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재사, 이후락의 '결단'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남북회담문서 ③] 역사적 7.4공동성명 발표와 불안한 예감('72.5.2~'72.7.4 이후)

2023-07-17     이승현 기자
남북회담 성공을 기원하는 시민들. '본 회담의 성공을 축원하나이다', '우리의 소원 남북통일' 팻말을 든 사람들의 표정에 기대감이 물씬 묻어있다. [사진 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7.4남북공동성명 발표 다음 날인 1972년 7월 5일 남북공동성명이 실린 신문을 보며 감격해 하고 있는 평양시민들. [통일뉴스 자료사진.  노동신문 1972.7.5]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평양방문('72.5.2~9)과 박성철 제2부수상의 서울방문('72.5.29~6.1) 이후 남북은 그간 회담 결과를 바탕으로 공동성명 작성을 위한 실무절차에 돌입했다.

통일부가 공개한 남북회담 문서 제7권의 제2장 '7.4남북공동성명 발표 및 남북직통전화 가설운용절차 합의'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박성철 제2부수상의 상호비밀방문 결과에서 1)외세의 간섭이 없는 자주통일 2)무력의 사용을 배제하는 평화통일 3)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한 민족의 단결 모색 등 3개항목으로 성문화하여 장차 평화통일을 지향해 나가는 과정에서 쌍방이 이를 존수하기로 원칙적인 합의를 봄으로써 1972년 7월 4일 오전 10시 7.4남북공동성명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되고 남북직통전화의 가설 및 운용절차에 관한 합의를 봄으로써 직통전화가 공식화되었다"고 시작한다.

공동성명 작성을 첫 실무자접촉은 '72년 6월 21일 오전 10시부터 1시간동안 판문점 판문각에서 진행됐다.

전날 오후 4시 25분부터 35분까지 10분간 남북직통전화로 통화한 남측 정홍진과 북측 김덕현은 이후락 부장이 친필로 작성한 문안을 놓고 협의에 들어갔다.

남북공동성명 발표를 위한 실무자 접촉 개요

보름 남짓한 기간동안 공동성명 발표를 위한 준비는 치열하고 분주했다.

6.23 접촉에서 북측은 '남북공동합의서(초안)'을 제의했다. 6.25접촉에서 남측이 '남북공동합의서' 제1차 수정안을 내놓았고 북측은 이후락의 평양방문 초청장을 전달했다.

6.27접촉에서 남측은 공동성명에서 일방적이며 선전적인 통일제안 지양 문구를 포함하자고 하면서 이후락이 7월 3일 평양을 방문하여 7월 4일 오전 공동성명을 발표한 뒤 오후에 서울로 귀환하자고 했고, 북측은 명칭을 '남북공동성명'으로 개칭하자며 남측의 1차 수정안을 재수정했다.

6.28접촉에서 남측은 이후락의 평양방문 일정(7.3~4, 수행원 4명, 7월 4일 오전 10시 평양에서 이후락·김영주 동시 발표)을 북측에 통보했고, 북측은 발표 일자를 7월 3일로 하자며 6월 29일 직통전화로 발표 일자에 대해 회담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이같은 양측 제안의 일부를 조정한 후 남북공동성명, 남북직통전화 가설 및 운용절차에 관한 합의서에 가서명했다. 그러나 남측은 6월 29일 직통전화를 통해 △이후락 부장 평양방문 취소 △남북공동성명은 7월 4일 10시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 발표할 것 △가서명된 내용중 '이후락 부장이 평양방문에서 공동성명을 발표한다'는 부분을 삭제한다고 북측에 통보했다.

결국 6.30접촉과 7.1접촉에서 양측은 남북공동성명 서명 문건의 교환 절차를 거쳐 1972년 7월 4일 오전 10시 역사적인 남북공동성명을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후락, "박정희도 섣부른 공개 반대한다"..제3국서 발표하자

전날 통화에서 김덕현은 류장식 조직지도부 부부장이 중요 문제 논의를 위해 남측 김치열 차장을 22일 오전 11시 판문각에서 만나고 싶다는 전달사항을 전했으나 정홍진은 어떤 문제를 이야기하려는지를 대충이라도 알려주어야 전달하고 결정을 받을 수 있고 또 내일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으니 그때 이야기하자고 통화를 끝낸다.

이튿날 김덕현을 만난 정홍진은 이 부장이 친필로 쓴 발표문안을 읽어보겠느냐고 제안하면서, "발표문의 내용은 양 회담(서울, 평양회담)의 합의점이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으나 그 표현은 다듬어야 할 점이 많다고 나는 생각한다"고 덧붙인다.

또 이 부장이 발표후 야기될 여러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든 극복해야 한다는 각오를 갖고 있다고 하면서, 공동성명 발표에 따른 내부의 부정적 의견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서울회담, 평양회담에서 논의된 문제들을 고위층과 협의한 결과 반대의견이 강하게 대두되어 이 부장이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고 하면서 "이 부장은 양회담에서 합의된 문제를 조속히 발표하겠다는 비장한 결단을 내렸다. 이를 발표함으로써 우리 체제내에서는 많은 어려운 문제가 있으리라 생각된다...이러한 결단을 내리게 된 것은 조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란 일념과 또 이 부장의 이러한 노력이 성취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영영 이러한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는, 다시 말하면 마지막이라는 예리한 시국판단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점을 깊이 유의해야 할 줄로 안다"고 말했다.

이어 "평양회담과 서울회담에서도 합의점을 발표하자는 문제에 있어서 좋은 결과를 거두기 위하여 발표문제는 신중히 그 시기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강조하였고 그 점에 대해서 귀측도 충분한 이해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하면서 박정희 대통령도 섣부른 공개에는 반대한다는 이야기를 한 것을 김덕현도 잘 기억할 것이라고 상기시켰다.

김덕현은 문안을 받아 자세히 읽고는 이후락의 친필문안을 그대로 줄 수 있겠느냐고 묻는데, 이에 정홍진이 "넘겨줄 생각이 있으면 다듬고 정서를 했어야 예의가 아니겠나? 이것은 부장님이 직접 생각나는대로 쓴 것이니까 김선생에게 넘겨 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라고 하자 "알았다"며 배석한 수행원(박진세)에게 기록하라고 지시했다.

이날 이후락의 발표문 초안에는 △긴장완화와 불시충돌사고 방지 △자주적 평화통일 민족대단결 △중상비방 지양, 일방적 선전적 통일제안 지양, 무력사용 금지 △남북직통전화 가설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남북적십자회담의 조속 성취 및 남북간 인적, 물적, 통신 교류 실현 등 6개항이 담겨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홍진은 "발표문은 내일부터라도 우리가 최선을 다하여 하루속히 다듬어야 하겠다"라며, "발표는 파리나 제네바와 같은 제3국에서 김영주 부장선생과 회담하고 발표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이후락의 생각을 전한다.

전날 통화에서 류장식 부부장이 김치열 차장을 만나겠다는 용건을 꺼냈던 김덕현은 이날 남측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며 더 이상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양측은 22일 군사정전위가 있으니 서둘러서 오전 9시 판문점 자유의집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사전 협의된 6월 이후락의 평양 재방문을 위해 김영주가 초청장을 발급하고 한다는 내용을 상호 재확인하는 것으로 이날 접촉을 마쳤다. 

북측 수행원이 이후락의 친필문안을 기록하는 동안 "서울-평양간 직통전화 가설과 그 운용에 관한 합의문을 토의하여 우리(남)측 원안에 거의 수정없이 확정하고 일시를 정하여 합의문서를 교환서명키로 합의"했다고 남북대화 사료집은 기록하고 있다.

서울-평양 직통전화는 이때도 남북간 연락의 요긴한 수단으로 진가를 발휘했다.

오후 비행기로 올라가겠다고 한 김덕현은 이날 저녁 직통전화를 통해 김영주가 요양차 시골에 내려갔으니 보고 후 다음 날(22일) 아침에 (평양으로)돌아오려 한다는 사정을 알려왔다.

이에 정홍진이 22일 만남을 모레(23일) 오전으로 연기하고 변동이 있으면 다시 연락을 취하자고 하니, 김덕현은 지금 정할 형편이 못된다고 하면서 다음 날 오전 중에 연락하겠다고 한다.

22일 오전이 지나 12시를 조금 넘긴 시각 북측은 직통전화로 정홍진에게 "정선생께서 궁금하게 기다릴 것 같아 전화를 드린다"고 하면서 김덕현이 시골에 내려가 전화도 안되는 사정을 설명하고는 도착하는대로 즉시 전화하겠다는 연락을 취해왔다.

1시간을 조금 넘겨 김덕현에게서 지금 막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이 부장의 친필 발표문안과 그밖의 설명을 보고받은 김영주 부부장이 공동발표 방식에 대해 대단히 환영하고 이 부장이 작성한 문안을 존중한다는 의사가 전달했다.

김덕현은 지금 북측에서 발표문안을 작성하고 있으니, 내일(23일) 오후 4시에 다시 만나자고 제안해 접촉이 이어지게 된다.

그렇게 23일 오후 4시 판문점 자유의집에서 이루어진 2차 실무자접촉.

김덕현은 '이후락 부장이 작성한 공동합의서 초안을 존중하고 또 이를 충분히 참작'하였다며 북측이 준비해 온 '남북공동합의서'(초안)을 전달하고는 '이후락 부장이 작성한 내용이 충분히 반영되어 있으니 귀측에서 이견이 없으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김영주 부장 명의 초청장은 "오늘 인쇄가 덜 되어서 못가져 왔다.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초청장은 틀림없이 김영주 조직부장 이름으로 초청될 것이며 다음 만나는 날 틀림없이 가져올테니 이미 초청한 것과 다름없는 것으로 생각하면 되겠다"고 사정을 설명했다.

북측 초안을 자세히 읽어 본 정홍진은 "귀측안을 읽어보니 발표하는 곳을 평양으로 지정하고 있는데 이후락 부장께서 제3국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한 말씀에 대한 김영주 부장의 의견으로 이해해야 하겠나"라고 묻고는, 남측 의견은 전달받은 북측 발표문을 이후락부장에게 보고한 뒤 다음 만남에서 말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견임을 전제로 '박정희 대통령의 위임에 의하여...'. '김일성 수상의 위임에 의하여...' 라는 문구는 오히려 문제를 어렵게 만들 위험이 있다고 생각되니 삭제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이 부장이 김영주 부장과 회담한 것이 대통령의 깊은 신임에 의하여 이룩된 것은 틀림없으나 대통령의 위임에 의한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말씀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 아니냐"고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김덕현은 "위임에 의하여 하는 것은 빼어도 괜찮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접견을 받았다'하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넣어두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실제 7.4남북공동성명에는 이후락, 김영주의 서명 앞에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라는 문구로 절충되었음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1974.7.4 동아일보 1면 보도 [사진출처-남북회담 사료집]

내부 반발 의식..'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로 합의

양측은 1차 실무자접촉(6.21)에서 합의한 '남북직통전화 가설 합의서'의 공표는 공동발표시 같은 자리에서 함께 서명하는 것이 좋겠다는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6월 25일 오전 판문점 판문각에서 열린 3차 실무자접촉에서는 남측에서 앞서 북측이 전달한 '남북공동합의서'에 대한 1차 수정안을 내놓았고 북측은 이후락의 평양방문 초청장을 전달했다.

정홍진은 "(이후락 부장은) 귀측이 제안한 '남북공동합의문'을 친히 오랜 시간 검토하고 지난번 부장님이 친히 쓴 초안이 많이 반영되었음을 기뻐했다. 그리고 또 다시 친히 귀측의 제안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문안을 작성하였다"고 발언했다.

이어 "서로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토의를 통하여 실질적 약속이 이룩되고 있는 이상, 귀측과 상이한 우리의 정치체제를 고려하여, 그 표현은 부장께서 작성한 것을 조속히 그대로 합의하는 것이 매우 바람직하다"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각기의 대내적 사정을 고려하여 그 표현을 다듬는 것은 중요한 민족적 과제의 훌륭한 성과를 위하여 참작되어야 할 것"이라는 것.

정홍진은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서울회담 이후 그 합의사항을 실천하기 위하여 고위층과의 협의하는 과정에서 강경한 사람의 반대에 부닥쳐 현재 부장이 매우 어려운 입장에 놓여 있으며 이러한 사정속에서 민족의 앞날을 위한 부장의 비장한 결단이 조속히 그 빛을 보지 못한다면 지금까지의 만북간에 솔직한 대화가 다시는 구할 수 없는 어려운 지경에 이르지 않으리라고 아무도 보장할 수 없다"고 간곡하게 북측의 양해를 구했다.

그러면서 "김선생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 중 몇가지에 대하여 나의 의견을 말씀드리면 이번의 회담이 어디까지나 이후락 부장과 김영주 부장이 주동이 된 회담이었고 이 합의사항은 그 소산이라는 점이다. 또 합의사항의 표기에 있어서 반대하는 사람(귀측으로 말하면 맹동분자)에게 잘 설명되고 납득할 수 있도록 각기의 대내적 사정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밖에 고위급 대표니 하여 스스로 높일 것이 아니라 온 민족에게 겸손히 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점 등이다"라고 콕 찍어서 남북 양측 내부의 반발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김덕현은 '잘 알았다'고 수긍하면서 남측이 제시한 '상사(上司)의 뜻을 받들어'라는 표현의 의미를 묻는데, 그저 '윗분이라는 뜻'이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이날 실무접촉에서는 이틀전 휴전선 인근 금강군 이포리(서이리 무명고지, 남측 지명은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서희리) 남북 초소사이에서   발생한 기관총 사격에 대해 지도를 펼쳐놓고 설명하는 장면도 있었다.

전날 북측 문의에 대해 나름 성실한 소명이 진행된 장면이다.

1972.7.4  [노동신문] 1면 [통일뉴스 자료사진]

전권위임 대표없는 합의서 대신 공동성명으로 합의

6월 27일 오후에 재개된 4차 실무자접촉에서 북측 김덕현은 "우리의 법규에 공동합의서라고 하면 조약과 같은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전권위임을 받은 대표들 사이에 하는 것"이라며, "우리는 그런 견지에서 공동합의서에 귀측은 박대통령의, 우리는 김일성수상의 위임에 의하여 되는 것으로 하여 그렇게 썼는데 이 부장의 문서에는 그러한 전권위임이 아닌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 부장의 뜻을 참작하여 연구한 결과 전권위임이라고 밝히지 않을 수 있는 공동성명으로 하는 것이 어떤가"라는 제안을 한다.

정홍진이 "그것은 좋다고 생각한다"고 즉답하자, 김덕현은 "공동성명으로 합시다"라고 맞장구를 치고는 "귀측의 표현방법을 따서 하나도 귀측이 이의가 없도록 만들었다"며 북측이 수정한 '공동성명'안을 제시했다.

주요 내용은 이렇다.
1. 공동합의서는 귀측만이 국민을 인식시키는데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도 인민들에게 대내적으로 설득시키는데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그 내용중 선전적 목적을 가진 일방적 통일제의를 삼가하자 하는 것은 조절위원회가 열리게 되면 자동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고, 또 문장 내용에 이미 다 들어가 있으니 넣을 필요가 없다고 본다.

2. 군사적 문제에 관한 것은 네곳이나 표현이 되었기에 약간 조정했다.

3. 조절위원회의 사업관리 범위를 넓혀 '통일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하고 했다.

4. 7항의 '성실하고 정직하게'는 '성실하게'로 하면 같은 뜻이 될 것이고, '상사의 뜻을 받들어'라는 표현은 봉건사회에 쓰던 단어이므로 '상부'라고 고치면 좋겠다.

김덕현은 "이 부장께서 이 사업으로 어려운 형편이라는 점을 참작하여 이 기회에 일을 성사시키겠다는 목적으로 많이 양보하였다"고 덧붙였다.

정홍진은 '선전적 통일방안을 제기하지 않겠다'는 이후락의 수정제안이 거북하다면, 남측 대내사정을 고려해서 '조절위원회를 하는 동안 선전적인 일방적 제안을 하지 않는다'고 넣으면 어떻겠느냐고 거듭 요구했다.

이에 대해 김덕현은 "만약 이러한 문구를 써 넣는다면, 첫째로 과거 우리가 제안한 모든 통일방안이 선전적이었다는 것으로 오해될 것이며, 둘째로 우리의 민족통일을 위한 순수한 제안들이 선전적이라고 주장하던 사람들에 대하여 그것을 시인하는 것으로 된다"고 하면서 "그래서 받아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또 조절위원회가 있어 앞으로 그런 일이 없을텐데 굳이 넣을 필요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정홍진은 거듭 대내적 사정을 거론하며 수정제안을 포함한 이 부장의 제안을 김영주에게 보고해달라고 했고, 김덕현은 이미 김영주 부장이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하게 말했지만 다시 한번 보고해 보겠다고 수습했다.

'선전적 제안'에 대한 이후락의 우려와 집착은 서울에서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도 강하게 나올만큼 뿌리깊은 것이었다.

이후락의 평양방문 일정에 대해서도 서로 탐색하듯 이야기가 나왔다.

정홍진은 개인적 의견이라면서 이 부장이 7월 3일에 갔다가 4일 오전 발표하고 그날 오후에 돌아올 것이라고 흘렸다. 

이에 김덕현은 김영주의 뜻이라면서, 평양을 다시 방문하는 이후락을 종전처럼 고위층이 영접할 것이며, 공동성명 발표외에 '이 부장께 아주 기쁜 소식을 알려드리겠다'는 말을 전했다.

김영주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후락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하면서 "이 부장이 제기한 문제들 가운데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이 있다. 공동합의서에 제기된 외에도 한 두가지가 해결할 것이 있는데 아주 기쁜 소식"이라고 말했다는 것.

이후락이 가족이나 많은 분들과 함께 평양에 와서 여러 날 머물면 좋겠다는 초청의사도 전달했다.

이 4차 실무자접촉에서 정홍진과 김덕현은 다음 접촉에서 며칠 후 발표하게 될 7.4남북공동성명서와 '직통전화 협정문'에 가조인을 하기로 했다.

무산된 이후락 평양재방문과 공동성명 평양발표

6월 28일 5차 실무자접촉은 일기 불순으로 인해 김덕현이 비행기로 출발하지 못하고 자동차로 이동해 늦게 도착한다는 소식을 직통전화로 알려옴에 따라 당초 예정보다 2시간 30분 지연된 낮 12시 30분부터 시작됐다.

양측은 상호 수정된 성명서 문서를 서로 교환하고 이어 직통전화 협정문에도 가조인(1시 20분) 했다.

이 과정에서 북측 문서에 '사상'으로 표현되어야 할 것이 '신앙'으로 고쳐졌다는 남측의 지적이 있자 북측은 옆방에서 전화통화를 한 후 '인쇄가 잘못된 것'이라고 정정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정홍진은 "이제 이 문제는 완전히 합의되었다"고 하면서 이후락의 방문과 공동성명 발표절차에 대해 북측에 통보했다.

'7월 3일 오후 2시 판문점 자유의집을 출발하여 7월 4일 오후 4시에 판문점에 돌아오며, 공동성명발표는 7월 4일 오전 10시 평양에서 한다. 먼저 김영주 부장이 읽고 그 다음 이후락 부장이 읽는다. 이때 북한방송을 서울에서 중계하겠다'는 것.

정홍진은 이에 대해 변동이 없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10시 발표 이후 평가는 잘 나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후락이 평양에 있는 동안 입장이 곤란할 수 있는 논평은 삼가해달라고 요청했다.

"부장께서는 성명발표하고 형무소에 들어갈 각오도 하고 있다. 대통령 각하께서는 반대하지만 이것을 발표하여 놓고 기정사실화하고 건의드릴 각오를 하고 있다...부장은 여러가지 어려운 처지에 있으나 날짜를 고정화시켜 기정사실화함으로써 이 사업을 성취시키고자 한다...부장께서는 그쪽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진취적인 사상을 갖고 계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수행원은 정홍진외 주치의를 포함해 0명이며, 공식회담에는 수행원 중 한명인 정비서까지 참가하겠다고 알렸다. 

김덕현은 정홍진이 김영주 부장의 '선물'에 대해 관심을 보이자 "이부장의 권위와 영향력을 높일 수 있도록 하여 드리고 또 인민들이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것"이라는 김영주의 말을 전했다.

나름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 진행되던 접촉은 여기서 한 차례 중대 고비를 맞이한다.

정홍진은 이날 저녁 6시 21분 김덕현과 직통전화로 연결해 '정말 미안하다. 정말 오해없이 들어 주기 바란다'고 하면서 "오늘 합의되었다고 축배를 들고 돌아와보니 말하지 못할 사정이 생겼다. 그것은 (이후락) 부장께서 도저히 평양에 가실 수 있는 입장이 못되었다. 그것은 만나서 말씀드리겠다"며 "그래서 7월 4일 10시에 발표는 하되 동시 발표를 하도록 하여야겠다"고 변경된 사정을 전했다.

그동안 남측 사정에 대해 나눈 이야기가 있으니 이해할 것이라고 하면서, "오늘 문서중에서 첫 부분을 지우고 몇 군데 수정하자"고 말했다.

"이번에 못가더라도 지난번 김영주 조직부장이 초청한데 대한 방문은 내부문제를 수습하고 나서 언제고 꼭 가겠다"는 이후락의 전언을 덧붙이면서 이에 대한 회신을 요구했다.

이때 남측 요청에 따라 지워진 부분은 '이후락 부장이 평양방문에서 공동성명을 발표한다'는 대목.

이날 양측은 밤 9시 50분가 되어서야 4번째 직통전화 연결이 되었으나 직접 통화는 6월 29일 오전 10시 50분에야 이루어졌다.

이후락의 사정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는 수 밖에 없다는 김영주의 의사에 따라 전화로 먼저 문안을 조정하고, 서명은 남측 문서에 이후락부장의 서명을 하여 전달하면 김영주 조직부장의 서명을 받아 다시 남측에 반환하는 방식으로 하기로 하고 북측 문서도 같은 방식으로 서명하기로 했다.

남측은 이 통화에서 공동성명 발표 수정부분을 읽어주었고, 북측은 이날 저녁 7시 35분 수정내용을 직통전화로 알려왔다. 

이에 남측이 수용의사를 확인한 뒤 각각 이후락과 김영주의 서명을 받아 6월 30일 다시 만나기로 한다. 그리고 그때 직통전화 합의문에도 같이 서명하기로 한다.

북측은 이날 밤 8시를 조금 넘긴 시각에도 직통전화를 통해 "우리(북) 문서는 그쪽 것 보다 가로가 3cm, 세로가 4cm 클 것 같다. 그리고 한면에만 인쇄하겠다", 9시 10분에는 "발표일자는 7월 4일이 틀림없지요. 인쇄에 일자를 넣기 위해 다시 확인합니다"라며 꼼꼼하게 공동성명 발표를 준비했다.

7.4남북공동성명의 문안 확정과 발표 방식은 통화 다음날인 6월 30일 오후 4시부터 판문점 자유의집에서 열린 6차 실무자접촉에서 마지막 조율을 거쳐 7월 1일 7차 실무자접촉에서 최종 확정됐다.

정홍진은 "우리측 문서를 가지고 왔다"며 문서를 교환하고 확인 절차를 거쳤다. 김덕현은 "이 부장의 영접준비를 크게 하다가 중지했다"며 "내부적인 사정을 좀 말씀드려 주실 수 없겠나? (이) 부장님께서는 언제쯤 평양을 방문할까"등을 물었다.

정홍진은 이에 "이 부장은 일단 발표를 하고 난 후 기회를 보아 평양에 가는 것이 모처럼 민족을 위하여 시작된 이 사업에 앞으로 더 큰 진전을 기대할 수 있겠다고 하면서 이 사업이 잘되게끔 더욱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며 기약만 할 뿐  평양방문과  발표가 무산된 '내부적 사정'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서 "기자회견에 있어서 귀측 입장을 곤란케 하는 일은 피하겠지만 혹시 오해가 가는 것이 있더라도 이해해 주기 바란다. 그리고 경위에 있어서는 숙소 등의 장소를 굳이 밝힐 필요는 없고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는 표현으로 하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또 수행도 부장 보좌관과 경호원이 수행하였다는 표현으로 하고 김 수상을 만난 이야기는 하겠으나 회의록은 공개하지 말고 회담의 결과는 공동성명에 밝혀져 있다고 이야기하면 될 줄 안다"고 말했다.

남북직통전화 가설 합의문은 기자들에게 흘려 공개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며, 이는 또한 공동성명의 합의사항이 구체화되고 진전되어 간다는 증거가 될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김덕현은 이에 "우리는 사진을 수상과 회담하는 것 하나와 그쪽(남)에서 사진을 내는 것을 꺼린다면 이 부장과 김영주 부장이 회담하는 사진을 내고자 한다. 그리고 기자회견에 있어서는 서로 입장이 곤란하지 않는 방향에서 하도로 하자. 기자들에게 그 경위에 있어서는 납득할만한 설명이 있어야 될 줄 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정홍진은 북측에서 수상의 면접사진을 내어도 좋겠지만 남측에서는 내지 않겠다는 것이 이후락의 의도라고 하면서 회담광경을 사진으로 발표하면 자연 수행원이 공개되기 때문에 곤란하다고 대답했다.

경위설명을 하는 과정에서도 김덕현과 자신이 서로 왔다 간 사실이 알려지면 적십자회담이나 이 사업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에 깊이 발표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이후락의 생각이라고 전했다.

정홍진의 이같은 반응은 박정희를 비롯해 남측 당국 내부에서 '김영주는 서울에 오지 않는데 왜 이후락만 평양에 가느냐'는 반대의견이 있고, 공동성명 발표 후 여론 추이를 예민하게 주시하면서 여러 정치적 효과 등을 저울질해야 했던 사정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안한 예감

7월 1일 오전 9시 40분 판문점 판문각에서 열린 7차 실무자접촉에서 남북은 전날 수교(手交)한 문서를 다시 주고 받은 뒤 북측의 제의에 따라 사진촬영을 했다. 문서교환과 축배를 나누는 장면은 북측이 데리고 온 사진사 1명이 촬영했다.

북측은 이후락이 김 수상을 만나 접견하는 것과 박성철 부수상이 박 대통령을 접견하는 것은 자연스러우니 사진을 내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양측이 같이 내던지, 같이 내지 않던지 하자고 제안을 하지만 남측은 이에 확답을 하지 못하고 "귀측에서 사진을 공개하는 것은 좋으나 우리는 공개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다같이 사진을 공개할 것을 바란다면 다시 이 부장에게 보고하고 전화로 연락하겠다고 이날 접촉을 마무리한다.

남북공동성명 발표 하루 전인 7월 3일 오전 10시 5분부터 저녁 6시까지 3차례의 직통전화 통화를 통해 세부사항에 대한 통보가 여러 건 진행됐다.

김덕현이 "우리는 '박정희대통령과 회견하였다'라고 발표하려고 하는데 귀측은 어떻게 하겠는가?" 묻자, 정홍진은 장시간 토의한 결과 라고 하면서 "현재로서는 (이)부장의 입장이 매우 난처하므로 '김일성'으로 하고 차차 그렇게 해결하여 가도록 하자. 그쪽에서 '박대통령'이라고 하여 준다면 이 부장의 입장이 매우 좋아질 것 같다. 이러한 우리의 입장을 잘 이해하여 주시기 바란다"고 대답한다. 양측 최고지도자의 호칭에 관한 문제이다.

김덕현이 또 "지금 방송에서 내일 이후락 부장이 통일문제라고 하지 않고 안보문제에 대한 중요발표를 한다고 예고하고 있는데 안보문제라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붇는데 대해 정홍진은 "내일 공동성명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문제를 통일문제라고 하지 않고 안보문제라고 한 것은 이 부장의 입장이 현재 어려운 처지에 있기 때문에 이를 고려한 것"이라고 답변한다.

이날 저녁 통화에서 정홍진은 "내일 아침 신문에 이후락 부장이 김일성 수상 만난 사진과 박대통령이 박성철 부수상 만난 사진이 나갈 것으로 예견된다"고 통보한다.

7.4남북공동성명 전문 [사진 출처-남북회담 사료집]
[서울-평양간 직통전화의 가설 및 운영절차에 관한 합의서] 전문

1. 직통전화의 설치목적
  조국의 평화통일을 자주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과업과 기타 남북간에 제기되는 문제 및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는 문제를 직접, 신속, 정확히 처리하기 위하여 서울-평양 간 직통전화(이하 직통전화라고 함)를 설치 운용한다.

2. 직통전화 설치장소
 직통전화는 서울에서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사무실 그리고 평양에는 김영주 조직지도부장의 사무실에 각각 설치한다.

3. 운용시간
 직통전화는 일요일과 공휴일을 제외하고 매일 9시부터  12시까지, 16시부터 20시까지의 사이에 운용하며 쌍방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경우에는 이상의 지정된 시간과 날짜에 구애됨이 없이 사전에 날짜와 시간을 설정하여 운용한다.

4. 통화자
 직통전화의 통화자는 다음과 같은 사람으로 한다.
 서울에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그가 지명한 3명으로 하며 평양에서는 김영주  조직지도부장과 그가 지명한 3명으로 한다.

5. 시험통화
 직통전화의 이상유무를 확인하기 위하여 제3항에 지정된 날의 10시에 시험통화를 한다.

6. 고장수리
 직통전화에 이상이 있을 때는 판문점 상설 연락사무소를 통하여 이를 통보하고 쌍방은 각기 자기 관할지역을 책임지고 보수하며  판문점 공동경비구역내의 고장은 양측이 공동으로 수리한다.

7. 비밀보장
 쌍방은 통화내용의 비밀을 엄격히 보장한다.
8. 수정 또는 보충
 본 합의서의 내용을 수정 또는 보충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쌍방의 합의에 의해서만  할 수 있다.

9. 유효기간
 본 합의서는 서로 서명하여 교환한 때로부터 발효하여 쌍방의 합의에 따라 폐기하기 전에는 계속 유효하다.

  

             서            울                                            평            양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조직지도부장 김영주

                                       

                                                     1972년 7월 4일

 

서로 다른 심중..역사적 탄생과 비극적 결말
 
이후락은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뒤 배경설명을 하면서 자신이 1970년 12월 21일 중앙정보부장 취임 이후 검토, 분석해 본 바에 따르면 북한은 남침기회만을 노리고 있으며,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우선 북한당국과 대화를 나누어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김영주 당 조직지도부 부장을 대화 상대로 택해 지난 3월 직접회담을 제의하고 5월 2일~5일 평양을 방문해 김영주와 두차례, 김일성과 두차례 회담을 가졌다고 공개했다.

회담을 더욱 증진시키기 위해 김영주 부장을 서울로 초청했으나 건강상 사정으로 오지 못하고 그의 대리로 박성철 부수상이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서울을 방문해 자신과 두차례 회담을 갖고 박 대통령을 한차례 접견했다는 사실까지 공개하고는 이같은 회담의 결과 오늘 공동성명을 발표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후락은 이날부터 남북관계는 '대화없는 남북대결에서 대화있는 남북대결의 시대'로 옮겨가게 됐다고 하면서 '"대화를 뒷받침해 줄 총력안보"를 강조했다.

기자들과의 문답에서는 "대화가 시작되었으니 그것은 곧 긴장이 완화되었다던가, 이제는 우리가 마음 놓아도 좋다는 생각을 해선 안될 것"이라며 "국민총화로서 평화를 모색하는 대화를 뒷받침해 주는 체제, 이것이 무엇보다도 아쉽다는 것을 한번 더 강조한다"고 말했다.

또 "우리가 확실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북한은 언제나 실천불가능한 앞지른 제안을 먼저 한다. 이것은 상대방이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고 제안을 하는 것이며, 얼핏 보기에는 가장 좋은 제안같지만 이것은 말의 선전이고 말의 외교이다. 그러나 우리 대통령 각하께서 하시는 외교나 선전은 어디까지나 성실하게 할 수 있는 일만 말하고 또한 그것도 행동으로 표시하는 것이 그쪽과 다른 전형적인 외교선전의 방식이다"라고 뿌리 깊은 불신의 일단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이후락은 "온 민족앞에 우리가 합의사항을 성실히 이행할 것을 약속한 만큼 나도 다시 우리 국민앞에 제가 할일을 성실히 이행할 것을 다짐하는 약속을 드린다"고 덧붙였다.

같은 날 박성철 제2부수상은 평양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남북공동성명 발표에 대한 배경설명을 한다.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서울을 방문해 박정희와 '회견'한 사실을 공개하면서, 조국통일 3대원칙에 대해 박정희가 전적인 지지를 표명했으며, 조국통일 문제 해결을 위한 상설적 협상기구인 남북조절위원회 구상에 대해서도 찬동했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는 이후락과 김정렴 비서실장이 함께 있었다고 했다.

"남북고위급회담이 진행되고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것은 민족최대의 염원인 조국통일을 촉진함에 있어서 참으로 커다란 사변"이라고 하면서 이를 통해 "남북사이에는 격폐(隔廢)된 감정이 풀리고 대화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였으며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돌파구가 마련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민족의 내부문제를 그 주인인 조선사람끼리 서로 마주 앉아 진지하게 협상한다면 능히 우리 자신의 손으로 조국의 통일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다는 것을 힘있게 확증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미 CIA, '南, 고위급 정치대화로 발전시키려는 北 시도 잘 저지했다'

냉전 완화의 세계사적 흐름속에 남북의 결단과 결단이 만나 힘겨운 과정을 극복하면서 만들어낸 7.4남북공동성명은 말 그대로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로 나아가려는 민족사적 사건이었지만 문제는 그 이행과정에서 터졌다.

공동성명 발표 이후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회의(3차례, '72.10~11) △남북조절위원회 회의(3차례, '72.11~'73.6)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 회의(10차례, '73.12~'75.3)가 이어졌으나, 이미 '10월 유신'('72.10.17)과 '사회주의 헌법 채택'('72.12.27)으로 본래 대결구도를 강화하는 흐름으로 회귀한 것.

처음부터 위험한 기도가 있었고 위태로운 과정도 숱하게 겪었다.

남북공동성명 발표 바로 다음 날인 7월 5일  김종필 국무총리는 '7.4남북공동성명 발표와 관련한 정부입장'을 설명하는 국회보고에서 △지나치게 비약적인 생각이나 또 지나친 사상이나 남북대화에 대한 환상적인 생각은 금물이다 △유엔은 외세가 아니다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은 현존 그대로 가벌성이 있는 행위에 대해서는 적용할 것 △두개의 한국을 인정하고 승인한 것은 아니다 △상호 중상·비방을 말자고 한 것은 개관적인 약속을 초보적으로 해본 것에 불과하다고 희망적 분위기에 제동을 걸었다.

이날 정부의 홍보업무를 맡은 문화공보부는 각 부처와 지방자치단체 공보관회의에서 △종래 '북괴'로 부르던 것을 '북한'으로 호칭할 것 △김일성과 그 체제에 대한 중상·비방을 삼갈 것을 지시하는 등 공동성명 후속조치를 마련했으나 박정희는 7일 국무회의에서 "7.4공동성명에 지나친 낙관은 하지말라"고 하면서 '반공교육을 계속 강화'하도록 지시했다.

7월 8일 검찰은 7.4남북공동선언 범위안에서의 발언은 목적의식이 없으면 규제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결정했으나 "공산집단에 대한 고무·찬양·동조는 계속 강력히 다스리겠다"고 발표했다.

이쯤에서 7.4남북공동성명 발표 전후 박정희가 처한 상황을 살펴보자.

전년도 대통령 선거에서 노골적인 관권·금권선거를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패배와 다름없는 당선을 한 박정희 앞에는 경제위기와 냉전 해체라는  거대한 흐름이 불안한 미래처럼 놓여있었다.

제갈공명과 조조를 합쳐 놓았다고 해서 '제갈조조'란 별칭으로 불리던 이후락은 역대 중앙정보부장 중 손꼽히는 박정희의 재사였다. 박정희와 그의 '결단'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고 어디를 향하고 있었던 것일까?

지난 2017년 7월 1급 비밀문서에서 해제된 미 중앙정보국(CIA)의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에 대한 '일일 정보브리핑' 자료'는 이런 의구심에 하나의 의미있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또 50년만에 공개된 '남북회담 사료집'의 대화록에 감춰진 행간을 읽을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자료에 따르면, 미국은 이후락의 평양방문과 박성철의 서울방문을 비롯해 일련의 남북접촉 과정과 논의내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었으며, 남북대화에 대한 박정희의 의지가 낮아 결국 회담은 실패할 것으로 예측했다. 결과적으로 정확한 예측이었다.

CIA는 박정희가 하비브 미국 대사와 면담에서 △이후락을 추가로 북한에 보낼 일은 없으며 △공동성명을 통해 설치된 남북조절위원회는 고위급이 배제된 실무진 위주로 구성하고 그 기능도 적십자회담 지원, 비무장지대 충돌 방지 등에 머물게 될 것이라고 언급한 내용을 닉슨에게 보고했다.

박정희는 체제경쟁에 대한 자신감이나 통일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김일성의 정치공세를 막아보려는 의도에서 대화에 나선 것으로, 남북정상회담에 나설 의향도 애초에 없었던 것으로 CIA는 분석했다.

CIA는 공동성명 발표 다음 날인 7월 5일자 브리핑 자료에서 "전날 발표된 공동성명 내용 분석 결과, 한국은 남북 대화를 고위급 정치대화로 발전시키려는 평양의 시도를 효과적으로 저지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