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할아버지 안병희 ⑤ 퇴학과 구금
[연재] 안영민의 「아버지, 안재구」 (16)
아버지는 독서회 회원들과 매주 두 차례씩 학습을 진행했다. 수시로 벽보 투쟁에 나섰고, 장날에는 읍사무소 앞에서 가두연설도 했다. 이를 통해 아버지는 점차 활동가로 성장해 나갔다.
독서회 회원들은 학내 문제에도 눈을 돌렸다. 당시 밀양중학교 교장인 이주형의 독단적인 처사에 다들 불만이 많았다. 한민당 간부로 미군정이 만든 ‘남조선과도정부입법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던 이주형은 민주 교사들과 학생들을 불온사상을 가진 자들이라며 탄압하기 일쑤였다. 독서회는 밀양중학교 학생자치회를 결성해 교장의 횡포에 맞서기로 했다.
“겨울방학을 마치고 개학 첫날 기습적으로 자치회 결성대회를 열었지. 개학식 때 교장 훈화를 듣고 마지막 만세 삼창을 하는 순간 박상업 형이 연단 위로 뛰어 올라갔어. 교사들이 다들 어리둥절할 때, 연단 아래에 있던 내가 자치회 결성대회 시작을 알리고 사회자로 박상업 형을 추천했지.”
겨울방학 동안 이미 학생들과 자치회 필요성을 물밑에서 공유한 상태라 결성식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회장에는 2학년 박상업 형이 뽑혔다. 1학년을 대표해 아버지가, 여학생 대표로 김문자가 부회장을 맡았다. 모두 독서회 회원들이었다.
김문자는 아버지와 동기생이었지만 나이가 서너 살 더 많은 누나로, 밀양을 대표하는 항일운동 지도자 김병환 선생의 고명딸이었다. 1889년 2월 밀양 부내면 내이동에서 태어난 김병환 선생은 증조할아버지보다 한 살이 많았다. 증조할아버지는 김병환 선생을 평생의 동지이자 혁명운동의 선배로 깍듯이 모셨다.
“김병환 선생은 밀양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이끄셨고, 김원봉 장군의 의열단 투쟁에도 적극 참여하셨던 분이야. 이 때문에 세 차례나 옥고를 치르셨고, 일제 경찰에게 고문받은 후유증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병고에 시달리셨지. 해방 이후에는 밀양군 건준 위원장으로 맡아 후대의 귀감이 되셨어. 할아버지는 김병환 선생을 구심으로 세우고, 밀양의 모든 투쟁과 사업을 그분과 상의하며 진행하셨지.”
김병환 선생은 1947년 1월 16일, 민족해방의 의열 정신을 고향의 후대에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수천 명의 참배객이 모여 밀양의 사회장으로 엄숙히 거행됐다. 부북면 운전리 굴밭 마을 뒷산에 장지를 모셨는데, 가까이에 의열단원 백민(白民) 황상규 선생의 산소도 있다.
자치회가 결성된 뒤 학교는 활기가 넘쳤다. 학생들은 자율적으로 규율을 세우고, 학교 구석구석 청소도 하면서 학교 분위기를 바꾸어 나갔다. 자치회 간부들에 대한 신망도 커졌고, 학생들의 참여도 높아졌다.
아버지의 학생자치회 결성 이야기를 들으니, 1980년대 초중반 대학마다 활발히 진행된 총학생회 건설 투쟁이 생각났다.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이 만든 학도호국단을 폐지하고 민주적인 자치조직인 학생회를 만들기 위해 선배들은 군사정권과 부단히 싸웠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4.19혁명 직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식민지 지배권력과 그 뒤를 이은 독재정권은 청년학생들의 당연한 권리를 억누르고 탄압했다. 이에 저항하는 청년학생들의 정의로운 투쟁도 끊임없이 계속됐다. 아버지가 어린 중학생이었던 해방 직후에도, 그리고 내가 대학생이었던 1980년대에도…….
봄꽃이 혼탁한 세상을 다시 환하게 수놓았다. 어느덧 5월이 다가온 것이다. 자치회는 메이데이 축전 참가를 결의했다. 당시는 1946년 10월 인민항쟁 이후 탄압 속에 위축됐던 민주운동세력을 다시 모아내고 미소 공동위원회 속개를 다그치는 일이 중요한 과제로 등장했다. 밀양의 메이데이 축전은 민전 지부와 전평 지부가 주최하고 여러 정당과 사회단체가 후원하는 행사였다. 이에 중학생들도 함께 참여하기로 나선 것이다.
“학교에서는 ‘정치집회에 학생들의 참석을 불허한다’며 제지하고 나섰어. 우익 정당이 주최하는 정치행사에는 버젓이 학생들을 동원하면서 메이데이 행사는 안 된다는 교장의 말에 학생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지.”
이주형 교장은 한술 더 떠 학교장의 지시를 위반하고 집회에 참석하면 교칙에 따라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자치회는 집회 참여를 학생들의 자율에 맡기고, 학생 대표의 축하문도 자치회장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낭독하기로 했다. 일반 학생들에게 피해가 안 가도록 최대한 유연하게 대처한 것이다.
대회 당일 아침에 학교 교실은 텅텅 비었다. 학교로 출근한 교사들은 학생들이 아무도 없자 행사장인 삼문동 공설운동장으로 쫓아왔다. 훈육주임을 비롯해 교장 편에 선 몇몇 교사들이 학생들을 붙잡고 학교로 돌아가라고 소리쳤다. 학생들은 들은 척도 안 했다. 학생들은 메이데이 행사를 마치고 대열을 지어 당당히 학교로 돌아왔다.
교장은 길길이 날뛰었다. 이번 기회에 자치회를 박살 내기로 작정했다. 결국 박상업 형과 아버지를 비롯한 자치회 간부들은 몽땅 퇴학 처분을 받았다. 학생들 편에 서서 교장의 처사를 비판해 왔던 손기용 선생도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경찰에 끌려갔다.
“그런데 자치회 간부도 아니고 집회 준비에서 아무 역할도 안 했던 학생들까지 퇴학생 명단에 들어 있었어. 박말수 형의 누이동생인 봉섬이도 들었고, 삼촌과 끝에 할배(할아버지 4형제 중 막내) 딸로 나보다 한 살 많은 수환이 아지매도 명단에 들었지. 이주형 교장은 이참에 ‘좌익’ 집안이라고, 민주인사의 자녀들까지 몽땅 싸잡아 퇴학시켰던 거야. 말수 형은 형수가 밀양군 여맹 위원장이었거든. 시동생과 시누이가 함께 퇴학당한 거지.”
독서회에 자기 집을 모임 장소로 제공했던 말수 형은 남조선에서 투쟁이 불법화되고 모든 활동이 지하로 들어가면서 소식이 끊겼다. 말수 형은 전쟁이 터지고 혼란한 와중에 홀로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아버지가 말수 형을 다시 만난 건 40여 년 후였다. 말수 형은 1993년에 처음으로 조국 땅에 돌아와 밀양에 성묘를 왔다. 아버지도 남민전 사건 석방 후 자유의 몸이 된 때였다.
“말수 형은 일본에서 총련 활동을 했다고 해. 그러니 고향의 친척들이나 친구들에게 소식을 전할 수가 없었지. 저놈들이 한순간에 간첩단 사건으로 엮을 수도 있으니까. 말수 형은 일본에서 교수가 된 내 소식을 듣고 정말 기뻤대. 목숨이 오가는 상황 속에서도 수학책을 놓지 않더니 결국 교수가 되었구나……. 남민전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걸 신문에서 보고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하고.”
퇴학 조치에 맞서 자치회 간부들은 벽보 투쟁과 함화(喊話) 투쟁으로 맞섰다. 벽보 투쟁은 앞서 설명한 방식 그대로고, 함화 투쟁은 새벽에 읍내 둔덕진 곳에 올라가 종이 나팔을 입에 대고 구호를 외치는 것이다.
“악질 반동 한민당 정치꾼 이주형 교장은 물러가라!”
“민주교육 짓밟는 교장을 쫓아내자!”
“민주학원 지키는 밀양중학교 학생들을 지원하자!”
“군정청의 식민지 교육을 반대한다!”
이렇게 1분 정도 큰소리로 구호를 외치고 다시 흩어졌다. 조용한 밤에 고함을 치니 장터가 다 울렸다.
“함화 투쟁이 확실히 효과가 있었어. 벽보나 삐라는 아침 일찍 사람들이 읽기 전에 경찰이 물통을 들고 적셔 뜯으면 그만이었지. 하지만 소리는 달랐어. 이미 사람들 귀에 들어간 걸 후벼 파낼 수가 없었거든.”
함화 투쟁이 계속되자 밀양경찰서장은 경찰들을 동원해 골목마다 밤새도록 지키게 했다. 몰래 치고빠지는 ‘범인’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인가. 벽보 투쟁과 함화 투쟁을 이어가던 아버지는 결국 경찰에 들키고 말았다. 함께 나선 동무 이재우는 무사히 도망쳤고, 아버지만 홀로 잡혀 경찰서로 끌려왔다.
“하이고 요런 쪼그만 자석도 들어오나?”
새벽에 갇힌 경찰서 유치장 간수의 첫마디였다.
오후가 되자 본격적으로 조사가 시작됐다. 그들은 배후를 알아내려고 했다. 어디서 누구와 함께 벽보를 제작했는지, 누가 시켜서 했는지 집요하게 캐물었다. 처음에는 웃으며 달래고, 그다음에는 협박하고, 그다음에는 욕설과 고함으로 겁을 줬다.
“형사 아재요. 내 혼자 다 했소. 풀도 집에서 내가 쑤었고, 삐라도 우리 집에서 내가 썼소. 삐라 글씨는 전부 내 글씨요. 지금 붓으로 써보면 알 것 아니오.”
그들은 말로 해서는 안 되겠다며 아버지를 지하실로 끌고 갔다. 그러고는 무지막지한 구타와 고문을 자행했다. 겨우 열네 살의 소년에게…….
“나를 고문했던 놈이 정해돈이라고 유명한 악질이었지. 밀양중학교 손기용 선생님을 잡아갔던 놈이기도 했어. 그놈이 나를 포승으로 꽁꽁 묶어놓고 마구잡이로 두들겨 패더니 몸을 공중에 매달아 빙빙 돌리는 비행기고문을 자행했지.”
아버지는 몇 번씩 기절했다. 그러면 양동이 물을 끼얹어 정신이 들게 한 다음 다시 추궁했다. 저들은 아버지가 누구의 손자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배후로 자치회 선배와 교사들을 엮고, 다시 그 배후로 밀양의 민주단체 간부들을 엮으려고 했다. 최후의 목표는 바로 증조할아버지였다.
“저놈들의 음모와 의도를 알고 있으니 버틸 수밖에 없었지. 하루걸러 한 번씩 고문을 당하니 요령도 생기더라. 물고문을 당할 때는 빨리 정신을 잃어버리는 게 편했어. 맞을 때는 몸에 힘을 완전히 빼버리는 게 나았고. 퍽퍽 소리는 크게 나도 아픈 감각은 확실히 덜 했거든.”
그렇게 보름 가까이 집요하게 당했다. 하지만 끝까지 버텨냈다. 경찰이 아버지로부터 얻어낸 건 하나도 없었다.
5월 하순에 미-소 공동위원회가 속개됐다. 소련 측 대표는 제일 먼저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고 나섰다. 밀양경찰서에서는 아버지를 소년원에 송치하려고 했지만 만 14세가 안 돼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미군정이 정치범 석방을 결정했다. 밀양경찰서도 아버지를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문으로 생긴 상처 때문에 의사를 부르고, 타박상을 없앤다며 약을 바르는 등 법석을 떠느라 이틀쯤 뒤에야 풀려났다.
18일간의 구금과 고문 수사를 이겨내고 동지들을 끝까지 보호한 것은 아버지의 인생에 새로운 변곡점이 됐다. 다시 잡혀간다 해도 두렵지 않았다. 저들과 맞서 싸울 자신이 생겼다. 그렇게 아버지는 투쟁의 최일선을 향해 한 발 더 다가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