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에서 우리는 처음 시작했다
[간서치의 둔한 서평(169)] 메건 혼터의 『끝, 새로운 시작』
“어떻게 여기 계신 분들 미리 대피가 안 됐나 모르겠네.”, “아, 주무시다 그랬구나.”
서울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져 강남을 비롯한 시내 곳곳이 물에 잠겼던 지난해 8월 8일 밤, 대통령은 상황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튿날 일가족 세 명이 참변을 당한 신림동 반지하 주택 현장을 찾은 대통령은 위와 같은 4차원적 발언을 했다. 그 모습을 또 정부는 촬영해서, 대통령이 ‘열일’하고 있다고 홍보했다가, 그야말로 욕이란 욕을 다 들어먹어야 했다.
또 왜 8일, 대통령이 상황실에 안 가고 ‘칼퇴’를 했는지 묻자, 무려 시민사회수석이라는 사람은 “비가 온다고 대통령이 퇴근을 안 하나”라며 되물었다. 당최 이들의 세계관은 무엇인가, 초현실적 세상에서 나는 살고 있구나, 기분 나쁜 감탄을 할 수밖에.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재난재해에 대처하는 ‘(만년)초보’ 대통령의 한심한 발언과 정부 당국의 안일한 인식과는 별개로, 2022년 8월 8일의 폭우는 정말 예사롭지 않았다. 서울에 하루 동안 내린 비로는 기상관측 사상 최대치였다. 그전 기록이 1920년 8월이었다 하니 흔히 이야기하는 ‘백년만의’ 기록적인 폭우였던 셈이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사는 이들이 모여 산다는 강남구 일대가 물에 잠기고, 값비싼 외제 승용차들이 지붕만 남긴 채 둥둥거리거나, 여기저기 처박혀 있는 모습은, 역시나 초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자연재해 역시 정확하게 빈부의 격차를 따지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에 내리는 형벌이 엄연히 다름은 모두가 알고 있다. 헌데 이번 폭우는 그러한 법칙(!)마저 무시했다. 강남구 지형 자체가 수해에 취약하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보통의 수준을 훌쩍 넘어서는 비가 쏟아진 것 또한 사실이라는 소리다. 즉, 100% 인재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수해였다.
그럼 정말 ‘백년만의’라는 수식어를 붙일 정도로 이번 수해는 특별했던 것일까. 유감스럽지만 그것 역시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대한민국은 기후변화에 따른 유무형의 재해를 입고 있었다. 2010년부터 정부가 ‘관계부처 합동’으로 발간하는 ‘이상기후 보고서’를 보면 바로 체감할 수 있다. 점점 더 명확하고, 광범위하고, 치명적으로 자연재해가 반복되고 있다.
‘역대 최고’가 해마다 경신되고, 최악의 폭염이 지나가면 최악의 한파가 몰아쳤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 ‘5월 고온 현상’이 해매다 최고치를 경신했다. 여름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한반도에 극심한 고온현상이 발생하고 고착화되고 있는 것이다. 기록적인 폭우와 가뭄, 수해와 산불이 반복된다. 태풍 피해 역시 과거에 비해 더 빈번히 발생하고 있는데, 이는 필리핀 동쪽 해상의 높아진 해수 온도로 인한 기류의 상승 등이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전 지구적 재앙이 결코 한반도를 비껴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체감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어떤가. 한반도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북한 역시 재앙을 피할 길이 없다. 오히려 황폐화된 산림과 취약한 인프라, 부족한 재정 등으로 더 큰 타격을 입는다. 여름철 집중 호우와 태풍, 그리고 거기에 수반되는 홍수 피해를 매년 입고 있다. 가뭄 역시 빈번히 발생한다. 복구가 늦어지는 가운데 다시 새로운 재해를 입는 형태다. 그리고 재해는 다시 식량난 감소로 이어진다.
많은 과학자와 전문가들이 기후변화를 기후위기로 명명하고, 더 늦기 전에 세계 모든 나라가 힘을 모아 대안을 만들고 실천해야 한다고 외친다. 굳이 툰베리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수많은 세계 시민들이 각 정부에 기후위기에 더 많은 재원을 투입하고, 자본의 압박에서 탈출해 생존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미국, 중국을 비롯해 G20 국가들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 이후 더욱 굳어진 자국이기주의, 진영 논리 앞에 이들의 절박한 호소는 쉽게 묻혀버리곤 한다. 지옥으로 가는 열차는 여전히 멈출 줄 모른다.
『끝, 새로운 시작』은 그 절망과 파국에서 시작된다. 기후이상으로 인해 물에 잠긴 런던. 이제 막 아이를 출산한 주인공은 아이를 데리고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안전한 곳을 찾아 움직인다. 도시의 고층 아파트가 해수면 상승으로 잠기고, 시부모가 살고 있는 산골로 피난을 가지만, 그곳 역시 지옥이다. 식량을 빼앗기 위한 인간들의 광기가 살육을 불러오고, 그 와중에 시부모를 잃게 된다. 새로운 생존의 길을 찾기 위해 떠난 남편 역시 돌아오지 않고, 결국 주인공은 아이와 함께 새로운 길을 떠난다.
소설은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 시적 문체로 일부만을 듬성듬성 보여줄 뿐이다. 그 나머지는 독자의 상상력을 요구한다. 하지만 마냥 불친절한 소설은 아니다. 아름다운 문체를 통해 주인공의 고통과 위기, 도전과 회의, 다시 체념과 끝끝내 지켜내는 희망이 독자를 어루만진다. 그리고 드디어 아이가 제 발로 땅을 딛고 일어섰을 때, 스스로 균형을 잡고 마침내 한 발을 내디딜 때, 짧은 탄성과 함께 ‘희망’을 보게 된다.
지구온난화는 이미 심각할 정도로 진행되었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영구동토층, 말 그대로 절대 녹아서는 안 되는 땅들이 녹아내리고 있다. 이제 다시는 인간의 힘으로 그 땅들을 복원할 수 없다. 녹은 그 땅에서 어떤 것들이 튀어나올지 알고 있는 이들은 없다. 코로나를 우습게 만들 정도의 바이러스가 우리를 다시 학살할 수도 있다. 이미 우리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이밖에도 인류가 스스로 만들어낸 재앙은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이렇게 생각하면 깊은 좌절과 회의에 빠져 벗어나기 힘들다. 어차피 망하는 세상, 멋대로 되어라, 자포자기 할 수도 있다. 점점 더 미쳐가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니, 이미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어느 작가의 말처럼, “세상이 망가지는 속도가 무서워도, 고치려는 사람들 역시 쉬지 않는다”고 믿고 싶다.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도 그것일 것이다. 포기할 수 없다고, 우리가 끝이라고 생각한 바로 순간부터 다시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는 것 역시 인류의 특징 중 하나가 아닐까. 전 지구적 재앙 앞에 굳이 너와 나, 우리 편과 상대 편, 적과 아군을 구분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어차피 이대로 있다간 순서의 차이만 남게 될 뿐 아닌가.
기후위기에 남북이 협력해 함께 대응해 나가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그러한 맥락이다. 정치군사적으로 갈등하고 기싸움하고 서로 헐뜯는 시간에, 어떻게 힘을 모으고 무엇부터 함께 시작해야 하는지 토론하고 경청하는 게 훨씬 더 문명인다워 보인다. 꼭 누구의 허락을 굳이 받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 정도는 괜찮잖아?
한 가지 다른 이야기.
튀르키예와 시리아를 초토화시킨 강진이 발생한 지 일주일이 지나고 있다. 우리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구조와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지구인다운 모습이다. 얼마가진 않겠지만, 정치·경제적 계산은 잠시 미뤄두고, 지구인의 본분을 다하는 모습들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단 하나의 생명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끝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면 정말 좋겠다.
그리고 언론은 오랜만에 횡재했다는 듯이, 듣기 거북한 감정적 배설만 하기 보다는, 아이의 눈물과 부모들의 한숨을 시청률 도구나 돈으로만 보기 보다는, 있는 사실을 성실히 알리고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줄 수 있는 사회적 공기의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 아, 우리 시대 언론에 너무나 큰 바람인가.
실시간으로 우리 구조대가 얼마나 많은 생명을 구했는지 알리는 것도 의미는 있겠지. 대통령이 연일 노고를 치하하는 것도, 그냥 안 보고 무시하고 뭐 그럼 되지. 하지만 바쁘고 마감 때문에 늘 노심초사하는 기자 양반, 어이 어이! 이게 무슨 게임이나 경연대회는 아니잖아. 그치?
우리나라 사람과 다른 나라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죽은 이들을 모욕하거나 조롱하지 않고, 그들을 온전하고 따뜻하게 기억해주지 못하는 공동체는 존재할 가치나 이유가 없다. 내 생각은 그렇다.
이번 강진으로 숨져간 모든 생명과 그 가족들을 위해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