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지도 살기 좋은 한국이라니!
[간서치의 둔한 서평(167)] 벨랴코프 일리야『지극히 사적인 러시아』
시간이 지날수록 무엇인가를 단정하고 확신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짐을 느낀다. 시원시원하게 ‘이것이 정답이다’, ‘이게 맞는 것이다’라고 말하기가 두려워지는 것이다. 제법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 지혜로워진 것이라거나, 마침내 중용의 도를 깨우친 것이 아니라, 그저 온갖 풍파에 시달려, 갈수록 더 회색 인간이 되어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다. 특히 나의 어설픈 확신이 누군가에겐 큰 상처가 될 수 있거나, 혹은 그보다 더 큰 고통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 두렵지 않을 수 없다. 그저 겁쟁이가 되어가고 있다.
지난 해 2월 22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 2개 공화국, 그러니까 도네츠크와 루간스크의 독립을 전격 승인했다. 그리고 이틀 후, 세계 거의 모든 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두 지역의 평화 유지를 명분으로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했다.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무력 분쟁이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제 전쟁은 1년을 넘어서려 하고 있다.
제정신을 가지고 있는 이라면 누구라도 전쟁에 찬동하거나 평화를 부정할 수 없다. 특히 동족 간에 참혹한 전쟁을 경험한 우리에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용납될 수 없는 명백한 전쟁 범죄로 받아들여진다.
침공 이후 현재까지 사망한 우크라이나 국민(민간인)이 어린이 4백여 명을 포함해 9천여 명에 달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누가 분노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당장이라도 푸틴을 전범으로 체포해서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 이유다.
하지만, 정작 러시아 국민들은 이번 전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고 있을까. 그들은 왜 전범 푸틴을 여전히 지지하고 있는지, 자국의 젊은이들이 전장에 끌려가 무수히 죽어가고 있는데, 왜 이 전쟁에 찬성하고 있는 것인지, 우리는 온전히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두 갈래 선택지가 주어진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러시아를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보고, 조금이나마 그들 행동의 배경을 이해해보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 다른 하나는 ‘러시아는 원래 저런 나라’, ‘살육을 즐기는 악마’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들을 배척하고, 나아가 가능하다면 그들을 처벌하는 데 일조하는 것이다.
한편 전쟁이 발발한 뒤 이어지는 과정에서 내가 의아해 했던 것은 이번 사태에 대한 국제사회, 특히 미국을 위시한 서방 사회의 대응이었다. 어리석은 내가 보기엔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나 반성 따위는 없이, 그저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결사 항전’으로 내몰고만 있었다. 자국의 군인은 단 한 명도 투입하지 않은 채, 이른바 최신식 무기를 제공해 우크라이나가 ‘더 오래’, ‘가능하면 더 길게’ 버틸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양측의 사상자가 늘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하루라도 빨리 양측이 협상 테이블에 앉아 전쟁을 멈출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진정 옳은 행동’이 아닐까. 둘 중 하나가 정말 ‘전멸’해야 이 사태가 끝날 것이라 판단한 것일까.
역시 미국의 행태는 참으로 미국다웠다. 지난 해 12월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해 미 의회에서 지원을 호소한 바로 그날, 미 상원은 자국이 독자적으로 전쟁범죄 혐의자들을 법정에 세울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여야의 초당적인 지지 속에 제정된 법안의 이름은 ‘전쟁범죄 희생자 정의법’. 무려 ‘정의’법이다. 이 법에 따르면 이제 미국은 전 세계에서 발생한 모든 전쟁범죄에 대해 그 행위자를 처벌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제3국을 상대로 전쟁범죄를 저지른 푸틴 등을 처벌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미 국무부는 블랙 코미디를 선보였다. ‘전쟁범죄 혐의자는 더는 미국 안에서 도피처를 찾지 못할 것’. 물론 ‘자국(미국)의 국익을 침해하는’이라는 조건이 포함되었을 테지만, 이미 전 세계가 그 정도는 알고 있기에 굳이 넣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자국의 일개 법안 하나를 명분삼아 전 세계 모든 국가의 분쟁에 개입해 처벌하겠다는 미국의 엄포 앞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작기만 하다. 그동안 어느 국가보다 많은 전쟁을 일으켰고, 당연하게도 무수히 많은 희생자를 만들었던 미국의 저런 오만방자한 행태 앞에서, 과연 ‘러시아가 절대악’이라는 명제가 온전히 성립될 수 있을까. 어리석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다.
이처럼 ‘러시아는 절대악’이라는 인식이 주로 서방 언론에 의해 세계적으로 확산됨에 따라, 어쩌면 가장 억울하고 또한 어려움에 처한 이들은, 1차 피해자인 우크라이나 국민을 제외한다면 러시아의 평범한 국민들일 것이다. ‘러시아 혐오 현상’이 광범위하게 퍼졌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는 러시아 청년들에게 은행 계좌 개설을 거부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이번 전쟁 이전에도 유럽은 정치적, 통화적 통합을 유지하기 위해 외부의 적, 즉 러시아에 대한 반감을 이용해 온 측면이 있었다. 에너지와 식량 등 의존하고 있는 부분이 적지 않았음에도 러시아를 가상의 적으로 설정해왔다. 하지만 이제 전쟁으로 인해 그 수준은 더욱 심각해졌다. 과거 반유대주의가 연상될 정도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러시아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소련의 해체와 러시아의 급속하고 폭력적인 자본주의화 과정을 직접 목격하고)을 보내고 한국에 와서, 다시 인생의 절반을 살고 결국 한국인이 된 이가, 자신이 태어나 자란, 그리고 살아왔던 러시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말하는 러시아가 ‘지극히 사적인’이유는, 그가 러시아의 모든 것을 알 수도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20여 년이 넘도록 한국에서 살아왔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한국인들의 러시아에 대한 편견, 오해를 목격해야 했던 저자는 우연치 않게 JTBC의 프로그램 ‘비정상회담’의 비공식 러시아대표가 되면서, 최대한 러시아에 대해 객관적으로 소개하고자 노력했지만, 곧 그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자신이 말하는 러시아가 러시아의 전부가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동쪽 끝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나고 자란 내가 알고 있는 러시아는, 흑해의 에메랄드 빛 바다를 보며 자란 사람과, 6개월 이상 밤이 지속되는 북쪽 동네에 사는 러시아인과, 캅카스 산맥의 조용한 산골짜기에서 가축을 키우는 목동들이 알고 있는 러시아와 다르다. 남한 면적 171배의 영토, 인구 1억 4천만 명, 140개 이상의 소수 민족이 사는 나라를 어떻게 감히 대표할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한국에서 러시아에 대해 설명하면서 양국민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의 차이를 절감했다.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너무도 다르다는 것이다. ‘단일 민족, 단일 국가, 단일 언어를 가지고 중국, 일본, 미국과 같은 강대국 틈에서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남은 대한민국의 세계관’과 ‘거대한 영토와 자원으로 유럽을 위협했던 제국, 한때 미국과 패권을 겨루던 강대국, 다민족·다문화 국가 러시아’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글쎄, 저자의 한국에 대한 평가가 온전히 타당한지는 잘 모르겠다.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왔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양국이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우리는 러시아에 대해 너무도 무지하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단순히 러시아를 ‘빨갱이의 나라’에서 이제는 지독한 권위주의 국가, 어리석게도 푸틴의 장기 독재를 순순히 받아들이며 사는 국가, 타국을 마음대로 침탈하는 무법자 국가, 우리의 ‘주적(!)’인 북한을 지원하는 ‘악의 축’국가로만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그것이 러시아의 전부일까? 아니 그것이 온전히 맞기는 한 걸까.
언론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소식은 누구의 관점에서 작성된 것일까. 오로지 러시아의 악행으로만 지금의 전쟁이 모두 온전히 설명될 수 있을까. 정말 푸틴은 미치광이 살인마이기 때문에 무고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일까. 이 어렵고도 미묘한 문제에 대해 우리 언론은 폭넓은 사고와 판단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을까. 질문은 끝이 없고, 아쉬움은 넘친다.
저자는 ‘유럽을 전쟁의 위기로 몰아넣은 원죄가 러시아에 있고, 푸틴이 전쟁 범죄자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치·경제적인 배경을 떠나서 이 책의 독자인 여러분들이 조금 더 다른 러시아를 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부탁을 드리고자 한다’고 전한다. 그 이유는 ‘러시아와 한국은 언젠가는 다시 협력하고 교류해야 할 나라’이기 때문에, ‘러시아와 한국이 우호 관계를 맺으려면 많은 걸림돌이 있겠지만, 한국인과 러시아인이 친구가 되기는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책을 통해 저자는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러시아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풀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유년시절의 경험을 회상하면서, 왜 푸틴이 그토록 오래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민주주의를 내세웠던 러시아가 그토록 쉽게 권위주의 체제로 바뀌게 되었는지,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를 돕겠다며 다가온 미국을 비롯한 서방이 러시아를 어떻게 바꾸어 버렸는지 설명한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북러 관계에 대한 그의 평가다.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소개할 수 없지만, 동의 여부를 떠나서 기존 소위 전문가들의 이야기와는 조금 다른 ‘신선한’평가였다. 러시아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우린 그저 우리 생각만 하고 판단해왔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러시아에 대해 무지했는지 절감했다. 아울러 내가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의 인식에 얼마나 물들어 있었는지도 새삼 깨달았다. 우리는 고르바초프를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냉전을 해체한 ‘위대한’인물로 평가하고 기억한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에게 고르비는? 저자는 말한다. 러시아에서는 그를 한국으로 치면 이완용 같은 인물로 평가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신선한 충격이었다. 러시아인의 입장에서, 특히 소련 해체 후 그 암울했던 혼란기를 직접 몸으로 겪었던 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는 ‘공감’도 이어졌다.
그동안 피상적으로만, 혹은 이념적, 정치적으로만 바라봤던 러시아에 대해 더 풍부하게 알 수 있도록 만들어준 책이다. 흥미로우면서도 생각할 것들도 적지 않게 던져준 책이기도 하다.
이 책과 함께 프랑스의 역사인류학자 에마뉘엘 토드의 <제3차 세계대전은 이미 시작되었다>도 일독을 권한다. 서방 주류의 시각이 아닌 ‘소수’의 입장에서 바라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이야기한다. 각국의 이해관계와 이데올로기가 난무하는 현실 속에서 진정 지금 시급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고심을 거듭하던 독일이 결국 자국의 탱크 레오파르트2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하기로 했다. 미국 역시 M1 에이브럼스 탱크를 지원한다. 우크라이나를 앞세우고, 서방과 러시아의 충돌이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러시아는 핵을 이야기하고 우크라이나는 크림반도 탈환을 이야기하지만, 독일과 미국인들은 죽지 않을 것이다.
이 와중에 우리는 국산 전차, 자주포 등을 수출한다고 휘파람을 불고 있다. 대량 살상무기를 자랑스럽게 대놓고 팔아먹고 있는데, 언론은 마치 매우 위대한 일을 하는 것처럼 용비어천가를 부른다. 우리의 기술력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우리의 살상능력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것일까. 돈에 환장한 사회에서는 충분히 목격할 수 있는 장면이다. 반도체 수출과 무기 수출은 다르다. 참 더럽게 돈 번다.
그렇다. 생각해보니, 우리가 누굴 비난하고 조롱할 자격이 있나. 부끄러움도, 양심도, 인간 존엄에 대한 소중함도 잊어버린, 이다지도 살기 좋은 한국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