려말선초의 서화가 순은 신덕린과 그의 작품에 관한 고찰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75)

2024-08-05     이양재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순은(醇隱) 신덕린(申德隣, 1330~1402)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작품이 두 점 소장되어 있다. 두 점 모두 ‘이왕가박물관’에서 소장하던 것을 이관받은 작품이다.

이 두 점 가운데 ①한 점은 「신덕린 필 산수도」(덕수 5060)로서 세로 106.1cm에 가로 39.4cm 크기의 중국산 선지(宣紙)에 그린 지본수묵화이고, 다른 ②한 점은 「전 신덕린 필 산수도」(덕수 3791)로서 세로 157.5cm에 가로 38.2cm 크기의 사직(紗織)-견(絹)에 그린 담채수묵화이다.

이 두 점 가운데 그림①은 순은(純銀)의 묵서와 인흔이 두 과(二顆) 남아 있고, 그림②는 작품의 수준이 상당하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번에는 이 두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1. 순은 신덕린은 누구인가?

순은 신덕린은 고령신씨 시조 신성용(申成用)의 5세손이다. 자는 불고(不孤)이고 호는 순은(醇隱)이다. 그의 이름과 자는 『논어(論語)』 ‘이인편(里仁篇)’의 문장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에서 따왔다고 한다. ‘덕이 있으면 반드시 따르는 사람이 있으므로 외롭지 않다’라는 뜻이다. 매우 의미 있는 이름과 자이다.

신덕린은 해서와 초서, 예서에 모두 능하여 당대 이름이 높았으며, 특히 팔분체(八分體)에 뛰어나 당시 사람들이 이를 ‘덕린체(德隣體)’라 부를 만큼 일세를 풍미하였다. 포은 신덕린은 율정 윤택(尹澤, 1289~1370)의 문하에서 수학했는데,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1347~1392),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 교은(郊隱) 정이오(鄭以吾, 1347~1434) 등과 더불어 고려말 육은(六隱)이라 불렸다.

『고려사』에는 신덕린에 관하여 다섯 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①첫 기록은 고려 충정왕(忠定王, 재위 1349~1351, 12세에 즉위) 2년(1350) 1월 25일 경진(庚辰) “왕이 사부(師傅)인 상의(商議) 민사평(閔思平)과 시학(侍學)[주1] 신덕린(申德隣)·안길상(安吉祥)·봉질(奉質)·손규(孫桂)에게 곡연(曲宴)[주2]을 베풀었다.”라는 기록(『고려사』 세가 권제37)이다.

②두 번째 기록은 공민왕 원년(1352년) 3월 7일 신해(辛亥) “전왕(前王, 충정왕)이 짐독(鴆毒)에 중독되어 강화(江華)에서 훙서(薨逝)하였다. 전왕이 강화(江華)로 쫓겨나자, 전교령(典校令) 신덕린(申德隣)과 전교승(典校丞) 안길상(安吉祥), 의영고사(義盈庫使) 손계(孫桂)가 따라가 하직하고, 박성량(朴成亮)과 박사신(朴思愼)이 좇아갔는데, 모두 순군(巡軍)에게 붙잡히고 박사신(朴思愼)에게만 뒤따르는 것을 허락하였다. (전왕에게는) 생필품 공급이 충분하지 못하고 사람의 왕래마저 끊어지자 (전왕은) 근심에 잠겨 울고 지냈으며 (전왕의) 부음이 들려오자, 도성 사람으로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라는 기록(『고려사』 세가 권제38)이다. 이 두 번째 기록은 『고려사졀요』 권26에도 나온다.

③세 번째 기록은 공민왕 16년(1367) 11월 25일 “좌사의(左司議) 신덕린(申德隣), 헌납(獻納) 박진손(朴晋孫)·이준(李竴), 정언(正言) 정리(鄭釐)·안면(安勉)을 파직시켰다.”라는 기록(『고려사』 세가 권제41)이다.

이 세 기록을 통하여 우리는 신덕린이 12세에 즉위한 어린 충정왕의 신뢰를 받던 신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덕린에 관하여 『고려사』 열전 권제18 ‘홍영통(洪永通, ?~1395)’조와 권제21의 ‘손수경(孫守卿, ?~1356)’조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신덕린은 고려에 충성을 다한 신하였다. 고려에 정절을 지킨 두문동(杜門洞) 72 현인(賢人)에 포함되고 있다. 또한 신덕린은 목은 이색(李穡, 1328~1396)과 매우 깊이 교유(交遊)하였다.

2. 신덕린의 생존 시기

신덕린 행적

1330년, 출생.
신덕린의 스승은 율정 윤택(尹澤, 1289~1370)이라 한다.

1348년경, 충목왕(忠穆王, 재위 1344~1348) 연간(年間)에 문과 급제.

1350년 1월 25일, 경진(庚辰), 충정왕이 시학(侍學) 신덕린(申德隣) 등에게 곡연(曲宴)을 베풀었다. 『고려사』 세가 권제37.

1352년 3월 7일, 신해(辛亥), 충정왕이 강화(江華)로 쫓겨나자 전교령(典校令) 신덕린(申德隣) 등이 따라가 하직하였다. 『고려사』 세가 권제38.
충정왕 사후에 벼슬을 사직하고 광주 서석산으로 이거하다.

1361년, 외아들 신포시(申包翅)가 광주 서석산에서 태어났다. 『고령신씨족보』.

1366년, 공민왕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여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검교관(檢校官)이 되다.

1367년 11월, 신돈을 탄핵하다가 25일 파직되다. 『고려사』 세가 권제41.

1371년, 신돈이 죽자 공민왕의 부름을 받고, 간의봉익대부(諫議奉翊大夫) 예의판서겸보문각제학(禮儀判書兼寶文閣提學)을 제수받는다.

1382년 윤2월 23일, 남원(南原) 호촌(壺村)에서 장손자 신장(申檣, 1382~1433)이 태어난다. 『고령신씨족보』.

1383년, 외아들 신포시가 문과에 급제한다.

1390년, 차손자 신평(申坪) 출생한다.

1392년 7월, 조선이 개국하자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갔다가, 곧이어 남원(南原) 송동면 두곡마을로 낙향한다. 이후 다시 처의 고향인 광주(光州)에 은거한다.

1393년, 셋째 손자 신제(申梯) 출생한다.

1402년, 손자 신장이 21세에 동진사 4위로 급제하고, 명필 신덕린의 손자 신장이 문과 급제한 것이 태종에게 보고된다.

 

신덕린이 고려 충정왕의 신뢰를 받던 1350년은 신덕린의 생존 연대를 유추해 볼수 있는 첫 기록이다. 그리고 신덕린은 고려에 정절을 지킨 두문동(杜門洞) 현인(賢人)에 포함되고 있다. 신덕린이 두문동 72현에 들어가는 것을 보면, 그는 조선초까지도 생존해 있었다.

한편 『태종실록』 태종2년(1402) 4월 3일조에 복시(覆試)를 시행한 기록이 나오는데, 그 기록의 끝에 “지신사 박석명이 아뢰기를, “새로 급제한 신장(申檣)은 전조(前朝)의 간의(諫議) 신덕린(申德隣)의 손자입니다. 신덕린이 글씨를 잘 썼는데 신장의 필법은 그와 비슷합니다.”하니, 임금이 이를 가상히 여기어 신장을 상서(尙瑞)의 녹사(錄事)로 임명하였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은 1402년에 신덕린의 손자 신장(申檣, 1382~1433)이 21세에 동진사 4위로 급제하였는데, 당시의 태종실록에 ‘신장은 글씨를 잘 쓴 신덕린의 손자이며 할아버지의 필법을 따르고 있다’라는 사실을 이렇게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신장은 신덕린의 장손(長孫)인데, 신장의 부친 신포시(申包翅)는 『고령신씨족보』에 의하면 1361년에 태어났다. 1361년에 태어난 신포시는 22세에 신장을 낳은 것이다. 이러한 사항을 역산(逆算)해 보면, 신덕린이 「고려사」에 시학으로 기록된 1350년은 21세이다. 이를 보면 1361년에 태어난 아들 신포시와 부친 신덕린은 32세의 차이였다. 신포시가 태어난 1361년은 고려 공민왕 10년으로 신포시가 6세때(1367년) 신덕린은 파직된다. 그리고 신덕린은 파직된 1367년 직후에 개경을 떠난다. 『태종실록』 태종2년(1402) 4월 3일조 기록으로 신덕린이 1402년 이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의 생존 연대로 미루어 보아, 그가 이러한 그림을 그릴 수 있던 시기는 대체로 40대 이후의 20년이었을 것이다. 즉 1370년 이후 1390년까지의 기간이다. 따라서 신덕린이 그린 그림이 남아 있다면 그 그림은 고려말기의 그림이 된다.

한편, 신덕린은 남아 있는 문집이 없다. 현재 전하는 그의 필체는 목판으로 판각된 것이다. 그런데 오세창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주3]에는 『진단인물(震旦人物)』을 인용하여 그를 선서화(善書畵)로 구분하고 있다. 즉 글씨와 그림에 모두 능하였다는 것이다.

여기 『진단인물(震旦人物)』에서 진단(震旦)은 중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을 의미한다. 진(震)은 진방(震方)을 의미하며 정동(正東)을 중심(中心)으로 한 45도(度) 각도(角度) 안의 방향(方向)을 말한다. 즉 동북아에서 해가 뜨는 방향(旦)이니 한반도를 의미한다. 『진단인물』이란 조선의 인물이란 의미로서, 특정한 책 이름이라기보다는 위창 오세창이 모은 인물들의 평가 기록으로 판단된다. 오세창이 자신의 의견을 『진단인물』로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인 요시다(吉田永三郞)가 『근역서화징』(1928)보다 앞서 1915년에 편한 『조선서화가열전(朝鮮書畵家列傳)』의 11면에도 신덕린이 채록되어 있는데, 그 기록에도 서화에 능한 것으로 나와 있다. 1915년 이전에 ‘이왕가박물관’ 소장의 신덕린 작품 2점이 시중에 출현하였던 것을 요시다나 위창 오세창이 보았던 것 같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누가 ‘이왕가박물관’[주4]에 매도했는가를 문의하였으나, 개인 정보 보호 차원이라는 명분으로 답변하지 않았다. 오세창이나 요시다는 위에서 언급한 ‘이왕가박물관’이 소장하던 신덕린의 서화를 보았기에 신덕린에 관한 이런 기록을 남긴 것으로 여겨진다. 신덕린의 관지가 있는 ①「신덕린 필 산수도」(덕수 5060)의 왼쪽 최하단에는 한 과의 주인(朱印)이 보이는데, 이 주인은 소장인으로 판단된다.

3. 그림의 바탕에 대한 관찰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그림①은 옛 중국산 선지에 수묵으로 그리고 있다. 이 선지는 먹의 흡수가 빠르다. 따라서 작가는 보통 두 장의 종이를 배접한 상태에서 그림을 그린다. 이런 경우 웃 장의 그림이 배접된 아래 장으로 스며 들어가기도 한다. 근래에 이러한 작품은 수리할 때 두 장을 분리하여 또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따라서 이러한 옛 중국산 선지를 이용한 그림을 볼 때는 먼저 표면의 상태를 살피게 된다. 그림①을 보면 표면이 매우 매끄러운데, 이는 이 작품이 원래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선지는 그림을 그릴 때 먹의 농도와 발묵(潑墨)을 유의하여야 한다. 그림①에서 순은(醇隱)이라 쓴 부분은 약간 번진 발묵을 보인다. 그러나 갈라진 종이의 틈을 살펴보면 첨관(添款)한 관지(款識)는 아니다.

그림① 오른쪽 상단부의 관지나 왼쪽 하단부 끝의 주인은 이미 오래전에 찍혀진 것이다. 현전하는 중국 고서화를 보면 선지에 그린 그림들은 시간이 지나면 훼손이 심한 상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현전하는 중국의 명작들은 견본(絹本)에 그린 작품이 많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두 작품 가운데 그림②는 씨줄과 날줄을 듬성듬성하게 짠 들여다보이는 망사(繪絹, 網紗) 위에 아주 얇은 선지를 덧씌운 지본체(紙本體)에 그림을 그렸으므로 ‘사직(紗織)-견(絹)’이라 말한 것 같다.

그러나 회견 위에 종이를 붙인 지본체의 표면(종이)은 원명대(元明代)의 아주 얇은 백면선지(白綿宣紙, 白綿紙, 宣紙, 畵宣紙)인데, 회견 밑에 붙인 바탕 종이는 좀 더 두텁다. 그렇게하여 약한 선지 위에 그리는 작품이 쉬 손상되지 않도록 한다.

그러나 지본체 상면은 워낙 얇은 종이를 붙였으므로 망사의 줄이 보인다. 그리고 시대가 흘러가면 종이가 조금씩 닳게 되므로 이러한 과정을 거친 종이를 대충 보아 넘기면, 마치 지본체의 상면은 비단 면인 것으로 판단하기도 한다.

②「전 신덕린 필 산수도」 부분. [사진 제공 – 이양재]

견본과 선지는 수묵을 그릴 때 나타나는 먹물의 번짐이 다르다. 선지는 견본 보다 발묵 효과가 크다. 옛 중국 선지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종이가 바로 얇은 망사(網紗) 견직물(絹織物) 위에 아주 얇은 선지를 배접해 올린 것이다. 대체로 망사 견직물을 종이 뜰채(발 = 沷)에 얹어 놓고 종이를 떴는지, 아니면 배접했는지는 더 연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원대(元代) 사경 축본(軸本) 가운데 이러한 선지를 망사 견직물 위 아래에 배접한 종이에 쓴 것이 현전하는데, 이러한 사경 용도의 지본체는 배접한 종이가 그림용 지본체보다 두텁다. 따라서 지본체에 쓴 사경 축본은 열었다 폈다 하는 과정에서 앞뒤에 붙여진 종이가 들뜨거나 일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훼손 현상이 발생한다. 그러한 훼손 현상을 참조하여 보면 이러한 그림의 지본체(紙本體)는 배접하여 제작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이런 지본체는 만든 후에 그 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쓴다. 대체로 작가나 그 주변 사람이 이러한 지본체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현전하는 고려불화 소품 중 극소수 작품은 천(베) 위에 종이를 배접하여 그린 것이 현전하기도 한다.[주5] 이 작품의 가로 폭은 38.2cm이다. 「몽유도원도」의 세로 폭은 38.7cm이다. 물론 비단은 짜기에 따라 폭과 길이를 조절할 수 있다. 특히 고려불화를 그릴 때 사용한 비단은 많은 경우 고려에서 회견(繪絹)으로 직조한 비단이다.

4. 현대 논증의 아이러니와 연구의 표준성

우리 민족의 전통사회에서, 즉 식민지 시대 이전의 우리나라의 서화비평가들이 우리 고서화를 논평 및 품평한 기록이 상당히 남아 있다. 고려중기 이후 조선말까지 우리나라의 사대부나 문인들은 시서화(詩書畵)를 모두 잘하는 것을 삼절(三絶)이라 하여 높이 쳤다. 그들은 실제로 그 시대 최고의 감식안이기도 하였다. 우리가 회화사를 연구하면서 당대나 직후 시대의 비평이나 고증을 중요시하는 것이 거기에 있다.

반면에 현대의 일부 감식 및 감정가들은 한문 문맹에 가깝고, 시서화도 문맹인 자들이 당대의 감식안 노릇을 하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현대의 우리가 알량한 과학적 증거를 들이대며 수백 년 전 작품을 수백 년 전 감식 및 감정 비평가들의 식견을 따돌리며 부정하려는 태도는 민족적 문물(文物)의 구안자(具眼者)들에게는 가소로운 일로 보인다는 것을 여기서 지적하고 싶다.

다시 말하자면 이미 수백 년 전 선인들이 구축하여 놓은 평가에 따르거나 존중하여 감식 및 감정하여야 하는데, 거꾸로 근래에 논리화된 고려불화에서 산수화적 요소를 찾아내어 고려의 산수화를 논증한다는 것은 순서가 뒤바뀐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우리 문화를 파괴하고 단절시켜 온 일제의 안목으로 우리 문화를 보는 문제점은 심각한 면을 도출하고 있기도 하다는 점이다. 우리의 눈으로 우리의 것을 못 보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의 과학적 방법론에 따라 감식 및 감정할 때 이러한 면을 먼저 인식하여야 한다. 그런데 과학적 감식안을 갖추지도 못한 자들이 선인들의 평가를 우습게 말하는 때도 있는데, 그것은 기본을 갖추지도 못한 망동이다.

동북아의 한국 중국 일본의 미술사를 연구할 때, 동북아 미술의 원천적 출현과 전래 과정을 볼 때 중→한→일 순이며, 이 순서로 미술의 연관성을 검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같고 유사하고 다름을 분명하게 인식하여야 한다.

고려시대의 미술은 고려시대의 미술 풍토에 맞는 고려시대의 특성을 이해하는 눈으로 보아야 한다. 특히 산수화라든가 초상화. 풍속화, 영모화 등등은 더욱더 그러하다. 고려시대의 산수화에는 고려 문인들의 이상적 지향점이 들어 있기도 하다. 고려불화에는 고려불교의 신앙적 지향점이 나타나 있는 것과 같다.

고려 산수화에 나타난 그러한 지향점이 조선초기의 산수화에서도 나타난다는 관점에서 대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조선초기의 가장 확실한 조선화의 명작 「몽유도원도」는 중요한 위상이 있다. 「몽유도원도」 이전의 작품에는 「몽유도원도」가 나오기까지 변화해 온 산수화적 요소가 들어 있을 것이다. 「몽유도원도」를 능가하지는 않지만, 「몽유도원도」에 나오는 요소를 「몽유도원도」 이전의 산수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나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신덕린 작품이라 관지되어 있거나 전하고 있는 두 점의 산수화를 검토하면서 이 두 점의 작품이 「몽유도원도」 이전에 그려진 작품이라는 판단이 섰다.

5. 삼원법(三遠法)의 고려 유입

서양의 원근법과는 달리 동북아의 산수화에서는 공간감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고원·심원·평원 등 3가지 종류의 투시법”이 있다. 그리고자 하는 자연경관을 바라보는 시선의 세 가지 각도인 고원(高遠)·심원(深遠)·평원(平遠)을 말하는데, 7,8세기경 중국으로부터 삼원의 형식이 출현하기 시작하였고, 오대(五代)의 이성(李成, 919년~967년)이나 송초(宋初) 범관(范寬)의 작품에서도 삼원법이 나타나는데, 삼원법의 이론은 북송(北宋)의 화가 곽희(郭熙, 1023~1085)의 아들 곽사(郭思)가 정리 편찬한 『임천고치(林泉高致)』에 의하면 곽희에 이르러서야 정립하고 완성되었다고 한다.

곽희 삼원법의 고원은 산 아래에서 산꼭대기를 올려다보는 앙시(仰視)로, 심원은 산 앞에서 산 뒤를 굽어서 넘겨다보는 부감시(俯瞰視)로, 평원은 가까운 산에서 먼 산을 바라보는 수평시(水平視)로 정의하였다. 그리고 고원의 시각으로 본 경우 산세가 높이 솟아 있어 산색이 청명하고, 심원은 층층이 중첩되어 무겁고 어두우며, 평원으로 바라보면 나직하기 그지없어 밝게도 보이고 어둡게도 보인다고 하였다.

또한 고원 산수에서 인물은 크고 뚜렷하게, 심원에서는 작고 세세하게, 평원에서는 크지 않되 맑고 깨끗한 모습으로 그려야 한다고 하였다. 고원은 경관의 웅장함을, 심원은 깊음을, 평원은 넓음을 나타내는 데 각각 활용되었다.

하지만 10,11세기 이후로 산수화가 자연의 다양한 속성을 동시에 담는 것을 지향하고, 화면 안에서 거닐고 머무를 수 있는 소요감을 유발할 수 있는 공간을 형성하기 위해서 삼원법을 병용하였다.

삼원법을 병용한 대표적인 화가 곽희의 작품으로는 「조춘도(早春圖)」(臺灣 古宮博物館 소장)가 있다. 그리고 고려에서는 현종(顯宗, 재위 1010~1031) 때 만든 고려 초조대장경 「어제비장전 판화(御製秘藏詮 版畫)」(성암고서박물관 소장)에서도 삼원법이 나타나는데, 초조대장경이 만들어지는 시기는 곽희가 삼원법을 정립하고 완성하기 훨씬 이전이다. 따라서 고려에는 적어도 초조대장경이 만들어진 11세기 초 이전에 이미 오대(五代)의 이성(李成, 919년~967년)이나 송초 범관(范寬)의 삼원법이 유입되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곽희가 완성한 삼원법은 조선초의 화가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에도 나타나는데, 그렇다고해서 곽희의 삼원법이 조선초에 들어온 것은 아니다. 곽희의 삼원법은 훨씬 이전인 11세기 후반, 곽희의 삼원법이 완성된 직후 고려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제비장전 판화」 이후 고려의 회화는 거의 모두 불교회화, 그중에서도 고려불화이다. 불교회화에서 나타나는 산수화적 요소라든가 수묵의 발묵 현상을 탐색함으로써 고려 산수화로 현전하는 작품들의 가치를 논하거나 규명할 수 있다.

현전하는 고려시대의 산수화로는 일본 상국사 소장의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가 있으며, 산수를 배경으로 한 노영(魯英, ?~1307~?)의 「고려태조 담무갈보살 예배도(高麗太祖 曇無竭菩薩 禮拜圖)」(1307년, 흑칠 나무 바탕에 금니, 12×21cm)와 익재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기마도강도」(견본채색, 28.8×43.9cm)가 있고, 또한 묘만사 소장의 해애(海涯, 고려말)가 그린 「세한삼우도(歲寒三友圖)」도 고려 산수화 연구에 참고가 된다.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 작가미상, 고려말, 일본 상국사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고려태조 담무갈보살 예배도(高麗太祖 曇無竭菩薩 禮拜圖)」, 노영(魯英) 작, 1307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기마도강도」, 이재현, 견본채색, 28.8×43.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세한삼우도(歲寒三友圖)」, 해애(海涯) 작, 일본 묘만사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물론 순은 신덕린의 작품①과 전칭 작품②에서도 삼원법이 나타나고 있다. 삼원법은 현대의 중국화나 한국화, 일본화에서도 나타나는 동양화의 기본적인 산수화법이다.

6. 고려말의 남종화(南宗畵) 수용에 관하여

동양화(東洋畵), 여기서 동양화라는 개념은 중국과 한국, 일본의 그림을 뭉뚱그려 한꺼번에 부르는 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중국화를 북종화와 남종화로 나누는 것은, 중국 명나라 말의 서화가 겸 이론가 동기창(董其昌)과 그의 친구 막시룡(莫是龍)이 1610년경에 쓴 글로 전하는 『화설(畵說)』에 정리된 옛 중국의 산수화를 남종과 북종 두 파로 구분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남종화란 단어가 명말에 생겨 났다고 해서 남종화가 명말에 발생한 것은 아니다.

남종화와 북종화의 갈래 구분은 이미 북송대부터 차츰 생기기 시작했다. “북송의 소식(蘇軾)과 그의 친구들이 사인(士人)과 화공의 그림은 그들의 신분적·교양적 차이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 차이가 난다는 논리를 세웠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사인지화(士人之畵)’ 또는 ‘사대부화(士大夫畵)’라는 용어와 사대부 화론(畵論)을 만들었다. 즉 사대부화란 그림을 업으로 삼지 않는 화가들이 여기(餘技) 또는 여흥(餘興)으로 자신들의 의중(意中)을 표현하기 위해 그린 그림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기법에 얽매이거나 사물의 세부적 묘사에 치중하지 않았다. 단지 그리고자 하는 사물의 진수를 표현할 수 있을 만큼 학문과 교양, 그리고 서도(書道)로 연마한 필력(筆力)을 갖춘 상태에서 영감을 받아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었다. 북송대는 사회적으로 문인(文人)이 곧 사대부라는 등식이 성립해 있던 때였다. 그러나 원대부터는 반드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아 결국은 사대부화 대신에 문인지화(文人之畵)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동기창의 남북종화론이 성립되었고 이후 남종화와 문인화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주6]

우리나라에서 남종화가 유행한 것은 조선중기부터이다. 이후 18세기 전반기에 남종문인화가 본격적으로 수용되고 하나의 양식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문헌기록을 보면 고려시대에도 사대부들이 원나라를 통하여 북송대 사대부화(士大夫畵) 이론을 접했음이 확인된다. 고려 사대부들은 문인화에서 산수화 다음으로 중요시한 묵죽(墨竹)과 묵매(墨梅)를 많이 그렸음은 여러 문헌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산수화 작품으로 회화사학계에 공인한 현전하는 남종화는 아직 없다. 따라서 순은 신덕린의 작품이 고려시대의 남종화로 공인되는 것은 우리 회화사를 바꿔 쓸 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다.[주7]

7. 신덕린 화에 관한 검토

위에서 언급한 작품①과 ②는 육안으로 대비하여 보면 이질적(異質的)인 작품으로 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확대하여 검토하면, ①「신덕린 필 산수도」는 지본수묵화이고 ②「전 신덕린 필 산수도」는 지본체 수묵담채화이다. 두 점의 작품은 그려진 바탕이 다르고, 작품을 그릴 때의 표현법이 다르다.

①「신덕린 필 산수도」는 지본수묵화로서 세로 106.1cm에 가로 39.4cm 크기이고, ②「전 신덕린 필 산수도」는 지본체 수묵담채화로서 세로 157.5cm에 가로 38.2cm의 크기이다. 이 두 작품은 모두 세로가 긴 작품이다. 그림에 종축(縱軸)으로 말렸을 때 나타나는 손상 흔적이 있는 것을 보면, 현재 이 두 작품은 펼쳐서 보관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족자(簇子)의 상태로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보존 상태는 아주 양호하다.

①「신덕린 필 산수도(왼쪽) 와 ②「전 신덕린 필 산수도」. [사진 제공 – 이양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①「신덕린 필 산수도」(덕수 5060)와 ②「전 신덕린 필 산수도」(덕수 3791)는 신덕린의 관지가 있거나 신덕린의 작품으로 전하는 그림이다. 이 두 점의 그림은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고 폄훼해서는 안 된다. 수준을 넘어선 수작(秀作)이다. 필자가 이 작품 실물을 처음 본 순간(2024년 7월 25일 오전 11:10경), 이 작품①은 충격적으로 다가왔고, 중국의 고서화 감정학 전문가들과 공동 연구할 필요가 있음을 직감하였다.

세로가 긴 종축(縱軸)의 작품①과 ②는 가로가 긴 횡축(橫軸)의 작품과는 그 구도가 다르므로, 종축의 작품과 횡축의 작품은 동일선상에서 공통성을 대비하여 논하기가 어렵다. 작가의 표현 의도는 전혀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만 세부적인 부분에서의 공통 특성은 찾아볼 수 있다.

- 작품①「신덕린 필 산수도」(덕수 5060).

작품①에서 보이는 관지는 판독이 정확하기로 정평이 난 박철상 박사에게 부탁한 결과 작품 상단부의 관지는 묵서 “醇隱(순은)”과 주인(朱印) “醇隱(순은)”과 德隣(덕린)이며, 왼쪽 하단부의 관지(소장인)는 “左圖右史(좌도우사)”였다. ‘좌도우사’는 ‘좌도우서(左圖右書)’와 같은 의미로서 장서가 풍부함을 말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볼 때 묵서 ‘醇隱’은 좀 먹물이 번져 있다. 이는 이 글씨를 옛 중국의 선지에 썼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덕린의 관지를 세부적으로 확대 관찰하여 보면 이 묵서와 주인은 이 그림이 그려진 직후에 찍혀진 것으로 보인다. 지본의 갈라진 틈으로 먹물과 인주의 흔적이 전혀 없다. 그것은 소장인 ‘좌도우사’에서도 같다.

작품① 「신덕린 필 산수도」 관지(왼쪽)와 소장인. [사진 제공 – 이양재]

우리 선조들이 인장을 찍는 통상적인 관념을 참조해 볼 때 국왕이나 선대의 관지 상부나 주변에 인장을 찍지 않는다. 통상적으로 볼 때 왼쪽 최하단부는 문장이나 그림이 끝나는 부분으로 거기에서부터 소장인을 찍으며 위로 올라간다. 그림의 상단부 중앙에는 신분이 높은 황제나 찍을 수 있었다.

왼쪽 최하단부에 소장인(所藏印)을 찍은 것을 보면, 그 소장인은 신덕린의 자손의 소장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좌도우사’를 말할 정도로 풍부한 장서(藏書)를 갖추고 있는 그는 누구일까? 혹시 세조(世祖, 1417~1468)로부터 수 많은 그림과 책이 있던 안평대군의 담담정(淡淡亭)을 증여받은 보한재 신숙주(申叔舟, 1417~1475)나 그의 후손은 아닐까? 만약에 소장인의 주인이 신숙주나 그 후손이라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작품①은 신덕린이 남긴 작품이 확실하다.

작품① 「신덕린 필 산수도」에 나타난 화법은 조선시대 전기간(全期間)에 보이는 화풍이다. 다만 그림의 됨됨이에서 적어도 15세기 이상으로 올라가는 그림이다. 우리나라에는 14~15세기의 그림이 별로 없어 당시의 재질에 관한 기준 유물이 없다. 더군다나 이 작품은 중국의 옛 종이(古紙)에 그려져 있어 려말선초의 옛 종이와 대비한다고 해서 의미 있는 결론이 나올 수 없다.

① 「신덕린 필 산수도」 중앙 부분,  지본수묵. 사람이 없다. 초옥의 모습이 「몽유도원도」와 유사하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몽유도원도」 부분, 견본채색. 사람이 없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작품①에서의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림의 중심부에 보이는 초옥(草屋)과 사선으로 그려진 문이다. 이 작품을 하나의 가설을 세우고 안견의 「몽유도원도」(1447년)와 대비하여 보자. 이는 무리한 대비일 수도 있지만, 봄을 그린 횡폭(橫幅)의 「몽유도원도」와 초겨울을 그린 종폭(縱幅)의 작품① 「신덕린 필 산수도」는 통하는 점이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작품① 「신덕린 필 산수도」 역시 안견의 「몽유도원도」에서처럼 사람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의외(意外)의 공통성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폐쇄된 산중에 초옥이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으며, 초옥으로 이르는 길은 잔도(棧道)로 그리고 있다. 초옥 왼쪽에는 대나무를 그리고 있지만, 다른 나무들은 모두 잎을 떨군 늦가을의 정취(情趣)를 그리고 있다.

만약 이러한 작품① “「신덕린 필 산수도」를 횡폭의 작품으로 계절을 봄으로 바꾸어 심산유곡으로 그린다면 어떤 구도와 모습으로 그렸을까?”를 상상해 보자. 최선의 명작은 어떤 모습으로 나올까? 「몽유도원도」가 아닐까?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작품① 「신덕린 필 산수도」는 안견의 「몽유도원도」의 출현을 끌어낸 몽학(蒙學) 선생의 역할을 한 수준의 보편적 작품으로 볼 수도 있다.

작품①의 이해를 위하여 엉뚱하게도 「몽유도원도」와 대비를 하였다. 이러한 엉뚱한 대비로 필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를 독자들이 생각하도록 하였다. 인적이 없고 문을 닫은 초옥, 심산유곡의 늦 가을, 이러한 그림이 표현하는 쓸쓸함은 무엇일까?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의 왕권(王權)을 향한 야욕이 들어있는 작품이다. 필자는, 「몽유도원도」와 상반적인 작품① 「신덕린 필 산수도」에서 몰락해가는 고려의 운명을 보는 것 같다. 작품①이 신덕린의 작품이 아니라고 간단히 부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물을 놓고 확대하며 세밀하게 살펴보면 이 작품은 그리 단순히 부인만 할 작품이 아니다. 이럴 때 중국의 화화사학계에서는 진품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또한 ‘이왕가박물관’에서도 「신덕린 필 산수도」라고 명명하였는데, 그 근거는 이 작품의 관지에 있다. 관지에 따라 이미 한 세기 전에 이 작품①을 신덕린의 작품으로 단정(斷定)한 것이다. 필자는 이제 우리나라의 회화사학계에서의 진중하고 종합적인 검토를 제안한다.

- 작품②「전 신덕린 필 산수도」(덕수 3791)

작품②는 관지나 소장인이 없다. 그러나 작품의 수준은 작품①「신덕린 필 산수도」를 능가한다. 이 작품에는 두 인물이 그려져 있다. 한 인물은 지팡이를 집고 다리를 건너고 있고, 다른 한 인물은 초옥에서 다리를 건너가기 시작한 인물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다리를 건너가는 인물의 정면에는 초옥과는 형태가 다른 큰 건물의 지붕선이 그려져 있다. 그 큰 건물의 지붕선을 보면 이 건물은 상당한 수준의 기와집을 묘사한 것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작품②에 그려진 두 인물은 동일인임을 지적하고자 한다. 한 인물을 한 화면의 두 곳에 그린 것이다. 다리를 건너기 시작한 인물이 초옥의 인물을 찾아가는 것 같지만, 다리를 건너는 인물이 향하는 방향에는 큰 건물이 있다. 그 큰 건물은 지붕의 선으로 볼 때 상당히 큰 기와집을 묘사한 것이다. 초옥의 인물과 다리를 건너는 인물의 묘사는 기본 꼴이 같다. 즉 작품②는 그림의 상부와 하부의 두 장면을 하나로 연결한 그림이다. 그림의 상부 초옥에 그려진 인물이 그림 하부의 다리를 건너기 시작한 자신의 모습을 봄으로써 심산유곡의 초옥을 떠나 큰 기와집이 있는 곳으로 가고자 하는 욕망을 표출하고 있다.

이러한 한 인물을 주제로하여 한 화면에 복수(複數)로 그려 넣는 구도(構圖)는 조선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조에 만든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1434)에 수록한 모든 그림에서도 보인다. 한 화면에 한 인물이 복수로 등장하는 묘사는 노영이 그린 「고려태조 담무갈보살 예배도(高麗太祖 曇無竭菩薩 禮拜圖)」(1307)에서도 고려 태조가 중복(重複)하여 그려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렇게 작품②에 그려진 두 인물은 동일인이고, 그림의 상부와 하부는 두 장면을 하나로 연결한 그림이라는 관점으로 볼 때 작품②가 지향하는 의미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만약 관지가 없는 작품②도 신덕린의 작품이라면 이 작품은 작품①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그려졌을 것이다. 작품②에는 순은 신덕린이 벼슬을 잃고 낙향한 심경이 담겨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②「전 신덕린 필 산수도」 중앙 부분. [사진 제공 – 이양재]

이 작품에 나타난 수지법이나 준법 역시 고려말과 조선초에 유행했던 것이다. 최소한 조선초에는 이러한 화풍과 구도가 유행되었던 것은 확실하다. 작품①과 ②는 동일 작가의 작품이라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이질적(異質的)이다. 그러나 작품②는 신덕린의 작품①의 창작 수준을 넘는 작품이지만, 작품명은 신덕린의 작품으로 전한다는 「전(傳) 신덕린 필 산수도」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과연 고려말기의 작품일까? 위에서 그림이 그려진 바탕을 관찰하면서 언급하였듯이 이 그림을 그린 바탕체는 원말(元末)의 사경(寫經) 일부에서 보이는 예와 같은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사경은 감지(紺紙)인데 비하여 이 그림의 바탕체는 어주 얇은 백면지를 배접했다는 점이다.

작품②는 회화 격식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그림이지만, 중국 원대의 산수화에서 보이는 그림들과는 다른 필법을 보이고 있는데, 필자는 이 작품이 그려진 재료적 특성에 관하여 중국의 고서화 감정학자들과 공동으로 연구할 것을 제안한다. 그런 연후에 이 작품에 관한 본격적인 탐색이 진행되어야 하므로 필자는 이 작품에 관해서는 일단 평가를 신중하게 유보하고자 한다.

8. 신덕린의 서법, 즉 ‘덕린체’에 관하여

현전하는 신덕린의 유묵은 발견된 바 없다. 다만 단편적인 서체를 보여주는 판각본에 그의 필체가 들어 있다. 조선시대에 우리나라 명필(名筆)의 필적을 새긴 각첩(刻牒)이 다수 간행된 바 있다. 김생(金生, 711~?)이나 이암(李嵒)을 비롯한 우리나라 역대 명필의 필적이나 비문을 모각(模刻)·탁인(拓印)하였다.

우리나라 명필의 각첩으로는 여러 사람의 글씨를 한데 모은 집첩(集帖, 筆譜)과 한 사람의 글씨만을 새긴 독첩(獨帖)이 있다. 집첩으로는 안평대군 이용(李瑢, 1418∼1453)이 간행한 『비해당집고첩(匪懈堂集古帖)』이 가장 이른 예로 알려져 있다. 이후 『해동명적(海東名迹)』 『동국명필(東國名筆)』 『대동서법(大東書法)』 등 다수의 집첩이 간행되었다.

『해동명적』에 수록된 신덕린의 서체. 사진 ; 『암헌서법』, 2019, (사)송헌문화재단 발행. [사진 제공 – 이양재]

이 가운데 『해동명적』은 신공제(申公濟, 1469∼1536)[주8]가 간행한 석각첩(石刻本)인데, 편찬자 신공제는 신덕린의 5세손이고. 신공제는 신장의 증손자이다. 전책(前冊)에는 조선의 문종과 성종 어필과 최치원·김생·영업·탄연·이암·신덕린의 글씨가, 후책(後冊)에는 이강·승혜근·성석린·박초·권근·이첨·정도전·정총·민자복·하연·신장·무명씨의 글씨가 실려 있다. 내용은 시문류이고 서체는 해행초인데 글씨가 정선되고 각법도 양호하다. 후에 이를 모각한 목각본도 전한다.

이 『해동명적』 전책에 신덕린의 「왕발시 등왕각(王勃詩滕王閣)」이, 후책에 신장의 칠언절구 2건을 수록하고 있다. 1859년 박문회(朴文會)가 편찬한 『고금역대법첩(古今歷代法帖)』 장45에도 신덕린의 서체를 두 줄에 걸쳐 간략히 수록하고 있다. 신덕린은 해서(楷書) 초서(草書) 예서(隸書)에 모두 능하여 당대에 이름이 높았으며, 특히 예서의 일종인 팔분체(八分體)에 능하여 그의 팔분체를 덕린체(德隣體)라고 불렸다.

9. 맺음말

필자가 이 「신덕린 필 산수도」와 「전 신덕린 필 산수도」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은 월간 「미술세계」 1993년 11월호와 12월호[주9]에 혜원 신윤복의 가계를 확정 기고하면서 알게 되었다. 필자는 지난 수십 년간 수 많은 작품을 보아왔지만, 우리 앞에 꺼내어진 그림 두 점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국립중앙박물관 유물부 담당자는 작품② 「전(傳) 신덕린 필 산수도」부터 열람대에 올려 놓았다.[주10] 작품② 「전(傳) 신덕린 필 산수도」는 아무런 관지가 없어, 우선 창작연대부터 규명하여야 한다고 본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창작연대를 규명한 후에 누구의 작품인가를 규명하여야 하지만, 창작연대가 고려말이나 명초로 규명된다고 해서 신덕린의 작품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신덕린의 작품으로 전한다”는 말은 작품의 유래를 설명하며 언급하여야 하며, 두 작품은 함께 묶은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어서 열람대의 작품은 ①「신덕린 필 산수도」로 교체되었다. 작품①은 작품②에 비하면 작품이 주는 화려함은 약하다. 그러나 작품①에는 순은 신덕린의 자필 관지가 있다. 작품①에 관해서는 작품②보다 세 배에 이르는 시간 동안 탐색하며 많은 사진을 중복해 찍었다.

결과적으로 볼 때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신덕린 필 산수도」는 신덕린의 작품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필자는 부정적인 의심의 눈으로도 보았다. 그러나 실물을 세부 검토하는 동안 그 의심은 말끔히 사라졌다.

이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이다. 진품으로 판정하면 국가나 박물관에 유익한 일이고, 필자가 간여한 특정 국가유산이 아니므로 자유로운 논리의 전개를 의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직 아무도 이 작품에 관한 연구를 시도하지 않았기에, 필자가 나서서 이 작품을 진품으로 판정한 것을 상당히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아무도 연구를 시도하지 않았기에 자유롭게 필자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필자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작품① 「신덕린 필 산수도」는 순은 신덕린의 작품으로 비정(比定)하며, 작품② 「전(傳) 신덕린 필 산수도」 역시 같은 시기의 작품으로 비정해도 좋다”고 판단한다. 필자 다음의 연구자는 이 작품을 “‘이왕가박물관’에 언제 누가 매도했는가?”를 확인할 수 있었으면 한다.

주(註)

[주1] 1350년에 신덕린의 관직은 시학(侍學)인데, 한국고전용어사전에 의하면 고려 때 시학은 “고려 공양왕 2년(1390)에 두었던 동궁(東宮)의 벼슬. 시학(侍學)은 3품부터 6품까지 있었음.”이라고 하고 있다. 이는 틀린 주장이다. 시학(侍學) 관직은 이미 『고려사』 세가 권제18, 의종(毅宗, 재위 1146~1170) 21년(1167) 9월 11일 자 기록에 시학공자(侍學公子)라고 나오며, 명종(明宗, 재위 1170~1197) 12년(1182) 5월 25일(갑오) 기록에는 “태자(太子)가 직접 학생들을 시험하여 하거원.(河巨源) 등 8인을 선발하여 시학(侍學) 직책에 충당하게 하였다.”라고 나온다. 1390년과 관련한 시학은, 1390년에 시학을 좌사경(左司經)으로 고친 것인데, 이를 시학의 시작으로 잘못 해독한 것이다. 1350년에 신덕린은 고려의 시학으로서 6품 벼슬을 하였다.

[주2] 곡연(曲宴)은 임금이 궁중내원(宮中內園)에서 베푸는 소연(小宴)을 말한다.

[주3] 『근역서화징』은 1917년 오세창(吳世昌)이 편찬을 시작하여, 1928년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에서 출판하였다. 기록에 나타난 역대 서화가 1,117인을 신라, 고려, 조선의 상·중·하 5편으로 나누고, 이를 출생연도순으로 배열하였다. 서술 방법은 성명에 이어 자·호·본관·가세(家世)·출생연도·수학(受學)·관직·사망연도 등의 대강을 소개한 후에, 예술에 대한 기록과 논평을 싣고 그 근거 서목을 밝혔으며, 유전되는 작품의 명칭과 소재를 적었다.

이 책보다 앞서 일본인 요시다(吉田永三郞)가 간략한 『조선서화가열전(朝鮮書畵家列傳)』을 편찬하였다. 요시다는 1910년도 8월 군산농사조합의 토지등록자 명부에 지주(地主)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책의 편찬자와 동일인(同一人)일 가능성이 높다.

[주4] ‘이왕가박물관’은 1909년 대한제국기 황실에서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박물관이다. 1907년 순종이 경운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하게 되자, 순종을 위무한다는 목적으로 창경궁에 식물원, 동물원과 함께 이왕직에서 박물관 설립을 추진했다. 1909년 11월 1일부터 일반에 공개하였다. 황실에서 설립하고 운영하였으며, 명품을 중심으로 불상·도자·회화 등을 수집함으로써 공공 박물관으로서 기능하였다. 1938년 덕수궁으로 옮겨 ‘이왕가미술관’으로 통합되었으며, 그 후신인 ‘덕수궁미술관’이 1969년 국립박물관에 통합됨으로써, ‘이왕가박물관’ 소장품의 대부분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의 주요 바탕을 이루고 있다.

[주5] 고려불화에서의 배채법 또는 이채법은, 얇은 견본에 그림본을 그린 후에 채색을 입히고 그 위에 종이를 배접한 후에, 뒤집어 견본 위에 그림을 그리는데, 그림②는 만들어진 지본체 위에 그림을 그린 것이다. 이 점은 어쩌면 고려불화의 본체와는 다르면서도 상통성이 있는 것을 느끼게 한다. 중국에서 원말명초의 고불화나 산수화 가운데 이런 지본체에 그려진 것들이 현전한다.

[주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남종화’, , 한국학중앙연구원.

[주7] 필자 역시 작품① 「신덕린 필 산수도」를 보았을 때 남종화이므로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단정하기를 주저하였다. 그러나 조선중기 이전의 작품이므로 “15세기말의 작품”이라고만 동행한 두 분 앞에서 단언하였을 뿐이다. 이 작품의 실물을 보면서 문득 중국 원대의 많은 서화들이 떠 올랐다. 필자는 작품①을 검토하면서 작품②의 우수성은 머리에서 지워야했다. 작품①에 몰입하였다. 부정적인 면을 찾아 고민하는 동안 고려에도 남종화가 있었는가 하는 점이 부담되었다. 필자의 눈 앞에는 공인(公認)이 안된 순은 신덕린의 작품이 있다. 순은 신덕린의 작품이 고려시대의 남종화로 공인되는 것은 우리 회화사를 바꿔 쓸 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기에, 이 연구를 회화사학계에서 하였으면 한다. 그러나 필자가 이 작품의 존재를 안 지난 30년 동안 남종화라는 선입감에 의하여 아무도 연구를 시도하지 않았다. 이 두 점의 작품은 전시회에 공개된 적도 없다.

[주8] 고령신씨의 옛 인물 중에는 글씨나 그림에 출중한 인물이 여럿 있다. 그 효시(嚆矢)를 연 분은 순은 신덕린이다. 조선초기의 서가(書家) 신장(申檣)과 문신이자 대학자인 보한재 신숙주(申叔舟), 서가 신공제(申公濟), 화가 영천자 신잠(申潛, 1491~1554), 그리고 조선중기 전서(篆書)의 대가 신여도(申汝櫂), 조선중기의 화원 신세담(申世潭)과 화원 신일흥(申日興), 조선후기의 화원 일재 신한평(申漢枰)과 풍속화의 대가 혜원 신윤복(申潤福) 등도 모두 신덕린의 후손이다. (이외에도 시서(詩書)에 능한 중요한 문인들이 상당수 있으나 생략한다.)

[주9] 이양재, 「혜원 신윤복을 찾아서 – 그의 부친 일재 신한평과 더불어」. 1993년 월간 『미술세계』 11월호와 12월호에 기고. 나는 이 글에서 혜원 신윤복이 고령신씨(高靈申氏)로 시조 신성용(申成用)으로부터 귀래정공파(歸來亭公派)의 혜원 신윤복에 이르기까지 19세의 계대를 확정하며, 그의 신분이 중인(中人)임을 규명해 내면서, 필자가 확정한 계대를 『고령신씨보외중인보(高靈申氏譜外中人譜)』라 하여 공개하였다. 당시 나의 이 규명은 혜원 신윤복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되었다. 이 논고는 원래 한 편의 글이었으나, 잡지사 편집부에서 둘로 나누어 게재하였다.

[주10] 1993년 당시에는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비장한 소장품을 외부인이 보기란 지금보다는 어려웠다. 1993년으로부터 30년이 지난 2023년, 순은 신덕린의 이 두 작품에 관한 나의 기억을 고령신씨 문중의 보학자 신경식 씨가 서서히 끌어내었다. 그리고 그의 신청으로 지난 7월 25일, 신경식 신구순 양씨(兩氏)와 함께 3인이 특별 관람할 수 있었고, 이어서 자리를 이동하여 신왕수 회장 등과 함께 ‘은평한옥역사박물관’을 찾았다. 항시 필자에게 연구를 독려해 주시는 신경식 신구순 신왕수(가나다 순) 씨를 위시한 고령신씨 문중의 여러분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2024.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