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유도원도』의 숨겨진 이야기
[기고] 작금의 과대 언론 플레이를 개탄한다 - 이양재
백민(白民) 이양재(李亮載)
지난해(2023년) 12월 27~28일에 느닷없이 천리대학 소장품 『몽유도원도』의 환수 기사가 나왔다. 그런데 금년(2024년)에는 설날을 앞두고 2월 4일부터 또 듣보잡 기사가 갑툭튀하였다.
“몽유도원도 환수계약 기념 ECI특별전 ‘신몽유도원도를 그리다’”라는 어느 작가의 전시를 서울의 모 갤러리에서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안견과 『몽유도원도』를 이용한 개인사업의 과대선전인 것 같다. 지금 발생하는 여러 우려가 있어 이번에도 글을 쓰게 되었다.
안평대군 수집품은 ‘담담정’과 함께 신숙주에게 하사
‘담담정(淡淡亭)’이라고 있었다.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이 마포 강가에 지은 정자로 그는 여기 담담정에 서적 10,000권을 소장하며, 당시의 명유(名儒)와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등의 원로 대신, 그리고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 등과 같은 젊은 집현전(集賢殿) 학사, 박연(朴堧), 안견(安堅) 등과 같은 당대의 예술인과 풍류를 즐겼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후에 세조는 ‘담담정’을 신숙주에게 하사하였으며, 이후 신숙주는 이곳에 별장을 짓고 당대의 문장가 강희맹(姜希孟), 이극감(李克堪) 등과 시를 지으며 풍치를 즐겼다. ‘담담정’이 신숙주에게 하사되었다는 것은 안평대군 컬렉션을 신숙주가 하사받았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필자는 안평대군이 안견에게 그리도록 한 주문화 『몽유도원도』도 이때 신숙주의 소장품이 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신숙주의 소장품은 한동안 그의 후손에게 비장(秘藏)되었을 것이다.
필자는 지난주에 「신 잡동산이」 연재에서 보한재 신숙주의 초상화를 최경(崔涇, 1420~1490 이후)이 1453년에 그린 것임을 규명한 바 있다. 그 초상화는 임진왜란 직후에 니동의 신속(申洬, 1600~1661) 가묘(家廟)에 모셔져 있던 초상화이다. 신속은 보한재의 7대 종손이므로 대대로 상속자가 되어 최경이 그린 신숙주의 초상화를 가묘에 모실 수 있었다. [관련기사 보기]
따라서 나는 신숙주의 종손 직계대(直系代)에서 임진왜란 직전에 중심인물을 찾아보았다. 그 결과 신속(申洬)의 조부 신강(申橿, 1543~1597)이 1592년 임진왜란 이전에 수십 년간 신숙주의 종손으로서의 중심인물이었다. 대체로 그가 신숙주의 초상화를 비롯한 많은 소장품을 물려 받았을 것이다.
『몽유도원도』는 임진왜란 시에 일본으로 넘어갔나!
임진왜란 시 조선을 침략한 규슈(九州) 가고시마(鹿児島)의 호족(豪族)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1535~1619)라고 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제4진으로 모리 요시나라(毛利吉成)와 더불어 1만여 명을 이끌고 김해(金海)로부터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제3진과 합세하여 창원(昌原)을 점령하고 성주(星州)ㆍ개령(開寧)을 거쳐 추풍령(秋風嶺)을 넘어 서울을 점령 후 강원도로 향했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는 다른 장군들과 함께 14만1천5백 명의 병력을 이끌고 재차 내침하여, 동래·울산 등지를 점령하고 대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田秀家)·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함께 장군으로 5만 명의 군사로써 사천으로부터 하동을 거쳐 구례·함양·남원·전주 등지를 함락한 후 시마즈의 부대는 사천에 주둔했고, 그해 11월 5백여 척의 해군을 이끌고 노량을 습격했다가 이순신(李舜臣)의 함대와 해전에서 대패(大敗)하고 겨우 50여 척을 건져 도망쳐 일본으로 돌아갔다.
시마즈 요시히로가 한양(漢陽)에 쳐들어왔을 때 신숙주의 후손가(後孫家)에서 『몽유도원도』를 가져갔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몽유도원도』는 시마즈 요시히로의 후손 시마즈 히사키(島津久徵, 1819~?)에게 이르기까지 전해진다. 시마즈 히사키는 현재 공식적으로 알려진바 일본 내 최고(最古)의 출처(出處)이다. 이후 일본에 전전하던 『몽유도원도』의 1893년 이후 행적은 안휘준 교수의 『안견과 몽유도원도』 pp.105~106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다.
『몽유도원도』는 해방 후 국내로 들어왔다가 다시 나깄다
『몽유도원도』는 1929년에 나이토오 코난(內藤湖南)이 「朝鮮 安堅の夢遊桃源圖」라는 첫 논문을 발표하며, 1934년에는 『조선고적도보』 권14에 첫 그림으로 수록한다. 1939년 5월 『몽유도원도』는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며, 이후 1947년 동경의 골동품상 용천당(龍泉堂)에서 입수한 후 재표구하여 수리한다.
현전하는 『몽유도원도』에는 안평대군 필(筆) 기문(記文) 바로 뒤에 신숙주 필(筆) 시(詩)가 들어가 있는데, 보한재 신숙주는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로 인하여 일본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던 인물이므로, 『몽유도원도』 재표구시 그의 자필 시를 앞쪽에 배치한 것이다.
1950년 한국전쟁 직전에 이 그림은 당시의 골동상인 장석구가 국내에서 팔기 위하여 국내로 가져왔으나, 국내에서의 매도는 불발되어 일본으로 다시 돌아갔고, 곧이어 일본 천리대학(天理大學)에서 매입하였다. 『몽유도원도』의 천리대학 취득은 법적으로는 선의(善意)의 취득이다. 이후 『몽유도원도』는 일본의 법령 개정으로 하여 중요문화재로 변경된다. 그리고 오늘에 이른다.
『몽유도원도』 환수의 허상과 실상 - 작금의 과대 언론 플레이를 개탄한다
필자가 12월 말 <통일뉴스>의 기고에서도 염려했듯이, 일부 공명심에 사로잡힌 몇몇 환수론자는 당장 무상 환수를 주장한다. [관련기사 보기]
그러나 일본의 문화재법으로는 합법적인 환수가 불가능하다. 일본의 현행법 체계는 장물이나 약탈품이라도 합법적인 시장에서의 거래는 선의의 취득이 인정되어 압류하지를 못한다. 반면에 미국의 경우는 장물이나 약탈품은 원소유자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러나 일본만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몽유도원도』는 민간인 천리대학이 취득한 합법적인 소장품이다. 무상 환수는 불가능하다. 무상(無償) 환수가 아니라 유상(有償) 환수만이 가능하다.
어느 면에서는 지금의 행정부는 친일적이다. 친일 행정부이다. 이러한 친일 행정부에서 일본의 행정부가 친한 행정부라면 민간에서의 유상 환수에 양국의 행정부가 협력하는 것만이, 그나마 합리적인 유상 환수의 길일 것이다.
일본은 국가의 체면과 자존심이 상하면서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신중히 접근하여야 한다. 이렇게 사욕을 위하여 갑툭튀한 듣보잡을 홍보하는 수단으로 이용한다면 환수의 기회는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어쩌자는 것인가?
나는 어느 독립운동가의 증손자이다. 그렇기에 냉정히 판단하여 말한다. 어떻게든 『몽유도원도』를 합리적으로 모셔 오자. 다시금 말한다. “소영웅주의자들이여, 『몽유도원도』를 언론 플레이하지 말라. 개인사업에 홍보물로 이용하지 말라.” 그리고 언론사는 사실 좀 확인을 하고 기사를 내기를 바란다. 소영웅주의자의 보도자료를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그대로 보도하는 3류 기사는 내지 않았으면 한다.
서산은 안견과 무관한 지역이다
충남 서산군에 ‘사단법인 안견기념사업회’와 ‘안견기념관’이 있다. 그런데 실제로 충남 서산은 안견과 무관(無關)한 지역이다. 안견은 “지곡인(池谷人)”이다. 그 ‘지곡’은 “지곡(地谷)”이 아니라 “지곡(池谷)”이기 때문이다. 서산 “지곡(地谷)”은 땅 골이며 “지곡(池谷)”은 “못 골”이니, 두 장소는 절대로 일치할 수 없는 장소이다. 안견이 말한 ‘지곡(池谷)’은 옛 경기도 광주군 지곡이다. 애당초 “안견은 충남 서산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는 말이다. “땅 지(地)도 못 지(池)도 구분하지 못하는 자들은, 더 이상 헛소리하지 말아야 한다.” 서산군은 소영웅주의자의 이상한 언론 플레이에 현혹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필자는 1994년에 안 모 교수와 안견논쟁(安堅論爭)을 한 바 있다. 이제 안견논쟁 30년 만에 당시 필자가 주장하였던 안견론과 그 뒷이야기를 차츰 정리하여 재차 필자의 안견론을 피력해 나갈 것이다. 이번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관한 이상한 사람들의 언론 플레이가 필자에게 다시 계기를 주는 것 같다.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회화사학자, 서지학자.
- ‘고려미술연구소’ 대표(1991~현재), 현재 ‘한국고서협회’ 상임부회장.
- 전 ‘포럼 그림과 책’ 공동대표, 전 ‘한국고전문화진흥회’ 상임이사.
- 1994년 우리나라 회화사학계 최초의 학술논쟁 ‘안견논쟁’을 주도. 회화사와 서지학 분야의 논문 및 잡문 100여편 이상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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