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할아버지 안병희 ⑩ ‘선’이 끊기고 홀로 남다

[연재] 안영민의 「아버지, 안재구」 (21)

2024-05-28     안영민

1947년 5월 미소 공동위원회가 속개되면서 각 정당과 사회단체로부터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합동회의 참가 신청을 받았다. 이때 남로당을 비롯한 좌익계와 중도파는 물론, 반탁 시위를 주도했던 한민당, 한독당 등 우익계 정당과 단체들도 참여했다. 때맞춰 급조한 단체들도 대거 등장했다. 합동회의 참가 신청을 한 남조선의 정당과 사회단체만도 425개였다. 남북의 461개 정당, 사회단체 회원은 모두 7,000만 명으로 집계됐다. 당시 남북 전체 인구의 두 배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였다.

“미소 공위에서 협의 대상 단체를 회원 수에 비례해 정한다고 하는 바람에 우익에서는 유령단체를 만들고, 회원명부도 허위로 작성했어. 그들이 그렇게 설쳐대니 남로당도 당원 배가운동에 나섰지. 5배가, 10배가라고 하면서 일반 대중들까지 대거 당원으로 가입시켰던 거야. 이게 나중에 엄청난 후과로 돌아왔어.”

1948년 8월 15일 대통령에 취임해 선서하는 이승만. 이승만은 친일 친미세력이 주를 이룬 제헌의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사진 제공 – 안영민]

5.10 단독선거를 끝낸 남조선에서는 국회를 구성하고 헌법을 제정한 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내세운 단독정권이 들어섰다. 국회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뽑았고, 이승만은 미군정청으로부터 정권을 인수했다. 또 미군 주둔군사령관이 쥐고 있던 남조선 국방경비대의 통수권을 인수해 ‘대한민국 국군’으로 호칭했다. 군대와 경찰, 사법권까지 장악한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 절대다수의 인민들을 ‘치안’을 내세워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전면적인 탄압 국면에 맞서 대중역량을 보존하고, 핵심역량을 지키는 게 필요했어. 하지만 남로당 지도부는 이와 정반대로 나갔지. 대표적인 게 ‘공화국기 게양 투쟁’이야.”

7, 8월의 연판장 투쟁은 인민대중의 단독정부 반대운동을 확산시키는 데 귀중한 성과를 남겼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뜬금없이 ‘공화국기 게양 투쟁’을 벌인 것이다.

공화국기 게양 투쟁은 면사무소와 학교의 깃발 게양대에, 9월 9일 선포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기를 게양하는 투쟁이었다. 깃발 제작을 위해 광목천과 물감을 사들이고, 마을에서 얼굴이 알려진 청년들이 제작 장소를 들락날락하는 모습은 금세 드러났다. 경찰의 수배가 떨어지자 투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도피할 수밖에 없었다.

“어쭙잖은 투쟁 한 번에 조직은 만신창이가 됐어. 한창 조직사업, 대중투쟁을 끌고 나가야 할 청년 일꾼들이 몽땅 수배자 신세가 돼버린 거야. 공화국기를 무사히 게양해도 한밤중에 건 깃발은 날이 새자마자 단번에 발각돼 내려졌어. 아무 성과도 없이 조직 역량만 일순간에 다 드러낸 어이없는 투쟁이었지.”

이 틈을 비집고 적의 공세는 세차게 몰아쳐 왔다. 탄압은 경찰보다 극우 폭력조직이 극심했다. 이들은 무자비한 폭력을 예사로 휘둘렀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문도 서슴지 않았다. 남편의 행방을 대라며 아내를 성고문하고, 조직원을 대라고 고문하면서 생사를 따지지 않았다. ‘빨갱이’는 죽여도 아무런 죄가 안 되던 때였다.

1949년 12월 6일자 동아일보 2면 광고란에 실린 남로당 탈당성명서. 이승만 정권은 이렇게 탈당성명서를 내야 사상전향을 인정해주었다고 한다. [사진 제공 – 안영민]

1948년 12월 1일, 일제강점기의 치안유지법을 그대로 계승한 국가보안법이 공포된 뒤로는 ‘사상전향서’가 등장했다. 거기에는 꼭 남로당 ‘탈당성명서’가 붙어 다녔다. 탈당성명서를 신문광고란에 내고, 그것을 오려내 사상전향서에 붙여서 내도록 했다. 당시 신문광고란마다 탈당성명서가 넘쳐났다.

그 와중에 아버지는 두 가지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나와 동무들이 참 존경하던 선배인 조우재 민애청 밀양지부 위원장 동지가 체포됐다는 소식을 들었어. 조 선배는 밀양농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학병을 피해 밀양 북부의 화악산으로 들어갔지. 그때 산에서 할아버지를 만났어. 해방되자 바로 하산해 경찰서와 행정기관을 접수하고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할 때 청년부장을 맡았지. 할아버지를 곁에서 지켜주던 조 선배의 늠름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

조우재 위원장이 체포돼 밀양경찰서에 구금됐을 때, 김종원 부대가 밀양에 들어와 있었다. 조 위원장은 이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조 위원장은 발목부터 인피를 위로 벗기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마지막 생명이 끊어지기 직전 자신을 고문하던 놈에게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나는 유물론자이기에 귀신이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죽어 귀신이 된다면 까마귀로 환생해 밀양경찰서 지붕 꼭대기에 앉아 밤마다 울며 네놈들, 친일 역적놈들을 끝까지 저주할 것이다.”

조우재 위원장의 마지막 외침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밀양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마지막 순간까지 절개를 지킨 모습에 친일 경찰과 군인들은 간담이 서늘했다고 한다.

또 한 가지, 입이 딱 벌어지는 소식이 들려왔다.

“밀양군당 조직책이 체포됐는데, 변절해서 조직 체계도와 당원 명부를 몽땅 내주었다는 거야. 그자의 이름은 최달현이었어. 연계소에서 가까운 터실 길목의 제법 큰 기와집에 살았고, 일본에서 전문학교를 나왔지. 해방 이후 민청 간부로 활동하다 남로당 군당 간부가 되었고, 1948년부터 군당 조직책을 맡았어.”

보도연맹 중앙조직표. 대표적인 관변조직임을 알 수 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경찰에 협조해 많은 동지를 잡아들인 최달현은 이 공으로 경찰에 특채됐다. 밀양경찰서 고등계 형사가 된 그는 밀양 남로당을 붕괴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79년에 남민전 사건으로 체포된 아버지가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수사받을 때, 한 수사관이 다가와 “고향이 밀양이라면서요?”라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니까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더라는 것이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민전 회관에서 자주 본 얼굴이었다. 최달현과 마찬가지로 해방 직후에 민청 간부로 활동하다가, 변절해 동지를 밀고하고 형사로 특채된 자였다.

‘최달현’의 경우는 적지 않았다. 밀양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체포와 변절이 일어났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남로당 지도부는 당을 정예화한다며 핵심 당원 중심으로 조직을 재편성하라는 방침을 내렸다. 문제는 대대적인 당원 배가 운동 때 마구잡이로 끌어들인 사람이었다. 그들은 입당한 지 얼마 안 돼 제대로 된 당원 교육도 받지 못했고, 사회정치적 의식도 떨어졌다. 당의 방침은 결국 이들을 버려둔 채 피하라는 말밖에 안 됐다.

이탈자가 속출했다. 이미 당원 명부까지 경찰 손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살길을 찾아 전향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혼자 전향하고 탈당하는 게 끝이 아니었다. 누구도 당원이요, 누구도 당원이요 하면서 다른 이들을 고발해야만 했다. 그래야 저놈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누가 이들을 탓할 수 있을까. 무작정 벌인 당원 배가와 대중을 책임지지 않은 결과는 이처럼 혹독했다.

남로당을 책임졌던 박헌영에 대한 평가는 상반되고 있지만 남로당의 좌경적 오류는 많은 사람들의 경험과 증언 속에 드러난 지 오래다. 사진은 1946년 무렵의 박헌영. [사진 제공 – 안영민]

“박헌영이 이북에 가서 50만 당원을 자랑했다는데, 그 50만 당원이 뭔가. 당원 5배가, 10배가, 이러면서 뻥튀기한 것 아닌가. 인민들은 그때 입당만 해주면 그 숫자로 친일 주구들을 내쫓고 모든 게 다 해결된다고 해서 가입서에 서명했을 뿐이야. 그것 때문에 경찰에 쫓기게 되었다고 다들 원망이 많았지. 변절자들이 갖다준 당원 명부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어. 나중에 보도연맹 대학살의 살생부로 다시 이용됐지. 미군정 탄압을 핑계로 북으로 도피한 뒤, 책상머리에 앉아 지시하는 것만 알고, 남쪽 동지들을 온갖 위험에 빠뜨린 박헌영 일파의 죄상을 나는 절대 용서할 수 없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에게 발급한 맹원증. [사진 제공 – 안영민]
1949년 6월 5일 동아일보에 실린 국민보도연맹 결성식 기사. 남로당 탈당자들을 계몽지도하기 위함이란 결성 취지를 소개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아버지는 여전히 군당의 소년 연락원으로 부북면당과 하남면당 ‘트’의 안전을 확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하남면당의 ‘트’가 습격당해 당책인 계음 아재가 총격전 와중에 세상을 떠나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하남면당과 그에 연결된 초동면, 상남면, 삼랑진읍의 당조직이 동면 상태로 들었다. 밀양읍, 무안면, 청도면을 연결하는 부북면당도 안심할 상황이 못 됐다.

대대적인 노출과 탄압 국면에서 파국의 날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부북면당의 ‘트’에 도착한 아버지는 사립문에 안전 신호로 걸어놓은 요령(놋쇠로 만든 큰 방울)이 없어진 걸 알았다. 문 앞에서 주저하는 아버지에게 한 노인이 다가와 시선을 피한 채 작은 소리로 말했다.

“총각, 어서 이곳을 피하게. 그 집 사람들 오늘 모두 잡혀갔네.”

아버지는 그 소리를 듣고 노인의 얼굴과 사립문을 번갈아 보았다.

“요령을 찾나? 내가 떼버렸네.”

“할배, 고맙습니다.”

아버지는 그 길로 빠져나왔다. 부북면당의 사고 소식을 산외면 다원에 위치한 군당 연락부에 알려야 했다.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다가 마을의 초입에 들어서는데, 누군가 아버지의 팔을 붙잡았다. 군당 연락부 ‘트’의 초당 방에서 만났던 형이다.

“덕출이, 날세. 어서 여기를 피하게.”

그 형의 손에 이끌려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논둑길 수로에 숨어 앉아 자초지종을 들었다. 군당 연락부 지도원 동지와 청년들이 우익단체 깡패들과 함께 쳐들어온 군인인지 경찰인지 모르는 자들에게 몽땅 잡혀갔다는 것이다. 군인인지 경찰인지 모른다면 ‘백골대’라고 부르던 김종원 부대였다.

“그들이 잡혀갔다는 건 내 ‘트’도 안전하지 않다는 의미였어. 즉시 비상선을 찾아가기로 했지. 이럴 때를 대비해 마련한 2선이 있었거든.”

그곳은 무릉동으로 들어갈 때 하룻밤을 잤던 곳이다. 무릉동으로 아버지를 안내해주면서 ‘신덕생’이라는 조직명을 지어준 서공생 동지의 귀미 마을 ‘트’였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는 마당에서 방을 향해 접선 암호를 보냈다.

“살내 마을의 도동댁에서 씨나락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지만 방에서는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 나온 대답이 뜻밖이었다.

“우린 그런 소리 들은 일이 없소.”

“아니, 씨나락 부탁한 일이 없다니요. 찹쌀 2되와 멥쌀 6되 가져온단 말 못 들었는교?”

“우린 살내 도동댁도 모르고, 씨나락 부탁한 일도 없소. 그라이 그만 가란 말이욧!”

퉁명한 목소리에는 싸늘한 한기가 묻어났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서공생 동지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미 천황산 일대는 김종원 부대에게 몰살된 상태였어. 그래서 서공생 동지도 그처럼 나를 매정하게 떼어낸 거겠지. 인제 그만 너대로 살길을 찾아가라는…….”

모든 선이 단절됐다. 하남면당도, 부북면당도, 산외면 다원의 군당 연락부도, 귀미 마을 비상 연락선도…….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막막했다. 갈 데가 없었다. 소년 연락원인 아버지로서는 그다음을 알지 못했다. 의지가 되었던 모든 선이 끊기니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렇다고 무작정 산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눈물이 왈칵 났다. 울음소리가 가슴에서 뭉쳐져 올라왔다. 그 통곡을 눌러가며 소리 죽인 채 한참을 울었다. 울고 나니 할매 품이 그리웠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다. 막막한 상황에서 어찌할 바 모르던 그때, 아버지의 나이 겨우 열여섯이었다.

집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하긴 달리 갈 곳도 없었다. 모두가 잡혀갔다는 소식을 연이어 들으니 두렵기도 했다. 그 순간 몸에 지닌 콜트45 권총이 생각났다.

“집에 가자니 총을 계속 지니고 있을 수가 없었어. 그렇다고 버리자니 당장 어느 놈이 달려들 것 같았고.”

아버지는 권총을 꺼내 들었다. 동지들이 목숨을 걸고 얻은 무기였다. 그걸 버린다고 생각하니 허망했다. 몇 번을 망설이고 갈등하다 결국 냇물에 총을 던졌다. 총을 버리고 나니 온몸의 피도 다 빠져나가 버린 듯했다. 아버지는 고요한 달빛을 따라 한참을 터벅터벅 걸었다. 인기척 하나 없고 소리 하나 없는 밤이 새삼 낯설었다. 연락원으로 숱하게 오가던 길이건만 모든 게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때의 막막하고도 사무쳤던 기억은 아버지의 평생에 무척 강렬했던 것 같다. 의식의 영역에서도, 무의식의 영역에서도……. 아버지는 말년에 병세로 기억이 흐려지고 혼돈된 시간을 보내면서도 마지막 순간 끝내 다시 찾아가 도달한 시간은, 소년 연락원의 임무를 수행하던 바로 그때였다.

귀미 마을에서 밀양 읍내로 들어서니 어느새 자정이 다 됐다. 아버지는 연계소 집 부근에 도착했다. 사방을 살펴보았다. 아무 인적이 없었다. 연계소 집으로 조심스레 발길을 옮겼다. 조용히 대문을 밀었다. 마침 대문에는 빗장이 채워져 있지 않았다. 아버지가 집을 떠난 뒤로 증조할머니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대문을 걸어두지 않았다고 한다.

이윽고 아버지는 대문을 열고 안으로 한 발 들어섰다. 1949년 4월 8일, 길고 길었던 하루가 이렇게 끝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