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이재문과 여정남 ⑤ 이재문을 통해 여정남을 소개받다
[연재] 안영민의 「아버지, 안재구」 (35)
1964~65년의 한일협정 반대 투쟁에는 대학생들은 물론 고등학생들까지 대거 참여했다. 민중들의 반일 감정까지 폭발하면서 투쟁은 거세게 진행됐다. 위기에 빠진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과 휴교령을 잇달아 선포하면서 시위 진압에 나섰다.
여기까지는 4.19와 비슷한 양상이었다. 학생 시위가 중심이었던 4.19와 달리 각계각층의 참여나 투쟁의 격렬함은 4.19를 능가했다. 하지만 2년에 걸친 투쟁은 ‘친일군사정권’을 몰아내려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한일협정은 체결됐고, 박정희 정권은 건재했으며, 투쟁은 서서히 소멸되고 말았다.
“그 이유가 뭘까. 다들 치열하게 토론했지. 그 결과 ‘운동의 지도부’가 제대로 없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어. 이제부터라도 지도부를 세우고 통일된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여기저기서 나왔지.”
남로당의 궤멸 이후 다시 등장한 지도부 문제는 크게 세 가지 의견이 존재했다. 먼저 지도부 문제를 북과 연계해 고민한 이들이 있었다. 다음으로 남쪽의 자체 역량으로 지도부를 세우자는 의견이 있었다. 이 의견은 다시 둘로 나뉘었다. 가능하면 빨리 세우자는 쪽과 시간이 걸리더라도 충분히 준비해서 세워야 한다는 쪽으로 갈렸다.
“세 가지 입장이 칼로 무를 자르듯이 확실하게 구분된 건 아니었어. 남쪽에서 자체적으로 지도부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도 북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배제하지는 않았지. 남로당에 대한 평가나 박헌영 문제에서는 또 의견이 갈리기도 했어. 북에서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정치적으로 숙청을 당한 것이라고 보는 이들도 적지 않았거든.”
전쟁이 끝난 지 불과 10년 남짓 지났을 뿐이다. 분단을 고착하려는 세력의 탄압이 갈수록 커졌지만, 남북이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다. 물론 탄압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고, 당장 먹고살기도 바빴다. 그렇다고 북이 어떻게 남의 나라, 남의 땅이 될 수 있을까. 삼천리 금수강산, 삼천만 민족이란 말이 입에 붙어 있는데, 어찌 북을 부정하고 지도에서 지워버릴 수 있을까. 4.19 이후 터져 나온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구호는 당연할뿐더러 자연스러웠다.
“동학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반외세 민족해방운동의 역사를, 과연 남북을 갈라놓고 생각한다는 게 가능할까? 당시만 해도 분단이 비정상이었고,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게 상식이었어. 더구나 북은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을 확실히 청산하고, 토지개혁에서도 성과를 보여주었지. 그러니 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그들과 손잡고 통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어.”
미국의 실체와 우리 운동의 성격을 둘러싼 토론도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이재문 동지와 나는 박정희의 5.16쿠데타와 대통령 당선이 모두 미국의 작품이라고 봤어.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은 일본과 한국을 하나로 묶고, 한국을 대소 전진기지이자 반공의 보루로 만드는 거야. 4.19 때 미국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이승만을 버렸어. 그래서 정권을 몰아내는 것이 가능했지. 군부가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6.3 때는 위수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투입해 철저히 시위를 막았어. 군대 동원은 미국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야. 한일수교는 그만큼 미국의 이해가 걸린 핵심사안이었지.”
아버지는 이재문 선생과 남쪽 변혁운동의 본질과 성격에 대해 많이 토론했다. 아버지는 남쪽에 진주한 미군이 친일파를 앞세워 인민들의 자주적인 국가 건설을 짓밟고, 전쟁과 분단을 통해 남쪽을 신식민지로 만든 게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쪽에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정권을 세우고, 이 정권이 북쪽과 평화적으로 통일하는 것이 우리 운동의 목표라고 보았지. 이 점에서는 나와 이재문 동지의 의견이 일치했어.”
이야기는 지난번 만남에서 나온 제안으로 이어졌다. 이재문 선생이 아버지에게 맡기려고 했던 경북대 핵심 운동가에 대한 교양 사업이었다. 이재문 선생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이재형 동지를 비롯해 6.3 투쟁을 이끌었던 핵심들이 그동안 다 졸업했습니다. 다시 경북대 운동을 이끌 새로운 핵심을 발굴해야 합니다.”
“정사회 회원 중에 괜찮은 학생들이 있지 않습니까?”
경북대 학생운동은 1964년 6.3 투쟁을 거치면서 저변이 확대됐다. 이재문 선생은 ‘맥령’을 이끌고 있던 이재형 선생에게 새로운 대중운동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렇게 해서 1965년에 결성된 서클이 ‘정사회(正思會)’였다. 맥령과 달리 정사회는 학교에 등록된 공개 서클이었다. 정사회는 1965년 한일협정 반대 투쟁과 1967년 6.8 부정선거 규탄 투쟁, 1969년 3선개헌 반대 투쟁을 주도하며 경북대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정사회는 공개된 서클이라 안 교수와 바로 연결돼선 곤란합니다.”
이재문 선생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믿음직하고 괜찮은 후배가 한 명 있기는 합니다. 그동안 실천적으로나 사상이론적으로나 검증된 후배입니다. 언변도 좋고, 배짱도 있고, 게다가 주먹도 셉니다.”
“그래요? 그 학생이 누구입니까?”
“지금 군에 있는데, 제대할 때가 다 됐습니다. 그 친구라면 앞으로 경북대는 물론 대구지역 학생운동 전체를 책임질 수 있을 겁니다. 제대하면 바로 안 교수에게 소개해 주겠습니다.”
아버지는 이재문 선생이 저토록 칭찬하는 학생이 누굴까 궁금했다. 신학기가 시작되자 이재문 선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제대한 그 후배가 조만간 연구실로 찾아갈 거라고 했다.
1968년 봄이었다. 수업이 모두 끝난 늦은 오후에 아버지는 연구실에서 그 학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리대 건물은 고요했다. 다른 교수들도 모두 퇴근한 후였다.
이윽고 노크 소리가 났다.
“네, 들어오세요.”
문이 열렸다. 장대한 키에 왕방울같이 큰 눈을 한 청년이 만면에 서글서글한 웃음을 띠고 들어섰다.
“교수님, 이재문 선배의 말씀을 듣고 왔습니다. 법정대 정치학과에 다니는 여정남입니다.”
아버지는 반갑게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맞은편 의자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쪽으로 앉읍시다. 이재문 기자한테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와 여정남의 역사적인 첫 만남이다. 앞으로 펼쳐질 두 사람의 관계를 보면 역사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날 아버지는 교수와 학생이라는 격식을 넘어 여정남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남이는 아주 영민했고, 책도 많이 읽었어. 서구 철학이나 인문학 지식도 풍부했고, 동양 고전에도 관심이 많았어. 한문도 잘해서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도 이해가 깊었지. 말투도 정열적이었고, 성격도 호방하고 거침이 없었어.”
아버지는 여정남의 늠름한 태도와 인품에 반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해 거침없이 비판하며 남다른 투쟁심을 보여주는 그의 패기와 열정에 덩달아 아버지의 가슴도 뜨거워졌다. 나중에 이재문 선생을 만났을 때,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일이 잘되려고 그러는지 정말 좋은 사람을 얻었습니다. 여정남은 장차 우리 운동의 지도자로 클 사람입니다. 이재문 동지와 제가 한번 멋지게 가꾸어 봅시다.”
여정남(呂正男). 정말 이름처럼 ‘바르게 살다 간 남자’였다. 한 시대를 호방하게 살다 간 영원한 청년이었다.
1944년에 대구시 중구 전동의 유복한 가정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그는, 경북중과 경북고를 졸업한 후 1962년에 경북대학교 법정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4.19의 도화선이 된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의 2.28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불의한 세상에 맞섰고, 방학 때는 막노동판에서 일하며 노동자들의 힘든 사정을 몸으로 느껴보기도 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대학 3학년 때인 1964년, 대학가에서 한일회담 반대 열기가 고조됐을 때 앞장서 참여했다. 이 때문에 학교에서 제적된 뒤, 이듬해 입대했다. 그리고 1967년 연말에 제대해 정치학과 선배인 이재문 기자를 통해 아버지를 소개받은 것이다.
첫 만남에서부터 서로의 열정과 신념을 확인한 아버지와 여정남 사이에는 무한한 신뢰가 생겨났다. 아버지는 여정남과 자주 만났다. 함께 사회과학책을 읽고 토론했다. 시대 상황과 정세도 분석했다. 경북대 학생운동의 역할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누었다.
“정남이는 워낙 똑똑하고 박식해서 토론이 잘 됐어. 가끔 술도 한 잔씩 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지. 정남이는 둘이 있을 때는 ‘형님’이라고 불렀어. 교수님이라는 호칭보다는 그게 더 좋다면서. 나도 그 소리가 듣기에 좋았어.”
여정남은 아버지의 둘째 남동생보다 한 해 아래였다. 그러니 동생과 진배없었다. 또 여정남의 큰형이 1930년생으로 아버지보다 세 살 많았다. 대건고 교사여서 아버지와 친분도 있었다. 여정남에게도 아버지는 형과 같은 존재였다.
“정남이는 내게 제자이자, 동지이자, 동생이었어.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나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
이렇게 해서 이재문, 안재구, 여정남, 세 사람은 하나로 연결됐다. 아버지는 이재문 선생과 여정남을 만나면서 본격적인 변혁운동의 길에 들어섰다. 그 길에서 평생을 함께할 동지를 얻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