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북 신광수 문학관’을 위하여
[연재] 이양재의 ‘문화 제주, 문화 Korea’를 위하여(7)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1. 석북 신광수와의 인연
1991년으로 기억한다. 석북 신광수(申光洙, 1712~1775) 선생의 자손 한 분이 필자를 찾아왔다. 벌써 30년이 지나서 그의 정확한 이름은 가물가물하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는 당시 성수역 인근에 있는 주소를 주며 방문을 요구하였다. 필자는 그의 주소를 방문하니 단독 주택이었다. 당시 그는 석북 신광수 선생이 신었다는 신발과 사모관대(紗帽冠帶), 그리고 고문서 및 고서를 보여 주었다.
당시 필자는 그 집에 있던 고문서와 고서는 모두 일괄 입수하였다. 다만 『관산융마』만은 입수하지 못했다. 그것만은 매도에서 제외하였다. 그러나 1년 정도가 지난 후에 필자는 답십리에 있는 어느 골동품상에서 『관산융마』를 보았고, 입수를 시도하였으나 백 모 사장은 쉽게 팔 의사가 없었다.
그리고 석북 집안 관련 자료를 일괄 입수한 지 3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 나는 목만중(睦萬中, 1727~1810)의 유묵 1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대로 소장하고 있다. 나는 31년 전에 그 자료를 타 성씨인 내게 넘긴 당시 그의 쓰라린 심정을 생각해 본다. 31년 전 나는 한참 방송과 신문을 타던 시기였고, 애서운동을 활발히 하던 30대 중반의 청년이었다. 그가 자신의 집안 소장품을 넘길 대상으로 나를 지목하고 가져온 것이 틀림없다. 당시 나는 30대 중반이었지만, 이러한 가치 있는 자료를 돈을 벌기 위하여 쉽사리 흩어 놓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 석북 신광수의 고향 서천군 화양면 활동리
필자가 석북 신광수 집안 자료에 특별한 애정을 쏟는 이유는, 석북이 1764년 1월에 제주에 체류하며 남긴 한시집 『영주창화시(瀛洲唱和詩)』와 『관서록(關西錄)』 원본(1774년), 그의 동생 신광하(申光河)의 백두산 기행문인 『북록(北錄)』 원본(1783년), 고령신씨 가문의 초간본인 『고령신씨족보』(어성보, 1578년) 등등 석북 집안의 10대(代)에 이르는 중요 자료가 여러 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자료 일습을 정리하여 충청남도에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을 신청한다면 지방문화재로는 쉽게 지정될 수 있을 것이다.
석북 신광수는 조선후기 잠녀(潛女) 등 천민들의 고단한 삶을 그린 대표적인 민중시인이다. 그는 신호(申澔, 1687~1767)의 자녀 사남매(四男妹), 즉 석북 신광수(申光洙, 1712~1775)와 기록 신광연(申光淵, 1715~1778), 진택 신광하(申光河, 1729~1796), 부용당 신씨(芙蓉堂 申氏, 1732~1791)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들 사남매의 고향은 “충청도 한산군 남하면 활동리”인데 조상대로부터 근래의 후손까지 누대를 그곳에서 살아왔다. 이들과 후손의 문장 활동이 대대로 활발하여 그들의 고향 일대는 숭문동(崇文洞)으로 불리기도 했다.
석북의 자손으로 현대의 유명 시인으로는 신석초(申石艸, 1909~1975)가 있다. 신석초의 본명은 신응식(申應植)으로 신긍우(申肯雨)의 아들이다. 신석초의 문학 세계도 우리의 현대문학사에서 중요하여 그의 문학관도 별개로 세울 만한 현대 시인이다. 그들의 고향은 행적 구역상으로는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활동리’이다. 석북 신광수를 위시하여 이들 고령신씨 가문의 묘소도 그곳 ‘어성산’ 지역에 있는데, 활동리를 탐문하여 보면 석북 신광수의 생가터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3. ‘석북 신광수 문학관’
필자는 서천군이 나서서 ‘석북 신광수 문학관’을 추진하기를 제안한다. 아울러 석북 신광수를 기리는 사업을 서천군이 방기한다면, 석북이 제주도에 40여 일을 머무르며 시집을 남긴 것으로 인히여, 제주도가 석북의 문학관을 제주 구도심권에 세우겠다고 약속하고 추진한다면, 필자는 제주도에 석북 집안 자료 일체와 제주도 관련 고문헌을 영구 기탁하는 등 크게 협조할 것이다.
필자에게는 석북의 선대(先代)를 포함하여 20세기 초까지의 석북 집안의 10대에 이르는 자료가 60여 점 이상이 있고, 그리고 마침 조선시대 여러 문인의 자필 시문 유묵과 제주도 관련 고문헌을 상당수 소장하고 있어, 박물관을 개관하는데 필요한 법에서 정한 유물의 최저 수량 100점을 충족하고 상회하여, ‘석북 신광수 기념관’을 세우는데 자료 부족의 어려움은 없다. 여기에 신석초 자료를 일부라도 수집하여 포함하면 된다.
석북의 고향이 서천이라도 제주시에서 그의 문학관을 세우지 못할 이유는 없다. 충남 홍성이 고향인 시인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은 홍성에 ‘만해 한용운생가 - 만해문학관’이 있으며, 남한산성에는 그의 ‘만해기념관’이, 강원도 인제 백담사 인근에는 ‘만해한용운문학관’이 세워져 있다. 또한 길림성 연길이 고향인 윤동주는 한때 그가 서울로 유학하러 와서 살던 서울 종로 서촌 인근인 청운동에 ‘윤동주문학관’이 세워져 있다.
4. 맺음말
필자가 석북을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것은, 석북 신광수는 조선시대 후기를 대표하는 민중시인이며, 31년 전 필자에게 들어 온 이들 자료가 흩어지면 의미가 반감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천군은 석북 신광수 형제들이라든가 신석초를 포함한 그 자손들의 문학 세계를 기리는 기념관을 착안하지 않는 것 같다. 한때 석북과 그 형제들, 그리고 그 자손들로 인하여 숭문동이라 불리던 그들의 고향 사람들은 아쉽게도 석북 신광수와 그 형제들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우리 민족 문화를 지키고자 하는 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 못하고 평생을 짊어지고 있는가? 이제는 노년의 나도 홀가분해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