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점의 실경산수 도산서원도(陶山書院圖)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36)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두 점의 [도산서원도(陶山書院圖)]가 있다. 한 점은 영조와 정조시대에 예림의 총수라 일컬음을 받는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실경산수이고, 다른 한 점은 작가 미상의 실경산수(實景山水)이다.
표암 강세황은 화조(花鳥)와 금충(禽蟲)을 비롯해 산수(山水)와 인물에 이르기까지 그림의 여러 분야에 능하였고, 글씨도 잘 썼다. 또한 그는 당대의 비평가이기도 하여 여러 작품 위에 화평(畵評)을 남겼고, 특히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1815년 이후)를 일찍이 발탁하여 화가로 키워냈다.
우리 미술사학계에서 표암에 관한 여러 연구가 있고, 필자 역시 조선후기의 여러 화가를 탐색하면서 일찍이 그를 주목하여 탐색한 바 있다. 이러한 강세황의 [도산서원도]와 작자 미상의 [도산서원도]를 비교하고자 한다.
표암의 [도산서원도]는 1751년(영조27)에 강세황이 그린 실경산수이다. 1970년 8월 27일 자로 보물 제522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이하 국박본)하고 있다. 국박본의 크기는 세로 26.8cm, 가로 138cm이다.
영조 27년(1751)에 그려진 이 국박본은 마의 올을 풀어서 늘어놓은 것같이 섬세하게 산과 계곡을 표현하였으며 나무들은 붓을 눕혀 점을 찍듯이 나타내어 당시 유행하던 남종화풍의 초기적 필치를 느낄 수 있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풍경을 그린 것으로 중앙에 도산서원을 배치하고 앞쪽에는 흐르는 강물과 함께 탁영담과 반타석 등을 그렸고, 왼쪽에는 곡류 위쪽으로 분천서원 애일당 분강촌 등을 그렸으며, 서원의 배치와 건물의 크기 및 방향 등이 실제와 부합되게 그려졌으며 건물의 이름도 함께 밝혔다.
그림이 끝나는 부분에는 표암이 신미년(1751년) 10월 15일에 쓴 자필 발문이 있다. 여기에는 성호 이익이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 자신에게 도산서원을 그리도록 특별히 부탁하였다는 것과 자신의 소감 및 제작시기 등을 비교적 자세히 적고 있다.
또한 표암의 발문이 끝난 여백에는 정묘(1927년) 중추(仲秋, 음력 8월)에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 쓴 배관(拜觀)도 두 줄로 적혀 있다. 그런데 국박본은 탁영담 글자 옆에 그려진 배에 사람이 없고, 도산서원 아래의 얼어붙은 강 위를 걸어서 건너가는 사람이 보인다. 아울러 탁영담 글자 옆에 그려진 배에 사람이 없고 배에 덮개가 쳐있다. 즉 국박본은 동경(冬景)을 그린 그림이다.
작가 미상의 [도산서원도]의 크기는 세로 23.3cm, 가로 128.5cm로 국박본보다는 면적으로 1/5 정도가 작다. 국박본과 실경 및 구도는 유사하지만, 그림의 여러 곳에서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우선, 작가 미상본은 탁영담 글자 옆에 그려진 배에 사공을 포함하여 8인이 배에 탄 것으로 그려져 있고, 강을 걸어서 건너가는 사람이 없으며, 그려진 산과 숲은 국박본보다는 풍성해 보인다. 즉 작가 미상본은 동경이 아니라 춘경(春景)으로 보인다.
따라서 작가 미상본은 그림의 구도와 형식은 국박본에서 따 왔지만, 세부적인 묘사를 달리하고 있어, 이 작품은 국박본의 이모본(移模本)이 아니라 전혀 다른 그림이다.
국박본은 1751년에 표암 강세황이 그린 것이다. 그러나 기년(記年)과 관지(款識)가 없는 작가 미상본은 국박본 이후에 그려진 조선후기의 작품으로 판단된다.
많은 면에서 두 그림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으나, 건물이나 지명을 적은 수법과 그 서체, 그리고 수묵을 기반으로 하면서 약간의 황토색 담채(淡彩)을 사용한 것 등등을 보면 동일한 작가의 작품이라고 볼 정도로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산세(山勢)를 표현한 것에서는 각기 그려진 필법의 특성에서 상당한 차이점을 보인다. 도산서원 건물을 묘사한 부분에서는 국박본보다 작가 미상본이 더 정렬(整列)되어 있다.
작가 미상의 그림은 세로가 23.3cm이고 폭이 42.9~43.0cm의 종이를 석 장 연결하여 그린 그림인데, 이에 착안하여 국박본을 상세히 검토한 결과 국박본의 중간 부위에서 연결한 부분이 확인된다. 즉 국박본은 그림의 세로가 26.8cm이고, 가로가 138cm인 것을 보아 69cm 종이 두 장을 연결하여 그림을 그렸음이 확인된다.
또한 그림과 발문의 연결 부위에 인장을 찍은 부분도 종이를 붙인 후에 찍은 것임이 확인된다. 만약 국박본이 전지(全紙) 한 장을 셋으로 나누어 그림을 그리고 발문을 붙인 것이라면, 그 전지의 크기는 80.4×69cm 이상이었을 것이다.
국박본은 표구된 상태에서 유전(遺傳)하였으므로 노후(老朽)되었으나, 작가 미상본은 미표구 상태로 현전하고 있어 비교적 양호하다. 같은 구도의 그림이면서도 확실히 다른 묘사력을 보여주는 두 점의 [도산서원도]의 공통점은 너무 같고, 그러면서도 차이점은 너무 다르다. 미술의 세계는 이토록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