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이재문과 여정남 ② 교원노조와 5.16쿠데타
[연재] 안영민의 「아버지, 안재구」 (32)
“니도 노조 할끼가?”
1960년 10월, 제대한 아버지가 복직 신청을 하러 영남고 교장실을 찾았더니 주덕근 교장이 대뜸 한 말이다.
“내가 요새 교원노조 때문에 미치겠다. 대통령을 쪼까내더니 세상이 온통 미쳐 돌아간다. 아니 선생이 노동자란 게 말이 되나? 니는 우예 생각하노?”
1960년 4월 29일, 대구의 교사 60여 명이 교원노조 결성을 제안하며 가장 먼저 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이승만이 하야하고 사흘이 지난 뒤였다. 이때부터 교원노조 설립 운동이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5월 22일에는 서울대학교 문리대에서 전국 조직인 대한교원노동조합연합회를 결성했고, 7월 17일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로 확대 개편됐다. 전국적으로 10만 명의 교사 중 약 2만 명이 조합원으로 참여했다.
교원노조 결성 이전에도 대한교련(대한교육연합회, 오늘날 한국교총의 전신)이라고 교직자 단체가 있었다. 하지만 1948년 결성 때부터 철저히 이승만의 앞잡이 노릇을 한 어용단체였다. 일반 평교사들보다는 교장, 교감, 대학교수들이 중심이었고, 사학재단과 관리자의 이해를 대변해 교사들한테서는 지탄받고 외면당했다.
4.19로 이승만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허정 과도정부를 거쳐 내각제 개헌으로 민주당의 장면 내각이 등장했다. 제2공화국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하지만 장면 내각은 교원노조를 인정하지 않았다. 정치적 중립 보장과 학원 민주화 요구가 자신들에게도 위협이 될 거라고 봤다.
교원노조가 학원 비리의 온상이었던 사친회비(師親會費, 나중에 육성회비로 이름이 바뀌었다)와 각종 잡부급 폐지 운동을 적극 벌이면서 사학재단의 반발이 거셌다. 그래서 나온 반대 논리가 ‘교직은 성직(聖職)인데 어떻게 선생님이 노동자가 될 수 있냐?’였다.
“교사도 자기 노동의 대가로 월급을 받아 생활하니 당연히 노동자죠. 무조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사들의 처우가 개선돼야 더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겠습니까?”
“말하는 꼴을 보니 니도 노조 하겠구만. 그럴 거면 복직 못 시켜 준데이.”
주덕근 교장은 아버지가 영남고 3학년에 편입할 당시에도 교장이었다. 아버지를 무척 아꼈으며, 대학 때부터 영남고에 강사로 일할 수 있도록 편의를 많이 봐주었다. 주 교장은 모처럼 만난 아버지에게 신세를 한탄하듯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아버지만큼 실력 있는 수학 선생을 구하기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엄포는 놓아도 복직을 허락했다. 아버지 역시 주 교장의 입장을 고려해 복직하자마자 교원노조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아버지한테 교원노조 이야기를 듣다 보니 1989년 5월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결성 때가 생각났다.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을 내걸고 출범한 전교조는 4.19 직후 교원노조 운동의 역사를 계승하는 조직이었다. 하지만 군사정권으로부터 수천 명이 해직돼 교단에서 쫓겨나야만 했다. 그때도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온 게 ‘선생님이 어떻게 노동자냐’는 논리였다.
교원노조나 전교조나 그 출발은 ‘학생들 앞에 부끄럽지 않은 교사가 되자’는 마음일 것이다. 거짓이 아닌 진실을 가르쳐야 한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교사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사명이다. 그래서 땀 흘리는 노동이 신성하고 일하는 노동자가 세상의 근본이라는 것을, 장차 노동자가 될 제자들에게 말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복직하고 두어 달이 지나 겨울방학을 앞두고 아버지는 주덕근 교장을 찾아갔다. 교원노조 가입을 양해받기 위해서였다.
“저도 이제는 교원노조에 가입해야겠습니다. 너무 언짢게만 생각하시지 말고 교장 선생님과 교원노조 사이에서 통로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다들 하는데 자네라고 우째 예외가 되겠나. 대신 나를 너무 궁지에 몰아넣지는 말게.”
당시 영남고에서는 교사들의 80%가 교원노조에 가입해 있었다. 전국적으로도 대구, 경북의 조직률이 높았다. 그러니 주 교장도, 무조건 안 된다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말이 통하는 선생 한 명쯤 가까이 있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1961년 3월, 새 학년을 앞두고 교원노조는 설립신고필증을 교부받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장면 내각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교원노조를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데모규제법과 반공법 제정을 시도하고, 민주 진영에 대한 탄압에 나섰다.
“한민당의 후예인 민주당의 본질과 한계가 드러난 것이지. 민주당 정권은 당시 도시의 심각한 실업 문제와 농촌의 기근, 기득권의 부패 비리 등 민주개혁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어. 민중들의 생존권 요구가 터져 나오고 민주화 시위가 곳곳에서 벌어지자 기껏 생각한 게 데모규제법과 반공법을 제정해 민주화 요구를 틀어막겠다는 것이었지.”
2대 악법 반대투쟁이 거세게 일어났다. 교원노조도 여기에 앞장섰다. 각 분회마다 교원노조 합법화와 2대 악법 저지를 위한 단식투쟁을 벌였다. 아버지도 단식투쟁에 동참했다.
단식을 시작한 지 1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그날도 유도부실에서 가져온 매트리스를 교무실 앞 복도에 깔고 단식투쟁을 이어가는데, 분회장 선생이 누군가를 데리고 아버지를 찾아왔다.
“안 선생님, 이분은 민족일보 기자입니다. 우리 분회의 투쟁을 취재하고 싶다고 해서 모셔 왔습니다. 잘 말씀해 주십시오.”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자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의 이름은 ‘이재문’이었다.
“그때 이재문 동지를 처음 만났어. 내 또래였지. 눈빛은 강렬했지만, 인상은 아주 부드러웠어. 초면이었는데도 어디서 만난 적이 있는 것처럼 정이 가는 인상이었지.”
첫 만남에서는 기자와 취재원 이상은 아니었다. 주로 교원노조 합법화 투쟁과 영남고 분회 활동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재문 기자도 아버지에 대한 인상이 좋았는지 다음에 따로 만나 여러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취재를 마친 이재문 기자는 돌아갔다.
그로부터 두 달 뒤인 5월 16일 새벽,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박정희를 비롯한 군인들이 한강 다리를 건너 서울로 진입해 민주당 정권을 뒤엎고 총칼로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이들은 정권을 탈취하자마자 진보 혁신계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에 나섰다. 4.19와 같은 민중들의 반발과 저항을 미리부터 눌러버리려는 조치였다.
5월 17일 아침, 아버지도 봉덕동 집으로 들이닥친 경찰과 군인들에게 잡혀갔다. 당시 청구대학에 다니고 있던 둘째 작은아버지(안용웅)도 함께 잡혀갔다.
“나는 교원노조 활동 때문이었고, 너거 삼촌은 학생 민통련(민족통일연맹) 활동 때문이었어. 그날 대구 일대에서 잡혀간 사람만도 백 명이 훨씬 넘었어. 민민청(민주민족청년동맹), 통민청(통일민주청년동맹)의 활동가도 있었고, 혁신정당 간부들과 노조 간부들, 피학살자유족회 간부들도 있었지.”
그렇게 끌려간 곳이 남대구경찰서 유치장이었다. 그곳에다 한방에 10여 명씩 집어넣었다. 일제 경찰과 이승만 정권이 자주 자행했던 일종의 예비검속이었다. 잡혀 온 사람들이 워낙 많다 보니 조사를 받는 데도 한참 걸렸다. 아버지는 교원노조 활동에 대해 추궁받았지만, 나올 만한 게 별로 없었다. 공식 직함을 가진 간부도 아니었고, 복직하고도 두어 달 뒤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다시 작은아버지를 통해 고등학생 민통련을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혐의를 추궁했다. 어려서부터 큰형의 영향을 받은 둘째 작은아버지는 4.19의 시발이 되었던 대구지역 고등학생의 2.28 투쟁에 주도적으로 나섰다. 1961년 청구대학에 입학해서도 지역의 고등학생 운동에 깊이 관여했다. 당시에는 고등학생 운동이 대학생 운동보다 투쟁 동력이 더 컸다.
경찰은 그 배후를 아버지로 본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도 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었다. 조사는 처음 몇 차례 진행하다 나중에 흐지부지됐다. 그런데도 아버지와 둘째 작은아버지는 두 달씩이나 붙들려 있다가 석방됐다. 잡혀 온 사람들도 대부분 석방됐고, 간부 몇 사람만 기소돼 대구형무소로 이송됐다. 그 사이에 박정희가 만든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반공과 구국을 내세워 모든 진보단체와 혁신정당을 강제해산하고 불법화했다. 교원노조 역시 강제해산 당했다.
아버지는 두 달간 구금됐던 경찰서 유치장에서 쟁쟁한 선배들을 만났다. 소년 시절에는 밀양에서 활동하다 외가인 구지로 도피해 목숨을 구했고, 청년기에는 대학에 다니며 1950년대를 보낸 아버지였기에 대구의 혁신계 활동가들을 잘 몰랐다.
“안중근 의사의 종제(從弟)인 안경근 선생님과 한방에서 지내며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지. 일제 강점기 때부터 대구에서 노동운동을 하셨던 이일재 선생도 계셨고, 피학살자유족회의 이복녕 선생, 사회대중당의 간부인 강창덕 선생, 나중에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당하신 서도원 선생도 같은 방이었지. 이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 운동의 과제와 방향에 대해 정리가 많이 됐어.”
군사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진보혁신계 인사들을 대거 잡아들인 박정희는 기어이 희생양을 만들었다. 사회당과 민자통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최백근 선생과 1961년 2월에 창간된 <민족일보>의 조용수 사장에게 구속 석 달 만에 사형을 선고하고, 해를 넘기기도 전에 형을 집행했다. 장차 자신의 앞길에 걸림돌이 될 혁신계와 언론계에 재갈을 물리겠다는 의지였다. 또한 남로당 군사 조직의 간부로 활동한 전력을 지닌 박정희가,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투철한 반공주의자로 변신했는지 미국에 보여주려는 만행이기도 했다.
“남로당 출신 중에는 박정희가 예전에 남로당 간부였다면서 기대하던 사람들도 있었어. 북에서 박정희의 친형이자 김종필의 장인인 박상희 선생과 함께 민족해방투쟁을 벌였던 황태성 선생을 밀사로 내려보낸 것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겠지. 하지만 최백근 선생과 조용수 사장을 죽이는 걸 보고 그런 기대는 사라졌어. 한마디로 ‘군복 입은 이승만’이었던 거야. 특히 어린 시절에 자신을 아껴주었고, 그 인연으로 밀사로 내려온 형의 친구인 황태성 선생을 바로 사형시키는 것만 봐도 박정희가 어떤 인간인지 알 수 있지. 변절자는 자기가 살기 위해서라도 더 악랄해진다는 걸 새삼 확인할 수 있어.”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이 군인들에게 끌려갈 때 민족일보의 기자와 직원 10여 명도 잡혀갔다. 간신히 연행을 피한 이재문 선생은 오랜 시간 수배자 신분으로 지내야 했다. 5.16쿠데타로 아버지와 이재문 선생의 재회는 상당 기간 미뤄졌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첫 만남으로부터 3년이 지난, 1964년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