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안견 신론① -안견의 관향 ‘지곡(池谷)’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73)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안견의 고향은 충남 서산이 아니라 지금의 서울시 강남구이다
필자는 월간 『미술세계』 1994년 4월호(통권 113호) pp.106~111까지 6면에 걸쳐 「안〇〇 교수의 안견론에 대한 비판」의 첫 글을 기고하였고, 그 논쟁의 연결 선상에서 월간 『서화정보』 9월호까지 1994년에만 11편의 글을 써서 발표하였다. 금년으로 꼭 30년 전이다.
이를 잠시 잊고 있는 가운데 2023년 12월 27~28일 듣보잡들에 의하여 안견(安堅) 작 「몽유도원도」에 관한 환수 이야기가 갑툭튀하였다. 나는 번개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에 나는 12월 29일 자로 통일뉴스에 “「몽유도원도」 언론 플레이 유감”을 기고한 바 있다. [관련기사 보기]
그리고 금년(2024년)에는 다시 설날을 앞두고 2월 4일부터 듣보잡 기사가 또 갑툭튀하였다. 그 기사는 “몽유도원도 환수계약 기념 ECI특별전 ‘신 몽유도원도를 그리다’”라는 어느 작가의 전시를 서울의 모 갤러리에서 한다는 것인데, 이는 분명 안견과 「몽유도원도」를 이용한 개인사업의 과대 선전이었다. 나는 다시 2월 7일 자 통일뉴스에 “[기고] 작금의 과대 언론 플레이를 개탄한다 - 「몽유도원도」의 숨겨진 이야기”를 기고하였으며, 이 두 번째 글의 끝에서 “이제 안견론쟁 30년 만에 당시 필자가 주장하였던 안견론과 그 뒷이야기를 차츰 정리하여 재차 필자의 안견론을 피력해 나갈 것이다. 이번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관한 이상한 사람들의 언론 플레이가 필자에게 다시 계기를 주는 것 같다”라고 언급하였다. [관련기사 보기]
안견론쟁 후 30년이 되는 이번에는 필자의 관점을 논쟁보다는 신론(新論)을 개진하는 입장에서 써 나갈 것이다. 사실 필자의 5월 13일 자 통일뉴스에 기고한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63) - 30년 전 안견론쟁을 회상하며”는 안견론쟁을 2024년에 ‘안견신론’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정지작업이었다. [관련기사 보기]
아울러 “「행화구욕도」와 이인로를 통해 본 고려와 금나라의 서화 교류”와 “고려말 화단(畫壇)에 관한 탐색①~②”, 그리고 “우리나라의 고려불화연구사” 등등은 ‘안견신론’을 시작하기 위한 몸풀기(warming-up)였다.
1. 지곡안씨 안견
-안견의 고향은 경기도 광주 지곡(池谷), 지금의 서울시 강남구 세곡동과 자곡동 일대이다
현동자 안견과 관련된 지명은 ‘지곡(地谷, 땅 골)’이 아니라 ‘지곡(池谷, 못 골)’임은 안견론쟁 초기부터 지적한 바 있다. ‘땅’을 뜻하는 ‘지(地)’와 물을 모아둔 ‘못’을 뜻하는 ‘지(池)’는 뜻이 통하여 함께 쓸 수 있는 ‘통자(通字)’가 아니다.
현동자 안견에 관한 20세기 이전의 모든 기록에 안견은 ‘지곡인(池谷人)’, 또는 ‘지곡안씨(池谷安氏)’라 하였다.
①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의 그림 위에는 ‘지곡가도작(池谷可度作, 지곡 가도의 작품)’이라 쓰고 있고, 「몽유도원도」에 붙어 있는 하연(河演, 1376~1453)의 시 끝부분에는 “야지지곡의우진(也知池谷意尤眞)”이라 하였다. 즉 “지곡(池谷)의 솜씨 진정 훌륭함을 알겠네”라는 것이다.
②안견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보한재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보한재집(保閑齋集)』에 수록되어 있는 「비해당화기(匪懈堂畫記)」이다. 이 화기는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이 소장했던 그림에 관하여 보한재가 1445년에 기술한 기록이니 만치 화기는 안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이 화기에 “아조득일인언, 왈안견, 자가도, 소자득수, 본지곡인야(我朝得一人焉, 曰安堅, 字可度, 小字得守, 本池谷人也)”라고 하였다. 즉 “우리 왕조에 한 사람을 얻었으니, 안견이라 하는데, 자는 가도이고, 소자는 득수로, 본은 지곡인이다”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소자(小字)란 ‘견(堅)’이라는 이름을 갖기 이전의 초명(初名)이다. 필자는 ‘견(堅)’이라는 이름은 안견이 여러 왕의 어진(御眞)과 광평대군, 안평대군 등의 초상을 그린 1442년경에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이 지어준 사명(賜名)으로 본다.
③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산수도 가운데는 “지곡안씨(池谷安氏)” “안득수인(安得守印)”이라고 낙관이 찍힌 그림이 있고, 일본의 아사오카 오키사다(朝岡興禎, 1800~1856)가 편저한 『고화비고(古畫備考)』를 1903년에 오오타 츠츠시(太田謹, 1842~1925)가 증정한 『증정 고화비고(增訂古畫備考)』에도 “지곡(池谷)”과 “안씨득수(安氏得守)”의 낙관이 채집된 것을 보면, 득수는 안견의 초명(初名)이다. 또한 안견 스스로가 “지곡안씨(池谷安氏)”임을 밝힌 것이다. 안견이 말하는 ‘지곡(池谷)’은 우리말로서는 ‘못 골’이지, ‘땅 골’이 될 수가 없다.
충청남도 서산(瑞山) 지곡(地谷)은 ‘못 골’이 아니라 ‘땅 골’이다. 거듭 말하지만, ‘땅’을 뜻하는 ‘지(地)’와 물을 모아둔 ‘못’을 뜻하는 ‘지(池)’는 뜻이 통하여 함께 쓸 수 있는 ‘통자(通字)’가 아니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지곡(池谷)’을 ‘지곡(地谷)’으로 주장하는 문맹(文盲)의 우를 범하였다.
2. 『호산록(湖山錄)』의 출현과 서지학적 검토
『호산록』은 “공주대학교 이문종(李文鍾) 교수와 당시 서산군청 이은우(李殷佑) 과장이 『호산록(湖山錄)』을 1987년 10월에 충남 예산군 고덕면 대천리 한정택(韓正澤)의 집에서 발견하여 1988년 3월 7일자 동아일보에 소개하였다. 이 책은 1992년 서산문화원(瑞山文化院)에서 원문과 번역본을 실어 『호산록(湖山錄)』으로 간행하였으며, 관련 논문도 출간되었다.”[주1]
그런데 문제는 『호산록』은 이문종이 주장하는 대로 한여현(韓汝賢, 1571~?)의 저술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책은 조선시대에 발간된 적도 없다. 1992년 영인본이 초간본이다. 호산록은 1582년에 서산군수로 부임한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이 한경춘, 한여현 부자에게 읍지 편찬의 필요성을 말한 것으로 한여현의 서문에 나타나 있다.
『호산록』의 제1책 건권(乾卷) 서두에는 「호산록서(湖山錄序)」가 3면에 걸쳐, 「호산록목록(湖山錄目錄)」이 반면(半面), 「호산록의례고상(湖山錄依例考詳)」이 2면에 걸쳐 기록하고 있다. 이 서두의 기록은 『호산록』의 편찬 동기와 그 과정, 목적 등을 알리고 저술의 기본 방향과 주요 항목의 설정 이유를 기술하였다. 『호산록』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그 뒤를 이어 “도리원근(道里遠近), 건치연혁(建置沿革), 군명(郡名), 성씨(姓氏), 향교(鄕校), 사묘(祠廟), 공자세가(孔子世家), 묘사(廟祀), 성황사(城隍祠), 여제단(厲祭壇), 동서리명(東西里名), 성곽(城郭), 관방(關防), 봉수(烽燧), 형세(形勢), 산천(山川), 토품(土品), 둔전(屯田), 국둔전(國屯田), 민속(民俗), 향풍(鄕風), 향서당(鄕序堂), 교량(橋梁), 장시(場市), 역원(驛院), 불우(佛宇), 누대(樓臺), 연당(蓮堂), 객관제영(客舘題詠), 제영(題詠), 유람(遊覽), 고적(古蹟), 해포(海浦), 해산(海産), 해호(海戶), 자염(煮鹽), 고금토주(古今土主), 징병격서(徵兵檄書), 임진년행궁(壬辰年行宮), 유지(諭旨)” 등의 항목을 기술하고 있다. 건권은 서두를 포함하여 모두 60장 120면이다. 그리고, 제2책 곤권(坤卷)에서는, “고금인물(古今人物), 충신(忠臣), 효자(孝子), 절부(節婦), 우거(寓居), 운석(韻釋), 향소청근(鄕所淸謹), 하리청근(下吏淸謹)”의 항목을 25장 50면에 기술하고 있다. 즉 영인본을 보면 건권과 곤권은 5침 선장본으로 『호산록』은 2권2책 본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있다. 분명 이 책의 원본이 아니다. 후대의 누군가가 원본을 필사한 책이다. 건권과 곤권은 우선 필체(筆體)와 행자수(行字數)가 다르다. 건권은 12행24자를 유지하고 있는데 비하여 곤권은 12행30자를 넘나든다. 즉 건권은 1면이 대체로 288자이나. 곤권은 1면이 대체로 360자가 넘는다. 『호산록』은 2권2책인데, 건권과 곤권의 분량 차가 크다. 그리고 각기 제책할 정도의 분량도 아니다. 즉 이 책은 원래 건권만으로 이루어졌던 책이었을 것이다. 곤권은 후대에 덧붙여진 책이다.
내용상으로도 살펴보면, 서문은 만력 기미년(己未年, 1619년)에 한여현(韓汝賢)이 찬(撰)하였다. 필자는 “한여현은 서문을 지은(撰) 것이지 호산록을 편찬(編纂)한 것이 아니다”라고 판단한다. ‘찬(撰)’이란 의미와 ‘편찬(編纂)’, 또는 ‘고(稿)’라는 의미는 다르다. 더욱이 곤권의 끝을 보면 “만력무오중춘군수김대덕고(萬曆戊午仲春郡守金大德稿)”라고 원고를 편찬한 사람을 밝히고 있다. 즉 『호산록』의 건권은 김대덕(金大德, 1577~1639)이 무오년(戊午年, 1618년)에 쓴 것이다. 한여현이 서문을 쓴 1619년보다 1년 전이다. 그렇다면 『호산록』이 한여현의 후손으로 보이는 한정택의 집에서 발견되었다고 해서 한여현의 저술이라는 단정은 분명 오판이다.
3. 『호산록』 곤권은 신뢰성이 없다
『호산록』 건권과 곤권은 동일 편찬자에 의하여 함께 편찬된 책이라 볼 수가 없다. 우선 건권의 끝에 원고를 쓴 김대덕을 밝히고 있어 이 책은 건권으로 끝난 책으로 밝히고 있다. 곤권은 후대에 누군가 보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현존하는 『호산록』은 건권은 원본을 베낀 것이라는 점이다. 건권과 곤권의 필체와 행자수는 다르다. 건권과 곤권이 한 짝이었다면, 그리고 동일인이 필사하였다면 필체와 행자수는 같게 하는 것이 보편적인 필사법이다. 더군다나 건권과 곤권은 분량에서 큰 차이가 난다. 곤권은 건권의 1/2이 안 된다.
안견이 서산 지곡(地谷) 출신이라는 주장은 편찬자가 의심스러운 곤권에 들어있다. 내용서지학에서 판단해 보자. 곤권이 1619년 편찬본이라고 인정해도 신숙주의 「비해당화기」가 지어진 1445년 기록보다 신뢰성이 앞서지를 못한다. 그런 관점은 상식적인 것이다. 따라서 『호산록』에 의거하여 안견 스스로가 ‘지곡(池谷)’이라 한 것을 ‘지곡(地谷)’으로 한다면, 누군가가 “지곡(池谷)을 지곡(地谷)으로 주장하기 위하여 사료를 변조하였다”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호산록』의 곤권은, 특히 안견에 관한 부분은 「비해당화기」를 똑같이 옮겨 베끼면서 지곡(池谷)을 지곡(地谷)로 변조(變造)하였으므로 신뢰성이 전혀 없다. 필자는 이 변조는 20세기 전반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주2]
4. 맺음말
위에서 논증한 바와 같이 현동자 안견과 충청남도 서산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변조한 『호산록』 곤권을 믿고, 충청남도 서산에 ‘안견기념사업회’가 조직되고 ‘안견기념관’이 세워졌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문화계를 기만하는 행위이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어느 듣보잡이 갑툭튀하여 「몽유도원도」를 환수한다는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현동자 안견과 충청남도 서산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필히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안견신론을 8월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오마이뉴스’ 7월 13일 자에서 듣보잡들의 언론 플레이가 또다시 나왔다는 것을 뒤늦게 전해 듣고, 이렇게 안견의 고향을 서둘러 밝히게 되었다. 그러나 안견신론은 예정대로 8월 중순부터 격주마다 한 번씩 독자들을 찾아갈 예정이다. 많은 분의 열독을 바란다. (2024.07.21.)
주
[주1] 國史館論叢 第81輯 > 조선 중기 私撰邑誌에 관한 연구 > Ⅲ. 읍지의 시기별 편찬과 사찬읍지 > 1. 조선 중기의 사찬읍지.
“한편 각 지역에서는 새로운 자료의 발굴도 이루어졌다. 일례로 충청도 瑞山의 사찬읍지인 『湖山錄』이 발견되어 현전하는 조선 중기의 사찬읍지가 없었던 충청도 지역의 읍지 연구에 활력을 주었다.”에 붙은 주17.
[주2] 이양재, 「안견의 본관과 출신지에 대한 고찰」, 『비블리오필리』 5, pp.74~79. 1994년 6월 23일 한국애서가클럽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