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운기』와 히브리 기원(紀元)
[연재]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국혼의 재발견’ (17)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
(15) 조선민족 신화의 전승비평적 접근
우리 민족 신화의 본질에 대하여 현대의 시각으로 비교종교학의 관점에서 새롭게 검토해 보고자 한다.
기록으로 남아있는 인류 최고의 신화는 유태인 토라의 첫 번째 권 「창세기」에 나와 있는 천지창조의 이야기이다. 이 신화는 유태 민족이 생기기 훨씬 이전에 메소포타미아에서 나온 것이다. 모세가 「창세기」에 기록으로 남겼지만, 이 신화는 갈대아 우르 지역에 살던 유태인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아브람(아브라함) 시대 이전에 이미 널리 퍼져있던 신화이다. 우리 민족 신화의 규명에 앞서 히브리력(曆)의 기원(紀元)과 그들의 신앙에 대하여 먼저 살펴보자.
가. 히브리력 기원과 신앙
유태교를 대표하는 문화가 히브리력(曆)이라 불리는 유태력이다. 히브리력의 시작은 BC 3760년 10월 7일이다. 즉 BC 3760년 10월 7일은 히브리력으로 천지창조 후 첫해의 시작일이다. 유태인(히브리인)들은 그들의 하나님이 10월 1일 날 천지를 창조하기 시작하여 10월 6일 날 마친 것으로 믿는다. 그러니 그들은 인간의 역사가 10월 7일 날 시작한 것으로 믿는다. 그것이 히브리력 첫날이다.
이후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의하면, 아담을 만든 이후 7세손 에녹이 승천하기까지 히브리력으로 987년, 아담의 10세손 노아 홍수가 온 것은 히브리력으로 1656년이다. 아담의 20세손 아브라함이 사망한 해는 히브리력으로 2123년이고, 아브리함의 손자 야곱이 이집트에 들어갔을 때는 히브리력으로 2238년이다. 올해 2022년이 히브리력으로 5782~3년이니, 유태인에게는 올해가 노아방주 후 4126~7년이 지나는 해인 셈이다.
(히브리력의 연대 계수가 기독교에서의 연대 계수와는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1600년대 아일랜드 교회의 주교였던 제임스 어셔는 라틴어 제목으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연대기』라는 책을 펴냈는데, 그는 연대를 거슬러 가면서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의 가계도와 나이를 따져 계산한 결과 천지창조가 기원전 4004년에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히브리력과 244년 차이가 난다.)
유태교의 창시자 모세는 BC 1526년에 출생하였고, BC 1446년에 출애급하였다. 그러나 BC 1406년~1400년에 가나안을 정복하고 고대 이스라엘을 건국한 건국자는 모세가 아니라 여호수아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신앙적으로는 유태인의 신 ‘여호와’가 흙으로 인간을 빚었다는 창조 신화와 동쪽의 낙원 에덴의 존재를 믿으며, 에녹의 승천과 노아의 방주를 사실로 믿고, 모세의 출애급을 믿는다. 이것은 사실(史實)이나 사실(事實)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요즘의 목사들은 단군 사실(史實)을 종교적으로, 즉 신앙의 문제로 본다. 그리고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본질, 즉 천손사상(天孫思想)과 홍익인간(弘益人間)은 외면하고 일웅(一熊)과 일호(一虎)라는 문자에 집착하여 허황되다고 공격한다. 그러나 허황된 면은 『성경전서』의 「창세기」에도 있다.
나. 단군기원은 지켜져야 한다
대종교를 대표하는 문화는 단군기원(檀君紀元)이다. 단군 사실(史實)에 따라 단기(檀紀)는 BC 2333년 10월 3일(음력)을 시작 기원으로 한다. 우리 민족은 이 해의 음력 10월 상(上)달에 단군이 고조선을 개국한 것으로 믿는다. 이때는 『구약성경』의 여호수아에 의하여 고대 이스라엘이 건국하기 927년 전이다.
F. 리가드 스미스 박사의 『연대기 성경』 한글판(하영조 목사)의 ‘연대표’에서 아브라함은 BC 2166년에 출생한 것으로 보았으니, 스미스 박사의 계산법으로는 아브라함은 단군기원 167년에 출생한 인물로 정의된다. 즉 우리 민족의 단군조선은 유태인의 옛 이스라엘보다 927년 전에 건국하였고, 우리 민족주의의 구심점 단군은 유태인의 시조라는 아브라함보다도 적어도 200년 훨씬 이전의 인물이다.
그런데 유태교와 기독교의 경전인 『구약성서』의 첫 기록들, 즉 「모세 오경」은 BC 1446~1406년경의 저술이다. 반면에 우리에게 남아있는 『삼국유사』의 「고조선」조 기록은 그 시원(始原)까지 따져서 올라가고 올라가고 또 올라가서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위서(魏書)』를 끌어들여도 BC 3세기 이상을 올라가기가 어렵다.
단군의 고조선 시대에 문자가 있었는가? 고조선 시대에 문자가 있었다는 점은 민족사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다만 그 문자가 어느 것이고, 고조선 어느 시대부터 사용하여 왔는가는 당연히 이견이 있어야 한다.
『구약성서』의 첫 기록자 모세는 자신이 태어나기 300년 전에 끝나는 종교역사서 「창세기」를 썼다. 그렇다고 「창세기」를 부정하는 유태교도와 기독교도는 없다. 마찬가지로 나철(羅喆, 1863~1916)이 『삼일신고』를 전해 받고, 김교헌이 『신단실기』를 역사의 기록을 모아 편수했어도 우리 민족의 정신을 담고 있다면 종교서로는 부정당할 하등의 하자가 없다.
역사의 기록을 모아 편찬한 종교 역사서는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전거(典據)가 있어야 하는데, 필자는 김교헌이 편수한 『신단실기』는 그것을 충족한 우리나라 종교 역사서의 표본으로 손색이 없는 것으로 평가한다.
필자는 단군기원력은 지켜져야 한다고 본다. 단군릉에서 출토한 성체(聖體)의 상한 연도가 BC 5100년이고, 『환단고기』가 첫 연도를 엉뚱하게 높여 주장해도 민족사학자들이 처음으로 정립한 BC 2333년의 단군기원력은 지켜져야 한다. 예수 탄생을 기점으로하는 서력기원도 사실상 오차가 있다. 그렇다고 서력기원의 변경을 말하는 신학자는 없다,
다. 구전시대와 토막문서시대
『삼국유사』의 「고조선」조를 논하기에 앞서 먼저 기록이 남는 원칙에 대하여 검토해 보자.
인간이 만든 가장 오래된 저술은 『구약성서(舊約聖書)』 「창세기(創世記)」의 천지창조와 노아방주 이야기이다. 「창세기」의 서두를 장식하는 천지창조와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남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유브라데 강변에 있는 아브리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Ur of the Chaldeans)의 고대 신화로서 이미 기원전 25세기 이전에 인류 최초의 문자, 설형문자로 점토판에 기록되었다.
중요한 사실은 BC 3000~2500년경에 인류 최초의 청동기가 이 지역에서 발명되었고, 이곳은 옛 수메르의 수도였으며 BC 2166년경에 아브람(아브라함)이 여기서 태어났다. 후일 이 아브라함은 유태교와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진 인물이 된다.
「창세기」를 위시한 『구약성서』의 앞 다섯 책은 모세가 저술하였다고 하여 “모세 오경(五經)”이라고 한다. “모세 오경”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등 모세가 집필하거나 혹은 그 내용이 모세와 관련되는 바가 많은 책을 말한다.
특히 “모세 오경” 가운데 「출애굽기」부터의 사경(四經)은 모세 시대의 직접적인 기록이다. 그러나 「창세기」는 모세 이전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창세기」는 모세가 “모세 오경”을 편술(編述)할 때 가장 어렵게 편술하였을 것이다. 물론 당시 모세는 점토판이 아니라 양피지에 기록을 남겼다.
기독교의 복음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와 영감으로서 이루어진 것이라 믿는다. 특히 모세 오경은 하나님과의 직접적 대화로 쓰인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성서를 성서문학적(Biblical literature) 측면에서 보거나 전승비평적(Tradition Criticism) 측면에서 보는 신학자들의 관점은 다를 수가 있다.
즉 『구약성서』의 「창세기」는 상당 기간의 구전시대(口傳時代)와 오랜 기간의 토막 문서 전승시기가 있었던 것으로 본다. 노아 홍수의 내용이 매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점토판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그렇고, 「창세기」 초입의 천지창조가 둘인 것도 그렇다. 「창세기」 제1장 제1절부터 제2장 제3절까지의 6일간 천지창조 기록이 있고, 이어서 「창세기」 제2장 4절부터 25절까지의 세계창조 기록이 있다. 언뜻 보면 이 두 기록이 일치하는 것 같지만, 세부적으로 검토하여 보면 「창세기」 제1장과 제2장은 최소한 두 개 이상의 문서가 합쳐진 것이다. 일부 신학자들은 4개 정도의 문서가 합쳐진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어떻든 모세 이전에 「창세기」의 전거가 되는 천지창조(天地創造)의 설화(說話)가 있었다. 일연의 「고조선」조도 똑같다.
라. 『제왕운기』에 대하여
『제왕운기(帝王韻紀)』는 이승휴(李承休, 1224~1300)가 고려 충렬왕 13년(1287)에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역사시(歷史詩)로 쓴 2권1책이다. 이 책의 초간본은 중간본에서 볼 수 있는 권말의 발문(跋文)과 후제(後題)를 보면 이승휴가 생존해 있던 원정 연간(元貞年間, 1295년∼1296년)에 진주에서 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공민왕 9년(1360)에 경주에서 중간(重刊)되었는데 진주 초간본은 아직 발견된 바 없다.
1360년 중간본은 현재 네 책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곽영대 소장본인 1965년 보물 지정본의 크기는 가로 18㎝, 세로 29㎝이며, 8행16자이다. 1965년 보물 지정본의 끝에 정소(鄭玿)의 발문(跋文)이 있으나 후기와 간기가 떨어져 나가 한동안 정확한 간행연대는 알 수 없었는데, 1986년에 동국대에서 소장하고 있는 같은 판본이 보물로 지정되면서 확인된 공민왕 9년(1360)에 경주에서 중간하였다는 간기가 있어 현존의 『제왕운기』는 1360년 경주 중간본임이 확정되었다. 이외에도 1991년에 보물로 지정한 김종규 소장의 『제왕운기』가 있고, 2010년에 보물로 지정한 한솔제지 소장본도 경주 중간본이다.
『제왕운기』는 상하(上下) 2권1책으로 되어 있는데, 상권은 서(序)에 이어 중국 역사의 요점을 신화시대부터 삼황오제(三皇五帝), 하(夏) 은(殷) 주(周)의 3대와 진(秦) 한(漢) 등을 거쳐 원(元)의 흥기(興起)에 이르기까지 칠언고시 264구로 읊어놓았다.
반면에 하권은 우리나라 역사에 관한 내용으로 동국군왕개국연대(東國君王開國年代)와 본조군왕세계연대(本朝君王世系年代)의 2부로 나누었다. 전자 1부에는 서에 이어 지리기(地理紀), 단군의 전조선(前朝鮮), 기자의 후조선(後朝鮮), 위만(衛滿)의 찬탈, 삼한(三韓)을 계승한 신라 고구려 백제의 3국과 후고구려 후백제 발해가 고려로 통일되는 과정까지를 칠언고시 264구 1,460언으로 서영(敍詠)하고 있다. 후자 제2부는 고려 태조 세계설화(世系說話)에서 필자 당대인 충렬왕 때까지 오언으로 읊고 있다.
하권의 제1부에 들어 있는 단군조선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와 더불어 가장 오래된 기록이며, 또한 이 책은 발해사를 우리 역사로 기록한 최초의 역사서라는데 높은 가치를 지닌다.
마.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단군 신화
우리나라의 단군 사실(史實)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고조선」조와 『제왕운기(帝王韻紀)』의 「본기」와 약간의 차이점이 있어, 그 구성을 살펴보자.
『삼국유사』의 「고조선」조를 요약하자면, 그 내용은 7개의 이야기 토막으로 엮어져 있다. ①환인(桓因)과 그 아들 환웅(桓雄), 그리고 환웅의 아들인 단군에 이르기까지의 삼대에 걸친 가계의 혈통, ②환웅이 아버지 환인의 도움과 허락을 얻어서 하늘에서 천부인 3개를 가지고 태백산(太白山)으로 내려오는 과정, ③신단수(神壇樹) 아래 신시(神市)를 베풀고는 스스로 환웅천왕이라 칭하면서 인간 세상을 다스리게 된 일. ④곰이 호랑이와 함께 사람 되기를 원하였다가 곰만 여자(熊女)로 화신(化身)한 것, ⑤그리고 이 여인, 곧 웅녀(熊女)가 환웅과 혼인한 것. ⑥환웅 부부가 낳은 단군왕검이 평양에 도읍을 정한 뒤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한 것, ⑦단군이 1,908세의 수(壽)를 누린 끝에 아사달산에 숨어 산신이 된 것 등으로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삼국유사』의 「고조선」조는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와는 다소간의 변화가 있다.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는 ①환인(桓因)이 그 아들 단웅(檀雄, 桓雄)에게 말하기를, “삼위태백(三危太白)에 내려가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고, ②환웅은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고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서 태백산 정상 신단수(神檀樹) 밑으로 내려오는 과정, ③손녀(孫女)로 하여금 약을 먹고 사람이 되게 한 설화, ④그녀가 단수신(檀樹神)과 혼인한 것, ⑤단군(檀君)을 낳았으며 단군은 조선의 왕이 되었고, ⑥시라(尸羅; 신라), 고례(高禮; 고구려), 남북 옥저, 동북부여, 예맥이 모두 단군의 후손이다. ⑦단군은 1038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아사달(阿斯達)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 또한 ⑧「단군본기」에 이르기를, “비서갑(非西岬) 하백(河伯)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부루(夫婁)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단군 사실(史實)이 대체적으로는 같으면서도 미묘한 차이점이 드러나는데, 가장 큰 차이점은 『삼국유사』의 「고조선」조에서는 환웅이 수의천하에 뜻을 두고 환인을 설득하여 지상으로 내려 온 것으로 나오지마는, 『제왕운기』에서는 환인이 환웅에게 삼위태백에 내려갈 것을 권한 것으로 나온다.
또한 웅녀의 존재를 손녀의 존재로 바꾸고 있으며, 환웅이 자신의 손녀로 하여금 약을 먹고 사람의 몸을 갖추게 한 후 단수신(檀樹神)과 혼인하게 한다. 이어 그사이에 아기가 태어나니 이름하여 단군이라 했고, 그가 조선의 지경에 의지해서 왕이 되었다고 『제왕운기』는 기록하고 있다. 즉 환웅은 단군의 외할아버지이고 단군의 할아버지는 단수신(檀樹神)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제왕운기』에서는 단군이 “비서갑(非西岬) 하백(河伯)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부루(夫婁)”라고 쓰고 있어, 부여는 고조선을 이은 국가임을 말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1281년의 저술이고, 『제왕운기』는 1287년의 저술이다. 즉 단군 사실(史實)에 대한 가장 오래전의 두 기록이 불과 6년의 편차(偏差)이다. 같은 시기에 두 버전(version)의 단군 이야기가 있었다는 점이다. 어느 버전으로 보던 우리 민족의 천손사상은 변함이 없지만, 제1기와 제2기의 민족사학자들은 예외 없이 『삼국유사』의 「고조선」조를 단군 사실의 원형으로 보았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단군 사실이 이렇게 차이를 보인다고 해도, 이는 『구약성서』의 「창세기」 창조 설화에서 보이는 두 가지 창조설 버전에서의 차이점에 비하면 별문제가 안 된다. 『신약성서』에서도 「마태복음」에서 보이는 예수의 계보와 「누가복음」에서 보이는 예수의 계보에서도 차이점이 있다. 신학에서의 정설은 「마태복음」에서 보이는 계보는 요셉의 계보이며, 「누가복음」에서 보이는 계보는 마리아의 계보이다.
「창세기」의 창조신화에서 하나님은 아담을 흙으로 만들었다. 조물주 하나님을 숫자 1로 정의하면, 흙에서 니온 피조물 인간을 숫자 3으로 정해 보자. 피조물 인간의 자손은 영원히 3이다. 그런데 (『삼국유사』로 보면) 천신(天神) 환인과 그의 아들 환웅은 신적 존재이므로 숫자 1이다. 그 아들 숫자 1이 숫자 3인 인간을 만나 단군을 낳았다. 즉 단군은 숫자 2인 것이고, 그리고 산신이 되어 숫자 1이 된다.
반면에 『제왕운기』로 보면 단웅(환웅)과 그의 손녀는 숫자 1이다. 단수신도 숫자 1이다. 그러니 (『제왕운기』에 의하면) 단군은 태어날 때부터 신이고, 산으로 들어가 산신으로 불린다. 이것이 단군신화의 본질이고, 이것을 사상화한 것이 천손사상(天孫思想)이다.
이러한 현상은 천제의 아들이라는 해모수와 유화, 그리고 주몽의 관계에서도 유사하게 설정된다. 천제의 아들 해모수는 숫자 1이고 수신(水神) 하백(河伯)의 딸 유화도 신의 가족이므로 숫자 1이며, 따라서 주몽도 숫자 1이 된다. 즉 주몽은 부모가 모두 신적 존재이므로, 그 자신은 인간으로서 숫자 1이 된다. 또한 주몽의 자손으로 태어난 고구려와 백제의 왕계는 고조선의 단군보다도 더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는 신적인 존재가 된다. 고구려와 백제의 왕족에게 따라다녔던 천손사상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변형된 것이 이른바 천황관념(天皇觀念)이다.
바. 우리 민족 신화의 전승비평적 접근
이제 『삼국유사』의 「고조선」조도 전승비평적(傳承批評的)으로 검토하여 보자.
『구약성서』의 「창세기」 앞부분이든 『삼국유사』의 「고조선」조이든, 태고(太古)의 신화와 역사는 일정한 구전시대가 있었다. 그 구전시대의 지식 전달을 가리켜 서지학에서는 “최초의 책은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화(神話)와 전설(傳說)은 구분하여야 한다. 전설도 구전(口傳)과 민담(民譚)은 구분되어야 한다. 민담은 만들어진 이야기이지 전설적 구전이 아니다. 민담을 사실(史實)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문자가 없고 지필묵(紙筆墨)이 없던 구전시대(口傳時代)의 지식이나 생각은 도제식(徒弟式) 전승(傳承)을 한다. 이러한 전승은 기억에 의존하는 한계가 있다. 구전시대를 지나 문자와 필묵(筆墨)이 발명되고, 후에 직물(織物)과 죽간(竹簡) 및 종이도 발명되고, 구전시대의 지식이 단편적으로 기록된다. 그러한 초기의 단편적인 기록들이 모이고 오랜 시일 전승된 후에 선택되고 집합되어 『구약성서』의 「창세기」와 같은 기록이 되고 『삼국유사』의 「고조선」조와 같은 저술의 전거(典據)가 된다.
단군 사실에 대한 전승비평적 관점에서 검토하면, 『삼국유사』는 중국의 『위서(魏書)』를 인용한 부분과 우리나라의 『고기(古記)』를 인용한 부분, 그리고 다른 제반 기록과 의견을 종합한 부분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런 구성을 미루어 보면 『삼국유사』는 일연(一然, 1206~1289)이 날조한 소설식 저술이 아니다. 일연이 당시에 전하던 구전(口傳)과 사실(事實) 및 사실(史實)을 모아 편찬한 책이 『삼국유사』이다. 『구약성서』와 『삼국유사』는 그 결이 다르지만, 그 책이 나오기까지의 전승비평적 관점은 보편적으로 같다.
사. 전승비평적 관점에서의 『환단고기』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이러한 고문헌 형성의 전승비평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환단고기』는 대한제국 시기에 “이기(李沂, 1848~1909)가 편찬하고 목판본으로 출판하였다”라고 주장하면서도, 그 판본(版本)을 1면도 제시하지 못하고 갑툭튀, 즉 어느날 갑자기 툭 튀어나왔다. 그러므로 『환단고기』를 전승비평적 측면에서 고찰해 보면 존재 논리를 성립시킬 수 없다.
해학 이기(李沂, 1848~1909)는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의 회원으로 대종교(大倧敎)를 중광한 나철(羅喆, 1863~1916)과 가까웠고 대종교의 중광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그가 환단고기를 편찬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라든가, 그의 글에서 민족사학적 자취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따라서 이유립이 이기를 끌어들여 『환단고기』의 편찬자로 주장한 것으로 판단된다.
아무리 수백 년 전의 기록으로 인정을 한다고 해도 이 책은 기존의 기록, 즉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등과도 그 근본적인 결이 다르고, 중요한 것은 『환단고기』가 주장하는 새로운 점이라는 것들은 사실상 전승비평적 관점에서 인정되는 가장 확실한 여러 고문헌을 파괴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환단고기』는 계승적 전거가 없는 위서(僞書)로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에 이 책은 서지학적 측면에서 보면 현대에 만들어진 최악의 종교 역사서이다. 또한 비교종교학적 측면에서 보면 이 책은 유사 종교 태백교(太白敎)의 유사 경전으로 확정된다. 유사 종교 태백교의 유사 경전 『환단고기』가 증산교로 흡수되는 정확한 과정은 연구의 한 과제이다.
아. 이유립의 태백교에 대하여
필자는 우리나라 신흥종교 연구 분야의 대가였던 심천(心泉) 이강오(李康五, 1920~1996) 박사(전 전북대 교수)를 1978년경에 서울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는 『한국신흥종교총람』(1992년)을 내었는데, 이 총람은 신흥종교를 주관적 관점에서 연구한 것이 아니라 각 교단이 주장하는 것을 정리한 책이다. 이강오 박사는 태백교를 아래와 같이 정리하였다.
“태백교는 단군교 계통 종단의 하나. 1909년 이기(李沂)를 중심으로 결성되었다는 단학회(檀學會)를 모체로 하여 1963년 이유립(李裕岦)이 조직하였다. 이 단체의 모체인 단학회는 한일합방 직전인 1909년 대영절(3월 16일)에 이기‧계연수 등이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제천의식을 거행하고 단학회 조직을 서고(誓誥)하며 단학강령 3장을 선포함으로써 창립되었다.
단학강령은 단단학회에서도 기본 강령으로 받들어지는데, ①제천보본 이구진실(以求眞實) ②경조흥방 이구화평(以求和平) ③홍도익중 이구통일(以求統一)의 3가지이다.
단학회 창립 무렵에는 이미 민족 고유 종교를 표방한 단군교(대종교)가 창립되어 있었는데, 이기 등은 나철과 민족상고사 인식 및 단군관, 고유 종교 이해 등에서 의견을 달리하였다.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민족주체의식이 필요하고 민족정신을 귀일시킬 구심체적 종교가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생각을 같이했지만, 이기 등은 재야에 전해지던 「태백일사」나 「단군세기」 등의 문헌에 기록된 역사인식-고유종교관에 토대하여 민족종교를 세워야 한다고 보았다.
단학회는 특히 단군신앙의 삼신설(三神說)에 대한 정의와 신시‧개천‧단군기원 등 핵심 문제에서 나철의 단군교와 다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단군교와 별도로 단학회라는 이름하에 단체를 창립하였다. 이 단학회는 태백교(太白敎)라는 이름의 종교와 이명동체(異名同體)임을 표방했는데, 무포교제(無布敎制) 자아신앙(自我信仰)을 신앙원칙으로 삼고 있는 점에서는 다른 교단과 차별성이 있었지만, 종교단체에 준한 교단조직을 영위하면서 삼신하느님(삼신일체상제)을 신앙 대상으로 하여 일정한 의례를 거행하고 삼일신고-천부경 등의 단군교계 경전을 중시하는 데서는 종교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단학회는 초대 대종사인 이기가 한일합방이 임박한 시국에 분개하여 1909년 7월 절식 자결함으로써 침체되었지만, 계연수와 최시흥‧이덕수‧이상룡 등 독립운동가를 지도자로 삼아 다시 활기를 찾았다. 그래서 삼일운동 후에는 최시흥을 중심으로 천마산대를 조직하여 항일 유격투쟁을 전개하였고, 이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민사(義民社)‧벽파대(碧波隊)‧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 등의 무장독립운동에 그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단학회의 주요 지도자들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전사하거나 옥사했는데, 계연수‧최시흥‧이상룡‧이덕수 등이 모두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거나 옥사하였다. 그러나 단학회는 무장투쟁 과정에서도 단학회보를 8호까지 발간하였으며, 1919년 3월 대영절에는 국내의 기미독립선언에 맞추어 「조선인십보장(朝鮮人十寶章)」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이덕수의 전사와 함께 회원들이 체포되어 투옥되거나 흩어졌으며, 단학회 활동은 침체되었다.
해방 후 단학회는 일제에 의해 수감되었던 이용담(李龍潭)이 출감하여 평양에서 단학회를 재건하고 제5대 회장으로 취임했으나 공산 치하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할 수는 없었다. 특히 기관지 『태극(太極)』의 1946년 신년호에 「신탁통치반대론」을 게재한 것이 문제가 되어 『태극』의 주간 이유립이 구속되고, 『태극』은 폐간되었다.
그러나 6‧25전쟁 때 이유립이 월남에 성공하여 1954년부터 동지를 규합하였다. 1963년에는 단단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이유립이 회장에 취임하였으며, 1965년에는 기관지 『커발한』을 창간하였다. 명칭을 단단학회라고 한 것은 『신단실기』의 “사물의 견고한 것을 보고 이르기를 단단이라 한다(見物之堅固曰檀檀).”라고 한 것 등에 의거한 것이다.
단단학회는 이름을 바꾸면서 태백교라는 종교적 색채에서 분리하여 민족의 종교‧철학‧역사를 연구, 실천하는 단체로의 전환을 천명했지만, 고유 종교라고 주장하는 태백교를 중심으로 민족적 종교통일운동을 추구하는 점에서 이전의 입장은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단단학회와 관련하여 또 하나 언급해야 할 것은, 1979년 공개되어 재야 역사학계의 상고사 인식에 큰 영향을 주었던 『환단고기 桓檀古記』가 이 단체에 의해 편집되었다는 점이다. 『환단고기』는 단학회의 계연수가 민간에 숨겨 전해 오던 사서들을 묶어서 1911년 편집했다는 역사서로, 「삼성기」‧「단군세기」‧「북부여기」‧「태백일사」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한국 상고사가 환인(桓因)의 환국(桓國)시대(7대 3301년)에서부터 시작하여 환웅의 배달시대(18대 1565년)를 거쳐 단군조선(47대 2096년)으로 이어진 것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상고시대의 한민족은 우수한 문화와 강대한 국력을 가지고 중국을 압도하는 역사를 영위했던 것으로 서술한다.
이 책은 편집된 이래 오랫동안 숨겨져 왔다고 하며, 1979년 단단학회 회장으로 있던 이유립과 조병윤에 의해 공개된 후 자랑스러운 민족사를 열망하는 일반의 정서에 부응하여 대중적 인기를 끌었지만, 주류 사학계에서는 위서라고 하여 사료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하 중략) 단단학회에서는 우리 역사의 정통이 기원전 3897년 환웅천왕의 배달 건국에서 비롯하여 단군조선―북부여(원시 고구려)―고구려(본 고구려)―대진(大震, 중 고구려)―고려(후 고구려)―조선―임시정부를 거쳐 현재의 대한민국에 이른 것으로 본다.” (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단단학회」, 한국학중앙연구원)
이강오 박사는 해당 종교의 공식적인 주장하거나 제공한 자료에 의거하여 소개하고 있는데, 이 소개에서 의문이 드는 점이 있다. 단학회라는 존재가 실존했던 것은 사실로 보이나, “과연 이기가 단학회를 만들었으며, 이유립의 1963년에 만든 태백교가 과연 단학회를 계승하였느냐?”는 점이다.
1889년에 태어난 독립운동가 오동진(吳東振, 1889~1944)이 1911년에 목판본으로 출판했다는 이른바 『환단고기』의 출판비를 냈다는 것이 성립되지 않듯이, 이기(李沂, 1848~1909)와 단학회 및 태백교의 관련성도 성립하기 어렵다고 필자는 판단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기관지 『태극(太極)』의 1946년 신년호에 「신탁통치반대론」을 게재한 것이 문제가 되어 『태극』의 주간 이유립이 구속되고, 『태극』은 폐간되었다”라고 하는데, 해방공간에서 발행된 간행물 『태극』의 실체도 확인이 필요하다.
자. 결어(結語)
서지학(書誌學)은 내용서지학과 형태서지학으로 나눈다. 필자는 비교종교학적 관점과 전승비평적 측면에서 『삼국유사』의 「고조선」조와 『제왕운기』의 「단군본기」, 그리고 『환단고기』를 검토하였다. 이는 내용서지학으로 검토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형태서지학의 관점으로 이들 문헌을 판단한 것이다.
『환단고기』는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기가 차는 유사(類似) 종교의 유사 경전으로서의 유사 역사서이다. 이 책은 위서(僞書)가 아니라고 믿고 싶어 하는 민족주의자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있다. 『환단고기』는 『삼국유사』의 「고조선」조와 『제왕운기』의 「단군본기」와 결이 다르며, 그러한 고문헌의 본질을 파괴하는 반문화적 반민족적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 민족의 본질을 망상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고, 우리 민족(我)의 비아(非我)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게 흐트러뜨리고 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을 망가트리고 약화시키는 행위이다. 이는 민족종교로서의 도(度)를 넘는 행위이다.