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견(彌利堅), 미국(米國), 그리고 또 미국(美國)④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74)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본 연재의 제16회부터 18회까지 세 번에 걸쳐 「미리견(彌利堅), 미국(米國), 그리고 또 미국(美國)」을 기고하였다. 이 글은 그 네 번째 글이다. 앞선 세 글의 결론부에서 필자는 “조선이 1883년 미국에 파견하였던 첫 번째 보빙사 일행들부터 친미적 사고에 물들어 왔다.‥‥‥‥ 대한제국의 고종황제와 당시의 계몽가들은 친미의존적(親美依存的)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필리핀에서의 이익을 위하여 (가쓰라-태프트 협약으로) 대한제국을 일본에 넘김으로써 끝내 대한제국을 배신하였다”라고 언급하였다.
아울러 “미국은 한국을 동맹이라 이야기하면서 일본 밑에 두고 있다. 그리고 알렌이 대한제국 시기에 하였던 경제 및 산업 특혜를, (지금은 대한민국에) 강요하고 있다. 동맹은 평등에 기반을 두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유럽과는 달리 한반도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미국과 한국의 동맹은 변화되어야 한다”라고 하였고, “미국이 한국 민중을 외면하고 적대시하면 미국 스스로가 반미를 키우는 것이 된다. 미국의 두 개의 한반도 정책은 변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오늘, 7월 29일은 가쓰라-태프트 협약을 작성한 1905년 7월 29일로부터 꼭 119주년이 되는 날이다. 오늘, 이 협약을 돌이켜 봄으로써 을사늑약의 120주년이 되는 2025년의 의미를 제고하고자 한다.
13. 가쓰라-태프트 협약을 당시 한성주재 구미 외교관들은 알았다
러일전쟁(1904년 2월 8일~1905년 가을)에서 미국은 일본을 지원하였다. 그 이면에는 러시아의 남진을 견제하고자 한 목적이 있었다. 1895년의 청일전쟁 이후 1903년 8월에 진행되기 시작한 러시아 차르 정부와 일본제국의 협상에서 일본은 만주에서 러시아의 주도권을 인정해 주는 대신 한반도에서 일본의 주도권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를 거부하고 한반도를 북위 39도 선을 경계로 북쪽은 러시아, 남쪽은 일본으로 하는 분할 통치안을 역제안하였다. 이 회담은 결렬되었고, 일본은 1904년 2월 4일부로 협상 중지를 선언했다.
일본은 러시아가 향후 전략적 이익을 위해 전쟁을 선택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대한제국에 대한 독점적 영향력을 얻기 위해 전쟁을 선택하여, 이미 2월 초에 마산포와 원산 등지에 일본군을 상륙시키는 등, 전쟁 준비를 진행하였다. 또한 당시 일본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미국 대리인인 제이컵 시프로부터 전비의 40퍼센트에 이르는 공식지원과 상당한 비공식 금융지원을 이미 받은 상태였다. 이러니 미국과 유럽은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일본의 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위하여 군사적 개입까지 하였음이 분명하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을 때, 로스차일드 가문은 상당한 수익금을 챙길 수 있었다. 이것이 러일전쟁이다.
러일전쟁은 1905년 9월 5일, 미국의 주선으로 포츠머스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종료되었고, 일본은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차지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는 것으로 전세가 기울자, 미 국무장관 태프트(William Howard Taft)는 동경으로 와서 일본 외무상 가쓰라와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과 일본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 승인하는 문제를 놓고 1905년 7월 27일 도쿄에서 회담하였다. 29일 각서(memorandum)가 작성되었는데, 그것이 가쓰라-태프트 조약(Taft–Katsura agreement)이다. 그런데 이 기록에는 서명된 조약이나 협정문 같은 것은 없었고, 일본-미국 간 관계를 다룬 대화에 대한 각서만이 있었다. 이 각서 작성 후, 미 국무장관 테일러는 필리핀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 행정부에서 당시의 이 각서는 비밀로 분류되지 않았고, 루스벨트 대통령 퇴임 후 일반 문서로 기록보관소에 이관되었지만, 1924년에 와서야 이 문서를 미국의 역사가 타일러 데넷(Tyler Dennett)이 기록보관소에서 발견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즉 이 협약 각서는 미국으로서는 비밀이 아니었다. 이 협정은 철저히 묻히기가 어려웠을 것인데, 과연 당시에 일본 동경주재 유럽의 외교관이나 한성주재 구미 외교관들은 전혀 몰랐을까?
더군다나 협약 체결 이후 태프트의 일본 방문할 때 동행하였던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는 한성에 들어와 고종황제의 융숭한 접대를 받으며 외교가에 큰 화제를 뿌렸다. 당시 이들 일행에 의하여 가쓰라-태프트 협약은 한성주재 외교가에 알려졌을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가쓰라-태프트 협약은 대한제국의 외교관과 고종황제만 몰랐던 것 같다.
이완용을 위시한 을사오적이 을사늑약을 강행하였던 것은 이 협약을 알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가쓰라와 태프트가 각서를 작성한 7월 29일로부터 꼭 110일 후인 1905년 11월 17일에 을사오적이 나서서 일본과 을사보호조약(을사늑약)을 맺음으로써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잃게 된다.
당시 을사늑약 이전에 이미 몇 나라들은 그 낌새를 눈치채고 먼저 철수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이탈리아는 을사늑약 이전인 10월 11일 영국 공사에게 외교 업무를 위탁하고 공사관과 재산을 매각하여 사실상 대한제국에서 철수했고, 곧이어 영국과 독일 공사는 휴가 귀국을 허가받아 이미 대한제국을 떠났다. 을사늑약 직후에 미국공사관은 곧바로 철수하였고, 영국공사관은 12월 2일, 독일공사관은 12월 4일에, 마지막으로 프랑스공사관이 12월 26일에 철수하여 서울의 외교공관은 완전히 사라졌다.
일련의 이러한 움직임을 보면 가쓰라-태프트 조약은 비밀 협약이었어도 한성주재 구미공사들 사이에서는 비밀 아닌 비밀로, 대한제국에만 비밀로 널리 알려졌던 것으로 보이며, 그들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 곧이어 일본이 대한제국 강제 점령을 시도하리라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우리나라의 사학계에서는 이를 입증하기 위한 1905년도 유럽 각국의 대한제국 관련 외교 기록에 관한 조사가 필요하다.)
14. 대한제국에 와 있던 선교사와 외국 상인들의 동향
대한제국에 와 있던 3M 즉 상인(Merchants), 광산업자(Miners), 선교사(Missionaries) 등의 1905년 7월 29일 가쓰라-태프트 조약 이후, 1907년 8월 1일 군대해산까지의 동향과 반응을 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들 가운데 당시 대한제국에 와 있던 상인과 광산업자는 대한제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도 자신들의 이익은 보장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선교사들도 일본을 거역하지 않는 한 선교가 보장된다고 믿었다. 따라서 친일 반응을 보이는 선교사들도 일부 출현하였다.
을사늑약 이후 고종은 을사늑약을 돌이키려 했다. 그러나 이미 대한제국에서 구미의 외교공관이 철수하여 구미 열강에 호소할 수단이나 방식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구미 열강에 특사를 파견하는 것이었고, 대한제국에 우호적인 선교사들에게 협력을 요구하였다.
고종은 처음 언더우드(Underwood, Horace Grant., 1859~1916) 선교사에게 특사로 나서 줄 것을 요구했으나, 이미 대세가 기운 것을 안 언더우드는 교육 사업을 전념하겠다며 특사직 제의를 거절하였다. 고종은 다시 게일(Gale, James Scarth., 1863~1937) 목사가 특사로 나서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게일 역시 선교에 전념하겠다며 제의를 거절하였다.
이에 세 번째로 헐버트(Hulbert, Homer Bezaleel., 1863~ 1949) 선교사에게 특사로 나서 줄 것을 제의하였고, 그는 고종의 특사직 제안을 받아들였다. 헐버트는 1905년에 고종의 특사로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를 만나고자 했으나 이미 가쓰라-태프트 협정을 맺은 후이므로 미 대통령은 만남을 거절하였다. 아마도 헐버트는 그 시기에 이미 미국과 일본이 작당(作黨)하였다는 것을 인지했을 것이다.
헐버트는 1906년에도 고종의 친서를 휴대하고 구미를 돌았으나 역시 성과가 없었다. 결국 두 번의 특사로서 헐버트의 역할은 아무런 성과가 없이 끝났다. 헐버트가 1907년 제2차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한 특사라는 주장을 하지만. 실제로는 1907년 7월 10일 헐버트는 자신이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특사가 아니라는 해명을 위하여 헤이그에 잠시 들렀을 뿐, 대한제국의 특사 그 어느 사람도 만나지 않고 곧바로 헤이그를 떠났다.
결국 헐버트 그는 망해가는 대한제국의 국고만 축낸 직업적인 로비스트였다. 결과적으로 무일푼으로 대한제국에 들어온 헐버트는 많은 재산을 챙겨서 대한제국을 떠났다. 그러고는 3년 후에는 미처 처분하지 못한 남은 재산을 챙기기 위하여 재입국하기까지 하였다. 헐버트는 기울어가는 대한제국의 최후의 시도를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철저히 이용한 것이 아닐까?(참조; 제14회 연재 「로비스트로서 실패한 헐버트 박사」 2023.06.12.)
15. 미국, 두 개의 한반도 정책과 프리메이슨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한 후, 미국은 38선을 그었다. 1904년 러일전쟁 직전에 러시아가 일본에 제안한 한반도를 북위 39도선을 경계로 북쪽은 러시아, 남쪽은 일본으로 하는 분할 통치안을 제안한 것을 러시아에 좀 유리하게 38선으로 내려 준 것이다. 미국과 러시아는 자기들 마음대로 한반도를 분할한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일본을 분할하지 않고 한반도를 분단함으로써 러시아 해군의 남진(南進)을 동해에서 저지하려 한 것이 아닐까?
러일전쟁 이전부터 미국의 동북아 정책은 일본을 앞세우는 것이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의 이해상충이 생기면 일본 편을 든다. 일본과 태평양이라는 미국의 앞마당을 지키기 위하여 한반도 남쪽이라는 완충지대가 희생하여야 하는 것이다. 미국의 방어와 태평양 지배를 위하여 전범국 일본이 아니라 애매하게도 한반도가 분단된 것이다.
미국의 두 개의 한반도 정책이란 한반도에서 통일 정부의 출현을 거부하는 것으로 읽힌다. 친미 친일의 수구당이 반북을 조장하고 평화의 기저를 뒤흔드는 것은 두 개의 한반도가 유지되어야 미·일에 이익이 되기 때문이며, 그에 따라 수구당이 두 개의 한반도 정책을 유지함으로서 한국에서의 권력을 보장받는다.
미국의 일본 우선 정책을 살펴보면 그 기저에는 구미의 비밀결사체 프리메이슨이 있다. 필자는 통일뉴스에 ‘[연재]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국혼의 재발견’’을 연재하면서, 그 제2회에 “프리메이슨단과 『한국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열 지파』”를 기고한 바 있다.
그 기고에서 “1901년부터 1909년까지의 미국의 대통령은 공화당의 ‘시어도어 루스벨트’인데 그는 프리메이슨 단 단원(團員, 회원, Freemason)이며, 1909부터 1913까지의 미국 대통령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가 바로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주인공 ‘태프트’이고, 그 역시 프리메이슨임을 밝힌 바 있다.
즉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고종황제의 퇴위와 군대해산, 1910년 국권피탈 시기의 미국 대통령은 모두 미국의 프리메이슨이었다. 이후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아침에 진주만을 기습한 후 미국과 프리메이슨단의 뒤통수를 가격하고, 프리메이슨단의 일본 내 재산을 압류하며 활동을 중지시킨다.
그런데도 1945년 일본이 전쟁에 패망한 이후 일본 점령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일본의 프리메이슨단 그랜드 롯지를 부활시켜 활성화하며,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일본을 다시금 동북아 방어 및 진출의 거점으로 삼는다. 트루먼은 1945년부터 1953년까지의 미국 대통령이었는데 그가 대통령을 하던 1945년 한반도는 분할되고, 1948년에는 남과 북에 분단 정부가 수립되며,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난다.
물론 ‘해리 트루먼’과 원자폭탄의 만주(滿洲) 사용을 두고 그와 맞섰던 더글러스 맥아더는 모두 프리메이슨이었다. 이를 보면 프리메이슨이 미국 대통령일 때는 일본 중심의 동북아 정책을 펴 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즉 우리 민족은 근현대사에서 프리메이슨의 밥이었다”라고 언급하였다.
사실 대한제국에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던 미국공사 알렌이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인하여 대한제국에서 철수하자, 그의 활동 공백을 메꾸기 위하여 1907년에 발기하고 1908년에 ‘한양롯지 1048’을 창설한 것이다. 1884년 조선에 처음 상륙한 개신교 선교사 알렌은 프리메이슨으로 유추되는데, 1885년 4월 5일 상륙한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은 1908년에 한양롯지 1048을 창설하는 주역이었던 것으로 보아 그는 선교사로 들어오기 이전부터 프리메이슨이었고, 조선의 기독교는 미국 프리메이슨의 지휘하(指揮下)에 진출한 것으로 판단된다.
미국 청교도의 주축은 프리메이슨인데, 그들의 기독교적인 강령은 “유태인의 선민의식과 백인우월주의의 인정, 그리고 미국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신념” 등등이다. 이것은 현재까지 한국 개신교에 그대로 남아있다.
16. 맺음말 : 한국에서 새로운 행정부가 나와서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헐버트는 언더우드의 활약에 비하면 그저 ‘빛 좋은 개살구’(All flash and no substance)일 뿐이다. 그는 대한제국에서 막대한 로비 자금만을 챙긴, 실패할 것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임무를 받아들인 직업적인 로비스트이다. 고종황제의 친서를 서구 열강에 단 한 번도 제대로 전달하지를 못했다. 그러면서도 헐버트는 친미주의자 이승만에 의하여 총 한 방 쏘지 않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급료를 받은 직업적인 로비스트이면서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을 받았다.
진실로 한국의 독립과 발전을 위하여 헌신한 미국인이 있다면 그는 언더우드 가문의 4대에 걸친 인물들이다. 언더우드 가문의 4대는 근대사는 물론이고 현대사에서도 항시 우리나라와 우리 민중의 편이 되어 주었다. 그래서 언더우드 가문 4대가 한국인들의 진정한 존경을 받는 것이다.
헐버트는 대한제국에서는 대한제국의 편에 선 것처럼 말하고, 서구에서는 대한제국 황제의 특사로 대단한 권한을 가진 것처럼 말하는 입발림(Lip service)에 능한 인물에 불과하다. 언더우드 선교사와 게일 목사의 행적을 주목하고 연구하면 침소봉대된 헐버트의 실체는 제대로 밝혀질 것이다. 헐버트의 실체가 분칠되어 대한민국의 독립 영웅 대접을 받는 것이 끝나는 날, 언더우드나 게일. 베델 등등이 제대로 기념되는 날, 그러한 날이 되어야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고 한반도의 미래를 바꿀 수가 있다.
미국이 한국의 동맹이라면 미국은 동맹답게 한국에 처신하여야 할 것이다. 이번 미국의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후보의 당선이 확실시되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한반도가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가 없다. 남에는 미군 주둔비를 더 내라 할 것인데, 과연 북의 핵과 미사일의 보유는 인정할 것인가? 한반도의 평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바이든이 한국에서 빼앗아 간 것을 되찾아 올 수는 있을까? 그리고 트럼프에게는 또 무엇을 빼앗길 것인가?
언제쯤 한국에서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행정부가 나와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바로 세울 수 있을까? 사대 수구당과 보수 민주당이 집권하여 온 지난 76년이 이 꼴이라면 적어도 사대 수구당은 몰락하여야 하고, 보수 민주당과 진보 사회혁신당이 우리나라 의회 내에서의 상대적인 권력으로 자리 잡아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그 100년이 되는 시점인 2045년까지 이루어야 할 미래 세대의 민족적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앞으로 20여 년 남았다. (2024.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