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고성군에 ‘한반도평화지대’를
[연재] 이양재의 ‘문화 제주, 문화 Korea’를 위하여(41)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1. 역사는 국가의 분열과 통합의 연속
나는 역사관이 뚜렷한 민족주의 성향의 애서가이다. 간혹 애서가를 자처하며 이기적 행동을 하는 꼴보(골통수구) 사이비들도 있지만, 애서가들 대다수는 민족주의자이거나 민족주의 지향자이다. 애서가들은 대체로 국가와 민족을 떨어뜨려 생각하지 않는다. 애서가로서의 민족주의자와 민족주의 지향자는 대체로 통일지향적인 사람들이다. 특히 나는 친일 꼴보가 싫다. 친일 꼴보는 보수가 아니다. 엄밀히 말한다면 그들은 수구도 아니다. 그들은 외세에 종속된 노예일 뿐이다.
역사는 분열과 통합의 연속이다.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로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 지역에는 많은 나라가 명멸해 왔다. 고려가 통일 지향적이긴 하였지만, 한반도 전역도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다. 근세조선이 사대외교의 굴욕을 겪었지만, 그나마 한반도와 간도 일부를 차지하였다. 1910년 이전의 우리나라 영토(한반도)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38선으로 분단되었고, 다시 휴전선으로 분단되었다. 현재 우리 민족의 당면 과제는 조국 분단의 종식이며, 현실에서의 통일이다.
2. 강원도 고성군을 주목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DMZ(비무장지대) 접경지역의 최북단 강원도 고성군(高城郡)을 주목하여 왔다. 본 연재의 39회에서 “고성군은 나름대로의 통일시대를 열어나갈 수 있는 잠재력이 숨 쉬고 있다”라고 언급하기까지 했다. 정치 체제를 하나로 합하는 급진적인 통일은 사실상 불가능할 수 있다. 경제를 교역하며 문화를 교류하고 평화적으로 공존하며 왕래한다면 그것이 곧 점진적으로 통일로 가는 길이다.
북에도 고성군이 있고, 남에도 고성군이 있다. 휴전 후 북이 다른 군 일부를 고성군으로 편입시켰기에 현재의 북쪽 고성군은 518.56㎢이고 남쪽 고성군은 664.55㎢이다. 남측 고성군은 외지인 비율이 극히 낮다. 3대 이상 거주해온 토박이의 비율이 60%를 넘는다. 아울러 이 지역은 북강원도 및 함경도에서 내려온 실향민들과 북강원도(통천, 회양, 원산 등지) 출신들도 대체로 많다. 어쩌면 “분단 및 휴전 이전의 강원도 도민들의 정체성이 살아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북측 고성군은 금강산 일부와 통천과 함께 해금강을 차지하고 있다. 남측 고성군 절반과 북측 고성군 절반을 ‘한반도평화지대’로 지정하여 시범 운영하는 것을 미래 세대의 정치가들에게 제안한다. 이것은 성사할 수 없더라도 일단 그러한 시도를 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물론 진정되게 성사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3. 고성군에서부터 냉전 패러다임을 깨자
금년이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으로부터 70년이 된다. 따라서 지금은 한국전쟁시 직접적으로 전투를 한 군인들이 대부분 타계하셨다. 그분들의 희생과 분투는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남북은 아직도 냉전의 패러다임(paradigm, 고정관념)에 갇혀 있다. 그것은 정치적 논리를 강요하는 것으로 국민에게, 특히 이산가족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준다.
냉전의 패러다임이란 “정치 사회 구조를 지배하는 고정관념”을 의미한다. 즉 남은 반공 패러다임에 북은 반미 패러다임에 갇혀 있다. 하지만 역사의 근본 원리에 따라 미래지향적으로 생각해 보면, 지금은 냉전의 패러다임을 깨야 할 시점이다. 남은 반공 패러다임을 깨 버리고, 북은 반미 패러다임을 깨 버려야 한다.
그 절호의 기회, 즉 시점이 2019년 하노이에서의 북미정상회담이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미국의 네오콘은 북을 적국으로 계속 남겨 두어야 했고, 지금 남의 수구들은 “북과 계속 적대적인 대립을 심화하여야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국지전(局地戰) 운운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국지전은 없다는 것이다. 21세기에 남북이 전면적으로 충돌한다면 그 충돌을 국민들이 알기도 전에 이미 한반도는 초토화 돼 있을 것이다. 국지전을 꿈꾸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러한 신냉전 시대에 우리는 냉전의 패러다임을 깨어야 할 한 새로운 지점을 찾아야 한다. 미래의 역사와 미래의 세대들에게 냉전 패러다임이라는 불행한 분단 유산을 물려 줄 수는 없다. 나는 냉전 패러다임을 깨어야 할 시작점으로 남북의 휴전선을 군(郡)의 중심부에 두고 있는 고성군을 주목한다. 특히 이 지역은 3대 이상 거주해온 토박이의 비율이 60%를 넘는 것이 매우 고무적이다.
4.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북한
1945년 8월 15일, 해방되고 지금까지 한국은 많은 급진적 변화가 엎치락뒤치락하여 왔다. 북에서도 해방 후 지금까지 많은 점진적인 변화가 있었다. 수구들은 북의 점진적인 변화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에 냉전 패러다임(고정관념)을 강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전문가의 눈으로라도 엄밀하게 관찰해 보자. 김일성의 시대에도 주체사상을 공식화한 이전의 시대와 주체사상을 공식화한 이후의 시대가 차이가 난다. 더군다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활동하던 전반기와 1994년 이후의 후반기와 차이가 난다. 지금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활동기 10년 차가 넘는 시기이다.
1912년 4월 15일생인 김일성 주석은 북의 정부가 수립된 1948년 9월에 만 36세였다. 현재 북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금년 1월 8일 자로 만 39세이고, 집권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즉 남측에서 현재의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냉전 패러다임의 관점으로 본다면 남측은 북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된다. 이미 변화한 인물과 시대와 역량을 무시하고서 무슨 올바른 대북 정책을 입안하고 내놓는다는 말인가?
북이 점진적으로 변화하였다는 것, 발전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고, 정치의 진화 또는 정치의 개혁이라 할 수도 있다. 그것을 인정하여야 북의 현재와 미래를 제대로 볼 수가 있다. 그런데 북이 점진적으로 변화해 왔다는 것을 수구들이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독자분들을 그 이유를 깊이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5. 강원도 고성군의 근현대사 유적을 주목한다
나는 1980년대 중반에 직접 차량을 운전하여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강릉시를 거쳐 고성군으로, 다시 동해안을 따라 부산시까지 내려갔다가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상경한 바 있다. 당시는 고성군의 근현대사적 유적에 관한 관심이 없었다. 이후 1990년대 초반에 다시 고성군에 간 바 있고, 이때 비로소 고성군의 근현대사 유적이 눈에 들어왔다. 이후 지난해까지 십여 차례나 고성군을 간 바 있다.
나는 왜 고성군 일부를 ‘한반도평화지대’로 하자고 주장하는 것일까? 고성군은 동해북부선(북한 원산 안변~강원도 양양, 192.6km)을 복구하면 원산시와 함흥시, 북청군, 라선시를 거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연결되며, 다시 시베리아 횡단 열차로 유럽까지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더군다나 고성군에는 고인돌에서부터 근현대사 유적까지 널려 있고, 북측 고성군은 금강산과 해금강의 상당 부분을 점하고 있고, 남측 고성군에는 금강산의 주 사찰인 건봉사(乾鳳寺)가 있다. 즉 남과 북의 고성군은 금강산 일부이다. 그리고 여기의 주민 60%는 3대 이상 거주한 토박이들이다. 남측 고성군 화진포에는 북에서 관심이 많은 김일성 별장이 있으며, 이승만별장도 있는 현대사의 유적지가 있다.
남과 북의 고성군 일부를 남과 북이 자유롭게 공존하며 거주하는 교류와 교역의 중심지로 만들어, 상호 간에 어느 한쪽의 정치 체제를 강요하지 않으며 시범적으로 공존하는 것을 모색하고 시도할 가치가 있다. 지금 우리 시대가 냉전의 패러다임을 깬다면, 우리 시대 이후의 다음 세대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6. 여적(餘滴)
노태우(盧泰愚, 1932~2021) 전 대통령은 나름대로 냉전의 패러다임을 깨어나간 대통령이다. 북방 정책을 추진한 것이 그것을 의미한다. 강원도와 경기도 인천시는 접경지역을 가지고 있어 평화가 가장 갈급한 지역이다.
지금 보수정당의 지도자들은 북이 점진적으로 변화해 왔고, 북이 변화하고 있는 근본 원리를 이해하여야 한다. 이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보수파가 아니라 역사상에 수구꼴통이라는 비판을 받게 될 수도 있다. 지금 국민 사이에서는 냉전의 패러다임이 이미 상당히 깨져가고 있다. 접경지대의 광역지자체 정치인 중 누가 먼저 냉전의 패러다임을 깨고 중도 보수의 기치를 드는 기수로 나설 것인가? 나는 강원도에 기대를 걸고 싶지만, 들리는 말이 “지금 강원도 도지사는 ‘남북대화’는 커녕 ‘평화’란 단어조차 거부감을 갖고 있다”라고 한다.
어느 면에서는 제주도도 강원도 고성에 이어 ‘한반도평화지대’로 설정하여서 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지역이다. 1948년 제주는 남한만의 분단 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5.10선거를 거부했다. 수구파들은 4.3을 일으킨 것은 5.10선거를 거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중상(中傷)하지만, 국내외에 있는 당시의 여러 문헌을 집중적으로 검토하면, 당시 제주도에서의 남로당은 아주 미력하여 항쟁을 일으킬 능력이 없었다.
4.3이 일어난 근본 원인은 1947년 제주도 경찰의 3.1절 발포사건에 기인한다. 해방 후 민족주의자들은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지만, 외세에 의한 38선 분단으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의 많은 제주도민도 같은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조선의 통일독립과 진보적 민주국가 건립을 위해 3.1절 28주년 기념대회를 개최했다. 당시 미군정은 그 시위를 불허했지만, 몰려드는 도민들을 막아낼 수 없었고, 대회가 끝나고 곧바로 가두시위가 시작되었다. 시위대가 관덕정을 거쳐 나간 후 관덕정 부근에 있던 어린아이가 미군정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채여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기마경찰이 그대로 가려 하자 이를 도망가는 것으로 이해한 주변의 군중들이 소리를 지르고 항의를 했다. 바로 그때 관덕정 앞과 경찰서 망루 위에 있던 미군정 경찰들이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이 총격으로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것이 4.3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후 극단적인 탄압과 학살로 인하여 제주도 도민들이 목표로 한 분단 거부와 통일 정부의 수립이라는 정의는 무자비한 탄압과 학살로 실종되었다. 따라서 “4.3의 역사적 재평가와 명예 회복은 평화 통일의 추구에 있다”할 것이다. 분단된 현재 상황에서는 두 번 다시 한반도에 전쟁의 참화가 와서는 안 되겠기에 제주도는 광복 60주년이 되던 2005년에 ‘평화의 섬’임을 선포한 것이다.
이제 ‘평화의 섬’ 제주도 도민들에게 남은 과제는, 제주도가 ‘평화의 섬’으로서 민족의 평화적 교류와 교역으로 남북 공존과 통합을 유도해 나가는 것이다. 강원도 고성이 ‘한반도평화지대’로서 역할을 찾지 못한다면, 차라리 제주도가 이 신냉전 시대에 제주도 나름대로 ‘한반도평화지대’의 역할을 점차적으로 확립하는 것은 어떨까?
아니, 고성군이나 제주도가 아니더라도 파주시의 임진강 건너 민통선지역라든가 인천시 강화도라도 상관없다. 어느 지역에서라도 시범적으로 운영할 ‘한반도평화지대’는 필요하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한반도평화지대’의 목적과 방향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