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할아버지 안병희 ⑪ 열여섯 살 ‘아기선생’이 되다
[연재] 안영민의 「아버지, 안재구」 (22)
1948년의 2.7구국투쟁 때 집을 떠난 아버지가 14개월 만에 돌아온 날, 다행히도 할아버지가 연계소 집에 와 계셨다. 할아버지는 이날 낮에 밀양에서 구지로 제사를 옮겨 가려고 제기와 집기들을 챙기러 오셨다고 한다. 한밤중에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들을 보고 놀란 할아버지는, 혹시라도 누가 따라왔을까 대문 밖으로 나가 사방을 둘러보고 돌아왔다.
“재구야, 조상님이 정말 니를 지켜주시는갑다! 어쩌면 이리도 때를 잘 맞췄노. 내일 아침 일찍 물건들을 싣고 갈 트럭이 올 거다. 그 차 타고 구지로 같이 가자.”
증조할머니도 기쁨과 당황스러움에 반 울음으로 이야기했다.
“내가 계음 아이 죽고부터는 정말 사는 게 아니었다. 앉아도, 서도, 잠자리에 들어도 온통 니 걱정뿐이었다. 왜놈 시대에 저놈들이 조선왜놈 노릇을 그렇게나 했어도, 해방되고 어디 한 사람 다치기나 했나. 그런데도 저놈들은 무슨 원수가 졌는지 사람을 이래 무참히 죽이고들 있으니…….”
왜놈 앞잡이들이 다시 미국놈 앞잡이가 돼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끌고 가는 모습을 지켜본 증조할머니는 비통한 심정이었다. 집 나간 장손에게 행여 무슨 일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지냈는데, 그리던 손자가 집으로 돌아와도 걱정부터 앞섰다.
“내일 아침 너거 애비하고 바로 구지로 떠나거라. 할배도 어디서든 잘 지내고 계실 테니 염려 말고. 지금은 밀양을 벗어나는 게 상책이다.”
다음 날 아침, 짐을 싣고 연계소를 출발한 미제 ‘스리쿼터’ 트럭은 무안으로 해서 영산과 창녕을 지나 현풍 아래 유가를 거쳐 구지로 들어섰다. 두 시간쯤 걸렸다. 집에 도착해 아버지가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할머니의 반가운 외침과 울음이 마당에 울렸다.
“이게 누고? 아이고 재구야, 니가 어떻게 이 차를 타고 왔노?”
할머니 옆으로 삼촌과 고모들이 달려 나왔다. 어린 동생들은 다들 오랜만에 보는 맏형의 팔과 허리를 붙들며 매달렸다.
“내가 구지를 떠날 때 엄마 뱃속에 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태어나 돌도 못 지나고 그만 세상을 떠났다고 하더라. 너거 할매가 나를 붙들고, ‘오라비 불러오려고 고게 먼저 가 버렸나 보다’며 슬피 우셨지. 얼굴 한번 못 본 동생이 불쌍하고, 엄마도 가여워 나도 눈물이 나더라.”
구지로 돌아온 아버지는 살아갈 길을 찾아야 했다. 투쟁 전선을 떠나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는 동생들을 돌보며 부모님의 일손을 거들었다. 무료하고 답답했다. 대식구의 생계를 이어가느라 쉴 틈 없는 부모님을 보기에도 면목 없었다. 그렇다고 취직하기에도 상황이 여의찮았다. 예전에 다니던 구지고등공민학교에 다시 입학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신문에서 ‘국민학교 교원 모집’ 광고를 보았다. 어차피 중학교 1학년 때 퇴학 당해 학교를 마치지 못한지라 별 관심 없이 훑어보는데, 응시 자격에서 눈길이 멈췄다. ‘중학교 3학년 졸업 또는 수료 미달자 중 응시 자격시험 합격자는 본시험에 응할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눈이 번쩍 뜨였어. 나도 시험을 칠 수 있는지 다시 자세히 읽어보았어. 응시 자격시험만 통과하면 본시험을 칠 수 있다는 거야. 그래, 한번 시험을 쳐보자, 마음먹었지.”
정부 수립 이후 국민학교 6년의 의무교육 시행을 추진했지만, 교사가 없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교실이야 가건물이라도 지으면 되지만 교사는 아무에게나 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교원 자격시험을 통해 국민학교 교사를 대거 뽑기로 한 것이다.
아버지는 이튿날 대구로 나가 중앙통 서점가에 들렀다. 시험과목은 국어, 영어, 수학, 사회(공민, 역사, 지리), 과학(물리, 화학, 생물, 생리), 음악, 미술, 체육이론과 교육이론이었다. 서점에서 적당한 교재를 사서 돌아왔다. 바로 공부에 돌입했다. 응시 자격시험은 6월 말이었고, 본시험은 7월 초였다. 아버지는 건넌방에 틀어박혀 밤낮으로 책과 씨름했다. 한 달가량 벼락치기로 공부한 결과 시험에 연달아 합격했다.
그렇게 해서 아버지는 국민학교 준교사 자격을 얻었다. 외가의 친척들을 보증인으로 넣고, 외가 큰집 할아버지(한민당 국회의원 김우식)가 도교육청 학무과에 특별히 부탁해 첫 임지 발령을 구지국민학교로 받았다. 이때 아버지의 나이, 만으로 열여섯 살이 좀 모자랐다.
“여러분, 나는 방금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소개받은 안재구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가르친다는 선생이라기보다는 함께 공부하고 함께 놀아줄 동무가 되겠습니다. 때로는 형처럼, 오빠처럼 여러분의 공부를 돕고, 한 가족으로 이 학교에서 생활하겠습니다.”
발령 첫날 조회 시간에 학생들에게 건넨 인사말과 같이 아버지는 형처럼 오빠처럼 학생들을 대했다. 빡빡 깎은 중학생 머리에 검은 목닫이 학생복을 입은 아버지를, 학생들은 ‘아기선생’이라 불렀다. 학부형들도 마찬가지였다. ‘아기선생’이란 별명은 이내 구지면 전체로 퍼졌다.
나중에 형이 대학에 입학했을 때, 지도교수님이 구지국민학교 시절의 아버지 제자였다고 한다. 학생들과 나이 차도 별로 나지 않는 ‘아기선생’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고, 뒤에 그 선생님이 수학자가 된 것도, 박정희 정권 때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된 것도, 여전히 수감되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아기선생’의 아들을 제자로 맞은 인연에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그 시절은 교육자의 사회적 지위가 매우 높았다고 한다. 면에서 가장 존경받고 지위가 높은 사람은 학교 교장이었다. 그다음이 면장, 그다음이 전관예우를 받는 유지가 되고, 경찰 지서장은 그다음쯤 됐다. 그런 시절에 열여섯 까까머리 소년이 교사가 됐으니 구지 외가의 친척들도 칭찬이 자자했다. 대식구가 의탁하고 있는 것으로 어른들께 송구스러웠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어깨도 조금은 펴졌다.
“학기 초에 가정방문을 나가면 구장이 직접 학생들의 집을 안내했어. 그리고 구장 집에서 점심 대접을 받았지. 머리가 희끗희끗한 구장이 정중하게 술잔도 권하고, 식후에는 담배까지도 한 대 담아 불을 붙여 주었지. 그 바람에 나도 담배를 일찍 배웠어. 그만큼 교사에 대한 존경심이 높았던 때야. 그런 존경을 받은 교사들도 학생들을 진심으로 가르쳤고.”
내게도 잊히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이 있다. 하루는 아버지를 모시고 외출하다 퇴근하는 큰아이 담임선생님을 만나게 됐다. ‘손자 담임선생님’이란 말에 아버지는 바로 모자를 벗고 젊은 여선생님께 허리를 깊이 숙였다. 나중에 다른 일로 선생님을 만났을 때, 선생님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날 제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시는 할아버님을 뵙고 많은 걸 느꼈습니다. 정말 아이들을 귀하게 여기고 열심히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에게는 교직이 천직이었다. 학생들을 정말로 좋아했고, 가르치는 일이 즐거웠다. 학교 일 하나하나가 모두 재미있었다. 교내 환경정리도 도맡아 했다. 복도 끝에서 끝까지 우리나라 역사 연대표를 상세히 적어 붙여 아이들이 익히도록 했다. 풍금을 치며 아이들과 함께 노래 부르는 시간도 즐거웠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 시절 이야기를 할 때면 아버지의 얼굴은 아이처럼 천진스러워졌다.
교사 일에 재미를 붙이고 잘 적응해 나갔지만, 세상은 여전히 혼란했다. 단독정부 수립 후 인민들의 항쟁을 무력으로 토벌하고 있던 이승만은 ‘북진통일’ 방침을 내놓았다. 이남의 국방군 병력이 대거 38도선 아래로 배치됐다. 이 때문에 남북 사이에는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이 빈번해졌다.
이승만 정권은 거기에다 ‘좌익 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전향시켜 이들을 보호[保]하고 인도[導]한다’는 명목으로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을 조직했다. 1949년 6월에 조직된 보도연맹은 1941년에 일제가 조직한 대화숙(大和塾)을 본뜬 것이다. 대화숙은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자들을 사찰하고 전향시키는 업무를 담당했다. 또 전향한 이들을 앞세워 내선일체와 천황에 대한 충성 등 일제의 논리를 홍보하고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보도연맹에는 한때라도 남로당원이었던 사람들은 의무적으로 가입해야만 했다. 빨치산이나 남로당원의 가족들도 반강제로 가입시켰다. 또 지역마다 경찰서별로 할당된 숫자가 있어서, 평범한 농민들에게 고무신이나 비료를 나눠주면서 가입도장을 받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승만 정권은 보도연맹을 만들면서 국민을 세 가지로 분류했어. 하나는 ‘도민’이라고 해서, 투쟁에 가담한 사실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도민증’을 주었지. 또, 투쟁에 가담했다가 체포돼 이력이 남았거나 전향한 사람들은 보도연맹에 가입시키고 ‘맹원증’을 주었고. 도민증도 맹원증도 없는 사람들은 모두 적으로 간주하고 잡아들였어.”
경찰이나 사찰 당국이 원하는 대로 전향만 하면 놓여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여기저기 관제 행사에 강제로 동원되는가 하면 감시는 여전했다. ‘맹원증’을 안고 창살 없는 감옥살이를 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승만 정권은 6.25전쟁이 터지자 이들을 모두 골짜기로 끌고 가 학살했다. 인민군에게 부역할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당시 보도연맹 가입자는 3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전국의 골짜기마다 이들의 시신으로 가득 찼다. 죽음을 의미하는 ‘골로 갔다’는 말도 여기에서 유래됐다.
우리 집안에도 보도연맹으로 학살당한 이들이 여럿 나왔다. 증조할아버지의 동생인 끝에 할배가 보도연맹에 가입하고, 그 영향으로 증조할아버지의 사촌동생인 월산 할배도 가입했다. 두 사람은 모두 전쟁이 터지자마자 골짜기로 끌려가 희생당했다. 특히 끝에 할배는 보도연맹 밀양군지부 훈련부장이라는 감투까지 쓰고 숱한 사람들을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고 한다. 본인은 물론이고 그들까지 모두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꼴이었다. 그 바람에 여기저기서 원망이 자자했다.
아버지가 구지로 내려가 초등학교 교사가 된 1949년 10월에 증조할아버지도 구지로 오시게 되었다. 미군정이 남로당을 불법화하며 대대적인 탄압에 나서자 남로당은 지하로 숨어 들어갔다. 이때 이루어진 조직 재편으로 군당 위원장에서 물러난 증조할아버지는 밀양을 떠나 있었다. 당시 탄압을 피해 산으로 들어가 유격대를 조직한 사람들은 대규모 토벌로 상당수가 전사하거나 붙잡혔다. 그런 상황에서 환갑을 앞둔 증조할아버지도 더 이상 활동하기가 어려운 처지였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의 감옥살이에서 얻은 병세도 심상치 않았다.
경찰의 추적을 받던 증조할아버지가 ‘합법 신분’을 얻게 된 것은 밀양 유도회(儒道會)의 중재 덕분이었다. 유도회에는, 밀양 유림을 새로 일으킨 우리 집안의 내력과 일제강점기부터 독립운동을 해온 증조할아버지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지역 경찰서에 말발이 서는 유지들도 있었다. 물론 그간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밀양의 남로당 조직이 궤멸하다시피 한 점도 영향을 미쳤다.
“밀양의 유림들이 나서서 경찰과 협상해 할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실 수 있게 만들었지. 경찰도 이미 나이도 들고 병고에 쇠약해진 할아버지를 붙잡아 가기보다는 나중에라도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을 테고. 물론 유림에서도 속셈이 따로 있기는 했어. 다른 곳에 거처를 마련해 드릴 테니, 할아버지 명의로 되어 있던 연계소를 자신들에게 넘겨달라는 거였어.”
이렇게 해서 증조할아버지는 병든 몸으로 밀양으로 돌아왔다. 선대가 짓고 자신의 손으로 새로 일군 연계소를 떠나야 하는 마음이 착잡하셨을 것이다, 낯선 집에서도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밀양에서도 보도연맹이 결성되면서 감시와 압박이 노골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신의 동생까지 보도연맹에 가입해 앞장서는 꼴을 보게 된 증조할아버지는 결국 고향 산천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증조할아버지 내외와 할아버지 내외, 아버지보다 세 살 많은 작은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와 삼촌들, 고모까지 일가족 아홉 식구가 구지에 모여 살게 됐다.
모처럼 얻은 평안한 일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듬해 동족상잔의 비극이 터진 것이다. 그 비극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되어 온 것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