데 정작 별감은 당황했는지 젓가락질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사진 제공 – 심규섭]

함께 온 아전은 주모 얼굴을 쳐다보면서 말한다.

“이분은 임금을 호위하는 무예청 별감이오. 아직 총각이지요. 이만하면 잘 생기지 않았소? 흐흐흐...”

별감은 술인지 주모한테 나는 것인지 모를 진한 향기에 몸이 얼어붙었다.
술을 마시고 안주를 먹으면서도 차마 주모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혼자 온 뒷모습의 사내는 이내 밀려났지만 차마 자리를 뜨지 못하고 버티고 있다.

주름을 넣은 옥빛 두루마기는 명품 옷이다. 두루마기를 허리춤까지 끌어올린 것은 허세를 부리는 것이다. 노련한 나장이 슬쩍 말린다. [사진 제공 – 심규섭]

멀찍이 떨어져 보던 옥빛 두루마기의 사내가 부채를 흔들며 다그친다.

“거, 술 한 잔 마시면서 말이 많소. 기다리는 사람 생각도 해야지.”

같이 온 나장이 슬쩍 말린다.

“손목이라도 잡고 싶으면 조급하게 굴지 마시오. 저들은 초짜인 게 분명하오.
나에겐 다 계획이 있소. 호호홍...”

술집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연분홍 진달래에 취한 것이다. 젊은 주모는 진달래의 화신이다. [사진 제공 – 심규섭]

술맛을 내는 것은 사람이다.
젊고 아름다운 주모가 술 향기로 남정네들을 불러 보았다.
저마다 위세를 자랑하기 위해 관복을 입거나 한껏 멋을 부리고 나왔다.
언젠가 예쁜 주모를 두고 싸움판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진달래 흐드러진 봄날 저녁이 깊어간다.(*)


*참고1 -무예청 별감은 조선시대 왕을 호위하는 일을 맡아보던 무관(武官)이다.

*참고2 -나장은 일명 나졸(羅卒)이라고도 하며, 의금부·형조·사헌부·사간원·오위도총부·전옥서·평시서 등 중앙의 사정(司正)·형사업무를 맡는 관서에 배속되어 죄인을 문초할 때 매를 때리거나 죄인을 압송하는 일 등을 맡았다.

*참고3 -진달래는 양심, 사랑의 기쁨, 미인처럼 여러 상징이 있다.
책가도와 같은 세화에서 표현하는 진달래는 양심이지만, 신윤복 그림에 나오는 진달래는 춘의(春意), 미인의 상징이다.


 

심규섭(沈規燮)

경북 봉화에서 출생.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다녔음.
현재 작품 활동과 전시기획 및 대중미술교육활동을 병행하고 있음.

6회 개인전과 수 십 회의 단체전.

저서 : 아름다운 우리그림 [궁중회화], [민화]
           [연필 하나로 내 얼굴 그리기]
           [북한미술이야기]

연락처 smynan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