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경북대 수학과 ⑥ 18년간 몸담았던 경북대에서 쫓겨나다
[연재] 안영민의 「아버지, 안재구」 (30)
1968년 1월, 박정기 교수가 경북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4년 임기였다. 수학자 출신의 대학 총장은 드문 경우였다. 당시 국립대 총장은 장관급이었다. 임명도 국무회의 의결사항이었다. 박 총장과 함께 임명된 부산대 총장은 문교부 장관 출신이었다. 그만큼 국립대 총장은 상당한 지위였다.
박정기 교수가 경북대 총장이 되면서 아버지도 3월 1일자로 문리대 학생과장을 맡게 됐다. 여기에는 박정기 교수의 특별한 부탁이 있었다. 당시는 1964년 한일회담 반대투쟁으로 활발해진 학생운동이 박정희 군사정권에 맞서 저항을 본격화하던 때였다. 경북대에서도 삼선개헌 반대운동, 교련 반대운동, 등록금 인하운동 등 해마다 학생들의 시위가 치열하게 전개됐다.
“학생들의 시위가 거세게 일어나면서 문교부는 시위 주도 학생들의 징계를 학교 당국에 강력히 요청했어. 나는 박정기 총장님이 문교부의 부당한 요구를 받아들여 정권의 앞잡이가 되는 걸 막아야만 했어. 그게 은사를 보호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지.”
아버지는 박 총장에게 간곡히 말씀을 드렸다. 정권이 하달하는 대로 따르면 임기는 보장받겠지만 후대의 역사에서 오명을 남길 수밖에 없다고. 대신 아버지는 박 총장을 지켜낼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학생 징계위원회가 열렸을 때 문리대 학생과장인 아버지는 최대한 징계 대상자와 징계 수위를 낮추려고 노력했다. 징계 대상자가 문리대가 가장 많았기에 자연스럽게 총대를 멘 것이다. 이를 회의록에 세세하게 담았다. 당연히 문교부에서는 난리가 났다.
“총장실로 연락을 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졌지. 그때 박 총장님은 미리 나하고 이야기한 대로 내 핑계를 댔어. 징계 학생이 가장 많은 문리대에서 학생과장이 강력히 반대하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고. 그 학생과장이 총장님 제자가 아니냐고 물었을 때는 요새 젊은것들이 나이 든 사람 말을 듣냐며 한탄을 늘어놓으셨어. 그렇게 나오니 문교부에서도 어쩔 수 없었는지 더는 따지지 않았다고 해.”
그리고 시간이 지난 다음 징계를 해제하고 학생들을 복교시켰다. 학생들에 대한 징계는 그 후로도 몇 차례 있었다. 그때마다 ‘문리대 학생과장’이 총대를 멨다. 아버지 덕분에 박정기 교수는 총장 임기를 무난하게 마쳤고, 아버지도 문리대 학생과장 보직을 끝냈다.
하지만 1972년 1월 후임으로 김영희 총장이 취임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동창이었던 김영희는 유신헌법 반대 시위에 나선 학생들을 가혹하게 대했다. 문교부와 한통속이 돼 징계를 남발했다. 그 와중에 1974년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이 터졌다. 경북대 학생도 대거 구속됐고, 징계가 내려졌다. 유신 말기까지 총장을 지낸 김영희의 악랄한 탄압에 학생들은 졸업식에서 총장 축사를 하러 나올 때 돌아앉았고, 김영희 명의의 졸업장 수여도 거부했다.
문교부의 조치는 ‘문제 학생’을 교실에서 추방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문제 교수’도 강단에서 내쫓기로 한 것이다. 교수 재임용 제도가 그 구실이 되었다.
“처음 교수 재임용 제도란 말이 나왔을 때, 나는 오히려 찬성하는 쪽이었어. 제대로 연구도 하지 않고 월급만 받아 가는 교수들이 적지 않았거든. 그런 사람들 대신 젊은 학자들이 강단에 선다면 연구 풍토도 정착되고 대학도 더 발전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
하지만 정부의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정부에 비판적인 교수들까지 재임용에서 탈락시킨 것이다. 여기에는 아버지도 포함됐다. 문교부는 ‘국가관 미확립’과 ‘학생운동에 동정적’이란 점을 재임용 탈락 이유로 들었다. 예전에 아버지가 시위 학생들의 징계를 반대하고, 징계 수위를 낮춘 데 대한 명백한 보복이었다. 1976년 2월에 벌어진 일이었다.
수학과는 물론이고 문리대, 나아가 경북대 전체가 술렁였다. 아버지만큼 학생들에게 실력을 인정받고 연구 성과를 낸 교수가 드물었다. 아버지는 문교부의 1971학년도 학술연구논문평가에서 최우수자로 선정될 만큼 뛰어난 연구자였다. 선정된 교수 중 수학 분야에서는 유일했다.
1974년 말에는 영국의 대학에서 교환교수로 와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아버지는 영국으로 나갈 준비를 하다 결국 포기했다. 박정기 교수가 “연구자로 한 단계 더 발전할 좋은 기회인데 왜 안 나가냐?”며 아버지의 결정에 의아해했다고 한다.
인혁당 관련자 여덟 분이 대법원 선고 바로 다음 날인 1975년 4월 9일, 사형집행을 당하는 걸 보면서 아버지는 결심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박정희 정권에 맞서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를 가슴에 새겼다. 그런 상황에서 영국으로 나간다는 건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이때의 결정을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다.
“그때 너거 아버지는 아직 애들도 어리고, 또 자기가 나가면 경북대 수학과를 책임질 사람이 없다고 했어. 나도 애들 걱정은 하지 말라고 했고, 박정기 교수님도 수학과 일은 다른 사람이 맡으면 되니 염려하지 말고 나가라고 하셨지. 그만큼 다들 이해를 못 했어. 만약 그때 영국으로 갔다면 어땠을까……. 재임용 탈락도 없었고, 남민전 사건에도 연루되지 않았겠지.”
아버지처럼 실력 있는 교수를 재임용 탈락시킨 문교부의 조치는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횡포였다. 하지만 이에 항의한다는 건 자신도 쫓겨날 각오를 해야 하는 일이었다. 서슬 퍼런 유신독재 아래에서 다들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버지는 18년간 몸담았던 경북대에서 쫓겨났다. 자신의 청춘을 바친 경북대 수학교실 운영과 KMJ 발간 업무에서 손을 떼야만 했다. 경북대를 떠나던 날, 박정기 교수는 “조금만 기다려 보세, 머잖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날이 올 걸세”라며 아버지를 위로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아버지의 재임용 탈락 소식을 듣고 동국대 이선근 총장이 바로 연락을 해왔다.
“이선근 총장은 동국대 이전에 영남대 총장으로 있었어. 이승만 정권 때 문교부 장관을 맡았을 만큼 굉장히 보수적이고, 친일 문제로도 비판을 많이 받았던 사람이지. 근데 내게 ‘영남대 수학과 조용 교수님한테서 안 교수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면서 동국대에서 강의를 꼭 좀 해달라는 거야. 정교수 대우를 해주고, 정교수 자리가 나는 대로 바로 채용하겠다는 제안이었지.”
아버지는 그 제안을 받고 일단 서울로 올라왔다. 아버지는 동국대 외에도 연세대와 서강대에도 강사로 나갔다. 아버지의 학문적 열정과 실력을 인정했기에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부탁했다. 숙명여대에서도 교수로 와주길 요청했다. 아버지는 동국대와 숙명여대 사이에 고민하다 새로 수학과를 개설하고 의욕적으로 준비하던 숙명여대에 가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1979년 9월 1일 숙명여대 수학과 교수로 발령을 받았다.
아버지의 재임용 탈락 소식을 듣고 이재문 선생도 연락을 해왔다. 서울에서 아버지를 만난 이재문 선생은 아버지에게 남민전 조직 결성을 알렸다. 그러면서 남민전 조직 가입을 요청했다. 아버지는 이를 수락했다. 이재문 선생과 함께 본격적으로 조직운동에 나서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는 유신독재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운동이었다. 민족해방을 위해 온몸을 던지는 전사의 길이었다.
이때부터 수학은 아버지로부터 한 발 떨어져 있게 됐다. 경북대 수학과 시절에는 수학과 변혁운동이 함께 존재했다. 아버지는 두 가지 길을 함께 추구했다. 아버지는 강의와 연구, 변혁운동,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았다. 밤을 새워서라도 주어진 임무를 수행했다. 국립대의 교수, 그것도 수학 교수라는 신분은 변혁운동을 벌이는 데도 큰 도움이 됐다. 아무도 아버지가 그런 일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북대에서 쫓겨나고 서울에 올라온 뒤로는 달라졌다. 아버지에게는 수학보다는 변혁운동이 우선이 됐다.
“남민전 활동으로 수학 연구가 뒤로 밀린 게 아쉽기는 했지. 강의는 차질 없이 수행했지만, 연구 활동을 하거나 논문을 쓴다는 건 쉽지 않았거든. 경북대에서 쫓겨난 뒤 내게는 박정희 유신독재와 싸우는 게 더 중요했어.”
그랬다. 유신독재는 아버지를 경북대 강단에서 추방했다. 유신 말기 대학은 긴급조치의 폭압 속에서도 독재 타도를 외치는 학생들의 시위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재야인사들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노동자, 농민들의 저항도 점차 고조됐다. 남민전 조직원들은 비밀리에 이러한 투쟁을 이끌었다.
“당시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 ‘내가 진정한 학문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라도 유신독재부터 끝장내야 한다.’ 서울에 올라와 사립대학에서 자리를 얻었지만, 학생들을 보호하고 정권을 규탄한다면 그 자리인들 보장될 수 없었어. 민중들의 저항 속에 점점 위기에 빠져든 박정희 정권이 무슨 짓을 할지 몰랐거든. 수학은 나중에라도 다시 할 수 있지만, 박정희 유신독재 타도는 바로 이 순간 내가 해야 할 일이었어.”
하지만 남민전 활동은 3년여 만에 끝이 났다. 1979년 10월, 남민전은 서기인 이재문 선생의 아지트가 발각 나고 조직원들이 체포되면서 그 실체가 세상에 드러났다. 이재문 선생의 체포 소식을 듣고 급히 집을 나선 아버지는 숙명여대 연구실에서 신변을 정리하고, 도피 생활에 들어갔다. 하지만 박정희가 총탄을 맞고 유신독재가 종말을 고한 다음 날인 10월 27일, 아버지는 끝내 체포되고 말았다.
사형선고와 무기징역의 혹독한 시절 속에 아버지는 더는 수학자의 길도 걸어갈 수 없었다. 군사독재 정권 시절 대한민국 교도소는 수감자에게 볼펜과 종이를 주지 않았다. 조선 시대에도 귀양 간 선비에게 집필의 자유가 주어졌건만, 대한민국의 교정 현실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김남주 시인은 감옥에서 우유갑에 못으로 새겨가며 시를 썼다. 신영복 선생은 한 달에 한 번 허용된 편지 시간에 봉함엽서 빽빽이 써 내려간 글을 밖으로 내보냈다. 하지만 수학 공부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볼펜과 종이가 없는 수학은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결국 10년의 세월을 수학과 단절한 채 살아야 했다. 볼펜과 종이를 달라고 여러 차례 싸웠지만, 저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독재정권은 그렇게 수학자에게서 수학을 강탈해 갔다.
1988년 12월, 10년 만에 감옥에서 나온 아버지는 수학자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10년의 세월은 최신의 수학 연구를 따라가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었다. 대신 아버지는 수학의 역사를 정리하고, 역사 속 수학자들의 생애와 삶을 청년들에게 알려주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 결과물로 『수학문화사』와 『수학을 만든 사람들』을 출간했다. 또 어린이를 위해 『쉽고 재미있는 수학세계』, 『생활에서 수학을 이해하는 책』도 썼다.
또 전교조 수학교사모임 고문을 맡아 현장의 수학 교사들과도 꾸준히 만났다. 수학 교사들의 세미나에서 발표할 원고를 준비할 때 행복해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당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역할이라 생각하며 뿌듯해했다.
본격적인 수학 전공 강의는 아니나 경희대를 비롯해 몇몇 대학에서 <철학의 세계, 과학의 세계> 등의 교양과목을 강의하기도 했다. 1~2학점의 강의를 위해 서울과 수원 등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젊은 학생들을 만나러 나서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아버지가 그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후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994년 6월, 구국전위 사건으로 다시 구속되면서 수학자로서 진행한 저술 작업도, 수학 교사들과의 만남도, 후대를 위한 교육도 모두 중단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