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대 총선에서 ‘낙랑클럽 모윤숙’을 돌아본다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58)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요즘 총선 판에서 때아닌 낙랑클럽(樂浪 Club, 낙랑구락부) 논란이 일고 있다. 수구 여당이 더불어민주당의 경기 수원(정) 국회의원 후보 김준혁을 지나치게 공격하고 있다.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 김준혁 후보가 갖고 있는 우리 민족의 역사인식은 분명하기에 수구 정당은 그의 국회 진출을 꺼리는 것 같다. 필자가 보기에는 수구 정당이 공격 같지도 않은 공격을 해대고 있으니, 필자는 국민의 판단을 위하여 이 글을 쓰게 되었다.
필자가 시인 모윤숙(毛允淑, 1910~1990)과 교육자 김활란에 대하여 처음 들은 것은 1975년경이다. 모윤숙 시인이 안호상(安浩相, 1902~1999) 박사의 처였다는 사실을 안 박사의 측근 박 모씨에게, 또한 그가 인도인 메논(K.P.S. Menon, 1898~1982)과 동거한 사실을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 1893~1963) 제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 사령관 재임 시(1945년 9월 8일~1947년 2월 5일)의 비서였다는 김 모씨에게 들은 것이다. 그리고 김활란에 대해서는 해방 당시의 여학생 열혈 활동가 황 모씨로부터 들었다. 이후로 나는 시인 모윤숙과 교육자 김활란에 관하여서는 철면피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시인 모윤숙을 중심으로 해서 그의 흑역사를 돌이켜 보자.
1. 시인 모윤숙의 해방전 찬란한 친일 행위
모윤숙은 1934년에 보성전문학교 교수였던 안호상 박사와 혼인했다. 이 혼인은 춘원 이광수(李光洙, 1892~1950)가 당시 자신을 따르던 18세 연하의 문학 지망생 모윤숙을 안호상 박사에게 떠넘긴 것이라는 말이 있다. 모윤숙의 호 ‘영운(嶺雲)’은 이광수가 지어준 호이다. 모윤숙은 이듬해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하여 국문학을 전공하고 딸을 낳은 뒤 결혼 2년 만에 남편과 별거에 들어간다. 정식이혼은 1960년에 했다.
모윤숙이 안호상 박사와 별거하던 그 시기에 그녀는 친일로 기울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혹은 모윤숙이 친일로 기울어지며 안호상 박사와 결별한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별거 중이던 모윤숙은 1936년에 산문과 시의 중간 형식인 장편 산문집 『렌의 애가(哀歌)』를 발표했으며, 이 산문집은 1937년 일월서방(日月書房)에서 초판 발행한다. 1938년 1월부터 4월까지 파인 김동환(친일파)의 『삼천리문학』에서 근무했다. 1940년 2월 조선문인협회 주최로 평양에서 열린 문예경연대회에서 시를 낭독했고, 같은 해 10월 조선문인협회 주최 문사부대(文士部隊) 육군지원병훈련소 1일 입소에 참여했다. 1940년 11월 조선문인협회 간사를 맡아 1943년 4월까지 활동했다.
1941년 1월 『삼천리』에 시 「지원병에게」, 5월 『매일신보』에 시 「아가야 너는-해군 기념일을 맞이하여」를 발표했다. 같은 해 9월 임전대책협력회가 ‘채권가두유격대’를 꾸려 ‘애국채권’을 팔 때 종로대원으로 참가했으며, 조선임전보국단의 경성지부 발기인 겸 산하 부인대의 간사를 겸임했다. 같은 해 12월 조선임전보국단 사업부 부원을 맡았고, 부민관에서 열린 조선임전보국단 결전부인대회에서 「여성도 전사(戰士)다」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1942년 2월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의 군복 수리 근로와 조선임전보국단과 국민총력 경성부연맹이 주최한 ‘저축강조 전진 대강연회’ 연사, 5월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주최 ‘군국의 어머니 좌담회’, 12월 ‘대동아전(大東亞戰) 1주년 기념 국민시 낭독회’에 참여했다. 1943년 3월과 8월 작사한 일제의 군국(軍國) 가요 「군국의 어머니」와 「어머니의 희망」이 방송되었고, 8월 경성부와 대일본부인회 경성지부가 공동 개최한 부인계발강연회에 ‘시국에 처한 부인의 각오’란 주제로 강연했다. 같은 해 11월 12일 자 『매일신보』에 시 「내 어머니 한 말씀에」를 발표하고, 조선교화단체연합회가 육군특별지원병제도를 선전 선동하기 위해 조직한 전위여성격려대의 강사로 활동했다. 1945년 7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후신인 국민의용대의 경성부 연합 국민의용대 결성식에 참석했다.
모윤숙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290∼335)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2. 시인 모윤숙의 해방후 변신
해방이 된 시기에 모윤숙은 이미 민족의 지조와 남편을 버린 상태였다. 그리고 친일에 오염된 그는 문학과 사회활동에 나선다. 모윤숙은 어디로 튀었겠는가? 마침 모윤숙에게 1945년 11월 이승만이 소집한 민족대표자대회에 참석해달라는 비서 이기붕의 연락이 왔다. 마지막 연사 이승만의 연설을 들은 모윤숙이 일어나 말했다고 한다.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여성입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지도자 어른들께 한마디 하겠습니다. 해외에서 생각하셨던 우리 국민은 모두가 믿을 수도 없고 약해 빠져서 무슨 일을 시킬 수도 없으려니 여기셨을 줄 압니다만 36년간 고초를 겪느라고 죽고 감옥에 간 사람도 허다하오며, 지금도 많은 지도자 어른들이 마음은 살아있어 할 일을 많이 하고 계십니다. 국내에 계신 여러 어른께도 똑같은 기회와 일을 주시고 직위나 명예보다 누가 더 잘 희생하여 이 난국을 바로잡나 하는 데 주력을 두시기 바랍니다” (모윤숙 [회상의 창가에서] 중앙출판공사, 1968).
대회가 끝난 뒤 이승만은 모윤숙을 돈암장으로 불러 당부한다. “해외에서 온 사람이나 나라 안에 있던 사람들이나 다 뭉쳐야 해. 나라를 생각해서 자주 와서 나에게 좋은 의견을 말해 주기 원하오”
모윤숙은 이승만을 지지하기로 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깨지고 반탁의 기운찬 소리가 온 남한을 휘몰았을 때, 유엔 총회에선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유엔위원단을 한국에 보냈다. 이승만 박사의 고집은 그때 정세를 수습하는데 약이 될만한 것이었다. 소련의 야욕이 무엇인 것도 알아차린 것 같고, 미국의 너그러운 듯하나 속이 비어 있는 민주주의의 협조자로서의 뜻도 잘 알아차린 듯하였다. 나는 김구, 김규식 두 분을 다 숭배했다. 그러나 더욱 이유있게 숭배한 분은 이 박사였다,”
모윤숙은 해방 후인 1947년 시집 『옥비녀』를 출간했고, 10월 파리에서 열린 제3차 UN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 1949년 월간 문예지 『문예(藝術)』를 창간했으며, 1950년 5월 한양 여성클럽 회장, 12월 대한여자청년단총본부 단장을 맡았다. 1951년 4월부터 이화여자대학에서 강의했으며, 1954년 9월 국제펜클럽 본부 부위원장, 1955년 한국자유문학가협회 시분과 위원장, 1955년 5월 한국문화단체총연합회 최고위원을 맡았다. 1959년 일문서관에서 시집 『정경(情景)』과 소설집 『그 아내의 수기』를 출간했다. 1960년 국제펜클럽 한국위원장을 맡으며, 수필집 『포도원』을 발간했고, 1961년 이화여자대학교 문화공로상을 수상했다. 1962년 시집 『빛나는 지역』을 출간했으며, 1963년 7월 예술원상 문학부문상을 수상했다. 1969년 여류문인협회 회장을 맡았다. 1970년 시집 『풍토』와 수필집 『밀물 썰물』을 발간하고, 국민훈장 모란장(牡丹章)을 받았다. 같은 해 민주공화당의 전국구 국회의원 등을 역임했으며, 1973년 『호반의 목소리』를 출간하고, 한국현대시협회 회장에 추대되었다. 1977년 5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9년 『황룡사 9층 석탑』으로 3·1문화상을 수상했다. 1980년 문학진흥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1982년 『모윤숙 전집』, 1986년 『영운 모윤숙 문학전집』이 간행되었다. 1987년 대한민국예술원 원로회원이 되었다. 1990년 6월 7일 사망했으며, 다음 날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1959년 시집 『정경(情景)』, 1964년 『구름의 연가(戀歌)』, 1970년 『풍토(風土)』 등이 있고, 1974년 서사 시집 『논개(論介)』, 1953년 수필집 『내가 본 세상』, 1960년 『포도원』이 있다. 이밖에 1974년 『모윤숙 시 전집』과 1982년 『모윤숙 전집』, 1987년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등이 출판되었다. 해방후 화려한 변신을 한 것이다.
3. 시인 모윤숙의 치부, 이승만의 첩자가 되고 메논의 정부 노릇을 하다
모윤숙은 일제하에서는 1940년대에는 조선문인협의회 간사직을 맡고, 이후 친일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경성지부 발기인 겸 산하 부인대의 간사를 겸임하면서 ‘총후부인(銃後婦人)’이 되라는 친일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해방후 38도선 이남의 조선은 9월 9일자로 미육군 제24군단이 점령하여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在朝鮮美國陸軍司令部軍政廳, 美軍政)이 미군정을 시작한다. 미군정청 사령관 하지 중장은 한국의 왕이나 다름없이 세도가 높았다.
“당시 한국의 절대권력자 하지 사령관은 김규식에 동조하고 그를 밀고 있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이승만 진영의 조병옥씨나 장택상씨 등은 메논과 하지의 접촉을 줄이려 노력했다. 거의 매일 밤처럼 충무로 ‘천향각’ 등으로 메논 박사를 초청하여 기생파티를 열었다. 메논이 기생파티를 싫어하는데도 말이다. 당시는 요정이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사교장이요 무도장이다. 평소 싸우던 정치인들도 요정에만 가면 희희낙락 의기투합하는 듯, 기생을 안고 국사를 논하다니…. 나라에는 자유가 없는데 요정엔 자유가 있었다. 36년 동안 말 못 하고 살아서 그랬는지 생각도 하기 전에 말부터 해대는 것이었다.” (모윤숙, 앞의 책).
시인 모윤숙은 이승만의 첩자가 되어 출중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인도 대표인 메논의 정부(情夫)가 된다. 그리고 메논과 이승만을 연결한다.
“1948년 1월 모윤숙은 날마다 이승만의 이화장에 갔고, 메논은 날마다 모윤숙의 집에 들렀다. 아침에 덕수궁 회의에 나가면서 메논은 대형 세단을 문 앞에 세워놓고 문간방에서 놀고 있는 딸 일선이를 껴안고 볼에 굿모닝 키스를 해주곤 했다. 저녁에는 비서를 시켜 초콜렛 등 과자를 보내주었다. 동네 사람들은 이상한 눈초리로 수군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메논 박사의 마음을 이승만에게로 돌리게 하기로 작정하였다.” (모윤숙 [영운모윤숙문학전집])
그녀는 당시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부정적이었던 메논의 생각을 바꾸도록 한다. 대단한 국제 O녀라는 미군정 사령관의 지적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이후에도 1947년과 49년에 열린 유엔 총회에 연달아 한국대표로 참가하여 남한 단독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한 외교 활동을 한다. 시인 모윤숙은 자신의 몸을 탐닉한 메논을 이승만 편으로 끌어들였고, 이승만의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관철시킨다.
따지고 보면, 친일파 시인 모윤숙은 이승만 제국 수립의 일등 공신이었던 셈이다. 어찌 보면 해방후 이승만이나 미군정청의 하지 사령관이 친일파를 중용하게 한 것도 모윤숙을 본보기로 본 영향일 수 있다. 그것으로써 시인 모윤숙은 1990년 사망할 때까지 부귀영화를 누린다.
4. 낙랑클럽은 분명 존속했다
메논의 정부였던 시인 모윤숙은 교육자 감활란과 함께 이승만의 지시로 외국인 대상으로 한국전쟁기 존재했던 고급 사교클럽 낙랑클럽(樂浪 Club)을 만들었다. 미 CIC(미군 제24군단 산하 정보기관) 보고서에 의하면 낙랑클럽의 설립 시기는 1948년에서 1949년으로 추정된다. 모집 조건은 영어 능통한 이화여자전문학교 출신자였고 총 100여 명 정도가 소속되었으며 이들은 이화여자전문학교 혹은 숙명여자전문학교 출신으로 영어 능통자라는 조건 때문에 당시 고관들의 부인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모윤숙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중심인물이 손원일 제독의 부인 홍은혜, 화신백화점 박흥식 사장 부인 허숙자 등으로 총재는 김활란, 회장은 모윤숙이었다. 이후 낙랑클럽에 대해서 수필가 전숙희(田淑禧, 1919년~2010년)가 쓴 책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에서도 유사 매춘 단체에 가깝게 묘사되어 있다.
단적으로 지나친 로비 문제와 김수임(金壽任, 1911년~1950년) 사건 관련으로 낙랑클럽을 조사한 미군 CIC도 당시 조사 보고서에서 낙랑클럽을 ‘로비를 위한 고급 호스티스 단체’로 규정했다.
낙랑클럽의 자세한 실체는 90년대 중반 <중앙일보>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가 비밀해제한 문서에서 발견하여 폭로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낙랑클럽의 성격과 활동에 관한 논란이 있었다. 무엇이 진실이든 낙랑클럽이라는 접대 조직은 존재하였으며, 그들의 활동을 영웅적인 것으로 미화할 필요는 없다. 낙랑클럽이 언제 조직되었는가 하는 논란도 모윤숙이 1948년 5.10 선거가 있기 훨씬 전에 메논의 정부였던 것을 살펴보면 큰 의미가 없다. 시인 모윤숙은 친일 문학인 가운데 가장 야심에 찬 문학가였다.
일본이 전쟁에 패망한 이후, 일본에서도 낙랑클럽과 같이 유사한 조직이 있었다. 일본 내무성 하시모토 마사미 경보국장은 8월 18일 각부, 현의 장관(당시는 부와 현의 지사를 장관이라고 지칭)에게 점령군을 위한 서비스 걸을 모집한다는 지령을 내렸고, 그 명령을 받은 경찰서장이 각종 수단을 써서 ‘국가를 위해 매춘을 알선해달라’고 부탁하고 다녔다고 한다.
당시 일본의 위안시설은 연합군의 본토 상륙날인 8월 27일 도쿄 오타구의 오모리에서 문을 연다. 그날 도쿄에 오는 점령군은 불과 몇 명 안 됐는데 그들이 왔을 때 제대로 수용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며 1,360명의 위안부를 모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일본은 아주 신속히 점령군을 위한 위안 시설을 만든 것이다.
이러한 패망 일본의 위안 시설을 낙랑클럽과 동일선상에서 대비할 수는 없지만, 상통하는 공통점은 있을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한 더러운 일을 자처한 모윤숙이나 김 모를 구국의 영웅으로 보아야 하겠는가?
5. 맺음말
치욕스러운 역사도 왜곡해서는 안 된다. 치욕스러운 역사를 왜곡하고 미화시키는 것은 친일을 정당화하고 사회 정의를 흐트러트리는 일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야당 김준혁 후보의 역사관은 정상이다. 비정상이 정상을 몰아내려는 여당의 선거 전략은 어리석다. 상대방을 비방한다는 것이 마치 거울을 보고 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어 이야기하는 것 같다.
국민들이 지난 2년간 뻔히 보아왔는데, 야권에 대한 철면피들의 험담(險談)을 믿겠는가? 필자 같은 민족주의자나 민주주의를 동경하는 중도층이 수구의 선동에 쉽게 휘둘린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지금 우리 중도층은 이번 총선에서 수구의 버르장머리를 고치려 들지 않을까?
분명한 것은 여당은 김준혁 후보의 국회 진출 가능성에 쫄은 것 같고, 이렇게 치졸한 공격을 하는 것을 보면, 여당에는 이번 총선의 전략가가 없는 것 같다. 역사의식이 있는 유권자들은 오히려 역사학자 김준혁 후보의 선전을 기대할 것이다. 부디 제22대 국회에 입성하여 역사 정의를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어떻게 되든 이번 총선은 많은 변화를 불러올 것이다. 조국(曺國)의 조국혁신당(祖國革新黨)은 이번 의회에서 핵(核)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문제는 일사분란한 움직임을 보일 수 있겠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번 총선을 끝으로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에게 달려간 흘러간 인물 김종인도 이제는 그만 책사(策士)의 위치를 내려놓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