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청(文淸)과 그의 회화를 다시 논한다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79)

2024-09-02     이양재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1. 글 머리에

조선 초기에 일본으로 귀화한 또 한 사람의 조선인 화가 문청(文淸)[주1]. 필자는 1994년 안견논쟁시, 일본 무로마치 시대의 미술에 영향을 준 것은 안견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안견보다는 이수문과 문청이었음을 논증하였다.

이후 1996년 1월 5일에 「문청(文淸) 회화의 이해」를 탈고하여 격월간 『한국고미술』 통권 제5호(1997년 3·4월호)에 기고하였고, 이보다 앞서 격월간 『한국고미술』 통권 제4호(1997년 1·2월호)에는 「이수문(李秀文)의 인생과 예술」을 기고하였다.

이수문과 문청을 연구하는 것은 일본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의 미술에 준 조선화풍의 영향을 연구 규명하기 위하여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청에 대해 연구하는 것은 이수문(李秀文, ?-1424-?)을 연구하는 것 보다 더욱 더 어렵다. 문청은 이수문과는 달리 문헌이나 유적(遺跡), 심지어는 구전마저도 거의 없고, 그나마 남아 있는 문청에 대한 한두 마디의 언급은 모두 일본의 자료이다.

하지만 현재 문청의 전존작품은 10여점에 달하므로, 우리는 이 작품들을 통하여 문청의 인생과 예술에 대해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해 볼 수가 있다. 그러나 필자가 1997년에 「문청(文淸) 회화의 이해」를 발표한 이후, 27년이 넘은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문청회화를 다룬 논문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2014년 3월에 미국 ‘하와이대학교 - 웨스트 오하우’의 일본계 학자 ‘카메다 카즈코-마다르(Kazuko Kameda-madar)’는 「A Sixteenth-century Korean Landscape Painting with Seal Reading "Bunsei" 文清 (“文清”이란 인장이 있는 16세기 한국 산수도)」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카즈코의 이 짤막한 논고는 문청에 관하여 의도를 가지고 왜곡한 글이다. 카즈코의 일본계 학자로서의 비학문적 행동은 아래에서 ‘문청의 생존년대와 문성(文成)에 대하여’를 논하며 다루겠다.

분명한 사실은 문청의 전존작품에서도 이수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조선화풍의 영향이 짙게 나타난다. 따라서 일본 미술사학계의 일각에서는 문청 역시 이수문과 마찬가지로 조선인일 가능성이 이미 오래전에 제시된 바 있었고.[주2] 이에 주목한 우리나라의 일부 미술사학계에서도 그에 대해 몇 편의 글을 발표한 바가 있었다.[주3]

문청 역시 이수문과 마찬가지로 자나 호가 알려진 것이 전혀 없고, 오직 ‘문청(文淸)’이라 새겨진 인장만을 작품에 낙관(落款)하였다.[주4] 우리나라의 회화사에 있어서 작품에 인장을 낙관하는 보편적인 예가 려말선초에 나타나기 시작하였고,[주5] 그리고 당시에는 두인(頭印) 등이 없이 자호나 성명 등을 새긴 한두 개의 인장을 간단히 날인(捺印)한 것으로 보아, 문청이 그의 실제 성명, 또는 명인지 아니면 자호인지를 명백히 단정짓기 조차 어렵다.

여기에 문성(文成)이란 이름의 화가가 역시 같은 연대의 일본 화단에서 활동한 바 있어 문청과 문성이 동일인이냐의 여부가 주목되기도 한다.[주6] 더구나 이수문은 도일후 결혼하여 아들을 얻었다고 알려진데 비하여, 문청은 가족이라든가 후손들에 대해 알려진 바 전혀 없다. 따라서 문청을 연구하는 일은 ‘문청’이라고 알려진 화가의 전존작품과 그에 대해 연구한 몇 편의 글을 찾아 헤메고 다니는 막연한 탐색이기도 하다.

그간 문청에 대한 우리나라 미술사학계의 기존론([주2] 참조)은 분석적인 논문이라기 보다는, 그의 작품 일부를 다룬 일본 미술사학계의 작품론을 우리의 시각에서 다시 보고 정리하여 소개한 정도의 한계를 지닐수 밖에 없었고,[주7] 1997년까지 우리 회화사에서 문청이나 이수문에 대해서 너무 소극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부정할 수만은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시점에 1994년에 안견논쟁이 발생하였고, 그 논쟁에서 미처 다하지 못한 말을 쓰고자하여 1996년에 문청을, 1997년에 이수문을 다룬 것이다.

2. 문청의 전존작품과 화풍에 대하여

우선 국내외에 전존하는 문청의 작품을 조사하여 보면, 인물화 4점과 산수도 6점 등 모두 10점으로 아래와 같다.[주8] 아래에 밝힌 소장처 가운데 개인 소장품의 현재 소장처는 일부 변동이 있으나, 2024년 현재의 소장자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 논고의 작품 설명에서는 구장처로 명시한다.)

- 인물화(4점) -

①<호계삼소도(虎溪三笑圖)> 1점, 지본수묵, 56.8×31.7cm., 미국 존 파워스 구장품. / ②<양수종이상(養叟宗頤像)> 1점, 1452년이전, 지본담채, 일본 교또 다이토쿠지(大德寺) 전래품. / ③<양기방회상(揚岐方會像)> 1점, 지본담채, 일본 교토 다이토쿠지 전래품. / ④<유마거사도(維摩居士圖)> 1점, 1457년이전, 지본수묵, 일본 야마토분카관(大和文華館) 소장.

「호계삼소도(虎溪三笑圖)」, 문청, 1점, 지본수묵, 56.8×31.7cm., 미국 존 파워스 구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유마거사도(維摩居士圖)」, 문청, 1점, 1457년이전, 지본수묵, 일본 아마토분카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 산수도(6점) -

⑤「연사모종도(煙寺暮鐘圖)」 1점, 지본수묵, 109.7×33.6cm., 일본 교토국립미술관 소장. / ⑥「동정추월도(洞庭秋月圖)」 1점, 지본수묵, 109.7×33.6cm., 일본 교토국립미술관 소장. / ⑦「루각산수도(樓閣山水圖)」 1점, 지본담채, 31.5×42.7cm.,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문청의 작품으로 국내에 있는 유일한 그림이다. / ⑧「산수도(山水圖)> 1점, 일본 히데노도오(秀野堂) 소장. / ⑨「산수도」 1점, 일본 마사키 비주츠칸(正木美術館) 소장. / ⑩「산수도」 1점, 미국 보스톤미술관 소장.

「루각산수도(樓閣山水圖)」, 문청, 1점, 지본담채, 31.5 × 42.7cm.,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산수도(山水圖)」, 문청, 1점, 지본수묵, 미국보스톤미술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위의 전존작품을 보건대 문청은 인물화와 수묵산수에 매우 능한 화가였다. 그런데 문청이 대덕사[주9] 승려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것은 그가 대덕사와 매우 가까이 지냈으며, 이는 또한 그가 불교를 주제로 한 다른 작품들을 남겼을 가능성도 보여 준다.[주10]

이러한 문청의 초상화 3점 가운데 대덕사의 전래품 2점은 1922년 3월에, 대화문화관 소장의 1점은 1936년 5월 6일에 일본의 국보(國寶)로 일찍이 지정되었다. 이는 일본 회화사에서 문청작 초상화의 중요성을 말하여 준다고 하겠다.

문청작 「호계삼소도」는 「삼소도(三笑圖)」 또는 「삼교도(三敎圖)」라고도 불리우는데, 이 작품에 그려진 세 노인은 유불선 삼교의 학자와 승려, 도사를 의미한다. 그 세 노인이 마주하여 파안대소를 하고 있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라 아니 할 수가 없다. 화찬(畫讚)하나 붙어 있지 않은 이 작품에서 무언가 구두선적(口頭禪的)인 의미가 들어 있는 듯하다.

「호계삼소도」는 중국 진(晉)나라의 혜원(慧遠) 법사가 루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에 은거하면서, 동림사 아래에 흐르는 호계(虎溪, 후시)를 건너지 않기로 하였으나 유학자 도연명(陶淵明)과 도사 육수정(陸修靜)을 배웅할 때 무심코 건너 버려 세 사람이 크게 웃었다는 전설적 고사를 바탕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그러나 혜원이 입적할 때(416년) 육수정은 겨우 10세에 불과해서 도저히 같이 교우할 수 없고, 또한 육수정(406~477)은 461년에야 여산에 들어왔기에 이런 만남 자체는 사실이 아니다. 이 그림은 삼교의 도가 모두 하나로 귀일한다는 의미에서 그려진 그림으로 보아야 한다.

한편, 조선 초기에 안견과 쌍벽을 이루었던 화원화가 최경(崔涇)도 「삼소도」를 그린 바 있다. 최경의 「삼소도」는 세 노인이 모여 앉아서 웃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라고 하는데, 문청의 「삼소도」의 경우와 같이 삼교의 세 노인일 가능성은 크다.

또한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화가 연담 김명국(金明國) 역시 「호계삼소도」(17.0×10.7cm., 견본수묵)를 그린 바 있는데,[주11] 김명국의 작품은 문청의 작품과 여러 면에서 상통한다고 할 수가 있다. 특히 김명국의 작품에 그려진 서 있는 세 노인의 복식을 보면 이는 문청의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각기 유불선 삼교의 학자와 승려, 도사를 의미한다.

다만 문청의 작품과 김명국의 작품에 다른 점이 있다면 문청의 작품에는 배경이 없는데 비하여, 김명국의 작품에는 절파화풍(浙派畫風)으로 길 위에서 파안대소하는 모습으로 그려 넣었다.

이렇게 문청과 김명국의 「호계삼소도」는 상호 비교하며 연구 및 감상하여야 분명한 뜻이 드러난다. 조선 초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문청 이외에도 거의 같은 시기의 화원화가 최경도 이른바 「삼소도」를 그린 바 있고, 또한 조선중기의 김명국이 「호계삼소도」를 그린 것으로 보아 이 화제(畵題)는 조선시대 초기와 중기의 화가들 사이에서 즐겨 그려졌을 것이라는 추정을 갖게 한다.[주12]

대덕사 소장의 「양수종이상」과 「양기방회상」은 실존인물을 묘사한 전신사조(傳神寫照)이다. 이 가운데 「양수종이상」은 양수종이(養叟宗頤, 1376-1458년, 大德寺 주지)가 스스로 지은 자찬을 그의 제자 기암종양(岐庵宗揚)이 그가 77세이던 1452년(享德元年)에 적어 넣은 것으로 보아 즉 이 작품은 적어도 1452년 이전에 창작된 작품이다.

반면에 「양기방회상」에는 양수종이가 짓고 쓴 연대미상의 찬문이 실려 있다. 하지만 양수종이가 1458년에 사망한 것으로 보아 이 초상화 창작시기의 하한선은 1457년 이전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필자의 견해로는 「양기방회상」이 「양수종이상」과 거의 같은 시기에, 아니면 오히려 「양수종이상」 보다 수년 앞서 「양기방회상」이 그려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양기방회상」에 씌여진 양수종이의 필적은 그의 만년필적이라 보기에는 어렵도록 힘이 상당히 들어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두 작품의 창작년도는 화찬이 씌여지기 이전임은 확실하다.

「양수종이상」과 「양기방회상」이 승려의 근엄한 모습을 그렸다면, 문청의 「유마거사도」는 「호계삼소도」의 경우와 같이 비교적 자유로운 필치로 유마거사[주13]라는 주제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유마거사도」에는 1457년에 존경조묵(存耕祖黙, 아리코오 소모쿠)이 쓴 찬이 붙어 있는데, 「호계삼소도」가 도의 귀일이나 해탈의 기쁨(喜)을 표현한 작품이라면, 이 「유마거사도」는 병고의 려(慮)를 표현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근대에 이르기까지 문청의 「유마거사도」는 여졸의 작품으로 오인되기도 하였다.([주25] 참조)

문청이 조선으로부터 귀화한 사람이라면 의당 그가 그린 일란의 이러한 초상화는 고려로부터 전해져 내여온 조선의 전통적인 초상화법에 의하여 그려졌어야 한다.

그런데 일본의 미술사학자 도변일(渡辺 一, 와타나베 하지메)은 그의 문청론에서 문청작 초상화를 가리켜 “문청화는 얼굴 모습의 묘사와 옷 주름의 선을 그리는 법에서 형식적으로 정비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 채색을 입히는데 있어서는 충실히 대륙의 람본(藍本)을 따르는 것으로 인정된다”고 언급하였다.

즉, 도변일은 문청의 전신사조법(傳神寫照法)에는 대륙의 영향이 있음을 말하여, 일본의 재래적인 초상화법과는 달리 그려진 조선화풍의 초상화 작품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한 것이다. 그러한 조선화풍의 특징은 「호계삼소도」와 「유마거사도」에서 더욱 더 친근하게 느껴져 온다. 향후 우리 회화사학계에서는 「양수종이상」과 「양기방회상」을 정밀 검토하여야 한다.

문청과 이수문의 당시 일본 화단에서의 역할을 대비하여 볼 때, 우리는 항시 문청이 초상화를 그렸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화상관(畵像觀)에서 볼 때 초상화는 실물과 다름없이 그려야 하는 사조 능력을 요구한다. 반면에 산수화란 작가의 화론적 관점과 재해석이 들어 갈 수가 있는 분야이다.

즉 문청이 초상화를 그렸다는 것은 그의 화가로서의 역량이 산수화를 위주로 그린 이수문을 앞지르고 있었음을 단정적으로 이야기하여 준다고 할 수가 있다.

문청의 산수도는 구사된 화풍상에서 볼 때 두 부류의 작품으로 구분할 수가 있다. 즉, 당시의 조선화풍을 보여 주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누각산수도」와 경도국립미술관 소장의 「연사모종도」, 「동정추월도」 등[주14] 3점과 당시의 조선화풍과 당시에 일본에서 선호한 일본화된 마하화풍이 혼합된 ‘수야당’과 ‘정목미술관’, ‘보스톤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 「삼소도」 3점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청의 산수도 가운데 우리가 우선적으로 주목하여야 할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삼소도」 1점이다. 이 작품은 「조선고적도보」 권14에도 총독부박물관의 소장품으로 수록되어 있는데,[주15] 우리나라의 미술사학계에서는 이 작품이 문청이 조선에 있을 때 그린 작품이라는 관점이 대두되어 있다.

특히, 서울대의 안휘준 교수는 조선화풍을 보여 주는 작품 3점--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누각산수도」와 경도국립미술관 소장의 「연사모종도」, 「동정추월도」--를 문청이 도일(渡日)하기 이전에 조선에 있을 때 그린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주16]

향후 이 「누각산수도」의 국내 전존 유래를 반드시 살펴보고 입증하여야 할 것이나, 이 추정이 사실이라면 이는 실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져다 준다. 즉, 이 글의 뒤에서 상세히 논하겠지만 필자가 유추한 대로 문청이 이수문 보다 먼저 도일하였음이 확실하므로 국립박물관 소장의 「누각산수도」는 15세기 초의 작품이 된다.[주17]

그런데 「연사모종도」와 「동정추월도」는 일본 복강 자작(福岡 子爵)의 가장품이었는데,[주18] 후에 이것이 어떠한 경로를 거쳐 고야시차(高野時次, 타카노 토키지)에게 이양되었다가 현재는 경도국립미술관에 소장하게 되었다.

어쨌든 문청이 조선인이라는 직접적인 증거는 바로 이 전술한 3점의 작품에 있다. 그리고 [주4]에서 언급하였듯이 이 전술한 3점의 작품에 찍혀진 문청의 인장은 ‘淸(청)’자에서 ‘月(월)’ 부분의 가로획이 하나만 들어가 있다.

한편, 일본과 미국에 전존하고 있는 후술한 「삼소도」 3점[주19]을 살펴보면, 이 작품은 앞서 언급한 대로 당시의 조선화풍과 일본에서 선호한 일본화된 마하파 화풍이 혼합되어 그려져 있다.

이들 후술한 3점의 「산수화」 가운데 수야당 소장의 산수도는 다른 두 점의 「산수도」에 비하여 조선화풍의 영향이 좀 더 나타난다. 그런데 이 가운데 정목미술관 소장의 「삼소도」에는 일조겸양(一條兼良, 1402-1481년)과 서계주봉(瑞溪周鳳, 1392-1473년, 교토 상국사 주지)의 화찬이 들어가 있는데‥‥‥, 만약 문청의 도일시기가 이수문 만큼이나 위로 올라간다면 당시 일본 예림에 있어서 문청이 연계를 맺고 있던 교토 대덕사와 이수문이 연계를 맺고 있던 교토 상국사의 회화사적 위치를 미루어 볼 때, 이러한 일본에서 당시에 선호된 화풍은 문청과 이수문의 영향으로 확립되었을 가능성도 엿보게 한다. 그 가능성은 문청과 여졸(如拙)의 교유관계에 대한 논리가 구체적으로 정립되면서 실체화 될 수가 있다.

이들 문청이 그린 후술한 3점의 작품에 찍혀진 인장은 [주4]에서 언급하였듯이 ‘청(淸)’자에서 ‘월(月)’ 부분의 가로획이 두 개가 들어가 있다. 즉 문청의 작품은 그 인문(印文)으로서 창작 시기가 크게 구분되기도 한다.

이로써 보건데 문청은 도일한 이후에 낙관하는 인장을 바꿨을 가능성이 있지만, 「본조화인(本朝畵印)」과 「증정 고화비고」에 증보 채록되어 있는 문청의 낙관에는 ‘月(월)’ 부분의 가로획이 하나여서 이를 쉽게 단정할 수 만은 없다.

이들 작품에 나타난 문청이 일본에서 구사한 화풍은 화면구성에서 전경(前景)과 후경(後景)의 2중적 구성을 보여 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즉 문청이 일본에서 그린 회화는‥‥‥, 첫째, 화면의 공활성(空闊性) : 전경(前景)을 낮게 하고 후경(後景)을 높게 배치하고 그 중간에 강수(江水)를 멀리 펼쳐지게 함으로서 화면에서 밝은 해방감을 준다. / 둘째, 산의 저평성(低平性) : 묘사된 산은 낮고 원만(緩慢)하며 험한 준령(峻嶺)이 없게 함으로서 수평감이 묘사된 그림을 지배하게 하여 정숙한 정서를 안겨 준다. / 셋째, 전경에 나무를 높이 그려 원근감과 공활감(空豁感)을 강조하는 효과를 내고 있으며 이는 화면의 수평구조에 대한 수직적 구도의 의미를 가져다 준다. / 넷째, 화면구성의 간결성(簡潔性) : 묘사 대상을 될 수록 간결하고 단순화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특성은 그가 조선에서 그린 것으로 믿어지는 작품들과 확연히 구분[주20]되는 특성인데, 매우 흥미롭게도 이러한 특성은 여졸(如拙)의 제자인 주문(周文)의 화풍에서도 보여 진다. 그런데 문청과 이수문은 모두 여졸과 관계가 있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주문의 회화에 나타나는 조선화풍의 영향은 --우리나라의 미술사학계에서 기존의 주장인 안견으로부터 주어진 영향[주21]이 아니라-- 당연히 문청과 이수문에게서 주어진 영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주22]

3. 문청의 생존년대와 문성(文成)에 대하여

문청의 생존년대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으나, 다만 그에 의하여 그려진 「양수종이상」과 「양기방회상」에 1452년과 1457년에 각기 씌여진 화찬을 참고하여 보면, 그는 늦어도 15세기 중기 이전에 활동하였던 화가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 화찬이 씌여진 시기는 문청의 말년일 수도 있다. 즉 문청이 이 두 작품을 그린 시기보다 훨씬 이전부터 일본에서 활동하였음은 쉽게 유추하여 볼 수가 있다.

틀림없는 사실은 적어도 이 두 작품의 창작시기로 인하여 문청의 생존연대 유추에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문청의 생존연대를 검토할 때 우리는 문청이 도일후 교토 상국사(相國寺)의 여졸과 어떠한 연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가 있다.[주23]

현재, 일본의 미술사학계의 일각에서는 문청이 여졸의 문인으로 주장되고 있다.[주24] 특히 『증정 고화비고』의 권17 ‘如拙’의 항목을 보면 그 말미(p.p.591-582)에 문청의 낙관과 문청의 회화에 대한 기록이 채록[주25]되어 있는데, “문청이 여졸의 문인이므로 문청의 작품이 한때 여졸의 작품으로 오인되어 왔다”는 관점이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도변일(渡辺 一, 와타나베 하지메)은 자신의 ‘문청론’ 첫머리에서 “문청화(文淸畵)가 오랫동안 여졸화(如拙畵)의 아래에 있는 것(포함을 의미)으로 혼동(混同)되어 왔다”고 지적하였다.[주26] 그러나 문청이 여졸의 제자라기 보다는 문청이 여졸의 문하(門下)에서 한때 도움을 받았다고 보아야 한다.

한편, 경도 상국사의 주지 서계주봉(瑞溪周鳳, 1392-1473년)은 --현재 정목미술관(正木美術館)에 소장되어 있는-- 문청의 「산수도」에 화찬을 하였다. 이 역시 문청이 상국사와 일련(如拙!)의 연계가 있다는 하나의 방증(傍證)이기도 한 것이다.

보다 중요한 사실은 “일본 미술사학계에서 여졸과 문청에 대해 논의되어 왔던 이러한 관점은 이들의 연계성을 입증하여 준다”고도 할 수 있다. 즉, “문청은 화풍이라든가 그가 활동한 영역에서 볼 때 실제로 여졸과 주문 사이에 위치한 화가였던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졸과 문청과의 연계를 보아 문청의 출생연대를 적어도 1400년 이전으로 올려 잡아야 하며, 또한 그의 도일시기는 여졸이 생존해 활동하던 시기가 응영연간(應永年間, 1394-1427년)이므로 이수문의 도일시기(1424년) 보다 다소 앞선 시기로 올려 잡아도 무방하다.[주27]

그렇다면 문청이 「양수종이상」과 「양기방회상」을 그린 때(1450년대)는 60대 초반이 된다. 그런데 문청이 초상을 그린 양수종이는 1376년생이고, 그의 「산수도」에 화찬을 쓴 일조겸양은 1402년생이며, 상국사의 주지 서계주봉은 1392년생이다. 이 역시 문청이 1390년이후 1400년이전에 태어났을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즉 문청과 이수문은 거의 비슷한 연령으로서 문청은 상국사를 거쳐 대덕사에서 이수문은 상국사를 거쳐 월전(越前)에서 거의 같은 시대에 활동하였던 것이다.

물론 문청도 도일하기 이전에 이수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조선에서 배운 완성된 필력을 지니고 있었다. 시기적으로 볼 때 문청이나 이수문, 양인은 모두 안견이 활동하기 이전에 도일한 조선의 화가이다. 따라서 문청이나 이수문이 창작한 초년작 회화에 나타나는 거의 완벽한 형태의 조선화풍은 --안견 이전의-- 고려로부터 계승된 조선 초기의 화풍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일본에는 “문청(文淸)이외에도 문성(文成)이란 화가가 동시대에 활동”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문청과 문성 역시, 수문(秀文)과 주문(周文)이 모두 “슈우붕”이라 읽히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모두 “분세이”라고 읽힌다. 따라서 일본의 미술사학자 전중일송(田中一松. 타나카 이치마츠)과 원풍종(源 豊宗, 미나모토토요무네)은 문청과 문성이 동일인일 가능성이 매우 큰 것으로 보았다.[주28]

문청과 문성은 아래와 같은 이유에서 동일인일 가능성이 크다.

첫째, 명확한 문성의 확실한 전존작품은 오직 「방우도」(放牛圖, 1445년경)[주29] 한 점 뿐이다. 그것도 관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완원(完沅, ?-1463년)의 화찬에 의해서이다. 즉 문성의 작품에는 스스로의 관지가 전혀 없다. / 둘째, 문청과 문성이 모두 “분세이”라 읽힌다. 즉 문청을 제3자가 ‘문을 이루었다’는 의미에서 얼마든지 문성으로 혼동하여 달리 쓸 수도 있다. / 셋째, 원 종풍(源 豊宗)의 지적대로 문청과 문성은 모두 대덕사의 주지 일휴종순(一休宗純, 1394-1481년)과 연계를 가진 화가이다.[주30] 즉 일휴와 매우 가까이 교유하였던 완원은 문성의 「방우도」에 찬을 썼고, 일휴와 가장 친했던 일조겸양(一條兼良) 역시 문청의 「산수도」에 찬을 썼다. / 넷째, 원 종풍은 문성의 「방우도」와 문청의 작품들 가운데 「산수도」 2점 --보스톤미술관 소장의 <산수도>와 정목미술관 소장의 <산수도>-- 을 비교하여 볼때 구사한 화풍이 같다고 지적하고 있다. 더군다나 원 종풍은 “주문의 「강천원의도(江天遠意圖)」는 주문의 전칭작품이지만 오히려 문청의 범주에 속한다”고 까지 언급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하여 문성은 문청과 동일인으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위의 글머리에서 지적한 미국 ‘하와이대학교 - 웨스트 오하우’의 일본계 학자 ‘카메다 카즈코-마다르(Kazuko Kameda-madar)’는 2014년 3월에 「A Sixteenth-century Korean Landscape Painting with Seal Reading "Bunsei" 文清 (“文清”이란 인장이 있는 16세기 한국 산수도)」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그는 제목에서 문청을 16세기의 조선 산수화가로 명시하여 논고를 썼다.

카즈코가 문청의 초상화를 참고했다면 문청은 15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인데, 카즈코는 문청의 산수화 만을 가지고 그의 생존연대를 끌어 내리려고 시도하였기에 이런 착오를 범한 것이다. 문청의 산수화를 창작한 시기를 연구하면서 어떻게 문청작 초상화에 표시된 연도를 검토하지 않는단 말인가? 박사학위의 학자라기 보다는 수준 미달의 아마추어 연구가(硏究家) 아닌가?

그는 아마추어 연구가는 아닐 것이므로 카즈코의 이런 착오는 고의적이라 할 수 있다. 문청의 연대를 16세기로 끌어 내려야 문청이 무로마치 시대의 일본 미술에 영향을 준 사실을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카즈코는 일본계 학자로서 할만 한 역사 왜곡의 행동을 한 것이다.

「방우도(放牛圖)」, 문성, 1점, 1445년경. 지본수묵, 일본 교토국립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한편 안휘준 교수는 “朝鮮王朝初期의 繪畵와 日本室町時代의 水墨畵”에서 문성이 “우리나라에 건너왔던 일이 있는 ‘문성외사(文成外史)’라는 인물”이고, 그가 “우리 나라에 유했던 것은 기록에 의해 밝혀져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주31]

그러나 문성외사가 [방우도]를 그린 문성임은 틀림없으나 이 문성은 우리나라에 온 일이 전혀 없다. 다만 일본 남선사(南禪寺)와 관련이 있는 인물인 문성범공(文成凡公, ?-1517년경)이 우리나라에 온 일이 있는 문성이다. 그는 1517년에 명나라에 건너가 객사하였는데, 그가 조선에 왔던 시기는 1486년경이었다.[주32]

그런데 문성의 「방우도」는 1445년경 작품이다. 이를 보면 남선사의 문성은 15세기말과 16세기초에 주로 활동하였으며, 「방우도」를 그린 문성은 15세기 전반기에 주로 활동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즉 남선사의 문성은 「방우도」를 그린 문성보다 적어도 한 세대 이후의 사람이다. 따라서 문청과 문성이 동일인이냐의 여부를 논할 때 남선사의 문성은 논외의 대상이다.

만약 문청과 문성이 동일인이 아니더라도 문성에 의하여 문청의 존재라든가 의미와 가치가 변동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문성보다는 문청의 존재 사실이 그의 전존작품으로 너무도 분명하게 설명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는 문청과 문성이 동일인이라는 가설 위에서 문성의 「방우도」를 통하여 문청이 이미 1445년경 이전에 당시 일본에서 선호되었던 일본화된 마하파 화풍의 산수도를 창작하였음을 다시금 유추해 볼 수가 있다.[주33]

이상에서 우리는 문청의 생존연대를 탐색하면서 마하파 화풍을 일본화시키는 선두에는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두 사람의 화가, 즉 문청과 이수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알게 되었다.

4. 글을 마치며

문청의 회화세계를 살펴보면 그는 분명 조선 출신의 화가이다. 그렇다면 그의 회화가 우리 민족의 회화사에 주는 진정한 의의는 무엇인가? 우선 우리는 그를 통하여 이수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존작품의 수가 매우 적어 가리워진‥‥‥, 특히 안견 이전에 고려로부터 계승된 조선 초기 회화의 한 원형을 유추해 볼 수 있다는 데 있다. 아울러 그는 조선 초기의 회화가 일본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의 회화에 미친 영향에 잘 알게 하여 준다. 즉, 문청의 회화에는 조선화풍의 특성이 너무도 명확히 나타난다.

이러한 조선화풍의 특성은 한편으로 이수문의 회화라든가 조선화풍의 영향을 받은 주문(周文)의 회화에서도 찾아 볼수가 있다. 문청은 이수문에 앞서 도일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문청은 화풍이라든가 활동 영역에서 볼 때 실제로 여졸과 주문 사이에 위치한 화가였다.

문청과 이수문이 조선화풍을 일본에 퍼트리는데 선두에 선 장본인이며, 아울러 이들의 작품에 나타나는 일본화된 마하파화풍을 살펴 볼 때 이들은 조선화한 마하파화풍을 일본화시키는 데에도 선두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를 생각게 한다.

이러한 문청 회화가 갖는 참 의미는 오늘날에 이르도록 우리 민족의 회화사에서 거의 잊혀져 왔다. 그러나 문청과 그의 화화가 갖는 의미를 한국미술사의 조선전기미술사에서 중요시하여야 한다.

향후에 조선전기 회화사에 관한 필자의 글을 모아 책을 낼 기회가 온다면 문청에 관하여 아직 다루지 못한 부분을 더 다루겠다고 약속하며 이번 글은 여기서 마친다. (1996.01.05. 일차 초고 / 2024.09.01. 增訂)

주(註)

[1] 문청(文淸)이 조선 출신의 화가였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우리는 그가 조선화풍의 작품을 남기고 있어 그를 조선 출신의 화가로 보고 있다. 안휘준(安輝濬) 교수는 자신의 글 <朝鮮王朝初期의 繪畵와 日本室町時代의 水墨畵>에서 문청의 출신국적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세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 바 있다. 첫 번째, 문청이라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의 화가들이 있어서 그중 한 사람은 조선에서 다른 한 사람은 일본에서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을 가능성이 있고, 두 번째, 조선인 문청이 조선에서 활동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갔을 가능성이 있으며, 세 번째, 일본인 문청이 조선화풍의 작품을 남겼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가능성에 대해 우리나라의 미술사학계에서는 두 번째 가능성을 정론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일본의 미술사학계에서는 두 번째 가능성과 세 번째 가능성이 각각 모두 조심스럽게 논하여 지고 있다. 필자의 이 글은 문청이 조선인이라는 전제조건에서 시도된 것이다.

[2] 渡辺 一, 『東山水墨の畵硏究』, 1985년(增補版), p.p.50-56, 동경, 中央公論美術出版 발행.
도변일(渡辺 一, 와타나베 하지메, 1904-1944년)은 『美術硏究』 제77호(1938년 5월호)에 “문청(文淸)”을 기고하면서, 문청의 여러 작품에 조선화풍의 영향이 짙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지적하였다. 도변일의 이 글은 그의 사후인 1945년 편찬된 <東山水墨の畵硏究>의 초판본에 전재(轉載)되었다.
최근에도 미술사학자 궁도신일(宮島新一)이 『日本の美術』 No.336(1994년 5월호)에 “水墨畵-大德寺派と蛇足”을 기고하면서, 문청의 전존작품에 조선화풍의 영향이 짙게 나타난다고 지적(p.p.62-67)하였다.

[3] 李東洲, “相國寺의 墨山水”, 『日本속의 韓畵』 p.p.78~91에 수록, 1974년, 瑞文堂 발행.
崔淳雨, “朝鮮王朝初期の韓日間の繪畵交流”, 『日本の美術 No.207- 室町繪畵』 p.p.87-94에 수록, 1983년 8월, 至文堂 발행. 東京.
安輝濬, ①“朝鮮王朝初期의 繪畵와 日本室町時代의 水墨畵”, 季刊 『韓國學報』 제3집 p.p.2- 21에 수록, 1976년 여름. 一志寺 발행. ②“秀文과 文淸의 생애와 작품”, 『讀書生活』 14호 p.p.152-168에 수록, 1977년 1월. ③“일본회화와의 교섭”, 『韓國繪畫史』 p.p.149~ 154, 특히 151~152. 1980년, 일지사 발행,
필자, “文淸 그의 繪畵에 대한 理解”, 격월간 『한국고미술』 통권 제5호 pp.50~60. 1997년 3월, 미술저널 발행. 그러나 1997년에 필자가 발표한 이 논고 이후로는 문청에 관해 연구한 제대로 된 글은 아직 없다.

[4] 문청(文淸)의 작품에 낙관(落款)된 인장(印章)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문청의 ‘淸’자에서 ‘月’ 부분에 긋는 가로 획이 하나가 있고, 또 다른 하나는 가로 획이 둘이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전자의 것은 조선화풍으로 그려진 작품에, 후자의 것은 일본화되어 가는 마하파 화풍(馬夏派畵風)으로 그려진 작품에 찍혀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두점의 인장을 비교하여 보면 그 크기라든가 인문(印文)은 같다.

[5] 화가가 자신의 작품에 낙관을 하는 풍습은 중국에서는 남송대(南宋代)에 와서 일본에서는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초기에 와서 부터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6] 문성(文成)은 문청(文淸)의 본명일 가능성도 있다.

[7] 따라서 당연하게도 일본의 미술사학계에서 편향된 시각에 의해 간과하고 넘어간 부분들을 우리나라의 미술사학계에서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8] 이 목록에는 문청과 문성이 동일인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므로 문성의 「방우도」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9] 교토(京都)의 대덕사(大德寺)는 일본의 문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찰 가운데 하나이다.

[10] 안휘준 교수는 『東洋의 名畵1- 韓國1』 p.159에서 문청이 승려화가로 추측한 바 있으나, 필자의 견해로 볼 때 문청은 대덕사와 연관이 깊지만 그는 결코 승려화가가 아니다.

[11] 李源福, “김명국의 두 道釋人物畵”, 격월간 『韓國古美術』 1996년 7월호(창간호) p.p.26-31, 특히 p.28에 도판 수록.

[12] 고려말과 조선초기에는 유불선(儒佛仙) 삼교(三敎)의 도(道)를 함께 다루고 있는 『인천안목(人天眼目)』이란 불화가 간행된 바도 있다. 『人天眼目』을 통하여 우리는 고려말이나 조선초기에는 유불선 삼교의 도가 하나로 귀일한다는 관점이 널리 전파되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실제로 고려말의 유학자 목은 이색은 이 책의 발문을 짓고 쓰기도 하였다. 이를 볼 때 「虎溪三笑圖」는 이러한 철학적 바탕위에서 그려진 것으로 판단된다.

[13] 유마거사는 석가와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서 출가하지 않고 집에서 보살의 행업을 닦은 인도 비사리국(毘舍離國)의 장자이다. 그를 무구(無垢) 또는 비마라힐(比摩羅詰)이라고도 하는데, 대승불교의 이치를 터득하여 지혜의 문수보살조차도 그를 당해 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대개가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손에는 말총으로 만든 주미(麈尾)를 든 늙고 병든 노인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솔거가 진주 단속사(斷俗寺)에 유마거사상을 그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4] 도쿄국립미술관 소장의 「煙寺暮鐘圖」, 「洞庭秋月圖」는 「瀟湘八景圖」의 한 부분이다. 그런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안견 작 「瀟湘八景圖」와는 그 구도가 전혀 다르다.

[15] 『朝鮮古蹟圖譜』 권14, 1934년, 조선총독부 발행, p.1960.

[16] 安輝濬 외, 『東洋의 名畵1- 韓國1』, 1985년(초판), 도서출판 등불 발행, p.159.

또한 안휘준 교수는 문청의 「煙寺暮鐘圖」와 「洞庭秋月圖」가 「樓閣山水圖」보다 먼저 그려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참조: “朝鮮王朝初期의 繪畵와 日本室町時代의 水墨畵”, 『韓國學報』 제3호 p.21.

[1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山水圖」를 문청(文淸)이 도일하기 이전에 그린 작품이라면, 그의 도일 시기를 필자의 의견대로 1424년 이전으로 볼때 국박 소장의 이 「山水圖」는 태종조(太宗朝)의 작품이 되며, 만약 문청이 1450년을 전후로 하여 도일하였다고 해도 적어도 이 작품은 세종조(世宗朝)의 작품이 된다. 그런데 태종조이든 세종조이든 이 시기의 전존 회화는 매우 희소하다. 즉 이 「山水圖」는 조선 초기의 화풍 연구에 화풍 연구에 한 중요한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18] 渡辺 一, 앞의 책, p.55에서 이 그림은 渡邊 一이 ‘문청’론을 발표할 당시(1938년)에 福岡子爵家藏品이라 밝히고 있다.

[19] 正木美術館 소장의 「山水圖」와 秀野堂 소장의 「山水圖>, 그리고 미국 보스톤미술관 소장의 「山水圖」가 이에 해당한다.

[20] 문청(文淸)이 조선화풍으로 그린 「樓閣山水圖」라든가 「煙寺暮鐘圖」, 「洞庭秋月圖」는 매우 안온(安穩)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반면에 그가 그린 正木美術館과 秀野堂, 그리고 보스톤미술관 소장의 「山水圖」 등 후술한 산수도 3점은 전술한 3점의 산수도에서 보이는 안온성을 찾아 볼 수가 없다.
후술한 「山水圖」와 전술한 산수도를 대비하여 볼 때, 전술한 산수도에서 문사(文士)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면 후술한 「山水圖」에서는 무사의 기상을 느낄 수가 있다. 그런데 이는 조선의 선비(士人)가 문사(文士)라면 일본의 선비는 무사(武士)인 것과 같은 차이점이기도 하다. 이토록 두 부류의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느낌이 다르다. 이는 문청이 일본에서 작품을 창작하면서 그들 선비사회의 요구(수요)와 취향에 맞게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21] 安輝濬, 『安堅과 夢遊桃源圖』 p.p.151-154., 1993년(개정판), 도서출판 예경 발행.

[22] 이수문(李秀文)과 주문(周文)의 관계는 격월간 『韓國古美術』 1997년 1월호에서 「李秀文의 生涯와 藝術」을 다루며 언급한 바 있듯이 그 둘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는 화가이다. 반면에 문청(文淸)은 주문보다는 여졸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화가이다. 주문의 회화에 나타난 조선화풍의 영향은 문청과 조선화로부터 간접적인 영향과 이수문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23] 교토의 상국사(相國寺)는 조선사신들이 종종 경유하던 조선과는 인연이 깊은..., 즉 지조선파(知朝鮮派)의 대표적인 사찰이었다. 일찌기 문청(文淸)이나 이수문(李秀文)은 도일 초기에 이 상국사와 인연을 맺었던 것이고, 당시(應永年間: 1394-1427년)에 여졸(如拙)은 이 사찰의 원로격인 화승(畵僧)이었던 것이다. 현재 상국사에는 14세기 말에 絶海中津(1336-1405년)이 찬한 고려시대의 「山水圖」가 전존하고 있는데, 이를 보면 상국사와 우리나라와의 인연은 상국사의 화승 주문(周文)이 조선에 오기 이전인 고려시대부터로 추정된다.

[24] 常石英明, <書畵骨董人名大辭典> 8판, 1989년 (株)金園社 발행, p.724.

[25] 『增訂古畵備考』 p.581, "畵史如拙印 有文淸二字方印 有其引者 余見維摩半身像 有祖黙和尙贊 長祿年號 畵似周文“ 즉, 한때 存耕祖黙이 찬한 문청(文淸)의 「維摩居士像」이 여졸(如拙)의 작품으로 오인된 것이다. 『增訂古畵備考』 이외에 ‘狩野永納’의 『本朝畵印』에도 문청의 낙관이 여졸의 항목 내에 채록되어 있다.

[26] 渡辺 一, 앞의 책, p.50, 동경, 中央公論美術出版 발행.

[27] 필자는 문청(文淸)의 도일은 이수문(李秀文)보다 다소 앞섰다고 본다.

[28] 田中一松, “文成と文淸”, 『美術史』 제3권 3호(1854년 1월), p.p.95-96.

源 豊宗, 『日本美術繪畵全集』- “曾我蛇足”, 1977년, 集英社 발행.

[29] 문성의 「放牛圖」는 1445년을 전후로 하여 창작된 작품인데, 현재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30] 대덕사(大德寺)의 주지 一休宗純 역시 그림에 매우 능하였고, 당대의 여러 작가들의 작품에 화찬(畵讚)을 한 바 있다. 또한 당대의 유명한 여러 화가들, 예를 들어 墨谿라든가 曾我紹仙 등등이 여러점의 一休 초상화를 남긴 바 있다.

[31] 安輝濬, “朝鮮王朝初期의 繪畵와 日本室町時代의 水墨畵”, 『韓國學報』 제3호 p.17.

[32] 源 豊宗, 주[29]의 전게서 참조.

[33] 문청(文淸)과 문성(文成)을 동일인으로 볼 때 우리는 문청의 주 활동 시기가 「養叟宗頤像」과 「揚岐方會像」을 그리기 이전임이 또한 입증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