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이재문과 여정남 ⑨ 민청학련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
[연재] 안영민의 「아버지, 안재구」 (39)
1973년 11월에 터져 나온 경북대 학생들의 반유신 투쟁에 고무된 재야와 종교계를 중심으로 12월부터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이 시작됐다. 연일 지지 성명이 이어졌다. 그러자 박정희는 1974년 1월 8일,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 15년간 징역에 처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긴급조치 1호’를 발포했다.
긴급조치 1호에는 유신에 반대하면 법원의 영장 없이도 체포, 구속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었다. 긴급조치 2호는, 1호를 어겼을 경우 민간인도 군법회의에 회부한다는 내용이었다. 계엄 선포와 다를 게 없었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종교계와 문인, 지식인 등 재야인사들이 줄줄이 잡혀갔다. 양성우 시인의 시처럼 온 나라가 ‘겨울공화국’이 되었다. 하지만 여정남과 학생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경북대와 서울대를 중심으로 각 지역의 대학에서는 3월 개학과 동시에 벌일 투쟁을 차질 없이 준비해 나갔다. 경북대가 3월 21일에 먼저 투쟁의 봉화를 올리고, 4월 3일에는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하지만 공안당국은 오래전부터 학생운동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전국적 규모의 연대 투쟁이 벌어지기 전에 선제적으로 시위 주동자들을 검거했다. 경북대에서는 시위가 예정된 3월 21일 아침부터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됐다.
약속한 대로 4월 3일에는 서울에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명의의 선언문이 발표됐다. 그러자 박정희는 이날 밤 10시에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다. 민청학련과 관련된 일체의 활동을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또 민청학련을, 불순 세력의 배후 조종 아래 ‘인민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사회 각계각층에 침투한 지하조직이라고 규정했다. 대학생들의 선언문 끝에 나온 명칭만 가지고 몇 시간 만에 민청학련을 체제 전복을 노리는 공산주의 혁명단체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정국은 단숨에 얼어붙었다. 학생들의 시위는 꺾였고, 곳곳에서 연행자들이 속출했다. 거리에는 여정남의 수배 전단이 붙었다. 결국 여정남은 4월 16일에 검거됐다. 여정남을 체포한 중앙정보부는 곧바로 혁신계 인사들의 검거에 나섰다.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송상진, 김용원, 우홍선, 이수병 등 혁신계 인사들이 서울과 대구에서 대거 연행됐다.
4월 25일에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민청학련 사건의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민청학련의 배후에 인민혁명당이 있다고 했다. 신직수는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의 수사를 진두지휘한 자였다. 5월 27일에는 비상군법회의 검찰부가 추가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 내용은 1964년의 인민혁명당 사건 관련자들이 대구를 중심으로 인민혁명당을 재건하고, 여정남을 서울로 보내 전국 대학의 학생 시위를 배후 조종했다는 것이다. 혹독한 고문으로 받아낸 조서 외에는 구체적인 증거가 하나도 없었다.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라는 명칭은 중앙정보부에서 갖다 붙인 것이다. 조직이라면 있어야 할 강령도 규약도 없었다. 그 어디에서도 실체를 찾아볼 수 없었다. 1964년에도 만들어지지 않은 조직이니 ‘재건’할 것도 없었다. 명백한 조작 사건이었다. 영구집권에 가장 큰 걸림돌인 서울과 대구의 혁신계와 학생운동을 동시에 뿌리 뽑기 위해 무리해서 지하당 사건으로 엮은 것이다. 그리고 여정남을 혁신계와 학생운동을 연결하는 고리로 내세웠다.
물론 이들은 4.19와 같은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로 박정희 유신독재를 타도하려고 했다. 이러한 투쟁을 준비하기 위해 사람을 모으고 장차 조직을 결성하고자 했다. 포악무도한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기 위해 준비하고 투쟁한 것이 무슨 잘못이라 할 수 있을까?
“이분들이 몇 년 전에 ‘경락연구회’라는 모임을 결성한 적이 있었어. 나도 이재문 동지를 통해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지. 이재문 동지도 초창기에는 이 모임에 참여했다고 했어.”
경락연구회는 새로운 운동의 지도부가 결성되기 전까지 지역별로 핵심 활동가를 연계하는 성격을 지녔다고 한다. 또 당국의 탄압이 일상이 된 상황에서 비공개로 모임을 유지해 왔다고 한다.
처음 ‘경락연구회’라는 명칭을 들었을 때, 나는 우리 몸의 ‘경락’을 떠올렸다. 경락은 인체의 기와 혈이 흐르는 통로를 말한다. 해부학적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체의 구석구석까지 다 연결돼 있다. 탄압이 일상화된 조건에서 변혁운동의 조직도 이런 형태가 아닐까. 독재정권과 그 하수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대중들 속에 구석구석 연결돼 움직이는 조직. 나도 학생운동을 할 때, 경락 같은 조직을 꿈꾼 적이 있었다. 있어도 없고, 보이지 않아도 실재하는 그런 조직을…….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고, 여정남이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또 한편으로 신변을 어찌할지 고민이 됐다. 공안당국이 여정남과 아버지의 관계를 파악했다면 아버지도 수사 대상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일단 학교에 출장계를 내고, 며칠 대구를 떠나 있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니 지금 도망친다면 ‘나도 관계있소’라고 인정하는 꼴이 됐어. 일단 자리를 지키며 상황을 보자, 이렇게 마음먹었지.”
잡혀가도 할 수 없다고 마음을 정리한 뒤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아버지가 만든 학습 노트를 여정남이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 학습 노트가 발각됐다면, 그래서 누가 만든 거냐고 캐묻는다면, 과연 혹독한 고문 앞에 버틸 수 있을까…….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정남이는 나와 관계된 부분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어. 나를 잘 알고 있던 서도원 선생도, 도예종 선생도 마찬가지였지.”
덕분에 아버지는 위기 상황을 피해 갈 수 있었다. 살 떨리고 숨 막히던 이때를 기억하며 어머니도 “정남이가 아버지를 지켜준 셈”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재문 선생은 달랐다. 1차 인혁당 관련자이자 대구 혁신계를 대표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던 이재문 선생은 즉각 지명수배가 떨어졌다. 인혁당으로 구속된 사람들과 오래도록 각별한 관계를 맺어왔기에 잡히면 마찬가지의 혐의를 받을 게 뻔했다. 이재문 선생은 중앙정보부의 추적을 피해 완전히 지하로 숨어들었다.
충격적인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비상군법재판에서 인혁당 관련자와 민청학련 핵심들에게 마구잡이로 사형, 무기를 선고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다들 겁주기로 여겼다. 설마 싶었다. 아무리 잔혹한 박정희라지만, 아무려면 했다.
하지만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지 불과 하루도 안 돼, 4월 9일 새벽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송상진, 김용원, 우홍선, 이수병, 그리고 여정남……. 모두 여덟 분이 희생당했다. 전날의 대법원 판결로 실망했을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아침부터 서둘러 구치소를 찾은 가족들은 새벽에 형이 집행됐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가족들은 통곡하며 울부짖다 결국 혼절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쫓아와 항의하던 종교인들도 모두 경찰에게 끌려 나갔다.
여덟 분의 사형집행 명령서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도 전에 이미 검찰에게 전달됐다고 한다. 판결은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모든 게 짜인 각본대로 흘러갔다. 애초부터 박정희는 이들을 죽일 작정이었다. 그래서 자신한테 저항하면 이렇게 된다는 걸 본보기로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소식을 듣고 아버지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믿을 수 없었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참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분단을 극복하는 변혁운동의 길에서 의견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한 사람 한 사람 소중한 동지들이었다. 폭압적인 탄압 속에서도 살아남아 견결히 지조를 지키며 싸워온 귀한 사람들이었다. 아버지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박정희에 대한 분노의 피눈물이었다.
나도 그 눈물의 절절함을 실감한 때가 있었다. 아버지가 기억을 서서히 잃어가던 2019년 어느 날이었다. 식사를 챙겨드리려고 아침 일찍 아버지 집으로 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인기척을 듣고 아버지가 안방에서 나왔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왠지 불안한 표정이었다. 나를 보면서도 안절부절못했다. 조용히 손짓해 나를 불렀다.
“영민아, 지금 옆방에 정남이가 와 있다.”
“네? 누구라고요?”
“여정남. 근데 지금 정남이를 잡으려고 밖에 경찰이 깔려 있다. 정남이는 절대 잡히면 안 된다. 정남이를 꼭 지켜야 해.”
아버지는 거의 울상이었다. 나는 상황을 눈치챘다. 일단 아버지부터 안심시켰다.
“아버지, 제가 여정남 선배를 잘 피신시키도록 할게요. 걱정하지 마시고 일단 방에 들어가 계세요.”
아버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밖에서 잠시 시간을 보낸 뒤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안방으로 들어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이제 안심하세요. 여정남 선배는 무사히 잘 피했습니다.”
“그래, 정말 다행이구나. 정남이가 무사하다니 이제 안심이다.”
아버지는 밤새 그렇게 보낸 듯했다. 긴장이 풀렸는지 한숨 자야겠다며 뒤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음이 무척 아팠다. 기억이 사라져가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순간에도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여정남은 아버지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그런 여정남이 박정희에게 죽임을 당했을 때, 아버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아버지는 정신이 온전할 때 한 번씩 여정남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정남이하고 마지막에 그렇게 언성을 높이고 헤어진 게 너무 마음이 아팠어. 왜 정남이를 좀 더 따뜻한 말로 대하지 못했을까. 이제까지 살면서 그만한 열정을 지닌 운동가를 본 적이 없었어. 그런 친구를 선배들이 지켜내지 못하고 너무 일찍 떠나보냈어.”
어머니도 생전에 두고두고 이야기했다.
“그날을 잊을 수 없어. 침통한 얼굴로 귀가한 너희 아버지는 식사도 거르고 밤새 서재에서 나오지 않았지. 그렇게 소리를 내며 우는 것도 처음 봤어. 차마 방문을 열지 못하고 나도 밖에서 같이 울었지. 서글서글한 눈매에 활짝 웃는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해. 그런 청년을 박정희는 어찌…….”
오랜 세월이 흘러도 어머니는 말을 다 맺지 못했다.
잔인한 4월이 지나고 여름이 되어서야 아버지는 대구 수성못 근처에 있던 여정남의 본가를 조심스레 찾아갔다. 당시 파동에 있던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여정남의 부친인 여이섭 선생이 주지로 있는 통인사란 사찰이었다. 여정남은 대처승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부친의 손을 잡고 한참을 울었다. 당시만 해도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눈물 외에는 서로를 위로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던 참혹한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