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할아버지 안병희 ④ 독서회와 벽보 투쟁

[연재] 안영민의 「아버지, 안재구」 (15)

2024-04-16     안영민

당시는 가을에 신학년 학기를 시작했다. 아버지가 1946년 9월에 밀양중학교에 입학한 뒤 열흘쯤 지났을 때였다. 하루는 2학년 자치회 회장인 선배가 찾아왔다. 그 선배의 이름은 박상업이었다.

“말이 2학년이지 늦게 입학해 스무 살쯤 된 청년이었어. 방과 후에 이야기를 좀 나누자고 해서 따라갔지. 나를 포함해 1학년 동무 여섯 명이 그 선배의 연락을 받고 한자리에 모였어.”

1946년 9월 밀양중학교에 입학한 아버지는 동무들과 함께 독서회 모임에 참여해 ‘우리 공부’를 진행하며 투쟁에 나섰다. (사진은 밀양시 삼문동에 위치한 밀양중학교 최근 전경) [사진 제공 – 안영민]

네 명이 남학생이었고, 두 명은 여학생이었다. 다들 아버지보다 나이가 몇 살 많았고, 1학년 중에서 똘똘한 학생들이었다. 박상업 선배는 그 자리에서 독서회 모임을 제안했다.

“그때는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참다운 진리, 세상을 바로 보는 공부를 ‘우리 공부’라고 했어. 학습 투쟁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 공부’를 중요하게 여겼지.”

우리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운동권’ 선배들이 다가와 현실을 바로 보는 공부를 하자며 학습팀을 만드는 과정과 흡사했다. 그런 모임을 중학생들이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만큼 그 시절의 소년들은 성숙했고, 그 시대가 소년들까지 투쟁에 나서야 할 만큼 엄혹했음이리라.

새 나라 건설 운동에 힘을 보태기 위해서는 애국심을 실천할 수 있는 지식이 필요하다는 선배의 제안에 모두 찬성했다. 학습을 책임질 사람은 조선민주청년동맹(민청) 지도원 구정식 선생이었다. 구 선생은 밀양의 민족교육자인 이진화 선생이 설립한 동진학교의 교사였다.

독서회 모임은 아버지와 동급생인 박말수의 집에서 매주 두 번씩 열렸다. 공부는 구정식 선생이 가지고 온 책을 읽고 함께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렇게 2~3주가 지난 어느 날, 박상업 형이 모임에 나왔어. 형은 우리에게 살아 있는 학습을 위해 실천 투쟁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지. 그 제안에 나는 들떴어. 한편으로 긴장되기도 했지만……. 여섯 명 모두 찬성했지.”

아버지와 독서회 동지들은 벽보 투쟁에 나서기로 했다. 벽보의 내용은 박상업 형이 학생복 윗옷의 안깃에 감춰 놓은 작은 봉지 속 얇은 미농지에 정리돼 있었다. 이 내용을 신문지 두 쪽 크기의 흰 종이에 적고, 말미에 구호를 정리하는 방식이었다. 우리가 대학 시절 대자보를 쓰는 것과 똑같았다.

남학생들은 벽보를 만들고, 여학생들은 풀을 쑤었다. 벽보 글씨는 잔글씨를 잘 쓰는 아버지가 썼다. 구호 글씨는 여러 사람이 나누어 큼지막하게 썼다. 그다음 붉은 잉크와 푸른 잉크로 중요한 대목에 동그라미를 그려 넣어 눈에 잘 띄게 했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새벽 3시에 거리로 나섰다. 남학생 두 명, 여학생 한 명씩 짝을 이뤘다. 두 패로 나눠 시내 곳곳에 벽보를 붙여 나갔다. 여학생이 먼저 정찰을 나가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했다. 여학생이 안전하다는 신호를 하면 남학생 둘이 잽싸게 벽보를 붙인 뒤 내빼는 방식이었다. 날이 밝으면 사람들이 벽보 앞으로 몰려들어 웅성거리며 내용을 읽었다.

“벽보 투쟁을 하는 날이면 밤을 꼬박 새웠지. 그렇게 10월 한 달 내내 투쟁을 이어갔어. 하다 보니 요령이 생겨 일솜씨도 늘었고, 배짱도 커지면서 대담하게 투쟁을 벌였지.”

1946년 9~10월은 전국이 투쟁의 물결로 출렁였다. 특히 쌀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온 나라에서 인민들이 “쌀을 달라”고 아우성쳤다. 당시 일본은 전쟁의 여파로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었다. 미국의 일본 점령군 사령부는 극심한 식량난을 해소하기 위해 조선에서 쌀을 들여오는 걸 묵인했다. 조선의 쌀이 식민지 시대와 마찬가지로 일본으로 송출된 것이다. 그 때문에 해방되던 해 대풍년이 들었어도 쌀값이 몇 배씩 오르고 시장에서 쌀을 구할 수 없는 지경까지 되었다.

“이 틈을 타 쌀을 매점매석한 뒤 일본으로 비싼 값을 받고 빼돌리는 놈들이 등장했어. 대신 공산품을 들여와 비싸게 팔아먹었지. 이놈들을 인민들은 ‘모리배’라고 불렀어. 미군정청의 비호를 받고 이승만 세력과 결탁한 모리배들은 매판자본으로 성장했고, 훗날 재벌이 되었지.”

분노는 봉기로 치달았다. 그 중심에 대구가 있었다. 1946년 10월 1일, 제일 먼저 부녀자들이 대구시청 앞에 모여들어 ‘쌀을 달라!’며 시위에 나섰다. 뒤를 이어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대열에 합류했다. 이들이 외친 구호는 ‘미군 물러가라!’로 집중됐다. 인민들은 자신들의 고통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

“쌀을 달라”"며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촉발된 인민들의 항쟁은 “미군은 물러가라!”는 구호와 함께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사진은 대구항쟁 당시 경찰의 발포 상황. [사진 출처 – 대구10월항쟁유족사업회]

시위 진압에 나선 경찰의 발포로 여러 사람이 죽고 다쳤다. 분노한 시위 군중들은 파출소를 불태우고 경찰서로 몰려갔다. 경찰들은 옷을 벗고 담을 넘어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미군정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남조선국방경비대와 민족청년단, 서북청년회, 백의사 등 극우단체까지 총동원해 시위 진압에 나섰다. 대구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확산된 시위는 12월이 돼서야 진압됐다. 독서회 동무들의 벽보 투쟁은 대구에서 시작된 10월 인민항쟁 내용을 주로 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밤샘 투쟁을 마치고 새벽에 집으로 들어오다 증조할아버지와 딱 마주쳤다고 한다. 당황한 아버지가 평소 잘 안 하던 문안 인사를 했다.

“할아버지,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밤새 안녕하지 못했다. 그래 너는 무슨 일로 날을 새고 새벽에 들어오는 게냐?”

딱히 할 말이 없었던 아버지는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고단해 보이니 우선 한숨 자고 낮에 이야기하자. 하학하거든 민전 회관으로 오너라.”

아버지는 학교를 파하고 민전 회관으로 가서 증조할아버지를 찾았다. 당시 증조할아버지는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당, 신민당의 3당 합당 문제를 놓고 여러 사람과 의견을 나누느라 몹시 바빴다. 그날도 찾아온 손님과 한창 이야기를 나누었다. 손님이 떠나자 증조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데리고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요즘 학생들이 모여 학습도 하고 삐라 투쟁도 한다는데, 재구 니도 같이 하나?”

“예.”

증조할아버지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너거들이 애국운동을 하는 걸 말릴 생각은 아니다. 다만 한창 공부해야 할 너거들까지 운동에 참가하도록 만든 세상이 참말로 답답하고 한심스러워서 그런다.”

“할배, 우리가 재주껏 잘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이소. 설사 붙잡히는 일이 있더라도 학생인 우리한테는 저놈들도 모질게 못할낍니다. 나라를 송두리째 미국놈과 그 앞잡이들이 집어삼키려고 하는데, 학생이라고 어찌 그대로 보고만 있겠습니꺼? 맞아 죽은 사람이 한둘도 아닌데…….”

증조할아버지는 손자의 의젓한 대답에 만감이 교차했다. ‘우리 재구가 벌써 이만큼 컸구나’ 하는 대견한 생각이 들면서도 투쟁을 하자면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있어야만 하는 현실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아버지한테 당시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1990년 봄에 구속돼 대구교도소에 갇혔을 때, 면회를 온 아버지는 나를 보자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자신의 뒤를 이어 투쟁에 나선 아들이 대견하면서도, 자신과 똑같이 엄혹한 시련을 겪고 있는 아들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그때 손자를 바라보던 증조할아버지의 눈빛과 40여 년 뒤 나를 바라보던 아버지의 눈빛은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1994년 구국전위 사건 때는 이보다 더했다. 아버지와 나를 동시에 구속한 저들은 재판정에도 함께 세웠다. 나를 아버지 재판의 증인으로 부르고, 내 재판 때는 아버지를 증인석에 앉혔다. 아버지와 나는 몇 달 만에 피고인석과 증인석에 떨어져 앉아 다시 만났다. 검사의 추궁에 참담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는 내게 아버지는 말했다.

“울지 마라. 뭘 잘못했다고 울고 있나. 죄지은 게 없으니 당당하게 행동해라.”

그 말을 마친 아버지는 고개를 들고 말없이 천정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아직도 내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다.

2013년 6월 열린 민족민주열사 범국민추모제에서 밀양초등학교 2년 후배인 박중기 추모연대 이사장(왼쪽)과 함께. 박중기 이사장은 1964년 1차 인혁당, 1974년 2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됐고, 특히 2차 구속 때 받은 전기고문 후유증으로 한쪽 눈이 실명되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다. 아버지와는 고향 선후배로 각별한 친분을 나누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그 뒤, 증조할아버지는 부쩍 성장한 아버지와 틈나는 대로 토론을 했다. 증조할아버지는 조손간의 토론을 통해 사회주의가 뭔지, 인민이 주인이 되는 평등한 사회는 어떤 모습인지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특히 미 제국주의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고, 그들과 싸워 이겨야만 조선의 완전한 자주독립이 이뤄질 수 있다는 설명은 아버지 가슴에 평생 강렬하게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