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여덟째 이야기, 밀정이라는 이름 속에 숨은 욕망의 파탄(3)

[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132)

2022-10-08     정해랑

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다시 봄이 왔습니다.
자연의 봄은 시간이 되면 오지만 역사의 봄은 그렇지 않나 봅니다.
하지만 역사의 봄이 오는 데 함께 했던 사람들은 괜히 들뜨지도 않고, 쉽게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저는 꽃샘추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물론 며칠 만에 끝나는 꽃샘추위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우여곡절과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으면서도 민족은, 민중은 의연한 발걸음을 이어왔습니다.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맨 앞에 서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들 뒤꽁무니를 따라가지는 않았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신돌석씨의 삶을 새로 발견하고, 함께 알리고, 서로 배우는 이야기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와 응원과 질책을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필자

 

[삽화-백소(白笑)]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강녹진)라는 긴 이름을 가진 단체의 대표가 발언을 시작했다. 그는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김순호가 자신도 녹화공작의 피해자라면서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했다는 것부터 청중들에게 알렸다. 웃기지 않냐고 했다. 국회 행정안전위 회의에서는 ‘주사파라고 불리는 주체사상에 대한 염증과 두려움 때문에 전향했다’고 하고는 ‘자신도 신군부의 녹화공작 피해자’라고 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고 다르게 살겠다고 전향했다는 사람이 자기도 녹화사업의 피해자라고 한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물론 그는 자기 나름대로 변명을 할 것이다. 자기는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다 피해를 당한 것이고, 자기가 부정한 것은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주사파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녹화공작을 했던 사람들과 그 뒤 그와 함께 이른바 주사파 척결이라고 하면서 공안 일선에서 움직이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인가? 당시의 보안사, 안기부, 대공경찰, 공안검찰 모두 같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것일까? 녹화공작 당시의 보안사, 안기부, 공안경찰, 공안검찰은 전두환 정권을 위해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고, 그가 특채되어 일했던 대공경찰이란 곳은 전두환 정권의 연장선인 노태우 정권을 위해 불철주야 노동자 학생을 탄압한 곳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주사파, 좌익 등의 가상의 적을 만들어 놓고 날뛰었던 것이다. 과거를 부정하고 새로운 삶을 살았다면 누가 뭐라고 하든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과거가 잘못되었다든가 아니면 이후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으니 참회한다든가 그래야 한다. 둘 다 다 하겠다는 그의 심보를 두고 강녹진 대표는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었다. 모든 빵을 다 챙기려 하는 욕심꾸러기 아니냐고 했다. 간곡히 요청드린다고 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솔직해야 한다. 지지소자(知止所者), 즉 멈출 바를 아는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세상이 화평해질 것이라고 하였다.

강녹진 대표는 자기처럼 녹화공작을 당한 사람들은 사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 프락치 활동을 했다고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천여 명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보다 더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자신들은 덫에 걸린 쥐와 같았다. 군대라는 폐쇄 공간에서 수십 년 고문과 조작을 일삼아온 보안대의 손아귀에 들어가서 움치고 뛸 재주가 없었다고 했다. 누구든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걸핏하면 하는 말은, 군대에서 죽으면 그건 무조건 자살로 처리된다는 걸 잘 알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너도 그렇게 될 수 있으니 살아서 밝은 세상 보고 싶으면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였다. 온 세상을 프락치 천국으로 만드는 것이 신군부 집단의 유토피아였을 것이다. 그들이 남긴 존안자료라는 것에 따르면 녹화공작의 대상이 된 모든 사람들이 ‘대좌경의식화 업무 협조망원’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것은 젊은이들의 영혼까지 파괴하고 오염을 시켜서 인간성 파탄에 이르게 하는 극악한 범죄였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도 끝내 협조하지 않고 버틴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협조했다는 사실이 괴로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었다. 진상이 완전히 규명되기 전에 구분이 어렵지만 이들은 모두 의인이다. 하지만 누구나 그럴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박종철처럼 목숨을 걸고 저항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시키는 대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다 김순호처럼 되는 것도 아니다. 조금은 비겁했고, 어느 정도 타협도 했지만, 동료를 팔아먹고 그것을 딛고 영달의 길을 걷지는 않았다. 그는 의인의 반대편에서 살아간 특이한 사람이다. 그 속에는 자기도 미처 깨닫지 못한 욕망이 있었을 것이다. 멈추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다가 윤석열 정권의 경찰 장악에 첨병이 되어 경찰국장까지 되었다. 이제는 정말 멈추어야 한다. 한번 거짓말을 한 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기 스스로를 속이게 되었다. 이제는 자기 자신도 무엇이 거짓인지 참인지를 모를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다만 끝없는 거짓과 기만만이 있을 뿐이다.

[삽화-백소(白笑)]

이어서 강녹진 대표는 그래도 의문사를 당하신 의인들을 알아보고 그들 죽음의 진상을 규명하고자 하는 의인들이 있어서 의문사한 분들에 대한 진상규명투쟁을 일찍부터 시작했고, 그 결과 녹화공작은 일단 막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신돌석씨는 그 말을 듣고 자신이 참가했던 추모제 생각이 났다. 그때 고인과 이런 저런 인연을 갖고 있던 사람들의 울분이 대단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돌석씨는 사실 내용을 잘 몰라서 당시에는 그런 울분은 별로 없었다. 다만 노조를 탄압하는 기업주와 경찰에 대한 분노로 추모제 끝에 싸움에 참가했고, 끌려가게 되었던 것이다. 만약 주위의 동료들이 그런 죽음을 당했다고 하면 신돌석씨 역시 온몸으로 투쟁했을 것이다. 강녹진 대표의 말에 따르면 녹화공작은 중단되었지만 끝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것은 선도공작이라는 이름으로 은밀히 다시 진행되었다고 한다. 신돌석씨는 ‘녹화선도’라는 것이 하나의 명칭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보니 ‘녹화공작’을 끝내고 ‘선도공작’으로 이름을 바꾼 모양이다. 그래서 강녹진의 정식 명칭에 ‘녹화·선도공작’이라고 하는, 가운데 점을 찍은 말이 있는 모양이다. 군의문사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가 거세지고,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자 녹화공작은 공식적으로는 1984년으로 접게 되었다. 이때는 전두환 정권이 수세에 몰리기 시작하던 때이다. 대학가마다 광주학살을 규탄하는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노동현장은 집권 초기에 민주노조를 탄압하여 투쟁을 잠재우려 했지만 오산이었다. 이곳저곳에서 노동조합결성이 있었고, 쟁의행위도 일어났다. 마침내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동맹파업인 구로동맹파업이 일어났다. 이곳저곳에서 노동자정치조직들이 생겨났다. 1985년 2월에 있었던 선거에서도 당시 여당인 민정당은 사실상 참패했다. 유신헌법을 흉내낸 엉터리 제도로 1/3을 거저 차지하고, 동반 당선식 중선거구로 다수당은 유지했지만 당시 민심이 어떠했는지는 분명해졌다. 전두환정권은 이때 어울리지 않는 유화정책을 폈다. 그러자 그 유화정책을 활용해서 정권의 반민주성, 비인간성을 폭로하는 갖가지 사건들이 터져 나왔다. 그 중 하나가 녹화공작에 의한 군의문사였다. 전두환 정권으로서는 녹화공작을 일단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그런 짓을 그만두면 하루도 버티기 힘든 자들이었다. 그들이 저지른 죄는 차고 넘쳤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은폐하고 눌러야 했다. 그리하여 1985년부터 선도공작이라는 것이 시작되는데, 과천과 진양분실로 무작정 연행해 가서 심사, 순화, 활용을 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사령부 소속 장교들이 은밀히 대상자를 관리하는 방식을 취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무리한 조사와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 그 결과 1987년에 두 명의 의문사가 발생한다. 신돌석씨가 여섯 명으로 알고 있던 의문사가 여덟 명이 된 것도 그 뒤 일어난 일이 추가되어서 그런 모양이다. 신돌석씨는 무심코 같은 내용인 줄 알고 넘겼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선도공작은 교묘한 방식을 띠면서 전두환 정권 말기까지 지속되다가 1988년에 일단 막을 내렸다. 그래도 직선제로 대통령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노태우가 그런 것을 계속하기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지속되는 노동자 학생 시민들의 투쟁과 여소야대 정국은 노태우 정권이 뭔가 다르다는 식으로 하게 강제했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도 쇼였다. 선도공작을 그만두었다고 하는 불과 2년 뒤인 1990년에 여전히 보안사는 프락치 공작을 했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린 ‘윤석양 이병 사찰 폭로 기자회견’이 있었다.

외국어대에 다니다 군대에 간 윤석양 이병은 1990년 5월에 입대하였다. 얼마 뒤 보안사로 끌려간 윤이병은 그들로부터 학생 시절 운동권 경력을 빌미로 협박을 당하고는 프락치 활동을 요구받는다. 그가 끌려간 곳은 과천도 진양상가도 아닌, 악명 높은 보안사 서빙고 분실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요구대로 프락치 활동을 하게 된 윤이병은, 4개월 뒤인 1990년 9월 양심의 가책에 못이겨 보안사의 사찰 자료를 들고 탈영을 한 뒤 한국기독교회관에 가서 그것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하였다. 그가 양심에 대해서 한 말은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렸다. ‘양심의 소리는 아주 작고 고요하지만 때로는 그 소리가 너무 커서 듣기조차 거북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가 들고 나온 자료에는 당시 세상을 뒤흔들 내용들이 있었다. 김대중, 김영삼, 노무현 등 뒤에 대통령이 된 정치인들과 재야인사, 종교계 인사 등 1300여 명의 개인 정보와 사찰기록이 담겨 있었다. 이들에게 일련 번호도 매겨 있었는데, 신돌석씨도 이때 일이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여기에 들지 않은 노동자들끼리 우린 뭐 아무것도 아니네 라고 하면서 자조적인 소리들을 했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조차 순진한 생각이었다. 이들은 대중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은 유명한 사람들대로 각자의 방면에서 자신들과 싸우는 사람은 싸우는 대로 탄압을 하였다. 이 일이 있은 뒤 보안사는 이름을 기무사로 바꾸고, 겉으로는 바뀌는 듯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그 뒤 셀 수 없이 많은 조직들이 수사를 받았고, 그 구성원들이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구속되었다. 이른바 ‘범죄와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또한 김순호 같은 자가 이후 승승장구한 것을 보면 역시 개꼬리 3년 묵어도 황모는 못 된다는 말이 딱 맞다. 이른바 민주정부가 세 번씩이나 집권을 했는데, 이런 자들을 여전히 활용해서 공작정치를 했는지, 아니면 이들이 정권의 말을 듣지 않고 움직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그런 자들을 철저히 척결하거나 통제하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해방 이후 청산되지 못한 친일공안경찰의 뿌리는 계속 이어지면서 우리의 민주주의에 커다란 장애물로 있는 것이다. 이들을 확실히 뿌리뽑지 않는다면 또다시 이들은 되살아나서 민주주의를 방해하는 일을 할 것임에 틀림없다. 지금 윤석열 정권에서 그것이 시작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에 대해서는 과거 집권을 했던 민주당만이 아니라 시민사회단체나 진보진영도 책임을 함께 통감해야 한다고 신돌석씨는 생각했다.

[삽화-백소(白笑)]

강녹진 대표의 말을 들으니 얼마 전 원로신부가 기자회견에서 했던 말이 생각났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전제를 한 뒤 김순호 사건은 잘 된 일이라고 하였다. 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때 깜짝 놀랐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가 하고 귀를 기울였다. 이 일이 생겨서 우리가 그가 밀정인 것을 알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임명한 이상민, 윤석열의 저의도 알게 되었다. 이런 것을 종교에서는 은총의 사건이라고 한다. 그 신부님도 역시 김순호가 멈출 줄 모르는 욕망을 갖고 있었고, 그것이 화가 되어 자신을 해치게 되는 불쌍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사실 그가 경찰국장 임명을 고사하기만 했어도 이처럼 전국민의 관심을 받는 밀정으로 등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멈추게 해야 한다. 성서를 보면 예수가 당시에 가장 비판을 했던 사람들이 성직자와 율법학자들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법조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법 기술을 가지고 세상을 농락하는 자들이 지금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듣고 보니 맞는 것 같았다. 언제나 멈출 줄 모르는 욕망이 파멸을 불러온다. 그러기 전에 국민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하지만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이어서 남녀 대학생들의 성명서 낭독이 있었다. 김순호가 나온 대학교 재학생들이라고 하였다. 당신이 우리 선배라는 것이 부끄럽다는 말로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어쩌면 그렇게 영화 ‘암살’에 나오는 염석진을 닮았냐고 하였다. 신돌석씨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아니 상당히 많은 사람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염석진은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총독 암살작전까지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변절을 하게 되고, 밀정으로 살아가게 된다. 김순호 역시 학생운동을 처음 하던 시절에 매우 열심히 했다고 한다. 그래서 1년 선배인 최동 열사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었고, 많은 후배들이 따랐다. 그러던 그가 강제징집을 당한 뒤 녹화공작을 통해 사람이 변하기 시작한다. 그에게 닥친 시련이었다. 거기서 아무런 흠도 없이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동료들을 고통받게 하면서까지 협조할 까닭은 없었다. 본인은 부인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증언을 보면 그는 그때부터 이미 공안경찰에 협조하고 있었다. 염석진 역시 그렇다. 종로경찰서에서 홀로 탈출한 것으로 나온다.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이고, 이미 그때부터 일제 경찰과 뭔가 주고받은 게 있었으리라. 김순호는 군대를 제대한 뒤 복학하지 않고, 곧바로 최동 열사를 따라서 부천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한다. 이때도 김순호는 매우 열심히 했다고 한다. 그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노동운동을 열심히 해보겠다는 마음에서 그랬는지, 아니면 밀정으로 공을 세우려는 야심에서 그런 것인지는 본인 말고는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이런 점 역시 염석진이 끊임없이 독립운동 언저리에 있다가 임시정부까지 기어들어간 것과도 흡사하다. 그리고 그 뒤 염석진은 일제 경찰이 되고, 친일파가 청산되지 못한 대한민국에서 경찰이 된다. 김순호도 조직에 대해 밀고를 하고는 공안경찰을 찾아가서 자신도 공안경찰이 된다. 이 또한 민주화가 되었다고 해도 가해자로 고문, 조작을 일삼던 공안경찰이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데서 오는 결과였다. 성명서를 읽는 학생들은 밀정이라는 이름 속에 숨은 욕망은 파탄날 것이라고 하였다. 아니 우리가 파탄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 자신들의 학교에서는 ‘암살’ 다시 보기 운동이 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난다고 하였다. 밀정 처단에는 시한이 없다고 하였다. 영화에서처럼 총으로 쏴서 죽이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기어이 최동 열사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모든 사실을 고백하고 자신의 죄를 사죄하며 용서를 빌게 만들게 하겠다고 하였다.

학생들의 성명서를 들으니 신돌석씨는 가슴이 뭉클하였다. 그래도 지금까지 우리가 헛살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돌석씨 또래나 그 위의 선배들 중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맛이 가서 세상이 이 모양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신돌석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각 세대는 자신들의 조건과 역량에 맞게 살아가고 있다. 어느 세대가 일방적으로 옳고 그를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좀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싸워가고 있는 사람들과 그것을 막고 되돌리려는 사람들이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그 어느 쪽도 아니다. 그 어느 쪽도 아닌 사람들을 좀더 나은 세상을 위해 살아가는 길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 대학생들이 이전에 비해 수적으로 적어도 옳은 세상을 위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은 이런 성명서를 읽는 학생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어서 마지막 순서로 대학생들의 노래와 율동이 있었다. 진보를 지향하는 대학생 단체 소속이라고 하였다. 언제나 그렇듯 집회에서 이런 모습을 보면 힘이 난다. 사람들은 노래 가락에 맞춰서 박수를 치며 호응하였다. 이제 시간은 꽤 흘러서 한밤중이 되었다. 신돌석씨는 함께 온 사람들과 용산역 부근에서 뒤풀이를 하고 막차를 놓치지 말아야 할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