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고려불화 연구사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71)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1973년 이전에 우리나라의 미술사학계에서 고려불화의 실체를 보고 연구한 학자는 전혀 없었다. 잘해야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노영(魯英, ?~1307~?)의 1307년 작 「아미타팔대보살도」및 「담무갈보살·지장보살도」와 「나한도」, 그리고 「부석사 조사당 벽화(浮石寺 祖師堂 壁畵)」를 본 정도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회화사학계에서 지난 50년간 고려불화를 연구한 과정을 돌이켜 본다는 것은 향후 고려 회화 연구의 방향 설정을 위하여 매우 중요한 일이므로, 이번에는 이를 간략히 정리하고자 한다.
1. 전설적인 고려불화
일제 강점시기 조선의 언론이 고려불화의 존재를 처음으로 보도한 것은 1938년 11월 22일자 <동아일보>(東亞日報)이다. “조선명보전람회도록(朝鮮名寶展覽會圖錄)이 경성부(京城府) 가회정(嘉會町, 가회동) 소재 경성미술관(京城美術舘)에 의해 간행(刊行)된 바, 신라진흥왕정계비문(新羅眞興王定界碑文)·고려불화(高麗佛畵) 등 130여점(餘點)이 수록되다.”라는 짤막한 기사가 실렸기 때문이다.
이 조선명보전람회는 일제 식민지 시기의 조선인 화상 오봉빈이 주최하였으며 당시 조선의 주요 문화담당자, 소장가, 서화가, 학자들이 고문과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출품작의 대부분을 수록한 『조선명보전람회도록』은 일제 강점기 때에 발간된 전람회 도록 가운데 질적 양적인 면에서 손꼽히는 도록이다.
이어서 12월 10일자에는 “조선미술관(朝鮮美術館)에서는 경성부(京城府) 부민관(府民館)에서 고려불화(高麗佛畵) 등 명보서화종합전시회(名寶書畵綜合展覽會)를 3일간(日間) 개최하다.”라고 보도하고 있다.
또한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의 『조선상식문답 속편』(1947년 동명사 발행)의 ‘18. 회화 – 고려시대의 회화’에서는 고려불화의 존재를 말하고 있다. 일련의 이러한 사실은 1938년에 고려불화가 미술 상품으로 전시되었고, 그 찬란한 존재가 식자층에 상당히 각인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일제 식민지시대 말기와 해방후 격동기에 고고미술사학자이자 한국화가, 단청장으로 활동한 임천(林泉, 1908~1965) 선생이라고 있다. 그는 임영주(林永周, 1943~)씨의 부친이다. 임천 선생은 고려회화와 고려불화에 관한 관심이 높아 고려시대의 몇 작품을 모작하기도 하였으나 당시 국내의 열악한 환경에서 고려불화의 연구까지는 이르지를 못하였다.
마치 고려불화가 전설이 되는 듯싶었다. 이러한 가운데 고려불화가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은 1973년이다.
2. 일본에서 드러나는 고려불화
①1973년, 동주(東洲) 이용희(李用熙, 1917~1997) 선생이 일본 나라의 야마토분카관(大和文華館)에서 개최한 「조선회화전」을 한국일보사와 동행 취재하고 몇 곳을 탐방하면서, 일본에 현전하는 고려불화의 아름다움을 <한국일보>에서 대서특필한다. 이때 처음으로 고려불화의 존재가 국내에 갑툭튀하며 알려졌다.
동주 이용희 선생은 당시 <한국일보>에 기고한 글과 자료를 모아서 이듬해에 『일본속의 한화』(1974년, 서문당)라는 저서를 내놓는다. 이를 계기로 하여 우리나라의 미술사학계에서 고려불화의 실체에 관한 인식이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②1978년 10월 18일부터 11월 19일까지 33일간, 일본 나라의 야마토분카관에서는 「특별전 고려불화」를 개최한다. 여기에는 고려불화 53점과 사경 17점 등 70점이 전시된다. 이 전시는 고려불화를 주제로 하여 전시한 최초의 기획전이다.
이 전시 도록은 표지에 도판 32면의 「수월관음도」 부분을 게재하였고, 도록 첫 면에는 도쿄 네즈(根津)미술관 소장의 「아미타여래상」을 원색 도판으로 수록하였고, 나머지 도판은 모두 흑백이다.
③1981년 2월 25일자로 일본의 아사히(朝日)신문사에서는 키쿠타케 준이치(菊竹淳一)와 요시다 히로시(吉田宏志, 야마토분카관 학예실장)가 편집한 『고려불화』를 발행한다. 이 책은 고려불화를 다룬 첫 원색 도판집이다. 이 책은 같은 해 <중앙일보>에서 편찬한 ‘한국의 미’ 시리즈⑦ 『고려불화』 발행의 동기가 된다.
이렇듯 1981년까지 고려불화에 관한 연구는 우리나라가 아니라 작품이 많이 남아있는 일본의 미술사학계에서 주도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본 미술사학계의 고려불화에 관한 연구 주도는 고려 특유의 불교와는 차이가 나는 일본 가마쿠라시대(鎌倉時代, 1185년~1333년)의 불교 시각에서 고려불화를 보고 평가한다는 한계성을 보여주었다.
3. 한국의 미술사학계 – 비로소 고려불화에 눈을 돌리다
④1981년 6월 30일, 한국의 중앙일보사에서는 동주 이용희 선생이 책임 감수한 『고려불화』를 ‘한국의 미’ 시리즈의 ⑦번으로 발행한다. 이 책은 국내에서 나온 고려불화에 관한 첫 번째 원색 도판집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이동주 선생의 ‘고려불화-탱화를 중심으로’와 동국대 문명대(文明大, 1940~) 교수의 ‘고려불화의 조성 – 배경과 내용’과 ‘도판 해설’, 그리고 한국화가 임천 선생의 아들 임영주씨가 집성한 ‘고려불화의 문양’이 게재된다.
⑤1984년, 한국의 동화출판공사에서는 불교미술사학자 홍윤식(洪潤植, 1934~2020) 교수의 『고려 불화의 연구』를 단행본으로 발행한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나온 고려불화에 관한 가장 방대하고 종합적인 연구 이론서이다. 고려불화를 연구한다면서 이 책을 안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⑥1986년 7월 1일, 한국의 도서출판 미진사에서는 권희경(權熹耕) 교수의 학위 논문 『고려사경의 연구』를 단행본으로 발행한다. 권희경 교수는 이후 도서출판 글고운에서 2006년 10월 20일자로 『고려의 사경』을 발행한다.
⑦1987년 7월 1일, 한국의 미술서적 전문출판사 열화당에서는 이동주 선생의 『한국회화사론』을 발행하면서 제2부로 고려불화를, 제3부로는 1974년 서문당에서 초판 발행한 『일본속의 한화』를 포함하여 편집·발행한다.
⑧1990년, 일본의 나가타 분쇼오도오(永田文昌堂)애서는 정우택 교수의 일본 규슈대학 학위 논문 『고려시대 아미타 화상의 연구(일문)』을 발행한다.
⑨1991년 7월 1일, 열화당에서는 동국대 문명대 교수의 『고려불화』(p.106) 단행본을 발행한다.
⑩1993년 12월 11일부터 1994년 2월 13일까지, 동국대학교 박물관 개관 30주년(관장 홍윤식) 기념전으로 동국대학교 박물관과 호암미술관, 일본불교대학의 공동으로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고려 영원한 미–고려불화특별전」을 개최한다. 이 전시는 한국에서 개최한 최초의 고려불화 특별전이다.
일본과 프랑스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려불화 17점(조선초기 작품 일부 포함)을 비롯해, 총 61점이 전시되었으며 국내 소장의 사경화, 판경류 등이 전시되는 등 당시 세계적인 규모로 개최되어 국내외의 큰 주목을 받았다. 고려불화를 일반에 널리 알리고자 강좌, 작품설명회 등 다양한 부대행사를 개최하였으며, 전시 기간에 6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았다.
이 특별전은 당시 국내에서는 실태 조사나 연구조차 제대로 되고 있지 않던 고려 불화의 실물 감상 기회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당시 전시를 주관하였던 동국대박물관장 홍윤식 박사는 당시의 감동을 회상한 『회상, 고려불화전』을 2019년에 도서출판 집옥재에서 출판한다.
⑪1994년 5월 18일, ㈜한국색채문화사에서는 「한국불교미술대전-②불교회화」를 문명대 교수의 감수로 출간한다.
⑫1995년 8월 27일자로 가람사연구소에서 홍윤식 편저 「조선불화 화기집(朝鮮佛畫 畵記集)」을 출간한다. 고려불화로부터 조선후기 불화까지의 화기를 모은 중요한 책이다.
⑬1996년, 키쿠타케 준이치(菊竹淳一)와 정우택(鄭于澤) 교수의 논문이 들어간 『고려시대(高麗時代)의 불화(佛畫)』를 한국미술연구소가 편찬하여 시공사에서 발행한다. 이 책은 현재까지 나온 가장 호화판의 고려불화 화집이다.
고려불화를 그리는 데 사용한 물감과 직물 등에 관한 일본에서의 재료 분석을 공개한 이 책은 당시 일본에서의 고려불화연구 결과를 집대성하려는 목적이 있었지만, 문제점은 일부 원불화(元佛畵)를 고려불화로 수록하였다는 지적을 받은 바 있다. 그리고 이 책의 편찬 및 발행에는 불교미술사학자들 사이에서 여러 뒷말이 전해 온다.
이렇듯 1980년대 초반부터 1996년까지 16년간은 우리나라 미술사학계에서 고려불화에 관한 연구를 비로소 시도하던 시기라고 할 수가 있다. 그리고 1996년 『고려시대의 불화』가 출간되자 우리나라의 고미술품 수집가들은 고려불화에 눈을 돌리게 된다.
1996년까지 국내에서의 고려불화를 감식 및 감정하는 주체는 동국대의 홍윤식과 장충식 문명대 교수였으나, 1996년 시공사에서 「고려시대의 불화」를 출간한 이후, 그 책의 필진의 한 사람으로 참여한 정우택 교수가 갑툭튀하여 그에게로 급격하게 기우는 현상을 보여준다.
그런데 문제는 고려와 동 년대의 중국 송금원(宋金元)이나 일본의 고 불화는 보존 상태가 양호한 데 비하여 일본에 현전하는 고려불화는 매우 열악한 보존 상태를 보여주고 있어, 그 시대의 낡은 불화만을 고려불화로 인정한다는 한계성을 보인다는 점이다. 따라서 시중에서는 우스갯소리로 “보존 상태가 좋은 우리나라의 옛 불화로 보이는 것들은 가짜”라는 해괴한 말이 나돌기도 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의 고려불화 감정학은 중일(中日)을 따라잡지 못하였음을 비꼬는 말이다. 즉 우리나라의 고려불화 연구는 아직도 일본 학자들에 의하여 고려불화로 지목된 불화만을 따라가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4. 고려불화와 송원불화의 대비 연구에 눈을 돌리다
2000년 이후, 고려불화에 관한 주목할 만한 여러 연구가 시도되었고 중요 논문이 상당수가 나왔다. 짧은 소견이기는 하지만 필자도 2000년 4월과 6월, 9월에 각기 발행된 격월간 『한국고미술』에 ①고려불화의 감정 및 감식에 대한 견해(통권 제18호), ②자비의 화신을 그린 ‘수월관음도’(통권 제19호), ③고려불화에 대한 단상(통권 제20호) 등을 연이어 기고하였다.
이 세 편의 글에서 필자는 우리나라의 고려불화와 이에 해당하는 같은 시기의 송료금원(960~1388)의 불화, 그리고 일본의 가마쿠라시대(1185년~1333년)와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1336~1573)의 불화까지도 비교 연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야 같고 다름이 나타나며, 고려불화의 특성이 드러난다고 본 것이다. 2000년 이전까지만 해도 그러한 종합적인 연구나 기획전은 없었다. 그런데 2000년으로부터 10년 후‥‥‥,
⑭2010년 10월 12일부터 11월 21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최광식)에서는 특별전 「고려불화대전-700년 만의 해후」를 개최하였다. 이 전시에는 108점이 전시되었는데, 일본에 있는 고려불화 27점, 미국과 유럽 소재 고려불화 15점, 국내 소재 고려불화 19점 등 고려불화 61점, 비교 감상을 위한 중국 및 일본 불화 20점, 고려불화의 전통을 계승한 조선 전기 불화 5점, 고려시대 불상과 공예품 22점을 전시하였다. 처음으로 비교 감상을 위하여 중국 및 일본의 불화가 20점 전시된 특별전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중국이나 일본의 옛 불화는 우리 고려불화보다 보존 상태가 생생하였다. “낡은 불화만을 고려불화로 인정하며 보존 상태가 좋은 우리나라의 옛 불화는 가짜”라는 해괴한 말이 생각나게 하는 특별전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국립중앙박물관의 학예관들은 필자가 1996년 이후 줄곧 느껴왔던 고려불화와 동시대의 동북아 옛 불화를 대비 연구하여야 한다는 관점을 받아들였거나, 아니면 각각의 연구 과정에서 똑같은 인식을 한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5. 확산하는 고려불화 연구와 여러 전시
⑮2010년 국박의 특별전 「고려불화대전-700년 만의 해후」 이후, 우리나라의 학계에는 고려불화에 관한 주목할 만한 많은 논문이 나왔다. 여기에 이를 일일이 소개하지 않는다.
⑯2016년 11월 3일부터 12월 4일까지 일본 교토의 센오쿠하쿠코칸(泉屋博古館)에서는 「고려불화」 전시회를 갖는다. 38점의 고려불화와 9점의 고려사경을 전시한다.
⑰2018년 11월, 중국 절강대학 아주연구중심에서는 『고려화전집1 - 구미장품권』을 편찬하면서 유럽과 미국에 있는 고려불화를 집대성한 대형 화집을 출판하였다.
⑱2018년 12월 4일부터 2019년 3월 3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관장 배기동)에서는 「대고려 918-2018 그 찬란한 도전」을 개최하였다. 이 전시에는 349건 452점을 전시하였는데, 이 가운데 전시한 고려불화는 10여 점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문화 전반을 보여주는 가운데 고려불화를 내놓은 전시이므로 관람자에게 고려불화가 그려진 문화적 시대환경을 느끼게 하였다.
⑲2023년 9월 5일부터 10월 15일까지 일본 규슈국립박물관에서는 특집전시로 「고려·조선시대의 불교미술」을 개최하였다. 여기에는 고려불화와 조선초기의 불화 40여 점이 전시되었다. 고려로부터 조선으로 이어지는 불교미술의 계승성을 조명한 전시이다.
2010년 이후 고려불화에 관한 괄목할 만한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실전에서의 고려불화 감식 및 감정학은 발전하지 못하고 아직도 1996년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학술적 논리와 실전에서의 감정은 일치하지 않는 것인가? 실물을 가지고 현실에서 조사 연구한 논문이 아니라 다른 논문과 정리된 자료를 모아서 엮은 논문이므로 실물에 눈이 어두운 현상이 나타난다.
6. 고려회화와 고려불화
현전하는 고려회화 대다수는 불교회화이고, 그 정수는 흔히 고려불화로 불리는 고려탱화(高麗幀畵)이다. 고려불화는 많은 경우 견본(絹本)이나 마본(麻本) 등의 직물(織物)에 그렸다. 마본은 식물성 직물이지만, 견본은 누에에서 뽑은 실로 만들므로 식물성 직물은 아니다.
견본과 마본은 그 성질에 차이가 있고, 종이와 직물은 그 성질의 차이가 크다. 같은 종이도 종이를 만든 그 재료라든가 두께에 따라 먹이나 물감을 받아들이는 데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하자면 재료를 달리하는 그림에서 천편일률적인 똑같은 현상이 나타날 수 없다. 또한 그림을 그리는 화공(畫工)의 수준에 따라 그려진 그림의 격차가 크다.
고려불화나 고려회화를 보는 감식 및 감정(鑑定)은 첫 번째로 먼저 그림을 그린 바탕 재질과 안료를 살펴본다. 그림의 바탕 재질인 견직물도 직조된 씨줄과 날줄의 오고 감에서 차이가 있다. 같은 견직물도 양잠(養蠶)에서 실을 뽑아 만든 회견(繪絹)과 야생의 산잠(山蠶)에서 실을 뽑아 만든 회견에서 차이가 난다. 이러한 것을 검토한 후에 그림에 나타난 문양이라든가 필선을 살펴본다.
고려시대의 불화와 산수가 그려진 바탕의 특성이 다르다. 종이나 회견에 그린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회화를, 고려불화를 감식하는 요령에 따라 판단하려 해서는 안 된다. 한·중·일의 고 불화는 연도가 올라갈수록 유사한 점도 많지만, 화가들이 즐겨 구사한 도상과 색감에서는 일정한 차이를 보인다. 오히려 산수화에서는 유사성을 불화에서보다 많이 찾을 수가 있다.
이상에서 1982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일본실에서 고려 수월관음도를 처음 본 이래, 관심을 가지고 보며 느껴왔던 고려불화에 관한 연구사를 간략히 기술하였다. 아울러 나의 고려불화론과 고려회화론을 간단히 피력하였다.
위에서 정리한 우리나라에서 고려불화에 관한 연구사를 이해하고 고려불화의 탐색과 연구에 접근하여야 할 것이다. 일부 연구자에게는 무서운 말로 들리겠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각 연구자의 연구 수준과 감식 안목의 유무 및 특성을 간파할 수 있다. (2024.07.05.)
첨부 : 1997년 9월에 PC통신 천리안에 연재하였던 “이양재의 미술에세이” 가운데 한 편이다. 이번 신 잡동산이 연재에서, 우리나라의 고려불화연구사를 돌이켜보며 27년 전에 쓴 글이지만 여기에 소개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첨부한다.
고구려 고분 벽화
李 亮 載 (고려미술연구소)
1.
“‘모나리자’라고 하면 모르는 이가 있을까요?”
“물론이죠, 당연히 있다고 보아야 하겠죠!”
“예? 모나리자를 모르다니....요?”
“아마죤이나 티베트 깊숙이에서 문명(文明)과 담을 쌓고 사는 사람들은 대개가 모르겠죠!”
“아~~! 하하.....,”
“많은 사람이 아는 ‘유명(有名)한 작품이냐?’와 ‘명화(名畵)냐?’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어요. 모든 명화가 유명한 작품이지는 않겠지요?”
“이해할 수가 있어요. 이름없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멋진 인물은 많으니까요. 멋진 사람이란 멋을 내는 사람이 아니라 인생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인간답게 사는 사람을 의미하지요. 그림 역시 그림다워야 좋은 그림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지요.”
“예..., 그래요. 그림은 그린 것 같아야 그림이지요. 거기에 작가로서 생명력을 불어넣은 그러한 그림이어야 진짜 좋은 그림이지요.”
2.
“우리 민족이 창작한 회화(繪畫) 가운데 세계적인 명작(名作)이 있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만약 없다면 우리 민족의 회화사(繪畫史)는 의미가 없는 일로서 이는 매우 섭섭한 일이 아니겠어요? 있다는 데로 희망(希望)을 가져야 겠죠!”
“하하하....., 매우 자위적(自慰的)인 표현이군요. 그러나 분명히 있어요. 명화를 보는 시각(視覺)은 동양이나 서양의 편향(偏向)된 어느 한 시각(視覺)이나, 과거나 현대의 어느 한 시점(視點)만으로 보아서는 안 되지요. 양대(兩大) 문화권의 특성을 떠난 오직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는 인간적(人間的)인 시각과 회화사적인 영속적(永續的) 시각으로 보아야 하지요.”
“그렇겠군요. 하지만 명화란 언제 보아도 좋은 그림이어야 하지 않겠어요?”
“물론이죠. 하지만 각 시대마다 예술에 대한 관점이라든가 가치가 달라지므로, 언제 누가 보아도 좋다고 할 수 있는 그림은 있을 수가 없지요.”
3.
“우리의 회화를 세계적인 명화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손에 달렸지요. 명화는 명화로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한 인정을 받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미술사학자(美術史學者)와 미술평론가(美術評論家), 애호가(愛好家), 그리고 미술가(美術家)의 의무(義務)이기도 한 것이겠지요.”
“그럼, 우리 민족이 창작한 회화(繪畫) 가운데 세계적인 명작(名作)은 어느 작품이에요?”
“하하....., 우선 우리 민족이 창작한 세계적인 명화를 손을 꼽자면 우선 고구려시대(高句麗時代)의 몇몇 고분벽화(古墳壁畵)를 꼽을 수가 있지요.”
“하지만...! 고구려 고분벽화는 작자미상의 작품인데 작자미상의 벽화를 세계적인 명화로 칠 수가 있을까요?”
“물론이지요. 프랑스의 알타미라 벽화를 잘 아시지요! 그건 선사시대(先史時代)의 벽화에요. 그러나 그 그림이 나오지 않는 미술사전(美術事典)이라든가 세계사(世界史) 책은 거의 없을 거에요. 반면에 고구려 고분벽화는 분명 역사시대(歷史時代)의 작품이지요. 그러면서도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요. 왜일까요? 회화성이 뒤져서? 아니에요! 우리 후손들이 널리 알리지 못한 이유가 크지요.”
4.
“고구려 고분벽화의 어느 면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여야 하는가요?”
“왜요? 제 주장이 의아하게 여겨지는 가요? 고구려 고분벽화는 한 시대 인간들의 삶의 형태에 대해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욕구가 그대로 표출되어 있어요. 다시 말하자면 가장 귀족적(貴族的)인 그것에서부터 가장 서민적(庶民的)인 것까지를 한 시대의 기록으로 나타내고 있어요. 지배자를 위해 그린 벽화이지만, 서민들을 그리되 지배자를 위한 서민들의 모습으로 그리지는 않았어요. 서민들의 생활 모습을 지배자의 공간에 그려 넣되 서민들을 사회 생활상(生活相)의 한 주체로 그려 넣었음을 고구려 고분벽화의 곳곳에서 읽을 수가 있어요.”
“아하! 그렇군요. 제가 알기에도 고구려 고분벽화 같은 벽화가 신라나 백제에는 거의 없어요.”
“그렇지요. 고구려 고분벽화가 없다면 우리 민족의 회화사는 무척 삭막할 거예요. 그것이 있으므로 해서 우리 민족의 회화사는 화려해 지지요. 실제로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고려중기까지의 500여 년간의 회화사는 거의 빈 공간이지요.”
“예..., 강대한 고구려에 그토록 아름다운 미술이 있었다는 것은 고구려가 문화국가라는 사실을 대변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죠.”
다행히도 최근 북한에서는 고구려 고분벽화를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려는 시도가 있고, 이에 조사팀이 이번 가을에 방북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매우 반가운 소식이다. (19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