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書員) 김려산(金麗山)의 실체를 찾아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80)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1. 글 머리에
1987년경에 3권1책의 불서를 입수하였다. 『대방광불화엄경입부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大方廣佛華嚴經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과 『대불정수능엄신주(大佛頂首楞嚴神呪)』, 그리고 『증도가(證道歌)』가 한 책으로 합본되어 있다.
『대방광불화엄경입부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은 40권 본 『화엄경』 안에 수록되어 있는 설법으로,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문수보살(文殊菩薩)에 의해 보리심(菩提心)을 내어 53 선지식(善知識)을 차례로 찾아가서 도를 묻고, 마지막으로 보현보살을 찾았을 때 보현보살이 설한 법문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보현보살의 행원을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하여 방대한 『대방광불화엄경』에서 이 품을 따로 분리하여 별개의 책으로 간행하거나 사경으로 만들었다.
『대불정수능엄신주』는 “나무 대불정 여래밀인 수증요의 제보살만행 수능엄신주(南無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神呪)”를 말하는데, 진언을 한문으로 적은 것이다. 그리고 『증도가』는 깨달음의 노래다. 내가 이 책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증도가』인데. 그 끝에는 판하서(板下書)의 서사(書寫)를 ‘호군(護軍) 김려산(金麗山)’이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김려산은 우리나라의 서예사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이번에는 그에 대하여 탐색해 보기로 한다.
2. 김려산에 관한 단편적인 『조선왕조실록』 기록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에는 서화가로 수록된 김씨가 138명이나 된다. 그러나 명단에 김려산은 없다. 김려산에 관한 역사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단종실록」과 「세조실록」에 언급된 정도이다.
①「단종실록」 권1 단종 즉위년(1452) 6월 18일 기묘조 3번째 기사에는 “사약(司鑰) 가운수(可雲秀)가 승직(陞職)이 되지 못한 것을 불평 불만하여 세조[주1]를 가리켜 헐뜯고, 정음청(正音廳)을 비난하였다. 서원(書員) 김려산(金麗山)이 듣고 정원(政院)에 고하니, 의금부에 계하(啓下)하여 국문하고 장 1백 대를 때리고 유(流) 이천 리(二千里)를 속(贖) 받았다.”라고 하였는데, 이 기록은 서원 김려산이 정원(政院, 承政院)에 가운수가 세종을 비난한 것을 고발한 기록이다.
②또한 「세조실록」 권2 세조1년(1455년) 12월 27일 무진 3번째 기사에는 김려산이 1455년(세조1) 9월 5일에 정하고, 같은 해 12월 27일에 2,300여 명의 좌익원종공신을 녹훈하였는데 그 녹훈자 3등 명단에 김려산이 포함된 것을 언급한 기록이다.
이외에 김려산의 이름이 기록된 불서가 2종 확인된다. 앞서 언급한 1460년 본 『증도가』와 아래서 다룰 1460년 본 『육경합부』의 「금강반야바라밀경」이다.
3. 1460년 본 김려산(金麗山)의 『증도가』
글머리에서 언급한 『증도가』의 끝에 있는 ‘호군(護軍) 김려산(金麗山)’이라는 조성기(造成記)를 소개하면 아래 표(1)과 같다.
이 조성기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김려산 이외에 황윤례(黃允禮)는 「세조실록」 권2와 권22에 이름이 나온다. 그도 김려산과 같이 좌익원종공신에 녹훈되는데, 그는 2등에 녹선(錄選)된다.
당시 김려산과 황윤례는 오위(五衛)의 정사품 무관 벼슬인 호군(護軍)인데, 조선시대에는 화원(畫員)이라든가 서원(書員)은 품계를 올리기 위하여 호군직(護軍職)에 임명하는 예도 종종 있었다.
|
天順四年庚辰十二月 日刊禪宗 書寫護軍金麗山 |
천순사년 경진 십이월 일간 선종 |
|
|
[표(1)] 1460년, 목판본. [사진 제공 – 이양재] |
조선초기에는 사대교린문서(事大交隣文書)와 자문(咨文)·어첩(御牒)·어제(御製)·어람(御覽) 등의 문서를 정서(正書)하던 조선중기에 정착한 사자관(寫字官) 제도가 없었는데, 조선초기에는 그 일을 각 관서의 서원이 했다. 조선초기 중앙관서의 서원은 서리(書吏)가 없는 병조·형조·승정원·교서관·장악서·봉상시 등에 배속되어 주로 문서 작성·열자(列字)·회계·공사 전달 등의 행정 사무를 담당하였다.
김려산은 승정원에 배속되어 문서 작성과 정서(正書)를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김려산은 서원으로서 정4품 호군에 이른 장대의 명 서사가(書寫家)였던 것으로 요해된다. 그러므로 그는 서사가로서 1460년 본 『증도가』 간행에 있어 판하서를 쓴다.
1460년 본 김려산(金麗山)의 『증도가』는 목판본으로 모두 10장이다. 사계단변이고 판심에 서명 약칭 ‘증(證)’과 ‘장차(張次)’를 기록하고 있다. 행간(行間)에 계선은 없으며, 각면 7행14자로서 본문 1815자를 수록하고 있다.
이 『증도가』는 권말 제호를 『영가진각대사증도가(永嘉眞覺大師證道歌)』라 하고 있다. 즉 이 책은 “당나라 승려 현각(永嘉 玄覺, 665~713)이 육조 혜능(慧能, 638년~713년)과의 대화를 통해 얻은 깨달음을 칠언(七言) 게송(偈頌)으로 읊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
4. 1460년 본 『육경합부』의 「금강반야바라밀경」 시주기(施主記)
『증도가』 이외에도, 1460년 본 『육경합부』 1책의 시주기에 김려산의 이름이 단순하게 들어간 책이 현전하고 있다. 즉 대구광역시 달성군 금성사 소장본 『육경합부』 1책(97장)에 들어있는 「불설아미타경」 제10장에 발원 및 시주자 명단 28명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시주자 명단의 맨 위에 김려산이 들어가 있다.
이 『육경합부』 1책(97장)은 2015년 5월 11일자로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책의 시주기는 『증도가』를 간행하는 데 간여한 김려산을 시주자로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화주(化主, 교화승) 설운(雪雲)’과 판을 세긴 ‘각수(刻手) 도운(道雲)’ ‘료인(了仁)’ 등이 「금강반야바라밀경」의 시주기에도 등장하고 있다.
두 책의 서체를 비교하여 보면, 『육경합부』의 「금강반야바라밀경」 역시 김려산의 판하본으로 간행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의 복사 전문을 입수하여 『증도가』와 정밀 대비하며 연구할 필요가 있다.
5. 맺음말 ; 김려산의 생존 연대
『조선왕조실록』의 이 단편적인 두 기록과 불서 2종을 정리하면, 김려산은 ①1452년에 서원(書員)이었고, ②세조가 단종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은 계유정란에 가담하였으며, ③그 공으로 1455년 12월 28일에 녹훈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아울러 ④김려산은 1460년에 『증도가』와 「금강반야바라밀경」의 판하서를 쓰거나, 그 두 책이 간행되는데 한 역할을 한다.
이상이 김려산의 단편적인 생존 사실이다. 이외에 김려산의 본관이라던가 고향, 생몰년도 가족 사항 등등에 관한 어떠한 기록도 아직은 찾을 수가 없다.
그는 세종조에 태어나 세조조에 활동했던 인물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즉 황진손(黃振孫)과 같은 시대를 살아간 서가였다. 지금은 잊혔지만, 그는 단종과 세조 년간에 활동한 당대에는 널리 알려진 뛰어난 서가(書家)였다.
이제 김려산의 존재를 드러내 공개한다. 앞으로 우리나라의 조선초기 서예사에서는 김려산과 황진손을 성달생 성개를 잇는 서예가로 함께 기억하도록 하자. 그들은 그럴만한 당대의 서가이다. (2024.09.08.)
주(註)
[주1] 이 문장에서는 세조(世祖, 1417~1468)가 아니라 세종(世宗, 1397~1450)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