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쾌대④ 리쾌대의 재북시 작품에 관하여(1)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72)

2024-07-15     이양재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신 잡동산이’ 연재에서 나는 우리 민족의 현대 유화가 이쾌대(李快大, 1913~1965)가 한국전젱 이전에 남에서 그린 그림과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북에서 리쾌대로서 그린 그림을 비교 탐색하고 있다. 첫 번째 비교 탐색에서는 ‘자화상’을, 두 번째 비교 탐색은 ‘군상’-4와 ‘대대장고지의 방어전투’를 살펴보았다.

1.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로 변하다

이제 이쾌대, 즉 리쾌대 작품의 근본적인 변화를 언급하고자 한다. 필자는 앞선 연재에서 리쾌대가 재북시기에 변월룡의 러시아 미술의 영향을 받았음을 언급한 바 있다. 이쾌대가 재남시 그린 작품 화집을 본 북의 미술학자이자 미술평론가 최명수는 리쾌대의 작품이 북에서 많이 변화되었음을 아래와 같이 지적한 바 있다.

해방 전 사실주의 화가로서 많은 작품을 내놓은 리쾌대는 8.15를 남조선에서 맞았다. ‥‥‥ 사실 리쾌대는 지난 시기에는 갖가지 서방 브르죠아 형식주의의 총체인 모더니즘의 영향 속에서 헤맸었다. 기초실력이 든든하였으나 창작 경향에서는 언제나 프랑스 후기 인상주의, 상징주의에 물 젖어있었다. 이로부터 문제성 있는 주제를 제기하지 못하였으며 개별적인 인물초상이나 정물을 그리는데 많이 치우치게 되었다. 그는 공화국의 품에 안긴 후에야 창작 방법으로서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알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그의 창작활동에서는 새로운 전환이 일어나게 되었다. 1950년대 중반기부터 그가 창작한 유화 《3.1 인민봉기》,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 《송아지》, 《박연 초상》, 《농악무》 등은 이전 시기와는 대비할 수 없을 정도로 묘사의 객관성과 재치 있는 기교가 주제 내용을 부각시키는데로 통일되어 있다. 그의 창작에서의 급격한 전환은 사회적 조건과 환경이 화가의 작품 창작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는가를 보여준다. ‥‥‥”[주1]

즉 북에서도 재남시절의 이쾌대의 작품이 재북시절 리쾌대의 작품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그것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로 인하여 일어난 새로운 전환으로 평하고 있다.

2. 이쾌대의 미술은 어떻게 변하였는가?

그렇다면 이쾌대의 미술은 어떻게 변하였는가? 지난 연재에서 말하였듯이 1953년 휴전 이후 변월용에 의하여 북에 유행한 러시아 레핀 미술의 표현 양식을 리쾌대도 받아들였다. 북의 미술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따라 구상화(具象畵)만이 있고 추상화(抽象畫)가 없다. 미술은 선전과 선동의 수단으로 정치적 계도적(啓導的) 목적이 있으므로 사회주의 사회의 승리와 우수성을 화폭에 담게 된다.

아울러 북에서는 벌거벗은 모습의 형상은 극소로 제한되어 나체화는 물론이고, 헐벗고 굶주린 것을 표현하는 그림에서의 헐벗은 모습도 극도로 제한된다. 이러한 미술에 관한 이념적 제한으로 인하여 이쾌대가 재남시 그린 『영웅-4』와 같은 작품을 재북시의 리쾌대는 그리지 않았다. 그런데 남측의 미술계 일각에서는 리쾌대의 재북시 작품에서 이쾌대의 재남시 작품의 흔적을 찾는다.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북의 최명수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리쾌대의 창작활동을 통하여 더욱 똑똑히 인식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개별적인 창작가의 미학관 형성과 창작방법은 해당 사회제도의 직접적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주1]

남에서의 리쾌대 작품은 어두운 채색을 많이 쓰고 있는데 비하여, 북에서의 리쾌대 작품은 옅은 채색을 많이 쓰는 경향이 있어, 리쾌대의 재북시 그림은 밝아진 것으로 보인다. 이쾌대의 재남시 자화상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에서 보다도 밝아지고 있다.

그런데 남의 미술평론가와 화상들은 이쾌대가 북으로 간 후 그의 미술은 퇴락(頹落)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거꾸로 북의 미술평론가들의 기본적인 관점은 리쾌대의 미술이 북에서 진일보하였고 본다.

최명수는 위의 글에 이어 “이제 세기가 바뀌어 10여 년이 지나갔다. 민족의 운명과 함께 곡절 많은 삶의 길을 걸어온 오랜 화가들도 거의나 떠나가고 없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많은 작품과 마찬가지로 재능있는 화가인 리쾌대의 작품은 오늘도 살아 겨레의 마음속에 빛을 뿌리고 있다.”[주1]

남의 미술평론가와 화상들이 북에서의 리쾌대의 미술이 퇴락한 것으로 보는 이유는 중국에서 만들어진 리쾌대의 가짜 작품 때문이다. 그 가짜들은 작품에 나타난 기량면에서 재남시 이쾌대의 작품과 대비할 수준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케인즈의 법칙에 경제에서는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고 했다. 그림도 그렇게 되려는가?

3. 리쾌대의 재북시 생활 일면

리쾌대는 1953년 포로 교환할 때 북을 택하여 평양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리쾌대의 형 리여성(李如星, 1901~?)은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에 남조선인민당 대표로 입북한 후 최고인민회의 제1기와 제2기 대의원으로 피선되어 활동 중이었다. 또한 리여성은 김일성종합대학 미술 강좌장을 하고 있었다.

그러한 시기에 북으로 간 리쾌대는 잠시 형 리여성의 자택에서 생활을 하였으며, 1954년 중앙건축미술제작소에 입소한 때로부터 제자 리병효(1916~1981, 유화가)의 집에서 합숙하였다. 당시 “리쾌대는 남쪽에 두고 온 아내와 자식들을 항상 마음속에 묻어두고 생활하였으나 자신의 창작생활과 고독한 합숙 생활로 혼자 지낼 수는 없었다”라고 한다.

리쾌대는 제자 리병효의 소개로 당시 평양의 음악계에 유명한 피아노 연주가 백운복을 알게 되었다. 백운복은 일본 우에노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음악 분야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리쾌대 역시 미술가로서 미술 분야의 실력가로서 의사소통이 이루어져 백운복은 자신의 친동생 백운선(1924~2010)을 소개하였다.

백운선은 1924년 2월 7일생으로 이쾌대를 만날 당시(1956년) 32세였다. 백운선은 평양시 서고녀중을 졸업하였고 총명하고 인물 또한 뛰어났으며 명문가의 가정에서 가정교양을 착실히 받으면서 성장한 지성인이었다고 한다.

그림① 「백운선 초상」, 리쾌대, 1962년, 유화, 29×22cm. 리쾌대가 북에서 1956년에 결혼한 후처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이들은 1956년에 결혼을 하였는데, 결혼 당시 백운선은 미혼모로서 6살 난 딸 리수영(1950년~)이 있었다. 재혼 후, 딸 리수봉이 1957년에 태어났으며 아들 리한욱이 자강도 희천에서 1960년에 태어났다. 북에서 안정된 생활 속에, 가정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가진 리쾌대는 부인 백운선(그림①)과 딸 리수봉(그림②), 아들 리한욱을 모델로 세우고 그림을 즐겨 그렸다. 이쾌대가 재남시 작품에서도 부인 유갑봉과 자녀들을 즐겨 그린 것과 같은 생활이다.

북에서 얻은 맏딸 리수영은 리쾌대 사후에 자강도 고풍에 사는 남자에게로 시집을 갔고 둘째 딸 리수봉은 자강도 송원군에서 사는 남자에게로 시집을 갔다고 한다. 재북시의 유일한 아들 리한욱은 어려서 5살 때(1965년) 아버지를 여의자, 아버지의 뜻을 따라 그림을 그리는 것을 포기하고 희천에서 중학을 졸업하고 청진광산금속대학을 1991년에 졸업하였다, 리한욱은 희천에서 김순녀(1962~)를 만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게 되었고 아들 리석(1998~)을 낳았다. 리쾌대의 아들 리한욱은 아버지의 작품과 미술에 관한 관심이 없을 정도로 공학부분을 전공하였다.

리쾌대의 처 백운선과 백운복은 원래부터 지성인으로 예술에 조예가 깊었고, 리쾌대의 작품을 소장하기를 즐겨하였고 한다. 북에서의 백운선은 “통일이 되면 남쪽에 있는 이쾌대의 본 부인 유갑봉과 자녀들이 소중히 간직한 이쾌대의 작품들과 합쳐 이쾌대 미술작품 전람회를 개최하여 세상에 리쾌대의 예술을 소개하는 것이 소원이었다”라고 한다.

그림② 「수봉이」, 리쾌대, 1962년, 유화, 27.3×21cm. 1957년에 평양에서 태어난 리쾌대의 딸이다. 리쾌대는 1960년에도 20호 크기의 『수봉이』를 그렸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리병효 초상」, 리쾌대, 1963년, 유화, 48.5×37.9cm. [사진 제공 – 이양재]
「리병효 셋째 아들」, 리쾌대, 1963년, 하드보드에 유채, 22.5×20cm. [사진 제공 – 이양재]

북의 아내 백운선은 리쾌대와 9년 남짓 결혼생활을 유지하였지만, 어려운 가운데서도 리쾌대 사후에 소멸해 가는 그의 작품을 찾아서 모아들였다. 백운선은 서울에서 이쾌대의 본처 유갑봉(劉甲鳳, 1914~1980)이 한 것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남의 유갑봉이나 북의 백운선이 없었다면 우리 민족 미술사에서 이쾌대는 지워졌을 것이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4. 북에서 인정하는 리쾌대 작품

북에서 리쾌대가 1961년경에 평양에서 강계로 이주한 것은 좌천이었으나, 그것을 숙청으로 오해 및 왜곡한 사람들에 의하여 그의 예술 성과는 유실되었다. 리쾌대를 시기한 일부 미술가들이 앞장서서 그의 흔적을 지워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강계 이주후 그의 무고함이 평양에서 해명되어 강계력사박물관에서 한때 창작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인구 재배치 후 강계에서 4년여 만에 타계(1965년 2월 20일)하여 다시 미술계 중앙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잊혀져 갔다.

리쾌대가 사망한 1965년부터 리재현이 『조선력대미술가편람』 증보판을 내놓은 1999년까지는 북에서 나온 다른 출판물이나, 그 어느 전시관에서도 리쾌대 작품을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다. 철저히 그를 찍어 치운 것이다.[주2]

북의 미술학자 최명수는 “필자 자신도 해외에 나와서 리쾌대에 관해 연구하면서 출판물을 통하여 「3.1인민봉기」와 「농악무」에 대한 출판물을 보게 되는 기회가 있어 그림을 지금 작품과 대비해 보았다”라고 한다. 그럼으로써 최명수는 “리쾌대 당대의 출판물에서 본 작품은, 모스크바 청년학생축전에 출품한 작품으로써 그때 당시 원작”이고, “중심부에서 춤을 추는 여인의 치마와 저고리 색깔이 유족이 소장했던 현전 작품과는 달랐다”라고 한다.

또한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을 자세히 보면 “늙은 로인과 아이를 업고 보따리를 이고 고향을 바라보는 어머니와 뒤로 아이가 한 명 보인다. 늙은 로인과 어머니 사이에 작게 아이 하나가 형상된 것이 조선미술잡지에 나온 원작인데, 원작과는 다르게 현전 작품에는 아이 그림이 빠져 있다” 그러므로 리쾌대 작품이 “아니다”라는 말아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북의 미술평론가들 사이에서는 조선의 미술작품규정과 작품관리운영에 대한 제도와 질서에 의하며 이 모든 작품은 이쾌대 본인이 직접 그린 후작(後作)임을 아래에 근거하여 논증하고 있다.

첫째, 세계미술계에 작품모사에 관한 규정이 있다. 조선에서는 미술작품모사에 관한 법과 규정이 있다. 세계적으로 원작을 모사하는 경우 원작과 모사 작품(후작)을 구별하기 위하여 사람이 감촉할 수 없는 어느 한 부분에 점과 반점 필치 중의 하나를 조금 다르게 형상하여 원작과 모사작품을 구별하게 하는 규정이 있다. 만약 법적으로 소송이 제기되면 모사한 미술가가 자기가 의도적으로 다르게 그린 부분을 인식시키면 후작이나 모작으로 인정된다.

북에서 모사를 하는 경우 똑같이 그린다는 개념에서는 같지만 조금 다른 것은 작품을 모사하는 데서 화면의 어느 구석까지도 똑같이 그려야 한다는 점에서는 다르다. 그러나 규정상 작품에 모사한 화가의 이름을 밝히게 되어 있다. 예를 들면 리쾌대의 원작을 모사한 작품의 리쾌대 서명 밑에 모사한 화가의 이름을 써넣지 않으면 국가작품심의에서 통과될 수 없다.

이 규정에 따라서 자기의 작품이 아닌 다른 작품을 모사했을 경우 ‘국가미술작품심의위원회’ 심의를 받아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데 오직 창작한 본인만이 그림의 색깔과 형태를 변경시켜 창작가의 주장에 따라 그림을 그려도 통과되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후작이 원작보다 미약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자기 작품을 다시 그린다고 해도 원작의 깊이를 따를 수 없고 흉내를 내는 데 불과한 경우가 많다.

둘째, 북에서는 국가출판검열지도국의 승인을 받아야 출판물에 실리게 된다. 국가출판검열지도국은 국가미술작품심의위원회에서 비준된 문건에 따라 다시 진품 여하를 조사하고 승인하며 일단 승인된 출판물이 의견이 제기되는 경우 출판검열지도국 성원들이 국가 앞에 책임져야 하는 엄격한 검열제도가 있다.

우선 출판물에 그림이나 글을 낼 때는 먼저 국가미술작품심의위원회 심의를 받아야 하는데, 작품심의는 작품의 진품 여부와 소유자, 관계자들에게 반증 자료를 받고 작품심의위원회 성원 7명 이상이 참가하여 결정하고 비준하여야 출판물에 나갈 수 있다. 이렇게 출판물에 관한 유일관리체계는 북의 독특한 출판 체계이다. 물론 남에서도 유신시대 청와대의 동정(動靜) 기사나 사진은 공보처나 공보부에서 제공하는 것만 쓸 수 있었다.

북에서 이러한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 《통일신보》 2015년 5월 2일 자에 <공화국의 품에서 삶을 빛내인 미술가들-민족의 넋을 화폭에 수놓아 온 리쾌대1>을, 5월 9일자에는 <공화국의 품에서 삶을 빛내인 미술가들-민족의 넋을 화폭에 수놓아 온 리쾌대2>가 게재되었다. 리쾌대가 북의 신문에서 공식적으로 언급된다는 것은 리쾌대의 명예가 회복되었다는 증거이다. 《통일신보》에 게재된 이 글에는 북의 미술학자이자 미술평론가 최명수가 쓴 논평과 작품의 원색 도판이 게재되어 있다.

지난 회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쾌대의 수준에 맞는 리쾌대의 작품이냐가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북에서 유출되었다고 말하는 리쾌대의 작품은 북에서의 전래 내력을 확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어차피 이쾌대나 임군홍, 김용준이나 이석호 등등의 북으로 간 작가들에 관한 연구를 한다면, 북측 자료와 북측 미술계의 상황을 참조하여 연구할 수밖에 없다.

5. 리쾌대의 무희 그림

이쾌대가 재남시 그린 무희 작품은 「무희의 휴식」(1937, 116.7×91cm. 그림⑤)과 「상황」(1938, 156×128cm)이다. 여기서 무희는 족두리를 쓴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무희의 이 복식은 궁중무희의 복식이며, 또한 전래적인 우리 민족 여성의 전통 혼례복이기도 하다. 이 두 그림은 널리 알려진 이쾌대의 대표작이다.

그림⑤ 「무희의 휴식」, 이쾌대, 1937년, 유화, 116.7×91cm. [사진 제공 – 이양재]

그런데 리쾌대는 1955년에 「족두리를 쓴 여인」(그림④)이라는 작품을 남기며, 1958년에는 수채화 「춤」(23×19cm, 그림③)을 남긴다. 「족두리를 쓴 여인」의 출처는 리쾌대의 처 백운선이고, 「춤」의 최종 출처는 북의 미술평론가 리재현이다.

수채화 「춤」은 필자가 제66회 연재 「나의 리쾌대 작품연구 방법론」에 기재한 리재현이 보관하였던 작품 목록에서 소개한 바 있다. 이 작품을 국내로 들여와 소장하고 있는 화상은 “이 작품은 춤추는 모습의 최승희를 그린 것이라고 한다”라는 사실을 북측 상인한테서 들었다고 한다.

그림③ 「춤」, 리쾌대, 수채화, 1958년, 23×19cm. [사진 제공 – 이양재]

최승희는 1955년 8월 13일 자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민족예술발전을 위한 사업에서 특출한 공훈을 세운 예술인’으로 선정되어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1957년 7월 16일에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조선민족무용의 고전적 유산을 계승하는 사업에서와 해방 후 공화국 정부의 문예정책로선에 립각하여 자기의 창조적 로력으로써 조선민족무용을 창작발전시키며 수많은 후진 무용가들을 육성하는 사업에서 특출한 공훈을 세웠다”라는 이유로 데뷔 30주년 기념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 받았다.

즉 이 수채화 「춤」이 그려진 1958년은 최승희의 최전성기였던 셈이다. 그러나 현전하는 수채화 「춤」은 작품의 상하좌우가 잘려 나갔고, 왼쪽 하단부가 찢겨 나갔다. 이 작품은 스케치 정도의 미술관용(美術館用) 참고품이다.

그림④ 쪽도리를 쓴 녀인, 리쾌대, 1955. [사진 제공 – 이양재]

반면에 1955년에 그린 「쪽도리를 쓴 녀인」은 완성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18년전(1937년)에 이쾌대가 그린 「무희의 휴식」처럼 의자에 앉은 좌상(坐像)이다. 무희가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그린 것 같다. (사진 화상이 선명하지 못하다.)

이쾌대는 무용이나 무희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그의 재남시 작품 「군상 1- 해방고지」와 「군상 2」의 화면 왼쪽에는 마치 발레하는 모습을 연상케하는 남녀가 그려져 있고, 그리고 그는 일련의 무희 그림을 남겼다. 이쾌대의 이러한 무희 그림은 귀족적 취향의 무희를 그린 것이다.

6. 리쾌대의 농악

이쾌대의 무희 그림이 귀족적 취향의 무희를 그런 것이라면 그의 1957년작 「농악」(그림⑥)은 농민들의 흥겨운 춤 그 자체를 생동감있게 그린 것이다. 관람자로 하여금 농악의 춤판으로 끌어들이는 구도와 필력을 보여준다. 이 그림을 그린 1957년에 리쾌대는 평론문 「문학수 개인전을 보고」를 썼고,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6회 세계청년축전’에 그림 「삼일운동」을 출품한다.

북에서는 전쟁이 끝난 1953년 8월부터 1961년 9월까지를 “전후 인민경제복구건설 및 사회주의 기초건설시기”라고 구분하는데, 「농악」이 그려진 1957년은 전쟁의 상흔을 씻고 안정화되어 나가며 인민경제를 복구건설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그 시기는 사회주의 기초건설시기였다. 이 시기, 즉 리쾌대가 백운선과 결혼한 1956년부터 1961년까지가 북에서 리쾌대의 최전성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⑥ 「농악」, 리쾌대, 1957년, 유화, 155×235cm. [사진 제공 – 이양재]

이 그림 「농악」은 그 시기에 ‘전국미술전람회’ 출품한 그림이다. 그림의 크기는 155×235cm로서 리쾌대가 북에서 그린 작품으로는 최대작이다. 당시 출품작은 『조선미술』 1957년 4호에 흑백으로 게재되어 있는데, 현전하는 「농악」은 1957년도의 원작을 1960년대에 다시 그린 후작(後作)이다.

그러나 현전하는 그림은 원작의 흥쾌(興快)함에 결코 뒤지지 않는 그림으로 보인다. 작가 자신이 원작을 똑같이 다시 그리는 것은 현재 한국의 화단에서도 많이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 창작 연대를 원작을 창작한 연도로 하는 경우가 많다. 작가는 원작과 후작의 구별을 위하여 약간을 달리 그린다.

리쾌대 작 「농악」의 ‘서명’과 그림 모서리, 1957년. [사진 제공 – 이양재]

리쾌대의 「농악」은 부분 습작(그림⑦)으로도 남아 있다. 북측 유족이 소장하여 왔던 춤을 추는 듯한 붉은 치마에 노란 저고리를 입은 여성은 그러한 부분 습작인데, 완성된 그림에는 이 복장을 한 여성은 있어도 이 습작과 같은 춤추는 정면 모습으로는 그리지 않았다. 그런데 부분도 그림⑦은 《통일신보》 2015년 5월 9일(토) 자 8면에 실린 〈민족의 넋을 화폭에 수놓아 온 리쾌대(2)〉라는 기사에 「춤」이라는 제목으로 게재(흑백 사진)되었다.

한편, 이 습작보다 완성도가 높은 같은 형상을 그린 리쾌대의 작품이 수년전 서울옥션의 경매에 리쾌대의 전칭(傳稱)작품으로 출품된 바 있다. 리쾌대의 작품이라 인정되지 않아 유찰되었다. 그런데 서울옥션의 경매에서 유찰된 그 작품은 MBC 문화부 기자였던 남달구(南達九, 1957~2023)가 입수한 것으로 전칭작품이 아니라 리쾌대의 재북 아내 백운선이 소중히 간직해 왔던 리쾌대의 진품이다.

리쾌대의 재북시절 연구가 그 동안 부진했던 것이 결국은 리쾌대의 재북시절 작품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 온 것이다. 북에서 이쾌대의 재남시절 연구가 시도되지 않는다면, 결국은 이쾌대의 재남시절 작품을 부정하게 될 수도 있다. 지금 남북에서 각기 이쾌대 및 리쾌대를 종합하여 연구하지 않는다면, 다음 세대에 가서는 우리 민족의 현대미술사에서 그의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2024.07.10.)

그림⑦ 「농악」 부분 습작 「춤」, 리쾌대, 1957년, 유화. 남달구 소장품은 이 모습에 배경이 조금 더 그려져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주(註)

[주1] 최명수, 〈민족의 넋을 화폭에 수놓아 온 리쾌대〉, 《통일신보》, 2015년 5월 9일(토)자. 8면.

[주2] 만약 리쾌대가 숙청된 것이라면 그는 강계로 보내지지 않았을 것이다. 강계는 한국전쟁 시 북의 임시수도였던 중요 도시였다. 한국전쟁 시 남측의 부산과 같은 역할을 한,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피란하였던 의주와 같은 의미가 있는 도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