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과 단군조선을 언급한 고서 및 고문헌
[연재]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국혼의 재발견’ (29)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안호상(安浩相, 1902~1999) 박사는 원래 해방공간에서 극우 세력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안 박사는 자신이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 원어를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읽었다고 자신을 소개하며 공산주의를 반대하기도 하였는데, 그는 1948년 이승만 정부에서 초대(初代) 문교부 장관이 되었고, 일민주의(一民主義)를 주창하기도 하였다. 그는 독립운동가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1885~1943)의 뜻에 따라 1919년경에 대종교인(大倧敎人)이 되기도 하였다.
일제 치하에서 창씨개명을 거부한 안호상 박사는 1970년대 중반에 ‘국사찾기협의회’를 결성하기 위하여 전국을 돌며 자신의 민족사학에 대한 강연회나 세미나를 부지런히도 하였다. 지금 나는 1977년경에 그의 강연회에 따라다니며 슬라이드 필름을 돌리던 일이 눈에 선하다.
당시의 민족사관을 주장하는 몇 명 안 되는 민족사학자들에게 갈급한 일은 단군과 고조선을 국정교과서에 싣는 일이었다. 그 일의 최일선에 나선 인물이 초대 문교부 장관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안호상 박사였다. 해방공간에서 극우였던 안호상 박사의 이러한 열정은 결국에는 1995년에 단군릉을 찾아 밀입북하여 북한에서 비밀스러운 여러 일화를 남기기까지 한다.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
1945년 해방할 때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당시의 고서수집가들에게는 단군과 단군조선을 언급하는 문헌이라면 그 문헌이 쓰여진 시대와 내용을 따질 겨를도 없이 거의 본능적으로 수집하는 기풍이 있었다. 그만큼 단군과 단군조선의 문헌을 찾는 일은 고서수집가들에게도 절실하고 다급한 일이었다. 이런 민족주의적 풍토에서 1982년 5월 21일 자로 ‘한국고서동우회(회장 안춘근)’가 출범하였다.
그런데 1984년은 우리 현대문학사에서 중요한 일이 발생한다. 소설가 김정빈이 당시 대종교(大倧敎)의 총전교였던 권태훈(權泰勳, 1900~1994)을 소재로 하여 『단(丹)』이라는 실명 소설을 ‘정신세계사’에서 출판하여 1년여 동안 우리 출판사 상 최초로 100만 권이 넘어선 슈퍼 베스트셀러가 나온 것이다.
‘정신세계사’에서는 그러한 복고적 분위기 위에서 1986년 5월에 임승국이 『환단고기』의 한글 번역본을 내어놓으면서 『환단고기』의 존재가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애서가들은 어처구니없이 웃고 “토론할 가치조차 없다”고 여겨 아예 관심도 두지 않았다.
물론 당시에 나는 월간 『전통문화』 1986년 11월호 pp.136~143에 「고서적 위조의 실상」을 기고하면서 “⑭이론에 맞추어 저작한다”라고 막연히나마 고서적 위조를 지적은 하였다. 즉 당시 서명(書名)을 언급함이 없이 지적한 ⑭번에 해당하는 그러한 예가 바로 『환단고기』를 지적하는 예이다. 당시에 피동적으로 언급한 이유는 이제 30세를 갓 넘긴 내가 임승국이나 노회한 박창암과 대척점(對蹠點)에 서는 것은 매우 골치 아픈 일로 여겼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당시 우리 애서운동가들이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이 지금과 같은 황당사관이 민족사관으로 위장하도록 번지게 일을 키우고야 말았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고서수집가들이 단군과 단군조선을 언급하는 문헌을 본능적으로 수집하는 기풍이 거의 없어졌다. 황당한 『환단고기』가 나옴으로써 더는 단군과 단군조선의 문헌이 나와 봐야 그 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악화가 양화를 구축했다.
(27) 단군과 단군조선을 언급하는 임란 이후의 고서 및 고문헌
단군과 단군조선을 부정하는 것을 애서가 대부분은 못마땅해 한다. 대체적으로 광적(狂的, mania)인 수집가로서의 애서가(愛書家)가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의 수준에 이르면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직감적으로 감지하는 수준에 이른다.
지난 제17회 연대 “『제왕운기』와 히브리 기원(紀元)”에서 우리나라의 단군 사실(史實)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고조선」조와 『제왕운기(帝王韻紀)』의 「본기」와 약간의 차이점이 있음을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단군 사실을 언급하는 고문헌들은 이 두 건의 고문헌을 근본으로 하여 요약되거나 안(按)이 붙은 것이지만,
이번 29회 연재에서는 제3회부터 제28회까지의 연재에서 중점적으로 소개한 자료는 제외하고, 단군과 고조선을 언급하고 있는 몇 종의 고서 및 고문헌을 몇 종 소개하고자 한다.
가. 임란 이후 단군과 단군조선을 언급하는 고서 및 고문헌
1. 오운의 『동사찬요』
『동사찬요(東史簒要)』 목판본 8권은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임란 의병장인 오운(吳澐, 1540~1617)의 편저이다. 대부분이 「열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열전」 부분만을 본다면 이 책은 조선중기 이후 활발하게 편찬되기 시작하였던 인물과 관련한 전문 저술의 선구적인 책이다.
오운은 1606년 영주에서 『동사찬요』 8권본(초판본)을 편찬하여 목판본으로 발행하였다. 이후 이를 수정 증보하여 11권(재판본)으로 만들었는데 8권본의 판목(版木)을 그대로 이용하면서 새로 증보한 부분은 판목을 추가로 만들어 간행하였다. 1614년에는 다시 「지리지」 1책을 보충하여 12권본(삼판본)으로 간행하였다. 그 뒤 후손이 1908년 영주 삼우정에서 16권본을 간행하였다.
그런데 필자가 수장하고 있는 이 책은 표지에 『동사(東史)』 4책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책1의 서두에 있는 『동사찬요 목록(目錄)』은 권지8 「별록(別錄)」까지 있고, 실제로는 권지2 상(上)까지 4책만이 남아있다. 낙질의 4책을 완질로 위장하기 위하여 책 표지의 표제 밑에 원형이정(元亨利貞)이란 권차(卷次)를 적어 넣었다. 목록에서 권지2 하(下)부분부터 그 이하를 제거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목록에서 이를 제거하면 이 책은 낙질(落帙)의 수준보다 못한 파본(破本)이 되기 때문이다.
여러 면에서 보았을 때 내가 소장하고 있는 『동사찬요(東史簒要)』 영본 4책은 1606년 초판본은 아니다. 1609년에서 1614년 사이에 간행된 재판본으로 보이는 11권본『동사찬요』의 낙질본이다. 이 책이 낙질본인 줄 알면서도 고서경매에서 매입한 이유가 있다. 재판본의 권1상(上) 첫 면에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단군을 언급하고는 있으나, 조선시대 주자학파들이 사대주의 존화사관으로 왜곡한 부분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문제는 이 책을 편찬하는데 참고한 「찬집제서(纂輯諸書)」의 목록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도 없으니, 우스운 일이다.
2. 조정의 『동사보유』
『동사보유(東史補遺)』는 조선중기의 문신 조정(趙挺, 1551~1629)이 단군조선에서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술한 역사서이다. 1646년에 아들 유도(有道)가 목판본 4권2책으로 간행하였다.
필자는 이 책의 초기 저술 상태를 볼 수 있는 필사본 3권1책본을 소장하고 있다. 내용은 단군조선에서부터 고려 말까지의 전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하였다. 권1은 단군조선에서부터 고구려의 멸망까지의 삼국사를 다루고 있고, 권2는 신라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에서부터 신라의 멸망까지를 다루며, 권2 삼국시대사 끝에 중요 인물과 사건, 그리고 명신(名臣)을 부기하고 있다. 권3은 고려시대를 다루고 있다. 필사본에서는 권3의 끝에 명신전을 부기하지 않았다.
즉, 이 필사본 『동사보유』는 조정의 저술이기는 하나, 그 목판본을 베낀 책이라기보다는 조정이 미완성인 채로 남겨 높은 『동사보유』를 정서한 것의 사본으로 보인다. 즉 미완의 상태로 남은 조정이 말년(1628~9년경)에 편찬한 『동사보유』 원고를 정서(淨書)하며 재편(再編)하고 판하서(板下書)를 쓰는 과정을 거쳐 4권2책의 목판본으로 인출하였는데, 이 책은 그 초기의 원고 정서본을 다시 필사한 것으로 보인다.
『동사보유』의 특색은 첫째, 고기(古記)에 실린 신화와 설화들을 많이 수록한 것을 들 수 있다. 단군신화 해모수신화 고주몽신화 김수로왕신화 김알지설화 등이 모두 실려 있다. 또 비단 고대사에 관련되는 개국신화만이 아니라, 고려 태조에 얽힌 설화도 ‘고려태조세계(高麗太祖世系)’라는 항목을 따로 설정해 소개하고 있다. 삼국시대사 끝에 박제상(朴堤上) 도화녀(桃花女) 천사옥대(天賜玉帶) 장춘랑(長春郎) 문무왕(文武王) 차득공(車得公) 수로부인(水路夫人) 등을 부기한 것도 이 같은 설화와 전설을 존중하는 의식과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기피했던 신화와 전설을 중시한 것도 이 책의 커다란 특색이다.
또 삼한의 위치에 관한 권근(權近)의 설을 부인하고 『동국여지승람』을 따라 최치원(崔致遠)의 ‘삼한설’을 좇고 있다. 북부여와 동부여를 독립 항목으로 내세워 삼국의 선행 국가로 설정한 것도 특이하다. 발해는 따로 독립시키지는 않았으나, 신라 효소왕조에 대조영(大祚榮)의 졸기(卒記)를 적으면서 발해 역사를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삼국과 고려 시대의 역사는 군주의 치적을 중심으로 하여 정치사에 치중하였으며, 역사적 사건에 대한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한 포폄(褒貶)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끝에 붙인 명신은 대부분 애국무장(愛國武將)이나 충신 의사 열부 그리고 명유(名儒)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즉 이 책은 주자의 강목법(綱目法)을 따라 엄격한 포폄(褒貶)을 위주로 하던 17세기 초기 사서(史書) 편찬의 일반적 분위기와도 매우 다르다. 특히 1606년(선조 39)에 완성되고 1609년(광해군 1)·1614년에 개찬되었던 오운(吳澐)의 『동사찬요(東史纂要)』와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대비되는 저술이다.
즉, 조정의 역사의식은 규범적이고 명분론적이기보다도 낭만적이고 탈규범적이라 할 수 있으며, 학계 일각에서는 이것은 “대북파 정권의 반주자학적(反朱子學的)인 정책 방향과도 관련된다”고 본다.
3. 작자미상의 『동국사기』
작자미상의 『동국사기(東國史記)』 필사본 1책은 단군조선으로부터 근대조선 숙종 즉위년(1674)까지의 역사를 쓰고 있다. 표제에는 “『동국사기』 계사십일월상한(癸巳十一月上澣)”이라 쓰고 있는데, 여기에서의 계사년은 숙종 즉위 후 첫 계사년인 1713년 이후로 보인다.
저지(楮紙)의 지질(紙質)이나 필체에서 조선조 말기의 특성이 보이므로 1893년경에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시기에 편찬된 『동국사기』를 베낀 것으로 보인다. 『동국사기』의 원저자가 누구인지 이 책에서는 밝히지 않고 있으나,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조선후기의 사대주의 역사관의 일면을 잘 알 수가 있다.
나. 단군과 단군조선을 언급하는 대한제국 고서 및 고문헌
4. 현채의 『동국사략)』
『동국사략(東國史略)』 4권4책은 이준(李儁, 1859~1907) 열사가 조직한 ‘국민교육회’에 가입해 계몽운동을 벌였던 백당(白堂) 현채(玄采, 1886~1925)가 편술하여 1906년 6월 10일자로 보성관에서 초판본을 발행하였다. 초판본은 선장본(線裝本)인데 종이는 두터운 중질지(中質紙)에 양면 인쇄를 하고 있다.
1907년 10월 30일에는 판(版)을 달리하여 일한도서인쇄주식회사에서 인쇄한 재판본 4권2책을 자신의 사가판(私家版) 발행하였고, 다시 1908년 7월 15일에는 일한인쇄주식회사에서 인쇄한 삼판본 4권2책을 역시 자신의 사가판으로 발행하였다. 그런데 이 책의 초판본은 『동국사략』으로 제호되어 있는데, 재판본부터는 『중등교과 동국사략』으로 제호를 변경하였다. 제호를 바꾼 이유는 중등학교의 교과서로서 사용할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1909년 5월 5일자로 발간이 금지되어 금서로 묶였다. 금서로 묶인 후에 1924년에 삭제와 증보를 거쳐, 현채 원저(原著)의 『동국제강(東國提綱)』으로 발간하였고, 그 이듬해인 1925년에 현채는 사망한다. 현채 사후인 1928년에는 『반만년 조선역사』로 제목을 바꾸어 발간되었다.
필자에게는 초판본 4권4책 가운데서 권2 영본(零本)이 있고, 재판본과 삼판본이 모두 있는데, 삼판본은 두 질(帙)을 복본으로 소장하고 있다. 필자 소장본 재판본은 1907년 11월 24일자로 인쇄하여 30일자로 발행하여 특별 제본(製本)한 하드카바 양장본 4권1책본이고, 삼판본은 1908년 7월 10일에 인쇄하여 15일자로 발행한 4권2책본을 복본(複本)으로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재판본 권4, 99쪽 첫 행에서 이준(李儁) 열사의 자결(1907년 7월 14일)을 언급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의 삼판본 복본을 대비하여보면 이 삼판은 두 종(種)이 있다. 같은 인쇄본인데 권4가 111면까지 있는 책과 70면까지만 있는 두 종의 책을 소장하고 있는데, 111면 본은 「을사신조약」과 「해아사건급선위」, 「융희시사」 「결론」 등이 있으나, 70면 본은 그 내용이 빠져 있다. 같은 조판본인데, 70면 본은 권4의 목차에서도 그 순서가 인쇄되어 있지 않았다.
이를 보면 현채는 이 책 삼판본을 친일파가 운영하는 학교에는 70면 본을, 민족주의자가 운영하는 학교에는 111면 본을 공급한 것이 나일까 추정된다. 혹시 1909년 5월 5일자로 발간이 금지된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닐지?
현채의 『동국사략』은 전통적인 편년체를 탈피하여 근대적인 역사 서술방법에 의하여 저술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역사 개설서이다. 이 책은 일본인 하야시 다이쓰케(林泰輔)가 1892년 다섯 권으로 구성한 『조선사(朝鮮史)』를 참조하여 저술한 책이다. 하야시는 단군신화를 부정하였으나 현채는 「단군조선」을 책의 서두에 서술하였다. 또한, 하야시는 위만조선 및 한사군 문제를 중요시해 시대구분의 계기로 삼았으나, 현채는 이에 관한 내용을 삭제하고 마한 변한 진한이 고구려 백제 신라로 이어진 삼국통합을 이뤘다는 삼한정통설(三韓正統說)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하야시는 임진왜란에서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일본을 주로 다루었으나, 현채는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활약한 우리나라의 의병 활동을 상세히 다루었다. 특히, 역사상 위인 및 명장과 외적과의 전쟁 등을 비중있게 다뤄 외세의 침략에 대한 자주 독립심을 고취하고 있다.
그러나 권1의 25~6면에서 대가야가 임나(任那)라고 언급하고 있는 부분도 있어 비판받고 있으나, 이는 대가야가 일본에 진출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참고로 대가야를 비롯한 여러 가야국이 일본에 지방 소국(小國)의 형태로 진출해 있었던 것은, 본 연재의 제27회 연재본 「가야국의 실체와 『가락국기』」를 참조해 보기를 바란다.)
『동국사략』은 태고사 상고사 중고사 근세사로 시대를 구분해, 태고사(권1)는 단군에서 삼한까지를, 상고사는 삼국 분립에서 후삼국과 발해의 멸망까지를, 중고사(권2)는 고려의 건국과 멸망을, 근세사(권3~4)는 조선의 건국에서 대한제국의 광무(光武)와 융희(隆熙) 연간까지를 다루고 있다. 또한 이 책은 정치사뿐만 아니라 제도, 문학, 기예, 산업, 풍속 등의 장을 설정해 일반 대중의 생활사도 자세히 서술하였다.
반일(反日) 인물 현채가 40세에 요절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다. 일제 강점기의 단군과 단군조선을 언급하는 고서
5. 김광의 『대동사강』
『대동사강(大東史綱)』 2권2책은 1928년에 송계(松溪) 김광(金洸)이 탈고하고,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 1868~1944)이 교정히여 1929년 대동사강사에서 간행한 우리나라의 역사서이다. 이강(李堈) 민경호(閔京鎬) 이명상(李明翔)의 서문과 목록, 「동국역대제왕전수통도(東國歷代帝王傳授統圖)」가 있다. 그런데 이 책의 각 권 첫 면에는 김광(金洸) 편차(編次)라고 되어있으나, 판권 면에는 저작자를 평안남도 중화군 중화면 진율리 440의 “김용학(金龍學)”으로 밝히고 있고, 저작 겸 발행자를 경성부 낙원동 210번지의 ‘정석채(鄭錫采)’로 밝히고 있다. 김광에 대한 인적사항이 확인이 안 되므로 김광과 김용학은 동일 인물로 여겨진다.
『대동사강』의 권1부터 권6까지의 상권은 단군 개국 이래 고려 원종까지를, 권7부터 권12까지의 하권은 고려 충렬왕 원년(1275) 이후 융희 4년(1910) 한일합방까지를 다루고 있다. 서술은 편년 순서에 따라 정리하였으며, 본문은 한문 원문에 한글 현토를 달았다. 연대표기는 간지(干支)를 앞세우고 다시 왕의 재위 연대를 적는 방식을 취하였으며, 삼국의 연기(年紀)는 고구려, 신라, 백제의 순으로 적고 있다. 이는 제1기 민족사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개인적인 의견은 쌍행의 주석이나 ‘안’설로 덧붙이고 있다.
『대동사강』의 권1은 「단씨조선기(檀氏朝鮮紀)」 「기씨조선기(箕氏朝鮮紀)」 「한기(韓紀)」 「마한급고구려신라백제기(馬韓及高句麗新羅百濟紀)」, 권2는 「고구려신라백제기(高句麗新羅百濟紀)」, 권3은 「고구려발해신라고려기(高句麗渤海新羅高麗紀)」, 권4∼8은 「고려기(高麗紀)」, 권9∼12는 「조선기(朝鮮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편년체 서술방식, 도덕론적인 역사인식 등 유교적 역사인식을 근간으로 하면서도 단군조선이 한 기씨조선 부여 예 맥 옥저 숙신 등 남북방(南北方)의 여러 국가들로 이어지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고, 발해 이후 금 후금 청으로 이어지는 계열을 「동국역대제왕전수통도」에서 수용하고 있다. 상고 시기의 역사 지리를 만주 일원에 비정하고 있는 것에서 제1기의 민족사관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문제는 우리나라의 모든 기록을 취합한다는 의욕이 앞서 『규원사화』와 『기자유지』의 계대를 무분별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그러한 무분별한 수용을 비판할 수만은 없다. 김광의 이러한 노력은 1939년 전남 나주군 봉황면 철천리 215에 주소를 둔 서계수(徐繼洙)가 발행한 『세가보(世家譜)』로 이어진다.
6. 『문화유씨감찰공파가승보』
『문화유씨감찰공파가승보(文化柳氏監察公派家乘譜)』는 전남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 201번지의 류인구(柳寅龜, 1895~?)가 편집하여 1936년 3월 30일자로 발행한 석판본(石版本) 가승보 2권1책이다.
이 책의 권두(卷頭)의 권1 앞에 「원파록(源派錄)」이 있는데, 중국과 우리나라의 연대(年代)에 단군을 부수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계보류 도서에 이런 식으로 등장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지만, 이런 사실도 있음을 여기에 기록으로 남긴다.
7. 창씨개명에 대항하여 『청금세보(靑襟世譜)』를 발행
1939년에 일본제국은 모든 조선인에게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라고 창씨개명을 명령하였다. 당시 이름을 바꿀 수 있는 기간은 1940년 2월 11일부터 6개월간이었고, 이 기간에 신고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불이익을 주었다. 각급 학교에 들어가기 어려웠으며, 청년들은 징병이나 징용 대상자가 되었다. 일반인들은 식량 배급에서 차별을 받았다. 조상이 물려준 성과 이름을 바꿀 수 없다며 끝까지 이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당시 80% 정도의 조선인들이 일제의 강요에 못 이겨 일본식으로 성과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서 1941년에 조선의 성씨를 지킨다는 의도에서 불익을 감수하고 1941년 11월 15일자로 전남 광주에서 『청금세보(靑襟世譜)』 2권1책을 서울에 사는 정인찬(鄭寅燦)을 저작 겸 발행자로 하여 석판본으로 발행하였다. 이 책의 권1에서도 김광의 『대동사강(大東史綱)』 2권2책이나 서계수(徐繼洙)의 『세가보』 8권1책본을 참고한 듯한 단군조선에서부터 조선 영친왕까지의 왕대(王代)를 수록하고 있으며, 권2에서는 광주와 무안 지역에 거주하는 일부 주민들의 가승(家乘)을 수록하고 있다.
일제의 강점기에 모 성씨의 문중에서는 창씨개명을 앞장서서 하고, 창씨개명을 한 족보 마저 발행한 사실이 있음을 미루어 볼 때, 창씨개명에 대항하여 『청금세보』를 발행한 이들은 상당히 민족적인 정체성을 보존하려 애쓴 항일의 의지가 넘치는 분들이다.
라. 조선후기의 역대도
지난 제28회 연재에서 연대표를 소개하면서 역대도는 포함하지 않았다. 이러한 1장짜리 괘도(掛圖) 형식의 연혁도(沿革圖) 또는 역대도(歷代圖)는 서당(書堂)이나 사가(私家)에서 주로 교육용으로 만든 것이다.
1. 『중국고금역대연혁지도』
『중국고금역대연혁지도(中國古今歷代沿革之圖)』는 제작연도가 고갑자(古甲子)로 쓰여 있는 필사본이다. 즉 ‘강어대연헌(疆圉大淵獻)’이 그것으로써 이는 정해(丁亥)년을 의미한다. 이 연혁도에 기록된 마지막 임금이 정종(正宗, 즉 正祖)인 것으로 보아 순조 때 정해년, 즉 1827년에 만든 것으로 판단된다.
크기가 100×132cm로서 다른 연혁도나 역대도 보다도 크고, 상부와 하부에 나무로 축심(軸心)을 넣은 것으로 보아 서당용으로 만든 것이다. 주로 중국의 고금 역대 왕조를 다루고 있으며, 조선은 일부에서 부기(附記)하고 있다. 조선후기의 사대사관에 의거하여 만들었지만, 단군조선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2. 『중국동국고금역대도』
『중국동국고금역대도(中國東國古今歷代圖)』는 헌종까지의 기록이 있고, “당저만세(當宁萬歲)”라고 한 것이 있고 “을묘추완산춘헌중간(乙卯秋完山春軒重刊)”이라고 간기가 있다. 이를 보면 이 목판본의 을묘(乙卯)는 철종 을묘(1855)년이다. 목판본은 크기가 53×83cm이다. 이 역대도는 『중국고금역대연혁지도』와는 달리 『중국동국고금역대도』라고 문헌의 이름을 정한만치 중국의 역사보다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많이 다루고 있다.
같은 목판본이 전주역사박물관에도 소장되어 있고,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는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다.
마. 맺음말
이상에서 임란 이후에 단군 및 단군조선을 언급하고 있는 고서 및 고문헌을 살펴보았다. 물론 지난 연재에서 이미 소개한 자료들은 이번 연재에서는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포함하지 않았다.
이미 소개한 자료와 이번 회에 소개한 자료들을 통하여 고려로부터 일제 강점기까지의 우리 역사서의 흐름을 독자분들이 보면서 생각해 보면, 우리 민족사관의 출현과 발전, 그리고 지향점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나는 민족사관의 생명력이 길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민족사관의 생명력이 길어지려면 식민지사관 못지않게 황당사관도 극복하여야 한다.
한국의 제2기 민족사학과 북한의 주체사학을 대비하여보면. 북한의 주체사학에는 남측에서 민족사학으로 위장한 황당사학이 아예 침투하지 못하였다. 북한은 주체사학의 중심점에는 제1기의 민족사학자들과 이를 보호 육성한 김일성과 김정일의 주체적 역사관이 있기 때문이다. 북에서는 주체적 역사관을 벗어난 황당한 이론의 전개는 허용되지 않는다. 역사적 진실과 평가 관점은 하나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남북의 역사학은 언젠가는 만날 것이다. 그 연결의 접점은 식민지사관도 아니고 황당사관도 아닌 제1기 민족사학자들과 그들의 논리를 확대 재생산한 수준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1970년대 중반에 리지린의 『고조선연구』가 남측의 민족사학계에 처음 알려졌을 때 그 충격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앞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 회복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남북이 각지의 역사 유적을 상호 방문하고 토론하며 상호간의 논리를 민족사관의 눈높이에서 점검하는 것이다. 그날을 함께 열어나가자.
독자들의 반응을 보면 『국혼의 재발견』 연재가 회를 거듭하면서 호응하는 독자와 비판하는 독자로 반응이 엇갈려 나오고 있다. 글에 따라서는 역작이라는 평가를 한 사람도 있고, 공격의 칼날을 숨기며 필자에 대하여 탐색을 시도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서지학을 인식하는 애서가일수록 호평을 하고 있으며, 인터넷 검색을 해 보면 퍼 나르기를 하는 분들도 상당수 있다.
여기에서 하나 변명을 하고자 한다. 나의 이 연재는 매주 서둘러 쓰고 있다. 프린터로 출력하여 탈고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원고 파일을 보내므로, 문장 연결이 부드럽지 못하고 오타와 빼 먹은 부분도 있는 것에 대한 양해를 구한다. 만약 언젠가 책을 낸다면 이 원고를 모두 출력하여 보정하고 주(註)를 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