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연표와 홍만종의『동국역대총목』
[연재]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국혼의 재발견’ (28)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이번 연재가 제28회 분이다. 고문헌을 위주로 소개한 역사 주제로는 26번째의 글이다. 이제 본 연재의 종착점을 예고하고자 한다. 본 연재는 제32회에 역사 주제로는 30번째 글로서 탐색을 끝내려 한다. 제33회에서는 전체를 요약 정리할 것이다.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
나는 ‘역대총목’이나 ‘연표’를 중요시하여 관련 자료를 10여 졈 수집하여 소장하고 있다. 그 가운데 우리 민족의 역사와 관련된 ‘역대총목’이나 ‘연표’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런데 본 연재의 제13회 연재 「‘기자(箕子)’ 진위 논란과 『고금역대보감』」에서 홍만종의 『증보역대총목(增補歷代總目)』과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總目)』을 간략히 소개한 바 있다.
(26) 유학자들이 편찬한 여러 역사연표, 그리고 『동국역대총목』
연표(年表), 또는 연대표(年代表)는 역사상의 일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표(表)이다. 연표는 공적인 것이다. 연표 성격의 사적인 연도순 기록은 연보(年譜)라 한다.
가. ‘연표’란 무엇인가?
연표, 또는 연대표는 어느 한 나라 또는 전 세계의 역사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적은 것에서부터 역사적 사건을 주제별로 나누어 연대순으로 적은 것 등등 그 종류가 다양하다.
예를 들어 국가별 연표는 한국사연표, 중국사연표, 일본사연표 등등으로 들 수 있고, 세계사를 다룬 연표로는 세계사연표를 들 수 있다. 그 밖에 주제별 연표로는 문학사연표, 미술사연표 철학사연표, 음악사연표 등등 주제나 분야에 따라 다양한 부문사 연표를 만들 수도 있다.
나. 연표의 역사
연표의 시작은 왕들의 계대표(系代表)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대체적으로 왕들의 계대표를 먼저 만들어 놓고, 그 재위기간을 계산 및 확정하여 연대표를 만든다. 연대표를 만든 후에 재위기간에 해당하는 연도의 사적을 사료나 사실에 의거하여 채워 넣는다. 따라서 사서(史書)에서 연표를 본다는 것은 사서 편성의 기본 틀을 보는 것이 된다.
동북아에서 연표의 시작은 중국 전한(前漢)의 사마천(司馬遷)이 상고시대의 황제(黃帝)로부터 한나라 무제 태초 연간(BC 104~101)까지의 중국과 그 주변 민족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서술한 『사기(史記)』의 권13~권22까지 10권이 연표이다.
사마천이 기전체(紀傳體)의 효시인 『사기』를 지은 이후, 중국이나 한국 등에서는 정사(正史)를 편찬할 때 『사기』의 체제를 그대로 모방해 연표를 별도로 수록하여 편찬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제19~21에 수록한 연표 3권,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제1권 머리에 수록한 「왕력」 15장, 『고려사(高麗史)』 권86~87에 연표 2권이 들어 있는 것 등이 실례이다.
이러한 역사서 편찬시 만든 연표 이외에 후대에 여러 사서를 취합하여 정리하는 차원에서 역사연표를 만들기도 하며, 또한 주제별로 나누어 부문사 연표를 만들기도 한다. 그러한 조선시대에 만든 역사연표로 가장 중요한 것이 홍만종(洪萬宗, 1643~1725)이 편찬한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總目)』이다.
물론 홍만종 이전에도 1594년(선조 27)부터 1879년(고종 16)에 이르기까지 역대 각 영(營)의 대장(大將)에 대해 연대순으로 기록한 『등단연표(登壇年表)』가 있었고, 사실상 각 시대의 방목을 모아서 집성한 『국조방목』도 일종의 부문별 연표적인 성격이 있기는 하나, 그러한 것들은 역사연표라 하기에는 부족하다.
근대에는 1915년에 어윤적(魚允迪)이 편찬한 우리나라의 역사 연표인 『동사연표(東史年表)』가 대표적인 연표이다.
그런데, 조선의 유학자들은 우리나라의 역사보다는 중국의 역사를 중요시하고 거기에서 교훈을 찾으려는 존화사대주의에 매몰되어 있었다. 홍만종은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總目)』을 편찬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사를 대상으로 한 『증보역대총목(增補歷代總目)』을 연이어 편찬해야 했다. 조선에서 조선만의 독자적 연표 편찬은 그만큼 힘든 일이었다.
다. 정극후의 『제왕역년통고』
『제왕역년통고(帝王歷年通攷)』는 정극후(鄭克後, 1577~1658)가 1644년에 연표형식으로 편찬해 목판본으로 간행한 책이다. 이 책의 끝에 ‘갑신추후학오천정극후지(甲申秋後學烏川鄭克後識)’라고 표기하고 있다. 책은 모두 12장으로 되어 있는데. 장1부터 장6까지는 각 면을 상‧하단으로 나누어 상단에는 중국 역대 왕조의 사실(史實)을, 하단에는 우리나라의 사실을 싣고 있다.
중국은 고대 제요(帝堯)로부터 명(明)나라 의종 때(1644)까지, 한국은 단군(檀君)으로부터 조선 인조 때까지 기록하였다. 장7부터는 「동방국도고(東方國都考)」라 하여 우리나라 각 왕조의 도읍지와 그 흥망분합(興亡分合)의 개략을 적어 놓았다.
정극후는 당시의 “공부하는 사람들이 중국의 역사는 대략적으로 아는 데 비해, 동국의 역사는 잘 모르는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편찬하였다”라고 한다. 그러나 현대의 민족사학적 관점에서 보면 당시의 모화사대성을 극복하고 있지는 못하다.
라. 박율의 『역대제왕전세지도』
박율의 장남 박두세(朴斗世, 1650~1733)가 쓴 재판본(1701년) 발문(跋文)에 의하면, 박율이 생존하던 ‘1660년에 처음으로 간행되었는데, 시간이 지나 목판이 깎여나가거나 이지러지는 문제가 발생하였고, 또한 초판이 너무 크게 간행되어서 생긴 불편함 때문에 1702년에 축소하여 다시 간행하였다’라고 한다.
이 책의 재판본의 앞머리에는 최석항(崔錫恒, 1654~1724)이 1702년에 쓴 서문 「역대제왕전세도(歷代帝王傳世圖)」가 들어가 있고, 끝에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박두세가 1701년에 쓴 말문이 들어가 있다. 그런데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는 1702년 서문과 1701년 발문 없는 1660년 판본이 소장되어 있다.
이 책에는 신라의 혁거세 건국 원년(元年)부터 우리 역사 연표도 해당 연도마다 첨가하고 있다. 그 이전의 역사인 삼한과 고조선의 역사는 고증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기록하지 않았다.
마. 홍만종의 『동국역대총목』
(1) 홍만종의 『동국역대총목』의 해제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홍만종의 『동국역대총목』은 가람문고와 일사문고 등등에 중복되어 소장되고 있다. 그중에 일사문고본(一簑古951-H758d)이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하다. 『동국역대총목』은 1705년(숙종 31)에 편찬되었고, 1706년에 현종실록자로 인쇄된 것으로 추정된다. 책은 1권1책(89장)이며 크기는 33.6×21.8cm이다.
『동국역대총목』은 홍만종이 단군에서부터 조선 현종(顯宗)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정리하여 엮은 책이다. 홍만종의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자(字)는 우해(宇海)이며, 호(號)는 현묵자(玄默子) 몽헌(夢軒) 장주(長洲)이다. 정두경(鄭斗卿, 1597~1673)의 문인으로서 1680년에는 허견(許堅, ?~1680)의 옥사에 연루되기도 하였다. 뒤에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 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시평(詩評)에 특히 뛰어났으며 도교(道敎)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동국역대총목』의 홍만종 서문(1705년)에 따르면, 교서관제조(校書館提調) 신완(申琓, 1646~1707)이 당시의 학자들이 중국의 사실은 잘 알면서 우리나라의 사실에 대해서는 소략한 것을 걱정하던 차에 중국의 『역대총목(歷代總目)』을 보고 이 체재에 따라 우리 역사를 정리할 것을 홍만종에게 위촉함으로써 책의 편찬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의 체제는 먼저 「서문(序文)」이 수록되었고 이어서 「범례(凡例)」 14조를 실었다. 이 범례의 내용은 홍만종의 사관을 잘 나타낸 것으로서 처음 6조까지는 단군(檀君), 기준(箕準, 箕子), 위만(衛滿), 삼한(三韓), 사군(四郡), 신라(新羅) 등에 대해 정통론의 관점에서 입장을 정리한 것이다. 여기서 홍만종은 우리 역사의 정통(正統)이 단군에서 시작되며 이후 기자, 마한, 삼국, 신라로 이어지는 흐름임을 제시하였다.
나머지는 신라왕의 칭호, 신라의 여왕과 고려의 우왕(禑王) 및 창왕(昌王)에 대한 기술 문제, 조빙(朝聘)과 책봉(冊封)에 대한 서술 방식, 국가 중심의 서술원칙, 지도의 수록 목적, 인접 국가에 대한 기술, 참고자료와 참고방식 등 본문의 서술 내용에 대한 원칙을 제시한 것이다. 이러한 「범례」를 보면 홍만종은 당대의 사대주의들이 존화주의 역사관을 갖기는 하였으나 단군을 우리 역사의 시작으로 보고 있었음을 정리한 것이다.
홍만종은 이 책의 「범례」에 이어 「동국역대전통지도(東國歷代傳統之圖)」와 「역대건도지도(歷代建都之圖)」를 수록하였다. 전자는 우리나라 역대 왕조의 계승관계를 정통론에 입각하여 도표로 작성한 것이고, 후자는 고조선에서 조선에 이르는 역대 국가의 중심지와 수도, 조선의 팔도(八道), 주요 산하(山河)를 하나의 지도안에 그려 넣은 것이다. 그 뒤에는 삼한(三韓)에 대한 고증을 적어 넣었다.
본문에서는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사군, 이부(二府), 삼국(신라, 고구려, 백제), 고려, 조선의 차례로 주요 사적을 정리하였다. 삼국 이후는 각 왕대별로 정리하였으며, 조선은 현종대까지 정리되어 있다. 본문에서 필자 자신의 고증 내용은 ‘안(按)’이라고 하여 해당 사실의 옆에 서술하였다.
이어서「부록(附錄)」으로 지지(地誌)를 실었는데, 그 서문에서는 역대의 강역을 개괄하고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東國輿地勝覽』으로 추정)를 참고하여 흥왕건도지지(興王建都之地)와 명산대천(名山大川)을 뽑아 부록으로 싣는다는 것을 밝혔다. 이어서 경도(京都) 및 팔도별로 각기 주요 사항을 정리하였다.
홍만종의 『동국역대총목』은 같은 현종실록자본으로 두 판본이 전하고 있는데, 다른 한판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가람문고(가람 古 951.01-H758d)에 소장되어 있다. 일사문고본과 가람문고본의 차이점은 가람문고본은 홍만종의 서문이 책의 끝에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2) 홍만종의 『동국역대총목』의 평가
『동국역대총목』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부정적이기도 하였다. 특히 이 책이 편찬되던 시기에 지평(持平)으로 있던 김시환(金始煥, 1673~1739)은 이 책이 “참월(僭越)하다”고 비판을 하였고, 당시(1707년)에 홍만종에 대한 논죄가 있었다. 그러나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이 두둔(1707년 8월 2일)하여 무마되었다. 또한 1745년(영조21)에는 “이 책을 보첨(補添)하라”는 영조의 명이 있었으나 원경하(元景夏, 1698~1761)가 “사법(史法)에 어긋나지 않는다.”라고 주장해 그대로 두었다.
홍만종은 이 책에서 우리 역사를 단군을 정통으로 하여 시작하였음을 명시하였고, 또한 그는 도가(道家)와 같은 유교에서 이단적으로 배척하는 사상도 포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점은 그가 단군조선을 우리 민족사의 정통으로 잡은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책의 문제점은 홍만종이 삼국 가운데 신라를 정통으로 삼은 것에 있다.
홍만종의 『동국역대총목』은 18세기 이후 남인(南人) 계열의 학자들의 역사서술에 많은 영향을 준 참고서로서 역사문헌학사(歷史文獻學史)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제1기의 민족사학자들은 이 책에 정리되어 있는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한사군 이부(二府) 등등을 부정하였다. 제1기의 민족사학자들은 단군조선으로부터 후기조선을 거쳐 부여와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는 우리 민족사도 원류에 포함시켜 삼음으로서, 민족사학의 방향과 민족사학이 어떠한 것인가를 재는 가늠자를 제시하였다.
홍만종의 『동국역대총목』은 근현대의 민족사학적 관점에서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 시대에 그가 『동국역대총목』을 편찬하였다는 것은 높이 평가하여야 할 일이다. 나름대로 당시의 유학자들 세계에서 우리 역사학을 바로 세우고자 하는 노력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존화주의 역사관을 극복하려 시도하였기에 치죄(治罪)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으나, 존화사대주의 사관을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바. 임상덕의 『동사회강』 연표
임상덕(林象德, 1683~1719)은 숙종조의 문신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소론의 거두 윤증(尹拯)을 사사해 그의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관직에 있을 때는 단종 때 권력을 장악했던 김종서(金宗瑞)의 죄를 용서할 것을 주장하고, 당론을 배격하며 숙종의 전제권 강화를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학계에서는 그가 『동사회강(東史會綱)』을 저작한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지방 수령을 지내던 1711년(숙종 37)부터 1719년 사이로 추측한다. 이 책의 앞부분에 서례(序例) 범례(凡例) 논변(論辯) 그리고 연표(年表)가 실려 있고, 본문은 삼국기(三國紀), 신라기(新羅紀), 고려기(高麗紀)로 구성하고 있는데, 특히 고려기는 본문 12권 중 9권으로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의 연표에서는 상고사는 제외하고, 삼국 신라 고려의 순으로 왕력(王曆)을 작성하였는데, 여기에 중국 왕력이 대비되어 있어서 본문 기사에서는 중국 왕력을 일일이 적는 것을 피하고 본국의 왕력만을 적고 있다.
그가 연표애서는 상고사를 제외하였어도, 논변(論辨)에서 단군, 기자, 삼한의 위치 등에 관해 고증했으므로 실제로는 상고사를 모두 부인한 것은 아니다. 특히, 범례와 논변에서 기자수봉설(箕子受封說)을 부인하고 기자가 주무왕(周武王)에게 신하로 복종하지 않은 독립군주였음을 강조하고 있어, 중국에 대해 조선이 자주적 국가였음을 명시하고 있다.
사대주의 유학자들이 기자와 기자조선의 후신이라고 주장하는 마한을 높이는 태도는 17세기 사서의 공통된 성격으로서 이 책에서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삼국 이전을 편년에서 삭제함으로써 기자조선과 마한을 정통국가로 취급하지 않았다.
사. 천동장본 『경세편년』
이 책의 표제(表題)는 『경세편년(經世編年)』이다. 앞‧뒤 표지의 내면(內面)에 ‘천동장(川東藏)’이라 적혀 있는 것을 보아 천동(川東)이 소장하고 있던 필사본이다. 종이는 도침한 얇은 양질의 저지(楮紙)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종이는 대체적으로 18세기 후기의 정조시대에 흔히 보인다.
『경세편년』은 원래 상하(上下) 2책이었던 것 같은데 상권(上卷)만이 있다. 이 책은 기원전(B.C.) 2367년부터 시작하여 기원후(A.D.) 303년(계해)까지의 중국과 조선의 편년을 뒤섞어 수록하고 있다. 이 책의 상권 첫 장 앞면을 여기에 공개하니 이 책의 하권(下卷)이 발견되기를 기대해 본다.
아. 필자미상의 『역대편년』
이 책의 표제는 『역대편년(歷代編年)』이다. 1801년에 편찬된 이 잭은 편자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첫 장 앞면에 인흔(印痕)이 두 과있다.
이 책은 앞부분은 한 면이 6행11칸으로 되어 있는데, 맨 윗 칸은 상원(上元) 중원(中元) 식으로 표기하고 있고, 그 아래의 6행10칸은 60갑자를 한 칸에 모두 쓰도록 하고 있다. 이 책의 열 번째 장 뒷면에 단군원년(檀君元年)이 기록되고 있다. 즉 이 책도 천동장본 『경세편년』과 마찬가지로 중국과 조선의 편년을 뒤섞어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이 책의 뒷부분은 한 면이 3행11칸으로 되어 있어, 한 장의 앞뒤가 60갑자를 쓰게 되어 있다. 조선이 개국한 해가 속하는 60갑자년의 기점으로부터 한 면에 30갑자의 사실을 기록하게 되어 있는 것인데, 이 책의 마지막 기록은 정종(正宗, 즉 正祖) 이후의 ‘아금상전하원년(我今上殿下元年)’이라 기록하고 있어 이 『역대편년』은 순조1년(1801)에 편찬된 책이다.
자. 홍기주 구장의 『화동기년』
『화동기년(華東紀年)』 역시 필사본으로 편찬자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이 책의 맨 앞장에는 “기주독본(岐周讀本)”이, 그 다음 장에는 “홍기주인(洪岐周印)‘이 찍혀져 있음을 보면, 이 책은 1829년생의 홍기주(洪岐周, 1829~?)의 구장본(舊藏本)이다.
이 책은 1면에 3행10칸으로 되어 있어, 앞뒤 한 장이 60갑자로 채워진다. 『역대편년(歷代編年)』과 마찬가지로 중국과 조선의 편년을 뒤섞어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의 마지막 기록은 정범조(鄭範朝, 1833~1898) 상신이 된 임진년(1892년)까지 기록되어 있다. 그 마지막 기록의 서체(書體)는 앞의 것과 동일하다.
홍기주(洪岐周)는 풍산(豊山) 홍씨이며, 자(字)는 강백(康伯), 거주지는 한양(서울)으로 1829년에 태어났으나 졸년은 미상이다. 그는 1858년 철종(哲宗)9년 무오(戊午)년 사마식년시에 진사로 입격하였고, 고종조에서 열네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고 한다. 즉 필자 소장본 『화동기년』은 1892년에 제작된 것이다. 그런데 이 책과 같은 책이 장서각에도 소장되어 있으나, 장서각 소장본은 1910년 조선왕조의 멸망까지 기록하고 있다.
차, 김교헌 교열 어윤적 편찬의 『동사연표』
어윤적(魚允迪, 1868~1935)은 민족사학자가 아니다. 그는 대한제국때 외부 번역관, 용천부윤, 국문연구소 위원 등을 지냈으나, 일제강점기인 1916년 1월 중추원이 주관한 조선반도사 편찬사업의 조사주임을 맡아 사료수집을 담당했고, 후일 중추원 참의, 조선사편수회 위원 등을 역임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그러나 이 책의 교열(校閱)은 1917년에 만주 화룡현으로 망명을 한 독립운동가 김교헌(金敎獻, 1868~1923)이 하고 있다. 앞의 연재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김교헌은 『증보문헌비고』 편찬에 간여한 당대의 석학이었고, 대종교의 제2대 도사교(교주)가 된다.
따라서 『동사연표』가 단군 1년부터 1910년까지를 대상으로 하고 있고, 상단에 단군기원 간지 한국의 역대기원(歷代紀元)을, 하단에 중국의 역대기원, 일본의 기원, 서력기원을 함께 기재하여 연대를 구분하고 있으며, 가운데 적요란에는 해당 연도의 역사적 사실을 한국사를 중심으로 중국 일본과 관계된 사실까지 수록하고 있는 것은 교열한 김교헌의 의도였다고 보아야 한다.
동사연표 부분은 426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고조선부터 신라까지가 328면이나 차지하고 있어 이는 교열자 김교헌과 같은 고대사 부분에 중점을 둔 인물이 아니고서는 시도할 수 없는 편찬이다. 즉 어윤적의 『동사연표』에서 김교헌이 차지하는 위치는 저자에 버금간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는 실제로는 김교헌이 편찬하였으나, 어윤적이 자신이 편찬한 것으로 이름을 올려 놓은 것 같다.
이 『동사연표(東史年表)』 1책 초판본은 1915년 12월 21일자로 보문관(寶文館)에서 간행하였는데, 이 책이 출판된지 1개월 후인 1916년 1월에 중추원이 주관한 조선반도사 편찬사업의 조사주임을 맡아 사료수집을 담당하는 등 본격적인 친일의 길에 들어선다. 마치 그가 조선총독부에서 자신이 편찬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을 제시하고, 조선사 전문가임을 자처하며 조선총독부를 접촉한 것 같다. 어윤적이 조선반도사 편찬사업의 조사주임을 맡은 배경을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이후 『동사연표』는 1934년에 내용을 증보하여 재판본을 출판하였으나 ‘일태자래조(日太子來朝)’ 등의 문구가 문제가 되어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발매 금지된다. 이후 1959년에 다시 내용을 증보하여 ‘동국문화사’에서 3판을 간행하였다. 이 ‘동국문화사’는 1966년에 최동의 『조선상고민족사(朝鮮上古民族史)』를 내어 놓은 바로 그 출판사이다.
『동사연표』 초판본의 체재는 「동사연표소서(東史年表小敍)」 「범례」 「역대운편(歷代韻編)」 「역대일람표(歷代一覽表)」 「동사연표」로 구성되어 있다. 「동사연표소서」는 책의 서문이며, 「범례」는 비교적 상세하게 되어 있다. 「역대운편」은 고조선 부여 중조선 마한 후조선 신라 고구려 백제 가락 발해 태봉 후백제 고려 근조선의 역대를 칠언시로 기술한 것이다.
「역대일람표」는 고조선 중조선 마한 후조선 동부여 신라 고구려 백제 가락 발해 고려 근조선의 역대제왕의 호 성명 재위기간 생몰연대 파계(派系) 후비(后妃) 능묘 및 국도(國都)를 수록한 것인데, 연대는 간지(干支)로 표기하고 있다.
카, 장도빈의 『조선연표』
장도빈(張道斌, 1888~1963)은 언론인이자 역사학자로서 독립운동가이다. 이 『조선연표(朝鮮年表)』는 ‘저작 겸 발행자’가 장도빈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장도빈의 저작을 1917년 11월 15일자에 사가판(私家版)으로 발행한 책이다. 사가판이란 개인적으로 돈을 내어 사가(私家, 자기 집)에서 발행 한 책을 의미한다.
이 책은 본문이 94면에 불과한 소책자이지만, 단군기원 원년(기원전 2333년)에서부터 1910년(단기 4243년) 일본에 합병된 것까지를 수록하고 있다. 장도빈 스스로가 출판경비를 부담하면서 출판하여 당시 화폐 50전에 발매하였지만, 이 책은 대부분 무상배포하였을 것이다. 그가 출판한 많은 책이 그렇다.
타. 맺음말
조선시대에 존화사대주의가 만연하였음에도, 자료의 부족을 겪으면서도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이 깨어난 인물들이 여럿 있었다. 그러한 인물들을 근‧현대의 민족사학적 관점에서 볼 때 미흡하더라도 모두를 매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민족사학자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라든가 산운(汕耘) 장도빈(張道斌) 등은 영웅적 인물들에 대하여 여러 위인전을 내었다. 그런데 근래에 민족사학을 한다는 분들 가운데 일부가 우리 민족의 탁월한 인물들, 특히 조선왕조의 탁월한 인물인 세종대왕(世宗大王)을 존경하지 못하도록 폄훼하는 경우가 종종있다. 그러한 폄훼 자체가 사대주의 모화사관이며 식민사관이다. 태조나 태종 연산군과 선조는 비판하더라도 세종대왕(世宗大王)의 가치를 떨어뜨리려 시도해서는 안 된다.
가림토문자나 신시문자는 미궁(迷宮) 속에 있지만, 세종대왕의 『훈민정음(訓民正音)』은 세계기록유산이라는 실체가 있다. 세종대왕의 업적을 부정하는 것은 곧 민족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요소, 동일한 문자와 언어를 쓰는 것을 흐트러뜨리는 행위이다. 1979년에 세상에 나온 『환단고기』의 독소는 바로 그러한 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