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되고픈 단군신화 속 호(虎)낭자의 분단극복 판타지
[화제의 책] 고승우 장편소설 『4천3백여 년만의 외출』
먼 옛날 쑥 한 타래와 마늘 20개로 햇빛을 보지 않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神壇樹) 아래 동굴에서 삼칠일(21일)을 버텨 사람으로 변한 곰이 있었으니, 익히 아는 단군신화 속 웅녀(熊女)이다.
웅녀는 잠시 사람으로 변한 환인(桓因)의 서자 환웅(桓雄)과 혼인해 단군왕검(檀君王儉)을 출산하고, 단군은 아비인 환웅천왕이 천부인(天符印)과 무리 3천을 이끌고 신단수 아래에 연 신시(神市)를 계승해 훗날 평양성에 도읍한 조선(朝鮮)을 세웠다.
이제부터는 4천300여 년 전(기원전 2333년) 그때, 곰과 함께 쑥과 마늘로만 동굴에서 생활하는 시험을 견디지 못하고 사람이 되지 못한 호랑이가 있었다는 사실도 다시 기억에서 끄집어 낼 일이다.
단군신화의 우화를 빌려와 남북 분단 현실의 문제를 다룬 흥미로운 소설이 지난 달 출간됐다. 제목은 『4천3백여 년만의 외출』이다.
뜻밖에도 작가는 합동통신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해 광주항쟁 당시 언론민주화투쟁으로 불법 해직되어 한겨레 창간과정에 참가한 뒤 편집부국장을 지내고, 지금도 한반도와 언론 문제에 대한 칼럼을 맹렬하게 발표하는 고승우 선생이다.
1980년대 후반 장편소설을 출간하고 2018년 《월간문학》 소설부문 신인상을 수상한 뒤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하고 있으니 놀랄 일도 아니겠다.
소설은 사람이 되지 못한 호랑이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된다.
호랑이는 일백일을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로 생활해야 하는 시험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온 뒤 곰이 삼칠일 만에 사람으로 바뀐 것이 분하고 가슴 아팠지만 그만큼 웅녀가 부러웠다.
4천여 년을 동굴 속에서 회한의 나날을 보내는 동안 사납고 급했던 성미도 찾아볼 수 없이 바뀌었다. 호랑이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어야 한다는 하늘나라의 민심도 커져갔다.
천상계(하늘나라)에 사는 환웅천왕은 사람이 되지 못해 슬퍼하며 오랫동안 인간에 대한 동경과 사랑의 감정을 갖고 있던 호랑이를 안타까이 여겨 4천300여년 만에 다시 한 번 사람이 될 시험기회를 주기로 했다.
하늘나라에선 영혼들이 사는 중간계(중간세계)에 살던 호랑이를 '호낭자'라 부르고 있었고, 그가 갈 인간세계는 중간세계와 거울로 서로를 비추듯이 똑같은, 동일운명체와 흡사한 곳이었다.
사람이 되길 꿈꾸었으나 실패한 호랑이가 4천3백여 년 만에 다시 기회를 얻어 치르게 된 시험과제는 분단된 한반도를 돌아보며 평화통일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라는 것.
평생을 언론인으로 살아온 고승우 선생이 사실에 근거한 글쓰기만으로는 성에 덜 찼던 모양이다. 출판사에서 붙인 '한반도 통일에 대한 판타지 소설'이라는 소개는 그가 얼마나 간절한 열망으로 분단 극복의 문제를 대하는지를 짐작케 한다.
자! 호낭자의 여정에 함께 따라 나서 보자.
첫 번째 도착지인 군사분계선 상공의 중간세계에서 평화와 전쟁을 관장하는 영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영혼을 만났다.
평화와 전쟁의 영혼은 세계의 근원과 인간의 본질, 우주의 기원에 이르기까지 평화와 전쟁 중 어느 것이 원인이고 결과인지 끝을 알 수 없는 논쟁을 벌였다.
자본주의 영혼은 평양 상공을 향해 쉴 새 없이 음식냄새폭탄, 풍족폭탄, 사치폭탄을 발사하고 이에 사회주의 영혼은 미사일로 사회주의 숭배폭탄, 신념폭탄, 자력갱생 폭탄을 발사해 방어와 공격 기능을 발휘했다.
호낭자는 갈수록 격렬해지는 결투를 보다 못해 싸움을 멈추라는 신통력을 쏟아 부었지만 당최 먹히질 않았고, 외려 중간세계 전체를 무대로 하는 특별한 영혼에게는 환웅천왕이 준 신통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조롱만 당했다.
신성한 중간세계에서 최고 덕목은 평화와 안정이었지만, 군사분계선 중간세계는 싸움으로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고 온통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미국과 일본, 남한 영혼이 중국, 러시아, 북조선 영혼과 맞붙어 맹렬하게 폭력을 휘두르는 3 대 3의 혈전에 끼어들기도 했지만, 그들은 여섯 마리 맹수처럼 뒤엉켜 싸우는데 만 열중했다.
이미 난장판이 된 패싸움 현장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하루 빨리 환웅천왕의 시험을 통과해 사람이 되는 일이 급했다.
호낭자가 평화 영혼의 도움으로 미리 본 한반도 중간세계의 전쟁은 결국 미국과 러시아의 대리전장이 되어 그들의 전술핵무기가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난 한반도는 모든 생명체가 죽고 불타 울부짖으며, 산자가 죽은 자를 부러워하는 생지옥 그 자체였다.
웅녀의 후손들에게 닥칠 수도 있는 참상에 호낭자는 차라리 눈을 감고 말았다. 전쟁은 절대 안 된다는 호낭자의 다짐은 남과 북의 영혼들이 모여 평화적 방식으로 분단을 해결하기로 한 합의가 펼쳐지는 미래를 현실화해야 한다는 결심으로 이어졌다.
한편으론 모두의 가슴에 적개심과 증오와 원한이 가득하게 만든 사상·이념전의 실상을 보면서 사람이 되고자 했던 자신의 열망에 회의감도 생겼다.
그렇게 호낭자는 전쟁과 평화, 인간의 본성과 가치에 대해 채 정리되지 않은 혼란 속에서 군사분계선 탐방의 필수코스라는 '분단 지옥'을 순례하게 된다.
△분단을 해소하지 못하고 세월을 보낸 죄(칼산 지옥방) △전쟁까지 한 죄(맷돌 지옥방) △분단된 조국으로 인해 겪어야 하는 고통(송곳 지옥방) △분단의 죄를 불태워야 하는 고통(불 지옥방) △분단의 차가운 고통에 대한 죄(얼음 지옥방) △분단으로 인해 망가진 것들에 대한 죄(벌레 지옥방) △원래 하나였던 강토가 찢어지면서 외세에게 동족이 시달리게 한 죄(태풍 지옥방) △분단의 고통에 연루된 죄(망치 지옥방) △분단으로 인한 배고픔의 죄(아귀 지옥방) △분단 속에서 살육을 행한 죄(전투 지옥방) △분단으로 가족과 헤어지거나 죽고 다치면서 당한 고통(회칼 지옥방) △분단 속에 행해진 고문의 죄(고문 지옥방)에 대한 대가를 차례로 치른 뒤 '다시는 분단의 죄를 짓지 않겠다'는 각오는 더욱 단단해졌다.
그 뒤 동명성왕과 김유신장군, 단군과 평양지신 등 '신선들'을 만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대화도 나누고 <남북의 친일파 귀신들>을 만나 신통력으로 혼찌검도 내는 여로를 이어간다.
소설의 주인공 호낭자는 사람이 되기 위한 두 번째 시험에 합격할까?
소설의 맨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호낭자의 동굴은 기원전 2333년의 침묵 속으로 다시 돌아갔다."
이어진 <작가의 말>은 다음과 같다.
"한반도 분단과 평화통일, 국방자주권 문제 등은 헌법에 보장된 주권자인 국민의 필수 선택 사항이다. 국가보안법 등으로 ‘입틀막’하는 것은 국민을 개·돼지로 보는 행태이다.
전체 사회에 체질화된 자기 검열의 굴레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K-팝, 한류에서 이들 민족적 과제가 다뤄질 경우 지구촌 차원의 집단지성에 의한 해결방안이 제시될 것이다.
자랑스런 금수강산을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모두 고민해야 한다. 더 늦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